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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신작시/엄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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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재국
외투
인체의 신비전에서
자신의 몸 껍질을 손에 들고
어디를 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저 사람이 걸어 도착한
여기 서울 혜화동,
지금 저 사람은 걸어 어디로 갈까
오월을 넘어 여름을 지나
겨울의 문턱에서
탈피된 거죽을 외투처럼 걸칠 것인가?
정신은 버리고 껍질만 챙긴 채
내용보다 포장이 소중한 시대에
당도한 그의 몸이
내게 물어오는 질문이 사뭇 진지하다
죽어,
일체의 의식을 배제한 그가
나보다 더 당당하게 전시실을 걸어가고
지금 나는
오그라든 의식을 놓을 데가 없어
두 손을 꼭 쥐고 있다
그의 다리 사이
잠시 정지된 시간 속을 스치는
살갗 말간 아이들,
내가 입고 있는 옷
그 옷 속의 한 꺼풀 옷을 들추며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고 있다
상표, 상표
검은 양말의 상표 같은 달이 뜬다
루이뷔똥, 구찌, 입생, 프라다
진짜보다 가짜가 밝은
세상에 붙이는 밤의 상표
오랜 세월 달빛으로 살았다
어둠이 달을 상표 붙이지 않았다면
나는 밤을 몰랐겠다
아니,
밤을 알고도 어둠을 샀는지 모르겠다
달빛이 던져주는 야릇한 어둠의 세상
그 완제품의 밤
그동안 소비한 달빛이 참 많습니다
벌레의 몸으로
장수하늘소의 이름으로 살았던 밤이 깊고
달빛의 양말을 신고 마을을 누볐습니다
달이, 구멍난 양말의 발가락처럼 떠오릅니다
엄재국
․1960 경북 문경 출생
․200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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