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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신작단편소설/임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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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17회 작성일 05-03-0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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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태


등뒤에서 한 남자가 울었다







이곳의 밤은 매우 묵직하다. 시간마저 붙들어 맬 듯한 단단한 어둠이다. 혼자 불 밝히고 새벽까지 깨어 있노라면 이 세상에 숨쉬는 생물은 나 하나뿐인 듯한 기분이 든다.
기억의 회로는 아마 그럴 때 더 촘촘해지는지, 멀거니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면 늦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별 기억들이 다 떨어져 내린다. 아, 그런 일도 있었구나 싶은, 생전 되새겨보지 않은 오래 전 일이 별안간 생각난다. 아기가 여자 몸 어디로 나오는가를 처음 알았던 게 언제인지도 여기에 와서 기억해 냈다. 중학교 2학년이던 어느 날의 하교 길에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동급생 하나와 그 문제로 심각하게 논쟁하던 기억이 불쑥 떠오르던 것이다.
이곳에 방을 빌려 들어온 지 닷새 되었다. 참 한적한 마을이다. 산모롱이 꺾어 돌다리와 미루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마을 초입이 특히 고즈넉하다. 휴가라도 받아 와 쉬고 있는 거라면 평화롭게 다가올 터이지만 지금은 모든 게 적막하게만 보인다. 발자국 하나 없는 들길을 혼자 걸어가다가 무심코 고개 돌리면 멀리 굴뚝에 오르는 흰 연기 한 자락이 쨍! 가슴에 시린 팔매질을 한다.
어둠이 깔리고 나면 다시 날이 밝기까지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하기야 어찌 소리 하나 없겠는가. 들창을 차고 달아나는 바람 소리, 늦은 마실 다녀오는 아낙의 청처짐한 발걸음 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커엉 컹 마을 곳곳에서 밤새 산만히 솟구치는 개 울음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소리들은 귓전에 닿는 순간 벌써 아득하다. 둔한 솜옷처럼 꽉 조여 있는 어둠에 적요의 밀도나 높여줄 뿐이다.
집 바로 앞에는 작은 개울이 있다. 개울 건너에는 담장 가득 원색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조금 색다른 집이 있다. 흙도 만지고 그림도 그린다는 여자가 혼자 살고 있다고 한다. 호기심이 일었지만 한번도 다리를 건너가 보지는 않았다. 한번은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물끄러미 물오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집 들창에서 나지막이 플루트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곡인가, 가슴에 찬 물결이 스며드는 듯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을에 들어오던 첫날 집주인 노부부와 몇 마디 인사 나눈 것 말고는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고 있다. 하는 일도 없는데 하루는 참 빨리 지나간다. 늦게 일어나기 때문일 터.
정오 가까이 되어 눈을 떠서는 한참 동안 부스스한 얼굴로 천장이나 바라보고, 허기가 느껴질 때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마당에 내려서면 해는 벌써 중천. 아침 겸 점심인 첫 끼니를 해결하고는 동네 외곽의 낯선 길을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겨울 짧은 해는 성큼 서산 쪽에 기울어 있다. 발밑으로 땅거미가 소리 없이 다가서고, 무덤 같은 밤이 시작되고, 앉았다 누웠다 줄담배를 피워대다가 지붕을 훑고 가는 바람 소리 한 자락에 불현듯 아득해한다. 그렇게 닷새를 보냈다.
휴가 받았다고 생각해요. 일부러 재충전의 기회를 주는 안식년 제도라는 것도 있다잖아요.
아내는 제법 의연하게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기죽지 않게 하려고 세심하게 마음 쓰는 걸 느낄 때마다 오히려 왈칵 화가 치밀곤 했다. 고작 직장을 잃었다는 것 하나로 속절없이 무너져 있는 내 자신이, 가사일 외에는 아무 재주도 없는 아내를 다른 능력 있는 여자와 비교해 보곤 하는 내 못남이…… 싫었다.
13년을 근무한 일터에서 쫓겨나는 일은 참으로 간단했다. 보직 없는 부서장으로 밀려난 게 시발이었다. 그나마 무연고지의 지방 발령이 아닌 것을 다행스러워하며 일감도 없는 빈 책상을 한 달이나 지켰다. 반은 오기였고, 반은 실낱 같은 기대였다. 동종 사무기기 업계에서 빈번히 스카웃 제의를 받을 정도로 한때 잘 나가던 내 위치를 아직 믿고 있었다. 서른아홉 살에 국내 영업을 총괄하는 부장 자리에 올랐으니 얼마나 빠른 승진이었던가. 목 좋은 곳에 자본금 지원 받아가며 대리점을 차릴 수 있었던 기회도 회사 생활만 충실하겠다는 생각으로 포기했었다.
그런 나를 내보내? 회사에서 곧 재발령이 있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부하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보낸 따가운 한 달이었다. 그런데 인사이동 후의 첫 월급을 받고 난 다음날 전무의 호출이 있었다.
미안하이, 위쪽부터 정리하기로 방침이 정해져서 어쩔 수가 없구만.
