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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젊은시인조명 작품해설/전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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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로서의 시
전미정
(문학평론가)
수학적 상상력
수학적인 해석력을 시적 상상력의 모체로 삼은 대표적인 시인을 들라 하면, 김삿갓이나 이상, 그리고 서구에서는 에드가 알란 포우를 들 수 있다. 수학과 문학이 인간을 탐구하고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오랜 세월 상보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듯하다. 수학자들 중에 문학인에게서 볼 수 있는 기인들이나 기인의 행적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 좋은 예증이다. 수학의 세계도 문학처럼 상상력과 창의력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수학적인 상상력이 시에 원용될 때 유희적인 속성을 강하게 노출시키게 된다. 에드가 알란 포우가 쓴 많은 단편 소설의 사건이나 주인공의 운명은 언제나 아이러니의 결말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다. 작가는 수수께끼를 내고 독자는 그것을 풀어나가는 문답 형식을 통해 독서 행위는 즐거운 놀이가 되는 셈이다. 30년대 이상 시의 특징으로 용인된 난해성도 그 포장을 벗겨보면 수학적 유희성에 근거하고 있다.
유희성에 빚지고 있는 수학적 방식의 하나가 패러독스이다. 수학적 패러독스의 묘미는 표면에 드러난 유희성을 자연스럽게 삶의 모순을 환기시키는 차원으로 유도하는 진지한 철학성에 있다. 패러독스는 문학 장르 속으로 편입될 때에도 말장난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유도하는 시적 수사법이 된다. 신비평가들이 시의 언어적 특질을 굳이 패러독스에서 찾고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복잡하고 모순투성이인 삶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제격인 수사법이 패러독스일 것이다.
이렇게 패러독스는 진지한 놀이적 상황으로 독자를 이끌고 들어가는 경향이 강하다. 패러독스는 어떤 현상이 직관이나 상식을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오는 상황에 근거하기 때문에 다분히 수수께끼적이다. 질문과 답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미론적 긴장이 수수께끼를 수수께끼답게 만드는 것처럼, 패러독스의 생명도 긴장에 있다. 패러독스는 상충되는 두 가지 상황의 연쇄적인 의미 충돌을 통해 의미론적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수수께끼나 패러독스 모두 비논리적이고 불가사의하고 딜레마적이고 불가해한 데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은유의 뿌리를 수수께끼에 두고 있음을 주지한다면, 수수께끼와 맞물려 있는 패러독스가 시에서 얼마나 중요한 수사법인지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수수께끼의 현실
배용태 시인에게 시는 놀이이다. 그는 시를 통해 자신과의 놀이, 삶과의 놀이, 시와의 놀이, 독자와의 놀이에 몰입하고 있다. 시적 전략으로서 선택된 놀이이다. 세계에 대한 서정적 대응의 한 방식이다.
배용태 시인에게 삶은 불합리하고 모순되고 난해한 상황으로 가득 차있을 뿐이다. 세계는 좀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이다.
멍멍 하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들 사이에서 개라고 불린다
야옹하는 개가 있다
개들 사이에서 고양이라고 불린다
개라고 불리는 고양이와
고양이라고 불리는 개가 만난다
고양이는 반가워서 멍멍 한다
개는 반가워서 야옹 한다
「개라고 불리는 고양이와 고양이라고 불리는 개」에서 고양이와 개의 문제점은 자신의 정체성이 뒤바뀌어 있음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고양이의 속성을 지닌 개와 개의 속성을 지닌 고양이는 만나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정체성이 뒤바뀌었는데도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현실은 그 자체가 수수께끼가 아닌가.
