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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시로 쓰는 시론(마지막회)/김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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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시로 쓰는 시론
19
갈라진 틈을 보면
흥분하는 친구가 있다
돌담 틈을 봐도 그러고
콘크리트 길 갈라진 틈새
비집고 올라온 풀싹을 봐도 그러고
은행알
빠꼼히 열린 쪽문 사이로
말간 졸깃한
알몸 드러난 것을 봐도 그러고
파종한 씨
밤사이 殼이 깨져
초록 이슬 하얀 속살이 보이면
처녀의 가장 은밀한 그곳을 본 듯
숨 가빠지며 얼굴 빨개지는 친구가 있다
데카르트가 지하에서 말한다
“그대 존재했노라. 흥분했으므로”
20
“풀 나무에게
진수성찬 되어주는 똥
흙 공장 일꾼들에게
포도주가 되어주는 오줌
고약한 벌레들 혼내주는
고약한 땀냄새
비상사태 맞아 비상망 구축하는
담 가래―
눈물 콧물이야 말해 뭣하랴
태초 이래 최고최선의 미용제 아닌가”
풀라토가 지하에서 말한다
“그대 존재했노라. 그대의 거품
버릴 것 하나도 없었으니"
21
“묻지 마 관광, 원조 교제
인터넷 채팅, 스와핑 부부
무섭게 돋아나는 잡초들―
그러나 칼로
잘라내서 될 일 아니다
가위질, 오히려 저들의 陰性
키워주고 있지 않는가
차라리 뮤즈의 農法이 어떨까
더더욱 아름다운 꽃
더더욱 아름다운 사랑
무성하게 무성하게 키워
잡초들 기를 못 쓰게 하는"
神農씨*가 이렇게 말하자
오르페우스*가
떠듬거리는 말투로 대꾸한다
“神兄 말이 옳아요
꽃은 꽃으로 다스려야 하겠지이요
나무들, 나무로 다스려야 하아듯”
그러나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기만 한
오르페우스의 논리 표현
*神農氏:백성에게 농사 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하는 중국의 祖神
*오르페우스:산천초목도 감동시켰다는 시인 음악가(그리스 신화)
22
탈을 벗기니까
그 상판대기 그냥 나온다
잠깐 낯설고 다시 지루한
‘낯설기 技法’의 얼굴들
수백 년 지나도
여전히 아름답게 낯선 옛날의
그 얼굴들과는 너무나 다르구나
하루에 세 번 옷을 갈아입어도
멋이 나지 않는 마몬의 옷들처럼
23
나무가 담을 허문다
높아지는 키로 높은 담을 허문다
담을 허물지 않고 담을 허무는 나무
처음엔 우물만 한 하늘만 보였다
얼마 지나니까 산봉우리가 보이고
다음엔 등 푸른 능선이 보이고
다음엔 은비늘 숲이 보였다
다음엔 나무 풀 벌레―
다음엔 땅, 끝없는 땅
다음엔 하늘, 끝없는 하늘
담을 허물지 않고 담 너머를 보는 시
이런 시를 인터넷 詩學에선 뭐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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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1934년 충북 괴산 출생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ꡔ바다ꡕ ꡔ꽃ꡕ ꡔ피뢰침 숲속에서ꡕ ꡔ시산일기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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