13년의 헌신이 그 한마디로 썩은 무처럼 잘렸다. 뒤에 이어진 말은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배신감보다 먼저 스스로가 천치같이만 여겨져 견딜 수가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와서는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동료들 앞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퇴직금의 일부를 월급인 양 갖다 주며 한동안 집에는 해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동종 업계를 돌아다니며 취직을 알아보았으나 스카웃 제의받던 시절은 이미 먼 옛날이었다. 업계 사정이 IMF 때보다 더 안 좋아 취직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사무직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지만, 다른 일은 자신도 없고 성에 차지도 않았다.
실업 한 달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취직은 거의 포기한 채 삼류 동시영화관과 기원 같은 곳에서 하루를 때웠다. 결국 아내가 알아차렸다. 퇴직금을 내놓고 함께 대책을 모색해 보았다. 하지만 그 돈으로 시작할 장사거리는 많지 않았다. 십 개월 정도 남은 아파트 분양을 포기하면 작은 음식점이나 생맥주집 정도는 차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자신이 없었다.
그 자신 없음에 깜짝 놀랐다. 고작 마흔두 살에…… 새 일 하나 시작하는 것이 이처럼 두렵다니……. 이제까지의 자부심은 다 무엇이었을까……. 근면, 성실, 정직, 스스로 자신의 장점이라 생각해 오던 것들이 전부 쓰레기통 속의 휴지조각들만 같았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신정연휴엔 친척들을 만나기 싫어 매년 다니러가던 큰집에도 가지 않았다. 알량한 목돈인 퇴직금은 줄어가는데 갈수록 게을러지기만 했고, 사소한 일로 애꿎은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 내 눈치를 살피는 아내의 조심스런 태도에마저 짜증이 일기 시작했다.
어느 날, 동네 가게 앞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시다 늦게 잠든 이튿날이다.
아홉 살짜리 큰아이가 아침부터 징징거리는 듯하더니 아내가 물 묻은 고무장갑으로 내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문방구에 가 아이의 준비물 좀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술기운이 풀리지 않아 꼼짝도 하기 싫은데 아내는 계속 성화였다. 자기는 설거지와 방청소만으로도 바쁘단다.
무슨 놈의 학교가 매일 준비물이 있어? 그거 선생자식들이 할 일을 학부모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야! 여전히 이불 속에 파묻힌 채 큰소리로 궁시렁거렸더니 아이 앞에서 그게 무슨 말이냐며 아내가 지청구를 보냈다. 나도 다시 한마디 던졌다. 그까짓 설거지 나중에 해도 되잖아, 당신이 갖다 와. 그러자 바로 아내에게서 날아온 말. 나는 이까짓 설거지라도 하지만 당신은 뭐 하는데?
피가 확 솟구쳤다. 방문에 베개를 내던지며 주방으로 달려나갔다. 아내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며 허둥거리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맥이 풀렸다. 누굴 탓하겠냐……. 아내를 향했던 분노가 서늘하게 되돌아왔다. 그 분노는 엉뚱하게도 겁먹은 표정으로 옆에 서 있는 아이에게로 방향을 틀었다. 너는 이 자식아 아직까지 준비물 하나 미리미리 못 챙겨!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이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아내는 입술을 꽉 깨문 채 설거지통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담뱃갑을 집어들고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텅 빈 집 앞 어린이놀이터에 앉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렇게 지내다간 아아, 퇴직금 까먹는 게 문제 아니라 내 자신이 먼저 망가지겠구나……. 울컥 서글펐다. 취직이건 장사건 우선 열패감부터 회복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다시 시작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한 달만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장래 계획을 세워보겠다고 하자 아내는 조금 뜬금없어 하면서도 일단 반가워했다. 새롭게 기지개를 켜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 기대감조차 부담스러웠지만 일단 집을 떠났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 등속으로 채운 작은 가방을 들고 시외버스에 오르던 날, 마치 다시 못 올 길이라도 떠나는 양 어찌 그리 비감하던지, 마침 펑펑 눈이 쏟아지고 있는 창밖 풍경에서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윗마을 쪽으로 걸어가다가 나뭇짐을 끌고 오는 여자를 보았다. 주워 모은 듯한 잡다한 나뭇가지들을 새끼줄로 대강 얽어 묶고는 힘겹게 질질 끌고 있었다. 흙을 만진다는 여자인 듯했다. 한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다가가서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여자는 의외로 선선히 짐을 맡겼다. 나뭇짐을 어깨에 이고 여자의 집까지 동행했다.
마당까지 들어가 우물 옆에 나뭇짐을 내려놓자 여자가 차 한잔 하고 가라고 청한다. 건성으로 권하는 건 아닌 듯해 여자를 따라 마당 한켠 자그마한 별채로 들어갔다. 작업실인 모양이었다. 비닐에 포장된 진흙 뭉치, 조각 도구, 전시 포스터, 그리다 만 서양화, 완성된 테라코타 조각상들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널려 있었다. 한 귀퉁이에 있는 큰 소파에 마주앉아 여자가 따라주는 녹차를 마셨다.
