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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신작시/홍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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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주
내 눈 속으로 들어온 나비
내 눈 속에 나비 한 마리 살고 있다
부신 햇살을 타고 어느 먼 풀밭이 문득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풀꽃만한 나비 한 마리가 그 속을 종일 날고 있다
(망막에 이상이 생겨 맺힌 像입니다
의사가 말했다)
약을 먹는 내내 나비는 내 한쪽 눈에서 어룽거렸다
나는 그가 옹색한 그 풀밭에서 아주 날아가 주길 바라며
식물도감을 들여다본다
나비의 겹눈을 통과한 수천의 꽃들이 한꺼번에 터진다
눈알이 뻑뻑하다 눈을 비비니 나비는
어둠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다
어느 날 내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 그는
문득 날아와 다시 어룽대기 시작했다
더듬이를 비비고 은빛 날개를 턴다
행간이 뿌옇다
흰 벽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나와 그것들의 행간에서 어룽거렸다
나는 그를 검열하는어룽나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 우물 안에는 고요가 산다
찰랑거리는 고요 속, 하늘이 깊다 구름꽃이 피었다 진다 떨어져 내린 꽃씨 하나 그 위에 물동그라미를 그린다 파문 속에 얼핏 보이는 것들 열무이파리, 양말 한 짝, 단추, 우물물이 드나드는 숨어 있는 길, 나는 그것들을 퍼 담으려고 허리를 굽혔다 순간 우물 속의 안 보이는 손이 나를 확 끌어 당겼다 아주 깊숙이 밑바닥에 동댕이쳤다 수천 년 고요가 미친 듯 술렁거렸다 바닥에 붙어 있던 물고기자리 별 하나가 나와 함께 솟구쳐 올랐다 그때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 나는 물이끼 덮인 우물 벽을 힘껏 내디뎠다 간신히 우물 밖으로 끌려나온 나는 내 안에 들어간 것들을 한참동안 토해냈다
그 후 내 입안에선 언제나 비릿한 냄새가 났다 우물가 미나리꽝에서 미나리가 시퍼렇게 자랄 동안 나는 그 우물가를 떠나지 못했다
어젯밤 나는 그 우물 속에서 달이 물뱀을 낳는 몹쓸 꿈을 꾸었다
홍승주
․2002년 ≪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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