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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초점/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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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왜 쓸쓸했을까?
김 성 균
(번역가)
“정녕 누군가 죽지 않고서는 …… 원한(怨恨) 따위는 없어지지 않는 것인가?”
(야설록프로, ꡔ夢魔鬼ꡕ제20권(양산박, 1998), 63쪽)
1. 유일신의 죽음과 진화
그래서 저 유대인들은 그들의 유일신 야훼이자 야훼의 아들이자 야훼의 ‘뫎’이랄 수 있는 자칭 유대인의 왕 히브리 사람(예수)을 죽여 그들의 어떤 원한을 풀었을 것이다. 그 원풀이에 희생된 예수의 죽음은 일개 사막의 군신에 불과했던 야훼를 세계적인 사랑의 신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유일신이자 그 신의 아들이자 그들의 왕인 인자(人子)를 죽인 유대인들은 그 살신(殺神)으로 인해 세계화된 신과 그 신도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배척당한 채, 그들이 죽인 아버지 야훼에 대한 더 처절한 죄의식에 다시금 휩싸여 오로지 야훼만을 받들어 모시며 2000여 년 동안 저주의 유랑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안으로 삭이지 못한 채 축적만 해온 원한은 그렇게 저주의 유랑이라는 대가로서만 풀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들은 도대체 무슨 원한으로 그들을 창조한 유일신, 그들의 유일한 아버지, 그 아버지의 독생자를 그토록 몇 번이고 배반하고 또 죽여야만 했을까?(유대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이 이른바 「토라」 혹은 「성경」이라고 경외하는 경전들은 이러한 배반과 천벌의 역사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마지막 역사서이자 보고서인 ꡔ신약성경ꡕ 역시 몇 번이고 ‘신을 배반하고 죽이고’, 결국에는 ‘신이 자살을 감행하게까지’ 만드는 유대인들의 원한을, 곧 켜켜이 쌓여-쌓아온 죄의식과 원한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그들은 그 역사적인 원풀이 제의, 예수의 준-자살, 신의 죽음을 통해서 진정 그들의 원한을 풀 수 있었을까? 그들이 풀고자 한 원한은 그들에게 오히려 더 지독한 원한을 심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들의 원한의 정체는 다름 아닌 외부를 향해 폭발한 그들의 죄의식이었다. 이른바 ‘원죄(原罪)’라고 부르는 그들의 죄의식은 신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배반, 불신, 반항의 대가였다. 하지만 그들의 유일신은 태초부터 자신의 최후의 피조물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알았고, 차라리 배반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그들을 창조했다. 그 신은 인간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순간, 인간이 입은 그 호꼰하고 관능적인 털 없는 수피(獸皮)에 배반의 영혼을 각인했을 것이다. 이른바 ‘자유 의지’라는 이름의 영혼을, 본능을.
인간의 원초적인 죄의식, 즉 원죄와 자유 의지는 그렇게 함께 태어났다. 이렇게 본다면 기독교 경전은 그런 ‘인간의 죄의식=신의 죄’의 역사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훼신은 자유 의지와 인간을 낳고 인간의 수피와 자유 의지는 죄를 낳고 죄는 벌을 부르고 벌은 죄의식을 낳고 죄의식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원한을 낳았다! 원한은 죄를 낳고 죄는 벌을 부르고 벌은 죄의식을 낳고 죄의식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원한을 낳았다!