여기 들어오신 지 닷새쯤 됐지요?
어떻게 아세요?
손바닥만한 데잖아요. 그냥 알게 돼요.
그렇게 대화를 시작해서 초면에 주고받을 만한 가벼운 이야기를 십여 분 정도 나누었다. 여자는 벌써 육 년째 이곳에 살고 있다고 했고, 그림은 취미 수준일 뿐 주로 하는 작업은 테라코타라고 했다. 가게에 다녀오거나 나무를 하러 산에 올라가는 일 말고는 거의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는 모양이었다. 여기엔 어떻게,라고 여자가 묻기에 한 달간의 무급 휴가를 받아 잠시 쉬러 왔다고 했다. 실업자라는 단어가 무슨 큰 흉처럼 목에서 탁 걸렸다. 거짓말을 한 것이 공연히 찜찜해 그동안 하지 못했던 독서나 실컷 해볼 생각이라고 생각지도 않았던 말을 덧붙이자 여자가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좀 폐쇄적인 사람이 아닐까 지레짐작했던 것과는 달리 여자는 초면에도 불구하고 퍽 이물 없는 태도를 보였다. 웃기도 잘 하고, 목소리도 활달하고, 묻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도 했다. 몇이세요? 하고 불쑥 나이를 물어오기도 해 마흔둘이라 했더니 제가 누나네요, 하고는 환하게 웃는다. 조금 놀랐다. 적어도 두어 살은 아래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여자는 마흔다섯이었다.
상대를 편하게 해 주는 쾌활함이 있는 반면 여자에게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우울이 있었다. 말하는 중간중간 아주 짧게 어떤 고단함 같은 것이 여자의 표정 뒤에 매달렸고, 가끔 앞에 아무도 없는 양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볼 때면 몸 전체가 차가운 대리석상처럼 가라앉아 보였다.
차를 마시고 나오다 보니 들어설 때는 보지 못했던 개와 고양이 여러 마리가 마당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우리 집은 동물원이에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개 세 마리, 고양이 네 마리를 기르고 있단다. 저놈들 때문에 어디 놀러가도 자고 오질 못해요, 하고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심하면 차 한잔 하러 오라는 여자의 인사를 등으로 받으며 개울을 건너왔다.

며칠 만에 또 눈이 내렸다. 이번엔 싸락눈이었다. 눈이 그치기까지 줄곧 들창을 내다보았다. 한 세 시간쯤? 그처럼 오래 눈을, 또 한 풍경만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눈발에도 처마 끝에도 먼 능선에도 다 표정이 있었다. 오래 바라보면 무엇과도 교신이 되겠다고, 그러니 아마 나무나 바위하고도 연애를 할 수 있겠다고…… 혼자 고개를 끄덕거렸다.
주인집에서 오토바이를 빌렸다. 헛간에 늘 세워져 있는 것이니 빌렸다기보다는 사용 허가를 얻은 셈이다. 밥 사먹으러 면까지 나가는 일이 불편해서였다. 동네 안에는 구멍가게 하나밖에 없다. 빵과 우유 등으로 대충 때우며 하루에 한 끼니 정도만 사먹고 있는데 그때마다 버스 타고 면까지 나가는 게 여간 번거롭지 않았다. 하루에 네 차례만 들락거리는 버스여서 시간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방에 앉아 있으면 가끔 테라코타 여자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밖에 나가 있는 개를 부르는 소리였다. 햇님아, 달님아, 별님아……. 듣다 보면 픽 웃음이 나왔다. 너무 소녀적인 이름들 아닌가, 나 같으면 남들 이목 때문에라도 그렇게는 짓지 못할 것 같았다. 고양이는 울타리를 빠져나가지 않는지 고양이 부르는 소리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밥 먹으러 면에 나갔다가 내친 김에 읍까지 달려 책을 몇 권 사왔다. 독서나 실컷 해볼 생각이라고 여자에게 즉흥적으로 말하고 났을 때, 문득 정말 독서 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때 생각 같아서는 당장 책방에 달려가고 싶었는데 읍 한번 다녀오는 게 쉽지 않은 일이어서 여러 날이나 미적거리던 차였다.
막상 자세를 잡고 책을 펼치니 생각만큼 글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몰입은 안 되고 잡념만 산만하게 따라붙었다. 읽는 일도 습관일 터. 머릿속에 오래된 빗장 하나 단단히 걸려 있다는 느낌이었다. 도전하는 마음으로 와락 책을 펼쳤다가는 건성으로 몇 쪽 읽다가 곧 덮어버리곤 했다.
