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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신작시/정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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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채원
쇄빙선을 기다리며
빙산에 부딪혀 찢어질지도 모르는
등지느러밀랑 아예 퇴화시켜 버리고
흰돌고래가 되어 북극바다를 떠다니면 어떨까
그러다 퍼렇게 날 세운 빙산조각들 사이
꼼짝없이 얼음감옥에 갇히면
하얀 얼음귀신이 되어 버리면 어떨까
가장자리만 겨우 녹았던 빙산조각들 다시 꽝꽝
얼어붙는 밤이면 숨죽이고 엎드려
아예 얼음바다가 되어 버리면 어떨까
그러면 그대
내 얼음심장 둥둥 북처럼 울리며
쇄빙선 몰고 내게 오지 않을까
얼어붙은 가슴 부수며, 물보라 일으키며
푸른 물길을 터주지 않을까
그때 나는 시린 꿈 막 깬 일각고래가 되어
얼음꽃 잔뜩 피어난 몸 부르르 떨며
그 외길 따라 은빛 화살처럼 헤엄쳐 나가겠지
하나뿐인 뿔을 잘라
뿔 속에 가득 찬 슬픔 다 퍼낸 뒤
뜨거운 내 눈물을 독주처럼 가득 채워
그대의 두 발에 부으면 어떨까
긴 항해로 나처럼 얼음이 다된
그대의 발 녹일 수 있을까
나도 그대 안에 부동항 하나 만들 수 있을까
분홍빛 아기돼지 한 마리
어디에서 여기까지 왔을까
떠내려온 아기돼지 한 마리
불어난 물살에 지상의 치부처럼 드러난
강가 버드나무 뿌리에
분홍빛 작은 몸뚱이 걸려 있다
영문도 모른 채
급한 물살의 소용돌이 속
붉은 흙탕물만 벌컥벌컥 마시다
식어 버린 입술
아직도 어미 젖꼭지를 찾는 듯
갓 핀 꽃부리처럼 벌어져 있다
이승의 탁류에 발을 담근 채
분홍빛 연꽃 한 송이 피어 있다
우산을 쓰고도 하염없이 젖어드는
내 저문 강변에서 쉽게 떠내려가지 않을
저 어린 蓮花紋 하나
성도 속도 모른 채
영문도 모른 채
피었다 지는
피어보지도 못하고 지는
내 원죄는 너무 오래 피어 있었다
고통의 향기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정채원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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