이처럼 단순한 심리현상학적인 원리를 기초로 하여 유대교와 기독교(그리고 이슬람교)가 성립된다. 이 원리를 굳건히 유지하는 돌쩌귀가 바로 외로운 사막의 군신이요 유일신인 야훼였다. 노예, 곧 동물의 상태를 갓 벗어나 불모의 사막을 유랑하던 민족이, 그 불행한 판켄드리야들(박상륭이 생명의 진화 단계를 설명하기 위해 자이나교에서 빌려온 표현으로 감각기관이 하나 있는 것을 ‘에켄드리야’, 둘 있는 것을 ‘드빈드리야’, 셋 있는 것을 ‘트린드이야’, 넷 있는 것을 ‘카투린드리야’, 다섯 있는 것을 ‘판켄드리야’라고 한다. 인간의 단계, 박상륭은 특히 ‘판켄드리야’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존재, 즉 인간이 되는 단계로 이해한다.) 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막=고해의 조건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하여 구비하게 된 최초의 자아․인간․세계․신에 대한 인식․의식․무의식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하기란 쉽다.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처절한 생존투쟁의 고난을 스스로 용납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들이 겪는 저주스런 갈증과 기아의 고통을 차라리 은총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들만을 사랑하는 신을, 비록 그들의 원죄에 대한 벌로 사막밖에 허락하지 않은 신이지만 생존의 신고(辛苦)를 치르고 나면 그들만의 약속을 땅을 선사할 신을, 그 약속의 땅을 정복할 힘과 용기를 줄 위대한 군신을, 그리하여 세상-사막의 모래알처럼 어디에나 존재하면서도 오직 하나뿐인 그들만의 신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사막의 판켄드리야들에게 생존은 바로 이러한 죄의식과 유일신의 존재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사막이라는 불모의 조건(고해)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심히 창대할’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에 신이 일용할 죄의식을 키워야 했고, 그 죄의식을 구원의 은총으로 바꿀 신이 필요했다. 사막이라는 불모의 조건에서 탄생한 신들(?)은 이처럼 필사의 ‘죄의식-도덕과 전쟁’을 관장하는 유일신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약속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명분도 바로 이러한 절대적인 신의 도덕을 위한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마저 도덕과 전쟁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예수 자신은 이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희생과 사랑의 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성립시킨 ‘사도바울 이후의 예수’는 기독교도들만을 사랑하는 기독교 도덕을 위한 전쟁의 신이 되어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러한 ‘바울의 예수, 혹은 바울의 기독교’에 대한 통찰은 니체의 ꡔ반그리스도(Anti-Christ)ꡕ(청하, 1987)와 콜린 윌슨의 ꡔ종교와 반항인(Religion and the Rebel)ꡕ(하서, 1994)에서 만나볼 수 있다.) 그 결과가 바로 바울의 기독교에 의한 그리스와 로마의 정복이었다. 사막의 죄의식을 먹고사는 신이 그만의 도덕적인 전쟁을 통해서 그리스와 로마를 점령해 버렸던 것이다. 갓 이울기 시작하던 그리스와 로마는 바로 이 바울식 기독교의 죄의식의 전파로 인해 본격적인 황혼기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기독교 도덕과 죄의식, 기독교 도덕과 원한의 심리학적․생리학적인 깊은 연관성을 꿰뚫어본 니체의 통찰은 비단 기독교뿐 아니라 이처럼 사막에서 발흥한 나머지 두 종교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도덕은 자기 공격적인 죄의식과 그런 죄의식이 중첩되어 외부로 발현되는 타자 공격적인 원한의 세속화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죄의식-원한-도덕의 메커니즘이 해소되기 위해서 “정녕 누군가의 죽음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 죄의식은 아직 진화하지 못한 사막의 신 야훼, 곧 척박한 대지의 신(기독교 및 유대교의 창조신)이 (어쩌면 불가피하게?) 피조물인 인간에게 예정한 운명인 ‘죽음’을 아담(인간)이 발견하면서, 즉 아담이 죽음과 맞닥뜨리면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살라고, 생육하고 번창하라고 창조된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이 절대적인 부조리의 발견, 신의 자손인 줄 알았던 자신의 짐승스러움의 발견, 그 공포와 전율, 불안과 치욕. 그것이 바로 아담의 죄의식의 뿌리기 때문이다. 죽음을 발견한 아담, 죽음 앞에 선 아담의 절망과 좌절. 그런 죽음을 신의 벌이라고 생각한 아담은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 (영문을 알 수 없는) 원죄를 어떻게 용서받아야 할 것인가? 그런 죽음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본질적으로 신을 거역한 죄는 아담이 죽어야 한다는 자신의 운명, 생명의 운명을 발견한 결과물이었으리라. 그래서 원죄란 본래 아담이 신을 거역해서 아니라, 신이 (무능하여, 혹은 고의로, 혹은 사랑으로?) 부여한 죽어야 할 운명을 깨달은 아담이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최초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음은 인간의 죄의 근원적인 표상으로 자리 잡았을 것이다. 죽음의 길을 걷는 자 죄 있을지니! 신의 뜻을 거역하는 자 죄 있을지니! 죄 있는 자 죽을지니! 그에 따라 조금이라도 죽음의 낌새를 보이는 자들은 죄인이라, 죽음으로 신의 뜻에 부응해야 한다. 죽음만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그럼에도 생육하고 번성하라!…….