「지쳤다가 지쳤다」에서는 주체와 행위가, 주어와 술어가 완전히 뒤바뀌고 있다. “누구가 지쳤다/지쳤다가 누가다 /지쳤다가 누구다/지쳤다가 기다리고 있다/지쳤다를 기다리고 있다/지쳤다가 지쳤다” 의미도 없고 끝도 없는 반복은 무질서를 낳는다. 기다리는 자는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고 있다. 누구를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계속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친다. 지치는 행위도 반복되다 보면 무질서해지고 지치는 행위의 주체가 누가되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마지막에는 서술어 ‘지쳤다’가 지치게 되는 행위의 주체를 동시에 겸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혼돈과 모순투성이의 세계에서 어떻게 두통이 느껴지지 않겠는가. 이러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한 인간의 고통을 형상화하는데 두통보다 저 적절한 통증의 메타포가 어디 있겠는가.
매일 두통약을 드셨잖아요
그랬었죠 그런데
갑자기 머리가 아프지 않은 거예요
축하할 일이네요
제겐 나쁜 소식이지만
어제 아침엔 정말 상쾌했습니다
그런 기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오가 되니 불안해지는 거예요
저녁엔 수면제까지 먹었습니다만
한숨도 못 잤습니다
어떡하죠
머리 아픈 약은 없는데
어떻게 하면 머리가 아플까요
「두통․2」는 수수께끼 같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의 전형적인 딜레마를 적절히 꼬집어내고 있다. 통증이 너무 고통스러워 진통제를 먹어야 하고, 통증이 치료되는 즉시 무통증은 금단 현상을 일으키고, 금단 현상인 불안증 때문에 수면제를 먹어야 하고, 그래도 안 되니까 다시 통증을 일으키는 약을 찾아야 하는 현실은 그 자체로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러한 세계를 대상으로 시를 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못마땅해」는 그렇게 두통으로 상징화된 세계와 씨름하는 시쓰기의 고통을 진솔하게 그리고 있다. “그게 못마땅해/뒤늦게 저녁을 먹는다/약을 먹는다/더욱 속이 쓰려 온다/먹은 걸 모두 토해 낸다/괜히 저녁을 먹었다/괜히 약을 먹었다/그렇게 몇 줄을 쓴다/시가 되어 있다/그게 못마땅해/그래서 내일/아침이면/한 줄을 쓴다/그게 못마땅해”
「두통․2」나 「그게 못마땅해」는 무한의 역행인 패러독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두통이 있으면 진통제를 먹어야 하고 진통제를 먹어서 통증이 없어지면 다시 통증을 일으키는 약을 먹어야 하는 순환적인 역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다. 써놓은 시는 못마땅하고, 못마땅하니까 다시 한 줄을 쓰고, 그리고 못마땅해 하고, 또다시 써야 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독서 행위도 예외가 아니다. 「W 혹은 유년기의 기억」의 시적 화자는 소설 ꡔW 혹은 유년기의 기억ꡕ을 매개로 하여 패러독스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사물들≫을 읽고 실망한 나머지 ≪W 혹은 유년기의 추억≫에 대한 좋은 기억도 지워버릴 수 있다고” 그것을 읽지 않는 쪽을 선택하는 시적 화자는 패러독스를 범하게 된다. 시금치를 좋아해서 너무 많이 먹게 되면 싫증이 날까 두려워 시금치를 좋아하지 않는 쪽을 택하는 패러독스와 일치한다.
이러한 망설임 때문에 시인은 소설 ꡔW 혹은 유년기의 추억ꡕ을 완독하기까지 6년이 걸린다. 물론 물리적인 완독이 끝나고서도 화자는 계속해서 소설의 시작과 끝이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조르쥬 빼렉이라면……제2부의 는 소년 가스빠르 빙클레어의 시점에서 썼을 것이다.”라고 고백하면서 심리적인 완독 선언을 망설이고 있다.
시인은 ꡔW 혹은 유년기의 기억ꡕ을 “≪W 혹은 유년기의 추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W를 여행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오랫동안 망설였다’”로 끝내면서 소설가의 망설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소설가의 망설임에 전염된 듯 시인 또한 그 소설의 독서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망설임을 반복하고 있다. 무한한 망설임의 역행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는 시이다.
