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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신작단편소설/윤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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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강
초록여인숙
사내를 만난 곳은 엑스트라를 실어 나르는 승합차 안에서였다. 장석무, IMF 때 실직했고 아내와는 이혼했다. 차 안의 열 명은 나를 빼면 모두 H 예술에서 모집한 엑스트라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지 못한 젊은애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을 때까지 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왔다. 젊은애들은 그렇다 치고 중년들의 사정은 보다 절박한 것이었다. 게 중에는 배우에의 헛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치들도 끼어 있기는 했지만.
나 역시 장의 처지와 비슷했다. 장보다 조금 더 젊다는 것을 제외하면.
잡지사가 문을 닫자 나는 본격적으로 소설이나, 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빌어먹을 부장이 원하는 기사는 매달 똑같았다. 굿 섹스 테크닉 아니면 오르가슴의 비법이었다. 부드럽고 느리게 애태우며, 숫자 8을 천천히 그리듯이 등의 문장을 써내는 것은 일요일 오후의 경춘가도를 달리는 것보다 더 지루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자네는 그 방면에 일가견이 있으니까 하는 부장의 태도였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히말라야 등정기나 토굴 속 성자의 고독이라고 말했다가 두고두고 빈축만을 샀다.
친구들의 전화가 뜸해졌고 곁을 맴돌던 몇 명의 여자들도 연락을 끊었다. 그들은 전화를 받으면 대뜸 바쁘다는 소리부터 했고, 마지막으로 사는 것이 왜 이리 힘드냐는 소리도 잊지 않았다. 30통의 이력서를 쓰고 나자 드디어 불면증이 생겼다. 어느 날 새벽 네 시, 가슴이 서늘해지며 문득 잠을 깼다. 내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 바로 곁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이사 온 지 삼 년 만에 알게 되었다. 새벽예배의 광신적인 기도소리는 대형 덤프트럭이 노면을 긁는 소음보다 더 귀에 거슬렸고, 나는 매일 매일을 신의 창조물인 인간들이 신께 구걸하는 소리를 들으며 암담한 마음으로 새벽을 맞이했다.
핸드폰의 벨이 요란하게 울린다. 겨우 잠든 지 두 시간쯤 되었을 때였다. 조감독으로 십 년 동안 영화판을 쫓아다니는 동창이다.
하, 참, 단역이 음주운전을 하다 로또 복권방을 들이받았다는 거야. 허리뼈가 부러지고 목뼈에 금이 갔다는군. 도대체 그 놈의 로또 복권은 나와 무슨 원수가 졌는지. 지난번에 똥구덕에 주저앉는 꿈을 꾸었네. 대박이 터질 줄 알았더니 꽝이었어.
새벽 네 시에 전화해서 그런 식으로 지껄일 녀석은 영화에 미친 그 녀석밖에는 없다. 동창은 늘 그런 식이다. 에둘러 말했다. 멍해져 있으면 어느새 부탁을 수락한 꼴이 되고 만다.
자네하고 키나 몸집이 비슷해. 뒷모습 몇 신이면 된다네. 아침 일찍부터 촬영에 들어가야 돼. 알겠나? 다섯 시, 강남역 2번 출구.
그렇게 해서 나는 꼭두새벽에 강가에 앉아 있었다. 조연출이 지시하는 대로 방죽 아래쪽 강가에 쭈그리고 앉아 눈에 힘을 주고 강물을 노려보았다. 어려울 것은 없었다. 뒤통수만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단역이 끝나자 동창은 엑스트라 역을 몇 개 더 맡겼다. 포졸 5, 행상 6, 걸인 3이었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경험이 중요해,라고 동창은 내 등을 두드렸다. 자넨 경험이 풍부하니까,라고 말하던 빌어먹을 부장과 똑같은 제스처였다.
머리로 쓰는 소설은 한 세기 전 문자 시대의 신화이지. 이제 소설도 발로 써야 한다네. 장르 여행이라고 생각하게나. 난 기꺼이 소스가 되어주겠네,라고 생색까지 냈다. 하지만 동창은 곧 나를 모른 척했다.
방죽 위를 걷던 포졸 4번 장이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다. 그 옆으로 포졸 5번인 내가 고꾸라진다. 안개가 걷히지 않은 방죽의 풀밭은 축축했다. 강아지풀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샛강의 물살은 부초를 흔들며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차가운 풀 위에 넘어져 기꺼이 죽어 있다. 송전탑 저편 염색 공장 굴뚝 위로 쏟아져 나오는 잿빛 연기는 음울했고 은어가 헤엄치던 샛강은 오염된 폐수로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공해로 인해 지난 겨울 이곳에서는 진홍색 눈이 내렸다고 한다.
강은 욕망의 찌꺼기들을 끌어안은 채 낮고 슬픈 음률을 내며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안개에 젖은 풀들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브람스의 클라리넷 5중주를 듣고 있다. 위장된 죽음은 아름다웠다. 어린 시절의 전쟁놀이에서처럼. 안온한 평화가 찾아왔다.
죽음이 이토록 감미롭기만 한 것이라면 당장 죽을 수도 있으련만.
내 곁에 엎어져 있던 장이 문득 지껄였다.
그동안 수백 번도 더 죽어보았네. 칼에 맞기도 하고 자동차에 치어 죽기도 했지. 누군가 나를 위해 화살촉에 치명적인 독을 묻혀주기를 바랬지만 그런 행운은 오지 않았다네. 자넨 나를 실제라고 믿나? 아니면 나는 단지 포졸 4, 걸인 1, 행인 8에 불과한가? 나는 이미 이곳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것 같네. 나는 나의 시뮬라크르는 아닌가?
순간적으로 나는 장이 콘티의 한 부분을 읊고 있는 줄 알았다.