박상륭도 통찰하듯이 척박한 이 대지에서 생명은 서로를 죽이며 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신의 숨결로 숨쉬고 있는 인간이라 하더라도 흙을 질료로 만들어진 생명인 이상 상극적(相剋的)인 질서를 벗어날 수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다른 피조물을 죽여야 한다. 그 중에서도 인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판켄드리야들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즉 죄의식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을 인식한다면, 그래서 영원한 존재를, 신을 인식한다면, 인간은 살아가는 한 죄의식을 축적할 수밖에 없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그리하면 죄에 짓눌려 죽을지니!
이런 절대적인 모순 속에서도 저 야훼의 자손들은 살면서 죽지 않는 차선책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모순적인 모색은 일종의 의사죽음의 상태, 혹은 스스로를 살리면서 죽이는(부정하는) 죄의식을 내면에 키움으로써, 즉 죽지 않고 살아서 신의 뜻에 순종하고 생육하고, 죄의식을 키우고, …… 그러다가 죄의식이 차고 넘쳐 한계에 이르렀을 때 그것을 외부적인 도덕으로 연장시키고, …… 그마저도 한계에 이르러 원한으로 발전하면, 자신을 죽이지 않는 한 또 다른 죄인을 죽여야 하고, …… 그런 자살이나 살인으로 인한 죄의식에 고통 받지 않으려면, 곧 자살이나 살인하지 않으려면, ‘살아라!’는 절대명령과 ‘누구든 죽어야 한다!’는 절대명령의 절대적 대립=집단자살이나 대학살을 동반한 전쟁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차차선책’이 ‘주기적’으로 희생양을 택하여 제의를 여는 것이었다. 즉 전쟁보다는 ‘가장 죄 없는, 그래서 가장 죄 많은’ 동물(어린양)이나 인간, 심지어 신을 희생시켜서라도 그들을 자멸로 이끌 수도 있는 죄의식, 원한, 도덕을 만족시키기! 그 중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대표적인 희생양이 바로 모세와 그의 후손인 예수, 다시 말해서 야훼의 아들이자 야훼 자신(自神)이었다.
모세와 예수는 켜켜이 축적된 죄의식으로 인해 자멸하기 직전이던 자신들의 민족의 죄의식-원한-도덕을 한몸에 해소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희생양들이다. 그들은 유대민족의 모든 죄를 안고 죽음으로써 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그들의 자손인 프로이트 역시 유대민족은 자신들을 죄의 구렁텅이=노예상태로부터 구원한 구세주 야훼-모세를 그들의 죄의식의 희생양으로 죽인 민족이라고까지 고백하고 있다.프로이트, 「인간 모세와 유일신교」, ꡔ종교의 기원ꡕ(열린책들, 1997) 참조.
이러한 유대민족 특유의 죄의식은 끝내 자신들의 구세주를 배반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유대역사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말하자면, 유대민족과 그 신의 생명력은 바로 그들 특유의 죄의식을 해소하기 위한 희생양으로서 죽여도 죽지 않는 신을 살해하는 살신(殺神)의 희생제와 그것이 초래한 죄의식들이 켜켜이 쌓여 형성된 ‘중첩된 죄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민족이 자행해 온 이런 신의 살해의 역사는 그들의 원죄론적인 죄의식과 원한을 해소하기보다는, 그들이 죽인 그 ‘모든 죄를 안고 죽은 신’을 세계적인 신으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유대민족의 역사는 일종의 ‘유일신의 진화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니체의 살신(殺神)?
그러나 그들은, 그리고 니체 이전의 서구인들은, 어느 누구도 감히 ‘신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들은 혹시 이렇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실로 죽은 것은 모세요 예수였지만, 우리가 죽인 것은 모세와 예수의 육체였을 뿐, 그들의 신성은 오히려 그런 육신의 죽음으로 더욱 만화방창하였도다!”