문학의 소통이론으로 보자면, 소설이 창작과 독자를 아우르는 하나의 전체라면 소설가와 독자는 그 소설의 세계를 이루는 부분들에 속한다. 그렇다면 소설의 부분으로서의 독자가 망설이는 행위는 망설임의 토대 위에서 세워진 소설의 전체와 닮았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패러독스이다. 전체와 부분이 동질화되어 있는 것도 패러독스(프랙탈 이론)이다. 이런 상상력을 통하여 무한의 세계에 대한 유별난 시인의 집착을 엿볼 수 있다. 패러독스의 세계에 두통을 앓으면서도 어느새 그 세계에 집착하며 그 세계와 닮은꼴로 행동하고 있는 시인도 패러독스의 대상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로써의 세계 인식에 있어서 무마침표는 의미론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이번에 발표된 10편의 시 모두 마침표가 없다. 마침표는 행위의 완결을 의미한다. 그러니 마침표의 일관된 생략은 시작과 끝도 없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형태의 삶 속에 갇혀 있는 현대인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노출하는 시적 전략이다.
무마침표는 계속적인 행위의 반복만 있을 뿐인 삶의 패러독스에 대한 상징적 기법이다. 무마침표는 독서의 가속도 효과를 높인다. 멈추게 하는 기능인 마침표가 없어서 읽기에 가속도가 붙는다. 이러한 시를 읽는 독자는 시를 다 읽고 나서 뭔가가 빠져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양파껍질 벗기듯 열심히 따라 읽은 그 속도에 비례하여 공허함도 극대화될 것이다. 모든 부분들이 균등화, 균질화되어 있는 현실은 무의미하며 허무하다. 무마침표의 시 형식은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무한하게 반복되는 부조리한 삶의 형태 속에 갇힌 현대인의 삶에 대한 상징적 부호이다.
또한 무마침표는 단지 문법의 파괴가 아니다. 문법은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 대표적인 요소이다. 그렇다면 무마침표는 세계 질서에 대한 일종의 도전을 의미한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질서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무질서가 난무하는 세계에 대한 시인의 시적 대응이다.
「연극사에 길이 남을 연극」에서는 배우라는 연극의 주체와 관객이라는 연극의 객체를 아예 파기시키기까지 하면서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는 여러분을 위해 한번 더 설명하자면 여러분은 관객이란 역을 맡고 있는 배우이고 저는 배우라는 역을 맡고 있는 관객입니다” 연극사에 길이 남을 연극이 연극이라는 기본 형태를 완전히 붕괴시켜 버리고 관객을 배우로 설정하는 자체가 전복적 의식이다. 기존 질서를 전복시킴으로써 시인은 자기 맘대로 세계를 비틀고 비꼬고 뒤집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시 의식은, 판소리처럼, 유희적 충동과 자연스럽게 만날 수밖에 없다.
희화화의 수사법, 패러독스
이러한 무한의 역행을 하는 세계를 견디는 방법으로 시인이 선택한 시적 전략이 희화성의 패러독스이다. 무질서의 세계를 더 강도 높게 무질서화시키고 수수께끼화시키는 심리의 저변에는 질서에 대한 역설적 희구가 깔려있는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시를 읽는 독자들은 본의 아니게 수수께끼의 현장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시인이 차려놓은 놀이마당에서 그 난해한 질문을 풀어야 하는 수수께끼놀이에 섞이게 된다.
복잡한 현실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사람이 범할 수 있는 두 가지 차악책이 있다면, 염세주의자가 되거나 니힐리스트가 되는 길이다. 니힐리스트의 상습적 태도 중 눈에 띄는 것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도리어 즐기는 일이다. 배용태의 시는 현실을 벗어날 통로나 출구를 제시하는 대신 그런 상황들을 즐기고 있다. 니힐리스트가 되기로 자처한 것이다. 세계와의 불화를 해소하기 위한 서정적 대응의 양식이 희화성이 강한 패러독스이다. 그의 패러독스는 하나같이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대상을 웃음거리로 전락시키는 기술면에서 뛰어나다.