감독의 컷! 하는 고함소리가 안개를 흩어지게 했다.
거기, 포졸 4, 죽은 자가 말하나?
감독의 레디! 액션! 소리가 떨어졌을 때 어디선가 털 빠진 늙은 개가 방죽 위로 달려왔고 촬영은 한 시간이나 지연되었다.
촬영이 끝난 후 장은 새파란 조연출에게 핀잔을 먹었다. 엑스트라도 영화에 기여하는 부분이 지대하다는 걸 알면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옆에 서 있던 나는 어차피 화살 꽂힌 등만 찍히는 것 아니냐고 장의 역성을 들었다. 장은 불면 때문에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송전탑의 꼭대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포졸 의상을 벗은 장의 옆얼굴은 훨씬 더 단단하고 고독해 보였다. 각진 턱과 면도하지 않은 턱수염, 깡마른 어깨가 틈을 주지 않았고 날카롭고 깊은 눈은 절망적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포졸 4보다는 복면을 쓴 테러리스트의 역할에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엑스트라들은 새벽에 만났던 강남역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몇 계단을 앞서 내려가던 장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더니 내게 한잔 하지 않겠느냐고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아까는 고마웠다고 덧붙였다.
그의 외로움이 갑자기 다가왔다. 지독하게 외로울 때는 타인의 사소한 친절도 눈물겹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나는 장의 뒤를 따라 실내 포장마차로 들어갔다. 방죽에 쭈그리고 앉아 꾸역꾸역 삼킨 김밥이 여전히 명치끝에 걸려 있는 것 같다. 장과 나는 국수부터 한 그릇씩 말아먹었다.
언제부터 엑스트라를 하셨습니까? 이런 일을 하실 분으로는 보이지 않는데요.
국수를 후딱 먹어치운 후 담배를 권하는 장에게 나는 의례적인 질문을 했다. 기자 시절의 습성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장은 질문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귀신이 붙어있다고 하지. 조상신. 놈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오른쪽으로 도망가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왼쪽으로 도망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대면할 수가 없다고 하네.
명문대학 입시에 실패하자 어머니는 점쟁이를 찾아갔지. 점쟁이는 나한테 몇 대 전 억울하게 죽은 동자귀신이 붙어 있다는 거야. 어머니는 점쟁이에게 몇 백의 돈을 집어주었네. 액땜을 하고 부적을 받아와 내 속옷에 꿰매주었지. 어찌되었든 그 다음 해에 나는 어머니가 원하는 메이저급 대학에 들어가기는 했어.
무거워 보이던 인상과는 달리 한번 입을 뗀 장은 얘기를 술술 풀어나갔고 그의 얘기는 흡인력이 있었다. 나는 푸른 색 플라스틱 의자를 당겨 그에게 바싹 다가앉았다.
어릴 때 내가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할머니는 마당을 비질하고 사람의 형상을 그렸지. 그리고 이마 쪽에 낫을 꽂아놓았네. 내 머릿속에서 생각을 쫓아내기 위해서였지. 원시인들은 오직 미친 사람만이 생각한다고 믿었다네. 미친 사람은 머릿속에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지. 첫눈에 알아보았네. 자네 이마에도 낫이 필요하다는 걸.
나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세게 문질렀다.
왠지 나는 그에게서 소설의 소재 거리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장과 나는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의 잔을 채워주고 밤새도록 마실 작정이었다.
남녘으로 취재여행을 떠났다가 한적한 시골 여인숙에 든 적이 있다. 초록여인숙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어 새로 지은 말쑥한 모텔을 두고 허름한 그곳에 투숙했었다. 자잘한 꽃무늬의 유치하고 낡아빠진 이불에 엎드려 누구에게도 보낼 수 없는 긴 편지를 썼다. 나는 슬픔의 아들이오,라는 진부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치졸한 글이었다.
이십 대의 막바지였고 사귀던 여자와 헤어진 직후였다. 장래가 보장되지 않는 시시한 잡지사의 기자 대신 여자는 증권회사 직원을 택했다. 여자를 떠나보낸 것은 결론적으로 나였다. 한 여자에게 얽매일 것이 갑자기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자고 마음먹었을 때 그때의, 산산조각으로 붕괴되던 사랑에의 몽상이 떠올랐다. 새벽 네 시의 교회에서 비어져 나오는 광신도의 아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소설의 제목을 불현듯 생각해 냈다. 초록여인숙. 나는 주인공을 M이라 명명했다.
M은 길 위에 선 채 하얀 꽃을 매단 이팝나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M은 강풍이 불어와 이팝나무의 꽃을 모두 떨구어버리지 않을까 따위의,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일들에 골몰하는 몽상가였다.
페루의 바닷가로 은둔한 실패한 혁명가를 연상시키는 장의 눈빛은 내가 찾아 헤매던 M의 이미지를 환기시켜주었다. 나는 장이 걸어가는 노정으로 M을 불러들였다.
한 페이지가 넘겨질 때마다 순결한 M의 영혼은 검은 빛깔로 물들어갔고 이팝나무의 가지에는 염색공장의 연기로 오염된 기묘한 빛깔의 눈이 내려앉았다.
―뉴기니아의 어느 종족의 얘기라네. 성인식을 치르는 날 소년 대여섯 명이 통나무로 지은 성소에서 제물이 된 한 소녀를 번갈아 범한다고 하네. 마지막 소년이 소녀를 범하고 난 바로 그 순간 밖에서 지키고 섰던 어른들이 통나무 기둥을 뽑아버리면 소년과 소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지. 바로 그날 밤 그들은 이 불쌍한 소년과 소녀를 구워먹는다고 하네…….