문득문득 여자 집에나 한번 더 건너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든 차 생각나면 들르라고 했지만 일 없이 먼저 찾아가기는 조금 뭐했다. 혼자 사는 여자인데다 또 예술을 한다는 사람 아닌가, 막상 불쑥 찾아갔다 작업에 방해되기라도 하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어느 오후, 마침 개울 건너에서 또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달님이었다. 달님아! 달님아! 대문을 열고 슬그머니 나가 보았다. 가게라도 가는 양 아래쪽으로 몇 걸음 걷고 있으려니 여자가 먼저 밝게 인사를 해 왔다. 가게 가세요? 그렇다고 대답하니 차 한잔 하러 오세요 하고 여자가 내심 기다렸던 말을 던진다. 이따 들르겠다고 하고는 가게로 내려갔다. 빵, 우유, 그리고 여자에게 줄 녹차 한 통을 사 가지고 개울을 건너갔다.
여자는 이번에도 서글서글 편하게 대해 주었다. 차만이 아니라 간식으로 국수 한 그릇까지 대접받느라 두 시간 가까이 머물렀다. 주섬주섬 화제를 넓혀가다가 여자의 과거 이력에 대해서도 약간 듣게 되었다. 어딘지 그늘이 느껴져요, 하는 내 말이 불러온 이야기였다.
여자는 상고를 졸업하고 작은 회사의 경리로 취직하면서부터 집안 경제를 거의 떠맡아야 했다. 세 살 아래의 남동생과, 일찍 혼자가 되어 호텔 잡역부로 자식들을 키워오다 그 즈음엔 몸이 부실해져 그마저 그만두고 만 어머니를 부양해야 했다. 중학 시절부터 품어온 미술대학의 꿈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결혼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남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을 때 여자의 나이는 서른이었다.
그림에 본격적으로 매달린 게 그때부터였단다. 본격적이라지만 빈약한 기초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환경 조건이 부실해 순탄치 않았던 모양인데, 여자의 목소리는 그 지점부터 남의 이야기처럼 심드렁해지기 시작했다. 나이 든 화가와의 짧은 동거, 속물적인 미술판, 그림이 잘 되어주지 않아 술로 한세월을 보냈다는 이야기들이 건성건성 짧게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벼락처럼 흙을 만났단다. 여자의 눈이 거기에서 다시 반짝 빛났다.
흙조각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아주 저릿했어요. 따뜻하고 편안하고 뭣보다 작품들 하나하나가 그렇게 친숙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어요. 마치 기억상실자가 어떤 사물이나 사람 앞에서 돌연히, 그러니까 기억은 없으면서도 그 대상과 함께했던 세월을 한순간에 몸으로 느끼는 그런 거 있지요, 뭉클하고, 서늘하고, 그러면서 한편 왠지 절박해져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 그런 심정이었어요.
말보다 여자의 표정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을 온몸으로 고스란히 추체험하고 있는, 감동과 회한이 기묘하게 뒤섞인 채 아련해져 있는 여자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나마저 여자의 그 옛 시간과 장소에 함께 서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여자의 눈길은 곧 창밖 먼 풍경으로 뻗었다. 금방 돌아오지 않을 눈길이었다. 여자의 당시 심정이 되어보려 애쓰며, 작업실에 널린 여자의 작품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주로 나체의 여인상이었다. 기형적일 만큼 가늘고 길게 늘어진 팔다리들, 하나같이 몽롱한 눈빛들, 단정하면서 어딘지 무심함이 깃든 자태들. 문외한의 눈으로 그 조형미의 독특함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글쎄, 여자의 곡절 많은 과거와 거친 열정을 방금 들었기 때문일까, 작품들 하나마다 쓸쓸한 초탈 같은 것이 짙게 배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슬그머니 일어나 나오려 하자 여자가 그제야 창밖에 가 있던 눈길을 거두었다. 약간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말했다.
아까 이야기요, 가까운 사이 아니면 하기 쉽지 않은 이야기들인데……, 고맙고 송구스럽고, 그러네요.
언제 가라앉았었냐는 듯 여자가 푸르르 웃는다.
아까 저보고 그늘이 느껴진다고 했지요? 유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아마 그래서 말이 쉽게 나왔을 거예요.
여자의 이야기만 듣고 내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은 게 공연히 마음에 걸렸다.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자의 이야기가 어쨌거나 한 예술가로서의 방황이고 고뇌였다면, 내 그늘이란 얼마나 세속적인가. 먹고사는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먼저 그를 무시해 줄 터이지만, 어쨌거나 그건 평범한 이야기였다. 지천에 깔린 평범한 고민남의 문제로 여자 앞에서 청승떨고 싶지 않았다.
방으로 돌아왔다. 까닭 없이 세찬 조바심이 밀려왔다. 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가게에 가 소주 한 병을 사왔다. 대학 시절의 기억들이 두서없이 떠올라왔다. 각종 세미나 준비하던 일, 도서관 앞에 새벽부터 줄서던 일, 이러저러한 수련회들, 열띤 논쟁들……. 그때 내가 꿈꾸던 것은 처자식 잘 먹여 살리며 집 평수 늘려가는 단란한 가정이 아니었다. 그런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그럼 무슨 생각들을 했지?