보다 더 면밀히 기독교를 정사해 보면, 유대교도들 뿐 아니라 기독교도들 역시 그들의 신을 한두 번이 아니라 차라리 무수하다고 할 정도로 죽여왔다. 아니, 그들은 그들의 신을 무수히 죽이면서 무수히 살려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기독교도 여부를 결정짓는 이른바 ‘회개(悔改)’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런 회개가 동어반복적인 전와를 겪으면,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죄인이다”라는 기독교 특유의 “죄의식!”을 스스로 내면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죄인’이 된다는 것이며, 그런 죄인이 된다는 것은 곧 (기독교적인) 도덕과 세계관을 받아들이고 복종․순종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순간, 곧 “정녕 예수가 죽은 순간”에 인간의 원죄를 포함 모든 죄는 ‘용서받은 것’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진정 “저들을 용서하라”고 그랬다면, 그는 인간의 죄를, 죄의식을, 원한을 해소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예수의 희생적인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그래서 ‘죄의식의 부활-회개’가 아니라, ‘죄의식의 소멸-사랑’에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저 해골의 언덕에서, 다소 불완전하고 덜 진화한 대지-사막의 한 유일신의 피조물들의 잔해 위에서, 어쩌면 야훼 자신이 저지른 혹은 안은 죄의 회개를 위한 그 자리에서, 그리하여 그 신 스스로 진화해야 한다는 소명을 안고 자살을 감행한 그 자리에서, 더욱 더 큰 죄의식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유다를, 인간을 만나야 했다. 인간은 죄 없는 인간-죄신(罪神)을 죽여 그의 죄를 다시 인간 자신의 내면 깊숙이, 무의식 깊숙이 각인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태초부터 죄 덩어리인 인간에게 살해된, 희생된, 자살한 저 사막의 유일신은 그런 희생을 통하여 인간의 죄를 사하고, 자신의 죄를 여의고, 그리하여 자신이 빌린 몸을 여의고, 몸의 우주보다 더 창대하고 사랑스런 마음의 우주를 향하여 진일보한 이른바 보디사트바(菩薩)로 거듭났던 것이다.
따라서 저 유일신의 죽음은 신 자신의 진화를 위한 것이었을 뿐, 그 신이 진화의 일보를 내딛는 순간 인간은 더욱 더 깊은 죄의식의 무저갱으로 추락하는 듯이 보인다. 해골의 언덕에서 생명의 뿌리를 내린 저 진화의 십자가는 대지를 핏빛으로 물들여갈 것이었다. 그렇게 만화방창하는 저 죄의 꽃들, 저 핏빛 십자가들은 죽여도 죽여도 되살아나는 신의 죄가 없었다면 피지 못했으리라. 저 십자가의 영광, 저 죄의 영광이 없었다면 신은 그렇게 처절한 희생양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죄를 먹어야 살 수 있는 신의 운명! 그래서 보디사트바란 바로 인간의 죄를 먹고 피는 핏빛의 연민과 동정의 꽃은 아닐까?
그렇게 기독교도들은 순간순간 죄의식에 시달리며, 순간순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왔거늘, 그렇게 매번 그들의 유일신을 죽여 왔거늘, 그 유일신은 스스로에게까지 죄를 묻고 자살을 감행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은밀하고 절묘하게 죄의식을 심어 왔기로, 그 신은 결코 죽은 바 없이 더욱더 창대해져 왔도다!
서구 계몽주의는 바로 이러한 신의 음모에 대한 어리석은 반란이었다. 그들은 넘치는 죄의식을 신이 아닌 자연과 타인들을 향해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갈수록 커져가는 죄의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을 굶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죄 없이는 신도 맥을 못 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신이 스스로(악마)와의 내기에 건 판돈이었던 자유 의지의 밀의(密意)를 부지불식간에 실천하고 있던 불경스런 계몽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남아도는 죄의식을 타자공격성으로 돌려 자연과 타자의 죽음만으로 자신들의 원한을 해소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들은 신의 죽음 없이 인간의 이성만으로도 충분히 이 대지의 변덕과 추악함과 잔혹함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상을 설파했다. 이들의 상태를 가장 일찍이 간파한 시인이 바로 니체였다. 니체가 한 광인의 입을 빌어 이들 계몽주의자들에게 “신의 죽음”을 고지했을 때니체, ꡔ즐거운 지식ꡕ(청하, 1989) 참조.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들 중 아무도 몰랐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유 의지의 밀의는 인간의 죄의식과 원한을 신이 아닌 변덕스럽고 잔인한 자연-대지와 타자로서의 인간(동물적인 인간)을 향하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자유 의지의 성과라고만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제 신이 희생양이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 신이 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서, 신이 더 이상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진화를 멈출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박상륭의 통찰대로 신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데박상륭, ꡔ神을 죽인자의 행로는 쓸쓸했도다ꡕ(문학동네, 2003), 21쪽.