장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별로 기분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혹시 내가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했다네. 하지만 분명 그 여자였어.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제물로 삼았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그 마지막 소년이 된 느낌이라네. 그 여자는 나를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고 영원히 사라졌지…….
나는 장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이타카로 귀환한 율리시즈가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었을까? 인간으로서 들어서는 안 되는 사이렌의 노래를 들은 그가 말일세⋯⋯.
장은 스스로의 잔에 술을 따르고 단숨에 들이켰다.
―율리시즈는 요정의 노래를 듣고 싶은 욕망을 거부할 수가 없었네. 돛대에 묶여 심연의 노래를 들었지. 부하들은 황홀감에 몸부림치는 대장을 바라보아야만 했어. 그들은 절대 알 수 없었지. 그들의 귀는 명령에 의해 밀초로 봉해져 있었으니까.
비뇨기과 의사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더군.
언제부터 이런 증상이 나타나셨나요?
부인과는 잠자리를 하고 계신가요?
혹시 외도를 하신 건 아닌가요?
나는 의사가 묻는 대로 적절한 대답을 해 주었지. 그가 프로이드와 라캉으로 내 자지를 해부하는 것을 참아야 했네.
그는 선생님의 페니스는 정상입니다. 심리적 기제에 의한 일시적 현상일 뿐입니다,라고 자못 엄숙하게 선언하더군.
아내는 그 순간만을 기다려 왔던 사람처럼 이혼하자고 하더군.
어린 시절 허약한 장은 자주 체했다. 할머니는 소반 위에 물을 한 그릇 올려놓고 정성 들여 빌었다. 조상신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장씨 대주 큰아들 우리 손주의 잘못을 부디 가져가소서! 다 가져가소서! 할머니는 방문을 열고 무쇠 식칼을 마당으로 휙 내던졌다. 칼이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집 안쪽으로 향하면 다시 주문을 외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칼이 바깥쪽을 향할 때까지 그 행위는 지리하게 반복되었다. 어린 장은 칼이 자신이 누워 있는 안방 쪽을 향할 때마다 죄의식을 맛보았다. 이불 속에 누워서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하나씩 되짚어야 했다.
신작소설|윤지강․
대기업의 홍보실에서 승승장구하던 장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쟁업체와의 빅딜설이었다. 회사는 파산 직전이었고 노조는 명동성당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하루는 농성장의 천막에서 잠을 자다 새벽에 잠을 깼다. 누군가 장의 몸을 발딱 일으켜 세우는 것 같았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성체 배령 시간이었다. 신자들에게 성체를 배령하는 수녀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것 같았다. 수녀는 그가 오래 전에 알았던 여학생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마치 쌍둥이처럼.
장은 꼬박 일 주일을 새벽에 일어나 미사에 들어갔다. 동료 중 하나가 회개하고 수도원에 들어갈 것이냐,라고 농담까지 했다.
어느 날 장은 미사가 끝난 후 제대 위를 정리하는 수녀에게로 다가갔다. 장은 더듬거리며 이강이라는 여자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수녀는 말없이 장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애는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부적처럼 가지고 다녔지. 내게 보내는 편지에 M.C라고 쓰기도 했어. 집안 대대로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지. 그 애를 처음 만난 곳이 바로 명동성당이야. 서울역에서 집결한 데모대의 행렬은 시청 앞에서 흩어졌어. 전경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들어간 곳이 명동성당이야. 성서공부를 하러 왔던 그 애도 떼밀려 성당 안으로 들어왔고 바로 내 앞에 서게 되었어. 그 애는 주머니에서 묵주를 꺼내 손에 굴리며 기도를 하더군. 고통의 신비 2단, 예수 우리를 위하여 매맞으심을 묵상합시다. 나는 그때 투쟁에 모든 것을 걸었던 때였어. 너무나 고요한 호수를 보면 인간은 돌을 던지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지. 악마가 내 귀에 속삭였어. 절벽에서 뛰어내리게, 권능이 그대를 날게 할 것이네.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편지를 보냈지. 첫키스를 하는데 그 애는 덜덜 떠는 거야. 입술을 열 줄도 몰랐어. 난 어느 정도는 장난이었지. 물론 그 애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애는 한 가지에 몰두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어. 순수하고 뜨겁고 열정적이었지. 두 가지를 생각할 줄 몰랐기 때문에 선택이란 없었지. 오직 한 가지만 존재했지. 신이거나 그림이거나 사랑이거나. 그 애는 그 셋 중에서 나를 선택했지. 더럭 겁이 났어. 진실이라는 것을 대면할 용기가 없었다네. 그래서 도망친 거라네. 군대에 입대해 버렸지⋯⋯.
수녀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이강은 제 언니입니다. 언니는 대학 2학년 때 죽었습니다.”
장은 충격으로 하마터면 수녀의 손을 덥석 잡을 뻔했다. 그동안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처럼 뒷머리 쪽으로 피가 확 몰렸다.
“자살이었습니다.”
수녀는 제대 위로 다시 올라가 제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장은 성당 안에 멍하니 앉아 십자가의 예수상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말해주기를 기다리면서 몇 시간 째 그러고 있었다.
―신비한 애였지. 해가 뜨기 전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어. 소녀 같은 데도 애늙은이였지. 나와는 확연히 달랐지. 어느 날 새벽 호숫가를 산책하는 데 수면 위에 누군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는군. 주위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고 해. 가슴이 무언가로 가득 차오르면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 같더래. 그대로 스케치북을 펼치고 수면에 떠오르는 얼굴을 그렸다는군.
산 위의 수도원 신부가 그 그림을 보고 성호를 긋더라는 거야. 신부는 중병으로 누워 있는 그 애 할아버지에게 봉성체 예식을 거행하러 왔다가 그 애 그림을 본 거야. 그 형상은 수도원 초대 원장인 외국인 신부가 그린 수도원 벽화의 예수 얼굴과 똑같았다는 거야.
