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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신작시/장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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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69회 작성일 05-03-0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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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진

버스는 일상의 끝을 고속으로 물고 달린다



눈 내리는 저녁,
세상의 한켠에 놓인 길에 오르면
큰 성에를 지고 있는 교회 꼭대기가 보인다
정수리 부근을 형벌 도구에 가격당한 모습
사람들은 십자가를 왕관으로 믿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가학적인 믿음들이
앞 유리창에 부딪혀 녹아내리는 중이다
바람에도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사자는
지상의 어느 목적지를 향하는 게 아니다
세렝게티 고원의 사자들도 달리면서 깨닫는다
짐승의 목덜미에서 솟구치는 피는
며칠동안 사자가 굶주림을 참아온 울분이다
세상의 먼지는 사자의 발톱 끝에서 일어나
버스의 배기통 밖으로 분출된다
들판에는 불어오는 바람에게 알몸을 내보이며
나무들은 노숙자 마냥 추위에 떨고
전봇대는 몇 가닥의 핏줄을 나누어
저희들끼리 체온을 유지하고 있다
무표정한 눈발들이
냉담한 어둠을 실어 나르는 동안
건너편 꼬마는 호기심에 유리를 닦고
어미는 손떼 묻은 시야를 물려주지 않으려
제 자식에게 꾸중을 늘어놓는다
차창에 얼룩진 뿌연 성에처럼
나의 입김도 그녀의 목소리 어디쯤에 걸려
송골송골 비지땀을 맺는 모양일까
겨울철에 버스를 타면 성에가 낀다







나는 좋은 시를 외지 못할 것이네



시가 써지지 않을 땐 두꺼운 손목을 보네
예리한 칼에 닿아도 피 한 방울 울어보지 못할 군살들
살면서 내가 나를 죽인 살의 무덤
그 안에 갇혀 있는 것들이 흐느끼고 있네

애착하는 만큼 버릴 게 많은 삶은
못사는 집 이사 가는 날처럼 자욱한 먼지가 나네
시작도 내 것이 아니었지만
아직도 붙잡으면 미끌리는 폐유(廢油) 속 인생
아버지의 작업복이 걸린 그 자리에 서서
얼마나 생을 부정하였던가

동네 꼬마도
학생이 셋인 우리보다 책이 많았지만
동물원내 시립도서관이
아이 걸음으로 삼십 분 거리여서
하루 종일 있는 날도 있었지만
정년이 다된 사서의 성희롱이
다시 아버지의 폭력 속으로 나를 데리고 갔네

펜을 잡은 손목이 낯익은 열등감으로
녹슨 수갑을 차고 있을 때
더는 누구의 짐도 물려받지 않기 위해
슬픈 여과지 같은 시(詩)를 사랑하게 되었고
짐짓 시인 흉내도 내어보네

좋은 시는 자꾸 보고 싶어져서
저절로 암송돼야 하는 것인데
좋은 시일수록
아물리는 상처를 건드리는 바람에
하여 나는 좋은 시를 외지 못할 것이네

시는 첫사랑의 추억으로 다가와
뒤틀린 나를 일으켜 세우며
지나간 일들을 이제 그만 놓아주라고
두꺼운 손목을 나무라듯 바라보고 있으니

나도 세상도 뒷골목의 한패거리인 것을

지금은 웃고 있을 내 아닌 것들과
그것들이 누렸을 세상의 편이에 대해
조롱과 찬사의 징표를 세우려 하네

장승진
․전남 장흥 출생
․2002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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