소주 한 병을 다 비워도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한 병을 더 사왔다. 가게에 다녀오는 짧은 시간에 대학 시절의 풍경은 다시 기억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대신 지난 십여 년의 달음박질 같은 직장생활이 희뜩희뜩 눈앞을 스쳤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 기억들은 고단했다. 회한에도 약간의 감미로움은 있게 마련인데, 거기에 있는 건 다만 서걱거리는 피로감뿐이었다.
자정이 넘어 술에 취해 열쇠로 대문을 따고 방에 들어가면, 아내와 두 아이가 일렬횡대로 얌전히 잠들어 있다. 그런 때, 물끄러미 그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정말 얼마나 서글프던지. 참들 불쌍하구나, 어쩌다 그래 이런 못난 남편, 시시한 아버지를 만났느냐……. 술기운을 빌어 감상적인 자학을 주절거리곤 했다.
한번은 아내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당신은 어떨 때 내가 불쌍해 봬? 아내가 대답했다. 그런 이튿날 아침이요. 아침에 눈을 떠서 당신이 양복을 입은 채 아이들 옆에 쓰러져 자고 있는 걸 보면, 그래요, 그런 때 당신 좀 불쌍해 보입디다.

밤에 누군가 들창을 두드렸다. 자려고 애쓰며 눈만 감고 있을 때였다. 얼른 일어나 들창을 여니 길 건너 테라코타 여자였다. 여자가 물었다.
우리 별님이 못 봤어요?
못 봤는데요.
거짓말!
정말 못 봤어요.
거짓말! 하고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나처럼 자다 나왔는지 여자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당신이 잡아먹었지?
울먹이면서 여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요, 전 개고기 안 먹어요.
거짓말! 벌써부터 우리 애들 노리고 있었던 거 다 알아, 다 안다구.
정말이에요, 잘 찾아보세요.
여자는 갑자기 풀죽은 표정이 되더니 말없이 돌아섰다. 계속 지켜보고 있었더니 다리 중간에서 여자가 돌아보며 말했다. 사실은요…… 별님이 내가 잡아먹었어요, 미안해요.
나는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본 다음 창을 닫았다. 그런데 눕자마자 다시 들창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천천히 일어나 창을 열었다. 별님이었다.
너 안 죽었니?
내 말에 별님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히히, 저 여자는 아무도 못 죽여요.
별님이가 돌아가고 나서는 다시 잠들지 못했다. 하기야 불면은 늘 있는 일이었다.

아침엔 목욕을 하러 모처럼 오토바이를 꺼내 읍내까지 나갔다 왔다.
지방도로를 가운데에 끼고 자그마하게 형성된 면소재지엔 목욕탕이 없었다. 우체국, 파출소, 농협까지 있는데 목욕탕과 이발관 같은 건 없었다. 대신에 웬 식당과 다방은 그리 많은지, 백 미터 남짓의 도로 양쪽에 식당이 아홉 개, 다방이 일곱 개나 되었다. 읍에서 돌아와 면내 전부를 삼십 분 정도 하릴없이 걸어다니며 세어본 숫자가 그랬다. 술집도 제법 되었는데, 그 중의 어느 집 이름 하나가 눈길을 잡아당겼다. <우물과 두레박>. 이런 궁벽한 면에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서울 인사동쯤에 걸려 있을 법한 술집 이름이었다. 언제 한번 들어가 보자고 마음먹었다.
<돈버는 데는 역시 장사가 최고>.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새로 사온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 들창을 두드렸다. 여자였다.
지금 가마 돌리고 있어요. 오실래요?
부모 몰래 읍내 서커스 구경이라도 다녀오자는 듯, 여자의 목소리는 은근하면서 경쾌했다. 가야지요. 덩달아 한껏 반색하는 표정으로 응대해 주고는 바로 옷을 갈아입었다. 조만간 그동안 만든 작품 구울 거니까 그때 꼭 놀러오라고 여자가 벌써부터 말해 왔었다. 말동무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가마 온도가 1,100도에 이를 때까지 총 열네 시간 정도 불을 때는데 그 긴 시간 동안 꼬박 혼자서 가마를 지키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란다. 불을 지피는 초반에는 수시로 가마를 들여다보며 화력을 조절해야 하지만 일정한 온도에 도달한 후부터는 삽사십 분 간격으로 불꽃 세기만 잠깐씩 살피게 되는데 그때가 가장 지루한 시간이라고 했다.
여자는 아기 봉분만한 작은 흙가마 옆에서 전기풍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풍로의 파이프로 시퍼런 불줄기가 쏟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얼추 온도가 올랐나요? 기척을 알리기 위해 말을 건넸더니 여자가 환히 웃으며 어서 와 앉으라고 손짓을 했다. 여자의 손이 가리킨 곳에는 소주 두 병과 두부부침의 조촐한 주안상이 준비돼 있었다.
팔백 도쯤 올랐어요. 신경 쓰이는 시간대는 지났어요. 대개 삼백오십 도 안팎에서 많이 깨지거든요.
불꽃만 보면 온도를 알 수 있는 겁니까?
대강은요.
대단하군요.