그 순간 이강은 수녀가 되겠다는 맹세를 했어. 미술대학을 졸업하면 수녀원에 입회하겠다고 신부에게 말했다는군. 그 약속을 파괴시킨 것이 바로 나, 나라네.
그 애는 마지막 만났을 때 임신했다고 말했었네⋯⋯.
장이 그때 성당에 홀로 남아 눈물을 흘렸는지는 알 수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합병회사의 경영진 실무자가 장에게 은밀하게 만남을 제의해왔다. 그들은 장의 배포와 능력을 알고 있으며 도움을 주면 요직에 앉히겠다고 그를 회유했다.
개인의 비극은 언제나 시대의 비극과 맞물려 있다, 물론 나를 합리화시키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네만, 이라고 장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대학 시절 데모하다 끌려간 장은 감옥에 갇힐 것이 두려워 선배의 이름을 불고 말았다. 그 대가로 장은 풀려났지만 투옥된 선배는 몇 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출옥 후 시름시름 앓던 선배는 급기야 시력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장과 절친했던 문학 서클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자백했다. 장을 형사들에게 밀고한 것도 그였다. 배신자는 장 하나만은 아니었다.
장은 회사의 기밀문서를 그들에게 넘겨주었으며 곧 회사는 합병되고 동료들은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장은 입이 마른지 말을 멈추었다.
―그들은 나를 이용하고 처분했지. 벽지로 발령을 내렸어. 막상 내려가 보았더니 책상조차 마련해 놓지 않았더군⋯⋯.
장이 극심한 자괴감에 빠져 있을 무렵 홍보실에서 동고동락했던 박이 그를 찾아왔다. 역시 실직자가 된 박은 소규모의 여행사를 차렸으며 장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의했다.
홍보실에서의 장은 위력은 상당했었다. 한다하는 정치인이 고급 바에서 두툼한 돈봉투와 함께 미니스커트의 계집애들을 무릎에 안겨주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자가 꿈인 박에게 경력을 만들어주기 위해 사보에 여행기를 신설해 매달 그의 기사를 실어준 것도 장이었다. 그런저런 관계로 박과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다.
―아내와의 결혼도 박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 몇 명인가의 여자와 섹스를 나누고는 있었지만 딱히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없었어. 혼기가 되자 집에서는 독촉이 심했지. 궁여지책으로 주변 여자들의 신상명세서를 정리해 박에게 던져주었네. 박은 리스트에 오른 여자들의 점수를 매겨주었지. 그 중 점수가 가장 높게 나온 여자와 나는 결혼한 것이라네.
장이 그녀를 택한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사양’의 한 구절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파괴사상, 파괴는 슬프고 불쌍하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하지만 결혼한 후 아내는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텔레비전의 한 프로에 나온 이화여대생이 감동 깊게 읽은 책으로 ‘사양’을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장의 아내는 귀여운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어쩌면 내 아내는 박의 이상형이었는지도 모르지. 안 그런가? 어째서 박이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느냐고? 이미 그때는 내가 그녀와 잠을 자고 난 후였거든.
박의 사업 아이템은 ‘캐슬관광’이었다. 북유럽 패키지. 백야의 나라 노르웨이, 뭉크 미술관, 햄릿의 무대인 크론보르 성. 박은 홈페이지에 유럽의 푸른 눈이라고 불려지는 브릭스달의 빙하 사진을 올려놓았다. 권태와 공허가 짓누르는 삶에서 탈출하고 싶습니까? 예스를 클릭하십시오. 캐슬관광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법이나 윤리, 도덕은 이 게임에서 완전히 삭제된 조항입니다.
“형, 한탕해서 출판사를 차립시다. 형은 기획하고 쓰는 것은 내가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작 생각해 낸 게 캐슬인가?”
“누가 그렇게 말하더군요. 악몽으로서의 유토피아라고.”
“이봐, 내겐 지금 이 순간이 악몽이야,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판타지이죠.”
박이 설득하지 않더라도 장에게는 무언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십 여 년 둥지를 틀며 청춘을 바친 회사는 하루아침에 붕괴되었다. 파괴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고 완성하려는 꿈도 아니었다. 장은 아무도 모르게 우울증을 앓았다. 때문에 기자가 되겠다던 박의 변모가 놀라울 것도 없었다.
캐슬관광은 남자 30명 여자 10명으로 이루어진다. 남자는 사십 대, 연봉이 억대는 되어야 한다. 여자의 조건은 좀더 까다롭다. 삼십 대, 대졸, 필수조건은 미모일 것. 좀더 쉽게 말하면 캐슬관광은 묻지마관광의 버전업이었다.
짝이 맞지 않는다고 하자 박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간택 받지 못한 남자들은 백마를 타는 거죠,라고 말하며 형도 익히 알고 있는 얘기가 아닙니까,라고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장은 내심 불쾌한 얼굴로 박을 노려보았다.
“성(性)의 판타지를 파는 겁니다. 유럽의 성(城)을 돌면서 짝짓기 게임을 하는 거지요.”
이국이라는 것, 짝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 욕망을 부추기고 금기에의 위반이 그들의 세포에 마약을 주사한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절대로 연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룰을 어길 경우 위약금을 지불한다는 각서를 쓴다.
“선배는 인솔만 하면 됩니다. 코펜하겐에 도착하면 현지가이드가 기다립니다. 명심할 것은 선배는 절대 게임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거죠. 어느 여자에게도 한눈팔아서는 안 됩니다.”