그가 제시하는 현실은 아름다운 눈을 가지기 위해 역설적이게도 장님이 되어야 한다. 시 「아름다운 눈을 가진 장님」은 제목부터 패러독스이다. 얼마나 터무니없는가. 아름다운 눈을 가지기 위해 아름다운 눈을 가진 장님이 되어야 하고, 장님이 된 이상 자신의 아름다운 눈을 볼 수 없는 ‘그녀'는 부조리한 세계를 유희하고 있는 시인과 다름 아니다.
패러독스의 재미에 시를 읽는 재미를 한층 보태고 있으면서 시선을 끄는 시가 「재미없는 대통령」이다. 수학자 에드윈 베켐바하(Edwin Bechembach)가 모든 숫자는 흥미롭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어낸 ‘재미있는’ 패러독스를 시화한 것이다.
재미없는 사람은
재미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재미거리였다
재미없는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은
재미있는 TV와 신문을 통해 매일 보도되었다
재미있는 대통령보다 더 유명했다
재미없는 사람에게
재미있는 나라는 재미없었다
재미있는 나라를
재미없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재미없는 대통령이 되기로 했다
재미있는 사람들은
재미없는 나라에 대한 호기심으로
재미없는 사람을 재미없는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재미없는 사람이
재미있는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지만
재미있는 나라는 재미없는 나라가 되기는커녕
더욱 재미있는 나라가 되었다
이 시에서는 재미있는 사람과 재미없는 사람은 질이 아니라 양과 시간의 계산법이 개입함으로써 등가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그 특성이 도리어 그 사람을 재미있게 만든다는 패러독스를 사용하여 시사적인 의미를 던지고 있다. 즉 재미없는 사람을 재미있는 사람들의 리스트에 올리면, 재미없었던 사람은 다시 재미없는 사람이 되고, 재미없는 사람이 되면 또다시 재미있는 사람이 되는 무한의 역행이 성립하는 것이다. 결국 재미있는 사람이나 재미없는 사람은 동질적이다.
희화성의 패러독스를 사용하여 현실의 모순을 희화화시키면서 그것을 반어적으로 즐기는 니힐리스트의 눈에 현실을 벗어나고자 안간힘 쓰는 사람들은 조롱거리에 불과할 뿐이다. 「새가 되는 방법」에서 그러한 냉소가 적잖이 느껴진다.
유치하게
아직도 새가 되고 싶다면
새가 되는 방법을 알려줄 테니
그대로 실행해 볼 것
우선 입을 삐죽 내밀어 부리를 만들 것
새를 잡아서 깃털을 뽑아 강력접착제로 팔에 붙일 것
(중략)
그래도 새가 되고 싶다면
여러분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닭이나 타조처럼 살아갈 것
이 방법마저 싫다면 또는 실패한다면
각자 알아서 새가 될 것
자신의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새가 되려는 환영을 빌려 잘 묘파하고 있다. 그런데 시인은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유치하게도’와 ‘아직도’라는 시어를 통해 한심한 인간들로 격하시키고 비아냥거리고 있다. 그래서 새가 되는 방법도 우스꽝스럽게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시의 문맥을 통해 읽자면, 시인의 저의는 다른 데 있다. 새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행동이 희화화되면 될수록 붕괴될 기미도 없이 도도히 서 있는 세계의 부정적 상이 더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적 패러독스와 시적 패러독스
수학적인 패러독스가 지닌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는 시작법에 대해 필자는 조금 회의적이다. 수학적인 논리로 채울 수 없는 시적인 논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수학적 패러독스를 그대로 차용한 외국의 시를 예로 들어 보자.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는 수학자 드 모르간이 무한의 역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큰 벼룩의 등에는 작은 벼룩이 붙어/큰 벼룩의 피를 빤다./그리고 그 작은 벼룩의 등에는 더 작은 벼룩이/그 위에는 또 더 작은 벼룩이……끝없이 붙어 있다./큰 벼룩은 또 더 큰 벼룩의 등에 붙어 피를 빨고,/더 큰 벼룩은 또 더 큰 벼룩의 등에 붙어 있고,/그것은 또……끝없이/더 큰 벼룩의 등에 붙어 피를 빤다”
이 시를 읽으면 어떠한 정서적 감흥도 일어나지 않는다. 수학자가 제시한 패러독스의 내용을 시라는 형식만 빌려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삶 자체가 딜레마적 상황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상징적 수단으로 수학적 패러독스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시적 패러독스는 적어도 수학적 패러독스의 외형과 근본적으로 다른 내적 논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시적 논리는 수학적 논리와 처음부터 그 출발점이 다르다. 시는 동일한 논리의 차용이나 동어반복이 아니라 정서의 환기가 그 고유한 자질이기 때문이다. 시는 외향적인 메시지 전달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그래서 정서의 울림판이 되는 내적 논리가 중요하다. 시는 감지한 사실의 형상화이지 그것을 논리화하는 자리가 아니다.