대단이랄 것까진 없어요. 불꽃 흐름하고 흙이 변색되는 정도를 갖고 판단하는 건데, 그 정도 눈대중은 여러 번 하다보면 저절로 생겨나요.
몇 점이나 넣으셨어요?
몰라요, 조그만 것까지 해서 한 서른 개 되나. 참, 한번 보실래요? 구워질 때 모습이 제법 그럴싸하거든요.
여자를 따라 가마 앞으로 갔다. 가마 안쪽까지 들여다볼 흥미는 별로 없었지만 사양은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여자는 가마 입구를 막아 놓은 몇 개의 벽돌 중에서 위쪽 하나를 장갑 낀 손으로 빼냈다.
자, 보세요. 화력이 세니까 너무 가까이 대지는 말구요.
벽돌을 빼낸 자리로 붉고 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조심스레 얼굴을 낮추어 그 좁은 구멍에 눈을 맞추어 보았다.
물보라 같은 힘찬 불무리가 먼저 보였다. 혹은 회오리바람 같은, 아니면 춤사위 흩날림 같은, 타원형의 주황색 불길이 겹겹으로 천장 가까이 휘돌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반투명의 은은하면서 깊은 불빛 너울이 엷은 안개처럼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너울의 안쪽에, 그 몽롱한 기운의 저편에, 아아! 황홀한 생명들이 소리 없이 피어나고 있었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천 도 가까운 무시무시한 고열을 몸에 두르고 발그레하니 달아오른 얼굴들. 한없이 부드러워 보이는 속살들. 깨어라! 하면 깨어날 듯한 생생한 예감의 열기. 조각품들은 모두, 수천 년을 기다려 비로소 탄생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제의적인 기운으로 충만해 있었다.
가마에서 눈을 뗀 다음에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신비로운 창조의 순간에 동참하고 난 듯한 뻐근한 흥분이었다. 완만하면서 힘찬 불줄기, 은은히 아른거리던 주황색 빛살의 너울, 그 속에서 고요히 때를 기다리는 생명들의 눈부신 예감. 술을 마시면서도, 여자의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정신은 내내 가마 속의 그 숨 가쁜 열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낯선 선동이었다. 무언가 나를 감염시키고 있었다. 마침내 내 가슴속에서까지 주황색 불줄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더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황황히 여자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마당을 빠져 나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고 기능이 정지된 듯 멍하기만 했다. 건전지 다된 장난감 로봇처럼 그렇게 이상한 정지 상태로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열패감을 떨치기 위해 찾아든 곳에서 오히려 그렇듯 정체 모를 열패감과 만나고 있었다. 아니, 정체는 차라리 뻔했다. 이제 다시 돌아가도, 직장을 얻거나 새 일을 시작해도, 세월을 자꾸 뒤돌아보게 되리라는 것, 내 안에서 늘 시린 가슴을 보게 되리라는 것, 그래서 어쩌면 더는 아무 것에도 성실하지 못하리라는 것. 정체는 그것이었다. 그런데 해답이 없는 것이다. 함정이다! 참으로 빌어먹을 함정이다!
눈을 뜨고 라이터 불에 시계를 비쳐 보았다. 불은 켜고 싶지 않았다. 열두시 이십분 전이었다. 잠깐 주저하다가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취해서 몽롱이 풀어지지 않으면 이 단단한 어둠에, 그리고 어둠보다 더 짙은 가슴 안의 폐허에 짓눌릴 것만 같았다. 날선 칼날처럼 가슴을 헤집는 그것을 맞받아친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했다. 감정이 아니라 위기를 느낀 본능이 먼저 술을 호출하고 있었다.
소리 안 나게 헛간에서 오토바이를 꺼내 대문 밖으로 나갔는데 전조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난감했다. 칠흑 같은 밤에 전조등 없이 오토바이를 타는 건 무리였다. 다행히 곧 랜턴 생각이 났다. 밤이 되면 화장실만 가는데도 불이 필요해 이곳에 내려오자마자 사놓은 것이었다. 랜턴을 들고 나와 오른쪽 액셀러레이터 핸들과 같이 쥐고는 오토바이를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십 미터도 가지 않아 그게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일인가를 깨달았다.
걸으면서 들고 다닐 때는 꽤나 밝게 생각되던 랜턴이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고작 전방 이 미터 남짓을 비추고 있는 불빛으로는 속도를 제대로 낼 수 없었고 땅바닥의 우둘투둘한 요철을 다 식별해 내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랜턴을 전방에 일직선으로 비추는 일도 액셀레이터 조절 때문에 쉽지 않았다. 잠깐만 방심하면 담장이나 길가 도랑에 처박힐 형편이었다. 자연히 온몸에 힘이 들어갔는데 얼마 가지도 않아 어깨가 뻐근해졌다. 이백 미터쯤 가는 데에 십 분이나 걸렸다.
돌아서고 싶었다. 위험도 위험이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술을 마셔야 하나, 약간 한심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라도 마셔야 했다. 취하고 싶다는 욕망 하나가 다른 모든 걸 누르고 있었다. 문 연 술집이 없으면 어떡하나 그것만 걱정되었다.