신이 죽을 리는 만무하다. 니체 특유의 과장된 수사로 인한 오해를 차치하자면, 니체가 입을 빌린 저 광인의 헛소리는 다름 아닌, 기독교의 신이 더 이상 자신의 생명력인 죄의식을 수금할 수 없어 굶주리기 시작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하면 저 헛소리는 ‘신은 이제 더 이상 죽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더 이상 인간의 죄의식-원한의 희생양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리하여 더 이상 진화할 수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니체가 죽음을 선포한 유일신은 바로 이처럼 ‘죄의식을 먹고사는 신, 진화하는 기독교의 신, 야훼’였다. 따라서 니체의 과장된 표현은 수사학의 거품을 제거하면 다만 야훼가 인간의 죄에 굶주리기 시작했다는 것, 더 이상 희생적인 죽음의 빌미를 찾지 못한 채 성장과 진화를 중단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 신의 욕구 불만이 니체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니체가 그렇게 혐오했던 데카당스의 징후인 원한(resentment)의 물레였던 저 유일신이 더 이상 맥을 못 추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그 원한이 저 기독교의 유일신이 아닌 이른바 서구 근대 부르주아의 “허구적인 이성”니체, ꡔ권력에의 의지ꡕ(청하, 1988) 참조.
이나 “흥행이나 유행, 혹은 붉은 용”박상륭, 위 책 359-361쪽 참조.
의 먹이가 된다 치더라도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본질적으로 신은 죽을 수 없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신은 결코 죽을 수 없다. 물론 신은 무한하나,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신은 인간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한 진화든 퇴화든 그의 역사를 계시할 수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달리 말하면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상륭 역시 그 특유의 ‘몸․말․마음의 우주론’을 통해서 이러한 신의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말은 혀를 빌고 마음은 말을 빌어야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신은 인간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죽을 수 없는 신을 “죽었다”고 선포한 니체의 수사는 신이 혀를 빌던 인간이 더 이상 신에게 혀를 빌려주지 않게 된 사태에 대한 과장법에 다름 아니다. 즉 신을 믿던 자들이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는, 다시 말해서, 기독교 특유의 죄의식을 가진 자들이 더 이상 그들의 신에게 죄의 용서를 구하지 않게 되었다는, 그래서 ‘신을 희생양으로 죽이지’ 않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신이 죽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은 신이 죽었다는 것은 무신론이나 유신론의 관점에서 본 액면 그대로의 ‘신의 죽음’이라는 불가능한 현실이 아니라, ‘신의 존재력(存在力)’이 고갈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서 거듭 신의 죽음을 고지하는데, 그것 역시, 죄의식과 원한을 먹고 진화하던 기독교 유일신의 파산을 의미할 뿐이다. 끊임없이 ‘선악을 넘어서’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 사유했던 니체에게 조로아스트는 기독교 유일신과는 달리 선악을 넘어선 ‘책임의 신’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선악을 분별하는’ 인간은 기독교에서는 이미 ‘죄인’이다. 이런 ‘원죄인’은 궁극적으로 원한의 희생양을 요구하는 존재다.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인 인간의 죄의 구속(救贖)은 필연적으로 그 죄를 지은 당사자의 죽음 아니면, ‘죄 없는-가장 죄 많은 무구한’ 희생양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원죄란 인간자신의 죽음으로도 속죄할 수 없는 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릇 희생양이란 자신의 죄를 전가시키기 위한 대상이다. 그런 희생양은 결국 ‘선하고-죄 없고-그래서 모든 죄를 담을 수 있는’ 무구한 존재여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죄-원한을 전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희생양은 결국 그 희생을 요구한 자의 내면에 또 다른 죄의식을 심는다. 이 악순환을 어찌할 것인가?