박은 거듭 당부했다. 장은 무언가 석연찮은 느낌이었다. 그게 무언지 모르지만. 분명 무언가가 장과 박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십 년 동안 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박은 장의 성적방종을 낱낱이 꿰고 있었다. 장은 그가 반어법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 새끼가 날 놀릴 작정이군, 하는 역정이 치밀어 올랐다.
“유혹되면 해고인가?”
“그럴지도 모릅니다. 조심하십시오.”
박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며 장의 시선을 외면했다. 무엇일까, 장은 박이 굉장히 어려운 수수께끼를 자신에게 내밀고 있다는 의혹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공항에 배웅 나온 아내의 얼굴은 생기가 감돌았고 남편을 멀리 떠나보내는 서운함의 기미는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장이 실직한 후 부티크를 열었다. 이태리나 홍콩에서 옷을 사가지고 몇 배를 붙여서 팔았는데 불황이었음에도 장사가 잘 되고 있었다.
박은 아내가 캐슬관광의 실제 코드는 모른다고 귀띔했다. 옅은 갈색의 니트 원피스를 입은 아내는 장이 알고 있는 그 여자가 아니었다. 헬스클럽에서 다듬은 몸매가 날씬하면서도 적당한 볼륨감으로 팽팽했다. 장은 새로운 여자를 바라보듯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가 변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장은 소외감을 맛보았다. 출국장을 빠져나가면서 장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내와 박은 이미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박의 손이 자연스럽게 아내의 허리께에 가 있었다. 그가 당장 여행을 집어치우자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출국장의 문이 닫혀버린 후였다.
실상 아내와는 오래 전 애정이 식은 상태였다. 아내와 마지막 키스를 한 것이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내가 ‘사양’을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던 그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박이 털어놓았다. 와이프와 각방을 쓴지 오래되었다고 우울하게 고백했다.
“키스리스! 섹스리스! 성욕은 있는데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만 욕망해서는 안 된다, 선배, 어느 쪽이 더 리얼합니까? 선배는 여전히 밖에서도 하고 집에서도 합니까?”
“취했군.”
“선배는 가능하지, 어느 여자든.”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유부녀인가? 불륜은 혁명이야, 임마!”
장은 그 말을 하고 나서 고소를 머금었다. 문득 그리운 사랑 때문에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혁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불쑥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문장에 방점을 찍은 것은 바로 장이었다. 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지나간 과거의 한 순간일 뿐이었다.
“불륜이 혁명이라고? 인간은 혁명과 사랑을 위해서 태어났다고? 그래서 형은 한 가지라도 이루어냈습니까? 사랑? 혁명?”
그날 박은 지나치게 많이 마셨다.
“형, 우리 스와핑은 어때?”
박을 한 대 치려던 장은 그의 눈빛에 주춤하고 말았다. 이 새끼는 지금 장난이 아니다,라는 직감에 술이 확 깼다. 머리 속의 회로가 뒤엉켰고 장은 더 이상 생각을 진전시키지 않기 위해 양주를 병째로 들이켰고 곧 탁자 위로 엎어졌다.
비행기는 북경을 거쳐 코펜하겐으로 향했다. 장은 비행기 속에서도 줄곧 아내와 박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 스와핑은 어때?라고 뇌까리던 박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장은 곧 한 여자로 인해 고통스러운 사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실은 영종도 공항에서 북유럽 패키지의 일행에 끼어있는 여자를 보았을 때부터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화이트 블루의 청바지에 블랙의 니트 상의, 같은 색의 긴 스카프를 목에 감아 내려뜨린 여자는 주위를 압도했다. 묘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어항 속의 금물고기처럼 모든 것에서 소외당한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밀어내고 있는, 고양이 같은 여자였다.
여자는 스케치북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어느 곳에서든 스케치를 했다. 때로 장을 몰래 훔쳐보며 그리기도 했다. 여자가 고양이 같은 눈으로 장을 주시할 때마다 장은 은밀한 기쁨을 맛보았다.
여자가 가장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온 것은 비겔란 공원에서였다. 여행 일 주일 째 되는 날이었다. 여자는 분수대 앞에 앉아 스케치에 몰두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눈부신 광선이 여자의 하얀 뒷목을 비추었다. 방금 푸새질한 옥양목 이불잇처럼 새하얀 목덜미였다.
장은 유년의 어느 한 순간을 떠올렸다. 어머니는 자주 개울가로 빨래를 하러갔고 장과 동생들은 어머니를 따라 개울가에서 하루 종일 목욕을 하며 놀았다. 어머니는 잿물에 삶은 이불 호청을 방죽의 아카시아 나무 위에 길게 펼쳐 널었다. 풀을 먹인 호청을 다시 말리고 다듬이질을 해 꿰매고 나면 이윽고 밤이 이슥해졌다.
풀 먹인 이불잇은 언제나 살을 에일 듯 빳빳했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버석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은 방금 시침질한 옥양목의 싱그러운 풀냄새가 그리워졌다. 시궁창 같은 곳을 헤매다가도 어머니의 이불 속에 누우면 땟국에 절은 영혼이 깨끗하게 정화되는 듯했다. 장은 그 여자의 보드라운 목덜미에 아프도록 입술을 문지르고 싶은 욕망에 온몸이 뜨거워지며 성기가 팽팽해졌다.
―내가 겨우 15개월 되었을 때 동생이 태어났어. 나는 어머니의 젖을 빼앗겼고 고무젖꼭지가 달린 우유병이 주어졌지. 프로이드가 말하는 구강기였어. 내 것을 빼앗아간 동생 녀석이 무척 미웠지. 어머니 젖을 탐욕스럽게 빨면서 한손으로는 또 다른 쪽 젖을 움켜쥔 녀석의 손가락을 꽉 물어뜯었어. 피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육군 중사인 아버지는 호랑이였어. 내 등덜미를 낚아채 어머니가 말릴 새도 없이 마당으로 집어던졌어. 동생은 새파랗게 질려 울어대고 나는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났다고 하더군.