자정이 지난 마을은 개짓는 소리 하나 없이 괴괴했다. 먼 들녘 위를 우우우 매운바람이 달려가고 있었다. 남은 거리를 가늠하느라 가끔 랜턴을 들어 멀리 비추면 구불구불 휘어진 길이 꼭 거대한 구렁이처럼 보였다. 다행히 자세에 익숙해지면서 차츰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물론 위험은 더욱 높아졌다. 서너 차례나 나동그라질 위기를 넘기고서야 겨우 면내에 들어설 수 있었다.
면에는 드문드문 불빛들이 남아 있었으나 술 마실 수 있는 곳들은 아니었다. 오토바이를 곧장 도로 끝으로 몰았다. <우물과 두레박> 그 집이라면 이 시간까지도 문을 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면 초입의 삼거리에 그 집 간판 하나만 무슨 등댓불처럼 오롯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문을 밀치고 들어서자 어디선가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병풍으로 군데군데 칸막이를 해 놓은 방 구조의 넓은 홀에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소리는 주방으로 보이는 오른쪽 안채 쪽에서 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작부야? 왜 자꾸 손님 테이블에는 가 앉는 거야?
점잖은 손님들 아니면 앉으래도 안 앉아요. 단골 만들려고 가끔 말상대 좀 해 주는 것뿐인데 대체 왜 그래요? 그렇게 못 믿으면 당신이 주방에 나와 있으면 될 거 아니에요.
어눌한 듯 무뚝뚝한 남자 목소리와 카랑카랑한 여자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술 마시긴 틀렸다 싶었지만 힘들여 나온 게 너무 아까웠다.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조심스레 여보세요! 하고 불러보았다. 삼십대의 두 남녀가 홀에 모습을 보였다. 술 한잔 할 수 있냐고 묻자, ‘끝났어요!’ 하는 남자 목소리와 ‘네, 그럼요’ 하는 여자 목소리가 동시에 날아왔다. 눈치 살필 때가 아니었다. 바로 신발을 벗고는 누가 막을세라 얼른 안쪽의 한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남자는 골이 난 얼굴로 여자를 노려보더니 쾅 문을 닫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대합탕과 소주를 시켰다. 소주 먼저 달래서는 오이 조각 하나로 단숨에 석 잔을 들이켰다. 추위에 움츠러들었던 몸이 서서히 풀렸다. 두 잔을 더 마셨을 때 대합탕이 왔다.
어머, 벌써 거의 다 마셨네요. 몹시 술 고프셨나 봐요.
대합탕 냄비를 내려놓은 여자가 싹싹하게 말을 건네 왔다.
네에, 여기 문 닫았으면 읍내까지라도 나갈 참이었지요.
그래요? 전에 오셨었나요?
처음입니다. 간판만 한번 보았는데, 이름이 좋더군요.
가끔 그런 말 들어요. 뜻이 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구요.
특별한 뜻이 있나요?
아니요.
여자가 수줍게 말을 흘리며 주방으로 돌아갔다. 다툴 때의 목소리와는 달리 순하고 여려 보이는 인상이었다. 여자가 가고 나자 왠지 아쉬웠다. 혼자 취하고 싶을 뿐 누구와 이야기 나누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잠깐의 싹싹한 응대가 마음을 눅눅하게 해 주었다. 외로운가, 자네? 혼자 중얼거리고는 다시 한 잔을 비웠다. 소주 한 병을 더 시켰다. 여자는 이번엔 술만 갖다 주고는 말없이 돌아섰다.
얼마 후, 실내에 음악이 깔렸다. 잔잔한 기타 전주에 이어 여자 가수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혼자 마신다고 분위기 배려해 주는가 보다. 음악이 흐르니 어쨌거나 기분이 좀 감상적이 되어갔다. 차츰 술기운도 오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취하고 싶은 내 마음이 먼저 그 음악에 스스로 젖고 있었다. 마시자, 밤새도록 한번 마셔 보자! 결의도 뭣도 아닌 질척한 충동이 가슴에 차올랐다. 두 병째 소주도 금세 바닥이 났다.
한 병 더 주세요.
말해 놓고 흠칫, 내 목소리에 내가 놀랐다. 싸움이라도 걸 듯한 큰 목소리였다. 까짓것, 무슨 상관이야. 곧바로 혼자 그렇게 주절거릴 만큼 취기는 이미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정말이지 누구와 싸움이라도 하고 싶었다. 머뭇거리며 난처해하는 여자의 모습을 보자 와락 오기까지 솟았다.
술값 없는 놈 아니니까 빨리 한 병 더 가져와요! 나 이 집 단골 삼으려고 하는데 처음부터 박대하면 섭섭하지요. 안 그래요, 마담!
잠시 곤혹스러워하던 여자가 이윽고 결심한 듯 소주병을 들고 왔다. 소주병을 내려놓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앉아 봐요. 같이 한잔 합시다.
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문 닫을 시간이에요!
