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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시인의 산문/손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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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19회 작성일 05-03-0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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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그늘

손 현 숙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 뒤에 숨어 있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 그는 오랫동안 그녀의 가능성이고 싶었다. 그녀 역시 유일한 그의 그늘이고 싶었다. 그러나…….
시인 1
물 위를 걸어오는 베드로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노라 오체투지하던 여든 노구의 모세가 저러했을까. 오래된 도시 중세의 가을쯤에서 그가 무심한 듯 걸어 나온다. 회색빛 대지 위에 공기의 살을 펼치며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움켜쥔 것이 없다. 바람의 결을 따라 세상 쪽으로 그가 조용히 몸을 내린다.
가늘고 여린 그의 얼굴선은 너무 고와서 깊고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깊다. 끝을 알 수 없는 비밀의 심연을 바라보듯 한동안 그를 향한 침묵은 차라리 물음의 답보다 더 명징하다.
시지프의 비극은 그가 힘겹게 밀어올린 돌덩이가 다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인데. 그러나 시지프는 언덕을 내려올 때 언제나 맨손으로 세상을 여유 있게 바라보기도 한다는데. 누구를 사랑하고 배려하고 궁금해 하고 말이나 행동에 있어 누군가의 지배를 받으며 의식의 언저리를 맴돌 때 영혼은 굉장한 에너지를 요구하기도 하고. 다트게임의 표적처럼, 한치 앞의 낭떠러지, 지뢰밭의 고요함, 외줄 타기의 고독처럼 조심조심 뒤통수를 스스로 지켜야 살 수 있는 세상. 그는 자신이 힘겹게 밀어올린 돌덩이를 정상에서 스스럼없이 내려뜨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적임에서 스스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선다. 모두 잃어 차라리 담담해지는 정신의 세월 일백십구 세를 넘긴다.
열두 번 찼다가 기우는 달이 지구를 마흔네 번 돌았다. 정령들은 비밀처럼 그의 주위를 돈다. 마음속 생각들을 그는 스스로의 날개 위에 받아 적는다. 달이 모양을 바꿀 때마다 그도 모습을 바꾼다. 그러고 보면 그는 한 번도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기억이 없다. 그는 지금 혼자 지어낸 세상에서 뜨고 지는 별을 밟고 서 있을 뿐. 당신 혹시 들리는가? 그가 나누는 저 세상과의 대화. 어둡고 찬란한 그림자 없는 몸체. 여성과 남성을 한몸에 지닌 오로지 비밀의 모습으로 살다가는 바람. 내 눈에는 보인다. 느리지만 게으르지 않고, 의식적으로 고집하는 자기만의 환상. 우리들의 영역 밖에서 내려오는 저, 시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빛, 세상의 말로는 풀 수 없는…….




시인 2
지하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교차하는 시간, 창이 넓은 거실에 그녀는 덩어리처럼 앉아 있다. 지나간 무엇들을 뇌 속으로 넘기며 단어와 문자와 기호들로 무늬 지는 앞으로의 무엇들을 꼼꼼히 짚어본다.
거대한 설계에서 돌 하나가 빠진 듯. 여름날 지나가는 여우비의 환영처럼. 정확히 계산된 분노의 곤봉에 망설임 없이 몸을 내주었던 그녀. 비밀의 모습으로 살다 가는 그 남자를 사랑하였으니…….
출구 없는 자신의 입장을 말없이 몸으로 막아서는 그녀. 우리는 그녀를 그의 가능성이라 부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속이 허하고, 향기는 짙고 깊어서 주변에서 더 그윽해지는 표현하기 힘들고, 결말이 분명한 그를 그녀는 오늘도 서성인다.
누구나 빛을 이해하기까지는 어둠을 필요로 하는 법. 막막함은 언제나 그녀의 몫. 그림자 한 점 없는 집안에 앉아 빨간 빛깔의 꽃차 한잔을 넘긴다. 어둠이 폭발하고 새벽이 올 때까지 동그랗게 몸을 말아 그녀는 그를 기다린다. 사람이 가장 무서운 이승에서 그녀를 살게 했던 힘. 그녀는 그것을 운명이라 불렀다. 그녀의 시간과 운명을 모두 지배했던 그를 그녀는 시인이라 높은 자리에 앉힌다. 시인은 언제나 그녀 앞에서 무한량의 힘을 휘두른다.
그녀 등뒤로 지는 해는 여전히 아름답다. 강을 건너본 자만이 강의 깊이를 아는 걸까. 성숙은 어차피 아픔과 죽음을 동반한다지 않은가. 지나가던 바람이 그녀의 어깨를 덥석 안는다. 어쩐지 슬픈 눈 밑. 바람에게 몸을 맡긴 그녀, 코싸인 커브로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하염없다. 시큼한 무엇이 그녀 몸을 치고 달아난다. 바람이 제 길을 찾듯 그녀 혼자만의 그늘 속으로 그를 가두지만…….



시인 3
만약 50년 뒤 지구의 종말이 온다면 당신은 지금부터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 당신이 그리도 중요히 여기던, 그래서 전쟁 치르듯 싸워서 해적처럼 쌓아두었던 돈과 사랑과 명예들은 또 어떤 모양으로 당신을 미혹시킬까. 저 웅혼한 하늘의 별들은 사람의 말로 무어라 풀이하면 좋을까. 신의 미세한 세포일지도 모르는 당신은 하늘의 관심 밖에서 또 무슨 미래를 바라보는가. 신탁처럼 내리는 시인의 질문. 답을 구하지 못한 내 침묵은 차라리 삶의 신비한 대화처럼 소슬하다.
착한 눈으로 초월의 세계를 응시하는 시인. 시인은 천천히 평생의 신비로움을 털어놓는다. 밤새 맨발로 하늘을 건너온 풀잎과의 대화. 가능한가? 마음을 열고 귀를 열고 눈을 크게 뜨면 밤 고양이와도 대화를 할 수 있다지, 아마? 시인은 분명 다른 세상을 짐작하고 있나보다.
당신은 아침식사 메뉴로 무엇을 택하시는지? 명사로 밥을 짓고 형용사로 반찬을 드시는가? 사람과 신의 언어, 그 중간 예각으로 환을 그리는 비논리의 지점. 느리게 걷고 느리게 말하고 호방하게 웃으며 정면으로 태양을 응시한다. 그곳에서 시인은 도도하고 거만하고 담담하게 세상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나…….

손현숙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추천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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