나는 늘 내 것을 빼앗길 것이라는 강박증에 시달려야 했어. 한시라도 엄마의 젖이 보이지 않으면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유아의 반복 강박증. 나는 여자의 풍만한 유방에 집착했지. 여자의 젖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으면 나를 쫓는 정체 모를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네⋯⋯.
여자가 장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온 것은 오슬로의 뭉크 미술관에서였다. 장은 <키스>라는 제목이 붙은 목판화 앞에 서 있었다. 뭉크의 키스는 달콤함도 열정도 없는, 죽음의 키스였다. 뭉크의 그림은 모두 생명을 소진하기 위한 강요된 제의(祭儀)처럼 보여졌다.
“뭉크를 좋아하세요?”
여자가 장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이듯 물었다. 여자의 유방이 장의 탄탄한 팔뚝에 닿았다. 노브라. 찌릿한 전율이 장의 척추를 관통했다. 장이 여자를 돌아보았을 때 부딪친 것은 부동산업자의 쏘아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한때 국회의원의 보좌관까지 지냈다는 부동산업자가 여자에게 끈질기게 추파를 던진다는 것을 장은 알고 있었다.
햄릿의 무대인 크론보르그 성에서 야외극을 관람할 때였다. 거트루드 왕비가 시동생인 클로디어스와 밀회를 즐기는 장면에서 장은 여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여자의 손을 움켜잡았다. 햄릿의 역을 맡은 배우가 절망적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이니라.
여자가 장의 귀에 대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오늘밤.
밤, 여자가 장의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이스로 촘촘하게 짠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짧은 드레스 위로 유두가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여자는 장의 눈앞에서 옷을 벗었다. 옷 속에는 아무 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여자는 불을 모두 끄고 플로어 스탠드 하나만 밝혀두었다. 여자가 손에 들고 온 술병의 뚜껑을 열어 먼저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한 모금씩 장의 입으로 옮겨주었다. 무슨 술이었는지 무슨 맛이었는지 모른 채로 장은 도취해갔다. 극도로 흥분한 장은 여자의 벌거벗은 몸에 술병의 남은 술을 모두 끼얹고 혀로 핥았다. 그들은 육체가 즐길 수 있는 모든 방종과 쾌락에 탐닉하며 오랜 시간을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장의 등에 얼굴을 묻고 여자가 말했다.
“대학에 입학한 직후였어. 텔레비전의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어. 책에 관한 프로였는데 사회자가 사람들에게 가장 감명 받은 책을 물어봐. ‘죄와 벌’ ‘부활’ ‘호밀밭의 파수꾼’ ‘토지’ 등등.”
“당신은?”
“‘사양’. 파괴는 불쌍하고 슬프고, 그리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문장에 매혹되었다고 했어. 사람들이 박수를 쳤어.”
장은 육체에 취해 여자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으며 다시 여자에게 삽입했다.
―왜 여자들은 그러지 않나? 하나가 꽃무늬 손수건을 접어가지고 다니면 유행처럼 따라하지. 애교머리를 늘어뜨리고 교복치마의 허릿단을 접어입지. 다리가 길어 보이도록 말이야. 책갈피에 꽃잎을 끼우기도 하고 푸른 색연필로 엽서를 쓰기도 하지.
그때는 여자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나는 그때부터 모든 것을 잊었지. 내가 누구인지 돌아갈 곳이 있는지조차.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출세와 야망, 모두를 잊었다네. 신검을 내 손에 쥐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생애 처음으로 자유로워졌지.
내 삶이 그토록 가벼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어. 언제나 삶은 내게 요구하거나 짐 지워진 것이었어. 존재의 문을 나는 처음으로 열고 있었고 그 안에서 나의 욕망은 정화되었어.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가 성령에 의해 신과의 합일의 경지에서 느낀 희열은 남녀가 육체적 교접에서 느끼는 오르가슴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더군.
일체의 고독과 권태, 공허가 사라졌고 나는 행복했지. 최초의 아담처럼 말일세.
하지만 그것은 꿈이었을까? 나는 어쩌면 내가 꾸고 싶었던 꿈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네. 안 그런가?
어린 시절 장의 마을에는 대장간이 있었다. 장은 할머니를 따라 자주 대장간에 갔다. 불에 달군 쇠를 벼리던 대장장이는 장을 보면 무뚝뚝하지만 친절하게 말하곤 했다.
“좋은 칼을 만들려면 많이 때려야 해. 쇠가 아무리 좋은 놈이래두 불에다 구우면 이렇게 숨골이 생긴단다.”
대장장이는 불 속에서 금방 꺼낸 시뻘건 쇠를 어린 장에게 보여주었다. 장은 얼굴에 뜨거운 열기를 느끼며 흠칠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이 숨골을 없애는 게 기술이란다. 때리고 또 때려서 불에 열일곱 번을 드나들어야 진짜 칼이 나오지. 하지만 사람은 나고 나고 또 나도 제대로 사람이 되기가 어려운 법이야.”
대장장이가 뜨거운 불 속에서 꺼낸 칼은 장에게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장은 그 칼을 신검(神劍)이라고 생각했다. 당나라 장수의 머리 위를 맴도는 불길한 새를 베어버린 김유신의 신검 같은 위대한 칼.
밤늦게까지 울리는 대장장이의 메질 소리는 묘하게 슬픈 음률을 지니고 있었다. 대장장이가 내는 메질 소리는 어린 장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장의 어린 시절 소망은 대장장이가 되는 것이었다. 대장장이가 되어서 뭐하는데?라고 어른들이 물으면 신검을 만들어 김일성을 무찌르겠다고 앵무새처럼 지껄였다. 육군중사인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며 장을 들어올려 천정에 장의 머리가 닿게 했고 장은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는 것이 흡족했다.