손목을 잡아 뺀 여자가 차갑게 말하며 돌아섰다. 내가 다시 큰 소리로 여자를 부르려 할 때 현관문이 열렸다. 아까 그 남자였다. 남자는 마뜩찮은 얼굴로 나를 쏘아보더니 우벅주벅 여자의 뒤를 따라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저 자식도 단골이야? 들리거나 말거나 상관 않겠다는 식의 성난 남자 목소리가 날아왔다. 일어서야 했다. 얼른 계산을 끝내고는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머리를 좀 맑게 하는가 싶더니 몇 발짝 걷기도 전에 안에서보다 더 취기가 올라왔다. 오토바이 시동을 걸고 천천히 차도에 내려섰을 때에 술집 간판의 불이 꺼지는 게 보였다. 그대로 잠시 기다렸다. 얼마 후 두 남녀가 나왔다. 그들은 힐끔 나를 바라보고는 술집 앞의 승용차에 올라 읍 방향으로 휭하니 멀어져갔다.
오토바이를 모는데 몸이 자꾸 좌우로 흔들렸다. 속도를 줄이는 대신 오히려 빠르게 오토바이를 몰아 몸의 균형을 잡았다. 랜턴은 아예 이빨로 질끈 물어버렸다. 단숨에 면내 도로를 종단해 마을로 빠지는 길 어귀에 들어섰다. 거기에서 기어코 사고가 나고 말았다.
좌회전과 동시에 길옆의 논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삼 분 정도 속절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려 일어서려 하자 허리가 심하게 당겼다.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았으나 팔다리가 전부 욱신거렸다. 옷은 아래위 모두 진흙 범벅이었다. 힘겹게 오토바이를 끌어올리고 나니 이번엔 시동이 걸려주질 않았다. 스무 번이나 실패하고 나자 오토바이를 지탱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게다가 젖은 몸이 오슬오슬 떨려와 잠시 쉴 수도 없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까운 곳에 여관이라도 있으면 거기에 오토바이를 갖다 놓고,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그리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우면 아아, 그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이곳 면내에는 여인숙조차 없다. 오토바이를 때려부수고만 싶었다.
면사무소 주차장이 생각났다. 거기에 오토바이를 박아두고 나면 일단 큰 짐 하나는 벗게 될 터였다. 그런데 겨우겨우 오토바이를 끌고 면내로 돌아와 보니 면사무소의 철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발로 냅다 대문을 걷어차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면 전체가 공동묘지처럼 고요했다. 한번도 환한 대낮이라곤 없었던 곳처럼 무겁고 짙은 어둠뿐이었다.
움직여야 했다. 몸은 까무룩 가라앉는데 턱이 저절로 흔들릴 정도로 추웠다. 이젠 오토바이 따위는 어찌 되든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열쇠로 핸들자물쇠만 걸어놓고는 비척거리며 삼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저 앞에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틀림없이 고장났을 거야……. 틀림없어……. 세상이 온통 적의로 가득 찬 듯해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틀림없어……. 고장 안 났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낯선 오기가 찬바람처럼 숭숭 가슴을 질러갔다.
요술처럼, 전화기는 고장나 있지 않았다. 송화기를 든 채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먼저 114를 연결한다. 읍내 택시회사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택시를 호출해 읍으로 나가고, 나가자마자 여관을 잡는다. 온통 진흙투성인 내 몰골을 보고 혹시 방을 안 주면 어떡하지……. 거기에서 갑자기 내게 돈이 별로 없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얼른 지갑을 꺼내 보았다. 지갑에는 역시 택시비나 겨우 지불할 돈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잠시 멍청히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머리가 텅 비어지는 느낌뿐, 걱정도, 화도 나지 않았다. 꼭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수천수만의 눈이 킬킬거리며 공중전화 부스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턱이 다시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서 내려온 진흙물이 입술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유리창에 칵 침을 내뱉고는 빠르게 번호판을 눌렀다. 신호음이 열 번이나 울리도록 전화는 떨어지지 않았다. 송화기를 막 내려놓으려 하는데 무슨 소리가 들린 듯했다. 황급히 송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여보세요……. 깊은 우물에서 힘겹게 올라오듯 아내의 잠기 밴 목소리가 느릿하니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아내는 울 것이다! 내가 말을 꺼내는 순간 아마 아내는 낮게 흐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찰칵, 얼마 후에 저쪽에서 수화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내 무릎도 탁 꺾였다. 유리창에 이마를 박은 채, 그냥 그렇게 있었다.
춥구나, 참 춥구나……. 울음은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울컥 목이 메인다 싶더니, 주르르 눈물이 흘렀고, 꾸역꾸역, 오바이트할 때처럼 목구멍으로 끈적끈적한 울음이 차올랐다. 내 자신이 우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등뒤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울고 있다고……. 어쩌면 저리도 서럽게 울까, 꽤나 슬픈가보군, 몹시도 외로운가보군, 모른 체하자, 그래 잠시 모른 체해 주자, 하고 나는 생각했다.


임영태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등단
․장편소설 ꡔ비디오를 보는 남자ꡕ
ꡔ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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