바로 이런 악질적인 죄의식의 굴레를 벗어나는 법은 자신의 생각․말․행동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조로아스트교는 바로 이런 책임의 종교다.ꡔ두산세계대백과 EnCyberꡕ 중 ‘조로아스트교’ 항목 참조.
이처럼 선악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결과를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생각은 니체를 충분히 자극했을 만하다. 이런 책임은 죄의식이 죄의식을 낳는 무구한 존재의 희생제의 악순환을 벗어나, 인간을 말 그대로 자유로운 주체로, 스스로의 주인으로 만든다. 바로 이처럼 자기를 책임지는 존재가 기독교의 신을 굶게 만드는 것이다. 니체가 말한 초인이란 신의 살해자가 아니라 이처럼 자기를 책임지는 존재에 다름 아니며, 그의 권력 의지란 이러한 자기 책임의 의지라고 할 수 있다.
3. 초인과 유일신의 죄과
그렇다면 인간이 스스로 이러한 주인이 되면 왜 신이 죽게 되는, 아니, 굶주리는 것일까? 주지하는 바대로 니체는 인간을 “동물과 신 사이에 놓인 외줄을 타고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물론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짐승과 초인 사이의 심연 위에 놓인 밧줄” 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황문수 譯, 문예출판사, 1993), 30쪽.
이라고 묘사했지만 우리, 그리고 박상륭이라면 ‘초인’의 자리에 신을 대입시켜도 무방한 은유이리라. 그렇기에 이 은유를 일견하기에 인간이란 동물(본능)과 신(죄의식)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그대로 추락해 버리고 마는 존재, 즉 어느 한 쪽으로든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되지만, 그가 가야 하는 쪽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피동적인 존재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인 변수는 동물에게는 죄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박상륭이 상극적 질서라고 부른 자연-대지의 질서를 충실히 따르는 동물들에겐 죄의식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바로 이 죄의식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만일 인간이 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면, 인간은 자신의 원초적 동물스러움에 죄의식을 느끼면서 ‘선악을 분별’하고, 자신 안에 존재하는, 아니 차라리 들끓어 넘치는 동물적인 악에 대한 죄의식과 원한의 희생양을 궁극적으로는 신, 특히 그가 기독교도라면 그의 유일신에게서 찾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동물스러움, 자신의 유한성, 자신의 죽음의 운명의 희생양을 신에게서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유일신에게 복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그런 신에게 죄의식을 바치지 말라고, 고통을 바치지 말라고, 죽음을 바치지 말라고 설파한다. 그렇다고 해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을 박상륭의 짜라투스트라처럼 동물 쪽으로, 대지의 신 쪽으로, 예수 이전의 야훼 쪽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니체가 제시하는 초인의 길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초인은 죄의식 없이도, 희생양이 되지 않고도, 죽음의 운명과 가혹한 대지의 뜻을 결연히 받아들일 줄 아는 존재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의 초인은 죄의식과 희생제를 통해 문화를 획득하는 인간, 죽음에 대한 공포와 원한으로 문명을 건설하는 인간, 타자에 대한 두려움과 욕망으로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다. 초인은 판켄드리야의 초입에서 카투린드리야로 퇴화한 아수라가 아니다. 니체의 초인은 죄의식의 악순환을 낳는-대지의 음기(陰氣), 불발된 성욕과 살욕(殺慾)을 켜켜이 유전시키는-종교(특히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아닌 자신의 생각․말․행동을 스스로 책임지는 인간, 문화와 문명에 복종하기보다는 스스로 문화와 문명을 창조하는 인간, 권력과 부가 아니라 예술을 추구하고 스스로 예술이 되려는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인간이다.
따라서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신이 아닌, 니체가 겨냥한 저 기독교의 유일신에 대한 짜라투스트라의 과장된 사형 선고는 삶과 죽음의 측면 모두에서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은 박상륭의 짜라투스트라라면 인간이 죄의식을 여의는 순간 남은 길은 동물을 향한, 카투린드리야를 향한 길 밖에 없을 것이며, 그 길은 곧 죄욕(罪慾)에 굶주린 신의 먹이가 도처에서 양산되리란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역리(易理)’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박상륭, 위 책, 363-364쪽 참조.