여기서 수학의 수많은 이론이 직관력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김용운 수학자는 인간의 감각적 요소가 무시되는 수학은 인간 소외 현상을 낳게 된다고 주장한다. 갓난아이도 엄마를 곧 식별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논리의 힘을 웃도는 능력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논리의 힘을 넘어서게 하는 요소가 바로 이미지가 아닐까. 이미지는 원체 모호성을 생명으로 한다. 모호함이 실은 정확함보다 더 어려운 경지이다. 이 모호함은 바로 온몸으로 대상을 느끼고 해석하는 직관력에 근거한다. 그것이 바로 서정의 힘이다.
필자의 미적 감식안을 일찍이 눈뜨게 한 수사법이 패러독스다. 패러독스만큼 의미 환기의 폭이 넓은 수사법도 없다. 패러독스의 의미 파장은 엄청나게 넓다. 수학적 성향이 강한 패러독스는 삶이 모순투성이라는 사실과 우리가 모두 미궁에 빠진 존재들임을 깨닫게 하는 거기서 그 임무를 완성할 수 있다. 그런데 시적 패러독스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수학적 패러독스와 달리 시적 패러독스는 정서적 환기의 기능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의 「님의 침묵」이 바로 시적 패러독스의 전형적인 예이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는 수학적 패러독스로는 이를 수 없는 섬세한 정서를 발산해 내고 있다. 시적 패러독스의 미적 특질을 충분히 즐길 수 있지 않은가. 수학적 패러독스의 논리성이 감히 넘다볼 수 없는 시적 패러독스가 환기하는 정서적인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시인이 애당초 모르고 시를 쓴다면 말이 안 된다. 배용태의 시는 시적 대상과 시적 정서 사이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대상을 논리적 탐구의 대상으로 끝간데까지 밀고 나가는 것이다. 초장르적, 변칙적 시작법으로서 시적 전략이 된다. 서정의 세계를 무화시킴으로써 반서정성의 서정이라는 새로운 형태에 도전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시의 논리적 접근이 지닌 약점은 정서의 밀도가 없다는 데 있다. 배용태 시인은 어쩌면 그것을 감수하고서라도 논리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가 형상화하고자 했던 유희의 시세계는 논리성이 강해야 설득력을 지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그가 독자들에게 역설하려고 했던 세계는 수학적 성향이 강한 패러독스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는다.
죠지오웰은 장미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이 아무리 정밀하게 이루어질지라도, 장미꽃을 보는 순간에 우리가 느끼는 감정보다 위대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 시단은 후자의 정서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전자 쪽으로 의도적인 방향을 트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시의 패러독스도 수학적 성향이 강하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논리적 언어가 더 어울리는가 보다.
전미정
․1994년 ꡔ현대시학ꡕ으로 등단
․시집 ꡔ유년의 서가로 가는 길에ꡕ
․저서 ꡔ한국 현대시와 에로티시즘ꡕ
․현재 시립 인천대 국문과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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