장은 동생보다 키가 작았고 싸움에서 늘 졌다. 영리했지만 허약했다. 장은 시험 때면 코피를 쏟으며 새벽까지 책상에 붙어 있었다. 그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공부였기 때문이다. 장의 동생은 우둔했지만 잘 생긴 얼굴의 쾌활한 소년이었다. 할머니가 동생의 형상을 그리고 이마에 낫을 꽂은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할머니는 동생이 엄마 젖을 넉넉히 먹었기 때문에 튼튼한 것이며 장은 젖배를 곯아 골골한다고 말했다. 종손인 장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지나치게 생각을 많이 하는 심각한 어린애였다. 집안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것은 동생이었다. 장은 때로 동생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를 바랄 때가 있었다. 동생은 가끔 장을 노려보며 형은 또 내 손가락을 물어뜯을 생각이지?라고 말하곤 했다.
나르빅으로 이동하는 열차 안에서 야릇한 미소를 띤 부동산업자의 얼굴과 마주쳤을 때 장은 부동산업자의 손가락을 피가 나도록 물어뜯고 싶은 증오심을 느꼈다.
여자는 장의 어깨에 몸을 기대고 차창 밖의 풍경에 몰두했다. 장은 팔짱 속에 숨긴 손가락으로 여자의 젖꼭지를 건드리며 비밀스런 유희를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부동산업자의 조소 어린 얼굴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가 아주 조그맣게 키득거리며 웃었다. 장은 여자와 부동산업자의 미소가 자신을 소외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국장에서 아내와 박에게서 느낀 지독한 소외감과 동일한 것이었다.
순간 여자가 캐슬관광의 지속적인 멤버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여자의 가면을 벗겨내고 싶은 사디즘적 욕구가 잔인하게 끓어올랐다. 장은 여자의 유두를 아프게 쥐었고 여자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열차 안이 아닌 둘만의 장소였다면 장은 여자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로 여자는 의도적으로 장을 피하기 시작했다.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여자에게 다가가려 할 때마다 부동산업자가 장에게 무언가를 요청했다. 대개 카메라를 눌러달라는 부탁이었다. 부동산업자는 세 번째 바뀐 파트너의 어깨를 끌어안고 턱을 들어올려 오만한 자세를 취했다. 폐기처분될 사진을 수없이 찍어대는 그들을 장은 경멸하고 있었다. 이제 장은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졌다.
장은 거꾸로 매달린 죄수였다. 더 이상 자백할 것이 없는데도 집요하게 자백을 강요하는 무자비한 집행관처럼 여자는 장을 고문하고 있었다. 장은 진심으로 고백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장은 백야의 밤을 며칠 동안 뜬눈으로 새웠다.
여행은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은 페리호를 타고 각 마을에 기항하면서 발레스트란드라는 작은 곶에 도착했다. 왕후 귀족이 머물렀다는 언덕 위의 크빅네스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페리호에 탑승했다.
여자는 뱃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여기저기서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설원을 넘어온 빙하의 얼음 덩어리가 햇빛에 반사되어 청록색으로 부서져 내렸다. 장은 오직 여자만을 주시했다. 여자의 목에 감긴 스카프가 바람에 날려 멀리서 여자는 비상하기 전의, 날개를 활짝 펼친 검은 새처럼 보였다.
장은 현기증을 느꼈다. 어찌된 일인가? 환시인가? 검은 새가 되어 서 있는 여자는 이강이었다. 검은 새가 된 이강이 청록색으로 흩어지는 빛의 무리 속에서 청초한 미소를 띠고 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배를 따라 낮게 날았다. 배의 스피커에서 ‘솔베이그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승객들은 한가로운 얼굴로 새들을 향해 먹이를 던져주고 있었다.
장은 용광로 속에 거꾸로 던져졌다. 대장장이는 불 속에 빨갛게 달구어진 그를 꺼냈다. 열 일곱 번을 집어넣었다 다시 꺼냈다. 그의 이마에 낫이 내리꽂혔다. 장은 자신의 이마에 영원히 찍힌 낙인을 보았다.
가슴이 결리듯 아팠고 눈앞이 흐려졌다. 페이드 아웃. 장은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고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아! 나는 그리워라 널 찾아가노라 널 찾아가노라⋯⋯
어느 순간 귀가 다시 열리며 노랫소리가 고막을 터트릴 듯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떴다. 온몸에 진땀이 흘러내렸다. 세계는 변함이 없었다. 오직 장만이 변했다. 여자의 검은 스카프가 바람에 휙 날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검은 새가 바다를 향해 힘껏 날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장은 여자 쪽을 향해 다가가려고 했으나 누군가 완강한 힘으로 장을 잡아당겼다. 구두끈이 풀어져 있었고 장의 발이 그 끈을 밟고 있었다. 장은 풀어진 구두끈을 매려고 허리를 굽혔다. 구두끈을 조여매고 허리를 들었을 때 이미 여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여자가 섰던 자리에서 웅성거렸다. 장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뱃전으로 다가갔다. 여자가 서 있던 자리에는 스케치북만 달랑 놓여 있었다.
북유럽 패키지의 일행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난 후에도 장은 열흘을 더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수색대가 찾아낸 것은 여자가 목에 감았던 검은 스카프뿐이었다. 그것은 배의 프로펠러에 감겨 있었다. 잠수복을 입은 키가 큰 백인이 바닷풀이 뒤엉킨 찢어진 스카프를 장에게 건네주었다.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고 여자는 실종으로 처리되었다. 장은 여자의 스케치북을 들고 비행기에 탑승해 혼자서 귀국했고 박의 여행사는 곧 문을 닫았다.