하기사 당금 창궐하고 있는 아수라도(阿修羅圖) 내지 축생도(畜生道)를 볼진대, 박상륭의 호통대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역시 ‘위험하기’ 그지없는 요설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바로 이런 축생도의 범람이야말로 인간의 내면에 켜켜이 죄의식을 산적해 온 저 유일신‘들’의 죄과는 아닌가?”라고 반문한다면 너무나 치기어린 투정에 불과할 것인가? 하지만 이 투정꾼은 인간의 죄와 원한과 성욕과 살욕과 죽음을 먹고 자라는 신을 받드는 “종교는 차라리 음습한 외설김성동, ꡔ만다라ꡕ(푸른숲, 1994), 200쪽.
”이라고 울부짖던 어느 행자의 목소리를 잊을 수 없다.
저 유일신들은 주기적으로 인간의 죄의식을 받아먹고 인간에게는 일시적인 위안을 주었다. 기도, 예배, 고백성사, 부흥회, 라마단, 성지순례, …… 이러한 유사희생제를 통해서 신도들이 얻는 위안에는 반드시 죄의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시적인 죄의식의 죽음으로 깃드는 일시적인 위안, 그 위안을 다시 얻기 위해서 요구되는 또 다른 죄의식. 죄, 죽음, 위안, 죄, 죽음, 위안, …… 우리 범부들의 종교는 늘 이런 ‘영원회귀’다. 그럴진대, 박상륭이 전망하는 무수한 죽음을 통한 인류의 진화, 마음의 우주를 향한 진화의 엄청난 역사는 여기, 지금, 대지의 변덕과 잔혹에 시달리며 들끓는 욕망의 열화에 전율하는 이 범부에게는 가공할 주문처럼 들린다.
4.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왜 쓸쓸했을까?
니체 역시 “삶은 죽음 때문에 실답다는 것을, …… 삶은 그것에 의해 완성된다는 것을!” 박상륭, 위 책, 374쪽.
알았을 것이다. 인간을 초극한다는 의지에는 바로 이러한 역리가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죄의식을 신에게 바침으로서 구원을 갈구하는 외설적인 의지가 아니라, 차라리 신을 말려 죽이더라도 자신의 죄를, 욕망을, 살욕을, 죽음의 운명을 스스로 안고 간다는 의지, 종교가 아니라 예술로서 자신의 운명을 표현하고 짊어지겠다는 의지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자기 부정이 아닌 자기 초극의 의지다. 그렇기에 만일 그런 초인의 길이 신을 죽이는 길이라 하더라도, 이 투정꾼은 그런 신의 죽음을 통해서 완성될 신의 모습이 어떨지가 궁금할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도, 박상륭의 짜라투스트라에도 그리 절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박상륭의 본의는 차라리 신을 죽였다고 주장한 짜라투스트라를 죽여 신과 짜라투스트라 모두를 완성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일상에서 우리가 겪는 자잘한 죽음들을 당당히 소화함으로써 비둘기발걸음으로나마 적어도 판켄드리야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삶과 죽음의 길을 넘어서 머언 훗날, 몇 겁 세월이 지난 언젠가는, 아니면, 바로 지금, 여기서, 일찍이 마음의 우주를 열어 보인 붓다․예수 등과 함께할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박상륭에게 죽은 짜라투스트라 역시 한 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짜라투스트라로 거듭나 우리와 조우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쓸쓸”했을까? 그것은 신을 죽인 자가 다름 아닌 ‘박상륭의 짜라투스트라’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어쩌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가 진짜로 신을 죽였다고 생각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차라리 그렇게 가정을 해야만, 그는 자신의 가혹한 ‘잡쇼’가 속세에 더 잘 “섞이리란”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주려고만” 했지 “섞이려 하지 않았고,” 박상륭의 짜라투스트라는 “주러 온 것이 아니라 섞이러”
왔지만 여전히 너무 진지했고 고독을 그리워했기에 쓸쓸했다. 하지만 박상륭은 그토록 진지하고 고독한 이야기를 걸쭉하게 시장에 풀어놓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꾸어 왔기에 짜라투스트라의 고고한 쓸쓸함마저도 감싸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성균
․역서 '살람 팍스의 평화를 위한 블로그' '명상의 기술'
․논문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강박적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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