―이혼 도장이 채 마르기도 전에 아내는 다른 놈에게로 달려갔네. 자네가 이미 짐작하고 있듯이 박이라네. 그들은 홍콩에 부티크를 가지고 있었네.
헤어지기 전 아내는 하고 싶던 말을 다 토해내더군.
‘내가 이혼을 결심한 것은 오래 전 일이야. 남희가 미국에서 나왔던 적이 있지. 그때 셋이서 밤새워 술을 마셨잖아. 술이 다 떨어져 내가 맥주를 사러 나갔어. 슈퍼가 문을 닫아 사 거리의 편의점까지 갔어. 시간이 좀 걸렸지. 낑낑거리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거실의 거울에 두 사람이 키스하는 모습이 비치는 거야. 난 당황했는데도 두 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게 현관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느라 애를 먹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너무 기가 막혀 화도 안 나.
당신은 언젠가부터 내게 키스하지 않았지. 키스리스! 그래, 키스리스! 난 경비실에서 인터폰을 했어. 맥주가 무거우니 내려오라고. 당신은 태연한 얼굴로 내려왔어. 엘리베이터 안에서 노래를 부르더라구. 그때 당신이 부른 노래가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야. 당신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어.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하마터면 난 웃음을 터트릴 뻔했어. 그때 처음으로 당신이란 남자를 제대로 아는 것 같았어. 바로 그 날 당신과 헤어지겠다고 결심한 거야.
당신은 언제나 보여지는 자신에게 집착했지. 그래서 타인을 들여다 볼 수 없었어. 당신은 거대한 페니스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했지. 황야의 무법자. 마초의 허상. 내가 매혹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낸 이미지였던 거야. 시뮬라크르. 난 당신이 아닌, 헛된 이미지를 숭배했던 거야. 당신이 당신 자신의 우상에 미쳐버린 것처럼.
당신이 단 한번이라도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 적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구원의 여지가 있을 거야.’
무서운 저주가 아닌가? 그렇게 해서 나는 내가 잊고 싶은 것들로부터 오히려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네⋯⋯.
나는 장의 얼굴을 새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폭풍우에 꽃을 다 떨어트린 이팝나무처럼 쓸쓸했다.
자,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지. 그 여자를 나는 만났네. 불과 얼마 전에. 나를 불능으로 만들어버린 여자.
그 여자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단 말입니까?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하지만 점점 확신이 흐려진다네. 어쩌면 나는 계속 헛것만을 보고 있는지도 모르지. 종로 5가를 지나다가 그 여자를 보았네. 그 여자는 어느 곳에 있어도 눈길을 끄는 타입이라서 금세 그 여자를 알아보았네. 여자는 여전히 블랙의 스카프를 길게 내려뜨리고 스케치북을 끼고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파고다 공원 앞을 지나고 있었네. 당장 차를 세우고 여자를 붙들고 싶었지만 거리에는 한 군데도 차를 세울 곳이 없었네. 여자는 인사동 쪽으로 접어들었어. 우회전이 되지 않는 도로여서 대로에 차를 버려둔 채 여자를 뒤쫓아 갔지. 여자는 어느 골목인가로 꺾어들었어. 나는 사람들을 밀치며 황급히 여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들어섰네.
막다른 골목이었지. 여자는 보이지 않았어. 몇 개의 주점들이 어둡기 전인데도 화려한 조명등을 밝히고 있었지. 골목 입구의 주점부터 샅샅이 뒤졌지만 여자를 찾을 수 없었다네.
남은 곳은 골목 막다른 곳의 초라한 여인숙밖에는 없었어. 초록여인숙이라는 낡은 간판이 걸려 있더군. 다짜고짜 안으로 들어가 여자를 찾았네. 주인은 내 행색을 아래위로 훑어보며 그런 여자가 없다고 말했어. 막무가내로 여자를 찾아내라고 소리 질렀지. 여자를 만나야한다는 일념밖에는 없었으니까. 여자만이 나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
나는 곧 밖으로 내쫓겼지. 그날 밤 골목 입구에서 여자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밤을 새웠네. 여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어. 나는 밤새도록 추위에 떨며 내가 맨 처음 범한 오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네.
그제야 나는 내가 영원히 매장해 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어. 이강은 나와 헤어진 후 ‘사양’을 소포로 묶어 보내왔지. 나는 군대에서 그 책을 받았어. 그 책은 내가 이강에게 선물한 것이었지. 혁명이니 사랑이니 하는 문장에 방점을 찍은 것도 나였지.
한동안 초록여인숙 주변을 배회했다네. 어느 날 그곳은 폐허로 변했더군. 나는 무너진 건물 더미에서 해머에 찌그러진 초록여인숙의 간판을 발견했네.
어느 날 다시 갔을 때는 그 자리에는 대형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들어섰더군.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장과 나는 포장마차 밖으로 나왔다. 장은 나와 반대편 방향으로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한 손을 들어 크게 휘저었다.
엑스트라는 그만두게나,라고 내게 소리 질렀다. 나는 장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내 앞에 멈추어 선 택시에 올라탔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내부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토할 것 같아 급히 창을 열었다.
백미러에 얼굴이 비쳐졌다. 나는 경악했다. 거울에 비쳐진 추레한 사내의 얼굴은 방금 헤어진 장의 얼굴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았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장은 길가의 플라타너스를 잡고 있었다. 그가 토하고 있는 것인지 오열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나였다. 어딘가에 버려두고 온 내 자신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생의 어느 지점에서 슬프게 통곡하고 있는 M이었다.
윤지강
․1959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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