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2호 초점/진순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45회 작성일 05-03-07 11:34

본문

이서국에서 풍자국으로
―최서림론

진 순 애
(문학평론가)



1.이서국에서
이서국은 최서림 시의 출발지이다. 가늠 안 되는 이서국의 늪에서 뿜어올린 최서림의 짙은 어둠 같은 슬픔은 최서림 개인의 것이며, 동시에 이서국 사람들의 것이다. 그래서 “이서국”이라는 기호는 개국신화 탄생의 기호이기보다는 최서림의 개인적 삶의 근원지이며, 그에 준한 시적 기호이다. 그러니까 이서국이라는 기호는 그의 고향 청도에 대한 기호이며, 고향의 삶에 대한 비유적 기호인 것이다. 청도 혹은 고향이라는 기호보다는 “이서국”이라는 기호는 기호의 낯설음만큼 그 의미의 파장도 낯설다.
그러나 낯설음 속에서도 이서국의 삶의 양식은 이서국만의 그것이 아니어서, 최서림의 이서국 이야기는 이서국 이야기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의 이야기로 확장한다. 세상의 행위 가운데에는 세상물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세상물정에 밝아야 슬픔의 깊이가 얕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서국의 삶이란 세상물정과는 무관한 삶이어서, 최서림의 이서국 이야기는 세상물정에 상처받은 사람들의 초상화로 “얼룩진” 이야기이다.
세상물정에 상처받은 사람들로 얼룩진 초상화는 시의 한 정신을 표방한다. 시는 시인의 정신이며, 그 시인이 속한 사회의 정신이고, 그 사회가 속한 시대의 정신이다. 물론 세상물정에 상처받은 사람들이란 어느 특정 사회 및 특정 시대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조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최서림의 이서국에서의 상처는 최서림만의 독자적 상처에 더 가까우며, 나아가 이서국 사람들의 상처이고, 이에 따라 역사성에 함유되는 상처이다. 그러므로 최서림의 이서국 이야기가 지닌 시적 의의 혹은 시의 정신은 역사성 혹은 역사적 정신으로 모아진다.

청도 사람에게 이서국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다.
이 세상이 이서국의 안이고 밖이다.

이천 년 청도 사람 밥줄 이어온 장터, 어귀
오동나무 밑 생선 파는 늙은 과부 장씨, 대대로
장터 살아온 어머니 닮아 새까맣고 기름기 빠진 얼굴에
자잘한 욕정과 좌절이 검버섯으로 박혀,
인생살이 모든 게 그저 목쉬는 흥정으로,
그에게 세상은 절인 고등어다.
아비도 모르는 아이 지우고 기어들어와
실밥처럼 풀어진 딸년 생각에
파장 때 남은 고등어로 잉어 한 마리 사
타박타박 낮은 고개 넘어오는
장씨는 더 작아 보였다
서쪽 하늘은 감빛이고
(중략)

잉어 고고 있는 솥 말없이 바라보며 장씨 딸,
납빛 얼굴 노을에 담그고 도라지 꺾는 손에
이서국 수렵꾼 딸 흘린 눈물 젖는다.
청도장서 어머니 따라 생선 장사나 할 그녀, 지금
뼈까지 녹아내린 이서국 잉어즙 짜내고
―「청도장」 일부

청도장은 청도의 장이면서, 동시에 청도를 넘어서서 5일에 한 번 혹은 4일에 한 번 개장하는 이 땅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쓸쓸한 풍물장을 대변한다. 때문에 이서국 혹은 청도라는 기표는 단일 기표에서 멈추지 않고 기의의 다양성을 함유하는 비유적 기호로 확장한다. 곧 최서림의 개인적 삶의 근원성을 내포하면서, 동시에 그와 다르지 않은 이 땅의 헐벗은 민중들의 삶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시적 기호는 개인적이면서도, 또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하여 읽게 한다.
지방에 4~5일에 한번 개장하는 장날은 단지 그 지방의 풍물만이 전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방민들의 삶의 애한이 함께 전시된다. 4~5일이 아니라 날마다 개장한 장일지라도, 지방의 장이란 물물 교환뿐만 아니라, 삶의 애한이 함께 교환된다. 민중적 삶의 집합지로서 장터인 것이다. 때문에 최서림 시의 근원지는 이서국 중에서도 보다 좁게 보면, 청도 장터가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최서림 스스로 “이서국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청도장을 지칭하듯이 청도장은 이서국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면서, 동시에 이서국의 한복판으로도 읽히고, 또한 최서림의 가슴 한복판으로도 읽힌다. 최서림의 뭉쳐진 가슴에서 튀어나온 슬픔의 장터로서 청도 장터인 것이다.
“청도 사람에게 이서국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다./이 세상이 이서국의 안이고 밖이다.”라고 시의 서두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에는 그의 근원지가 삶의 출발지이고 또한 전부일 만큼 크게 자리 잡혀 있다. 굳이 귀소본능이라고 언급하지 않아도, 근원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청도 사람이 세상을 보는 거울이며, 이 세상의 안이고 밖인 이서국에 대한 이야기는 청도 사람인 최서림의 시적 장치를 불필요하게 한다. 이서국에 대한 이야기 전달자로서의 역할만으로도 청도 사람의 이야기는 충분히 시적 발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가령 “청도 사람에게 이서국은 끝도 시작도 없다./청도에서는, 모든 사물이 이서국의 입구고 끝이다.”는 언표나, “매운탕집 주인 늙은 상이군인/찌그러진 오토바이 끌고 와 캄캄한 밤 랜턴 켜고/절벽 아래 한 귀퉁이 수양버들 밑 거북바위에 쪼그리고/복수처럼 부풀어오른 물에 메기낚시 한다/이따금, 주체스런 육체 뒤로 눕혔다 일어났다 하며,/안드로메다서 온 별빛이 안경 너머/맥 풀린 눈 속으로 잦아들 때/낚싯줄 삼킨 시커먼 물이/하늘과 땅 휘돌아/끝도 시작도 없이/클라인씨병처럼 흐른다/이서국 속으로”(「청도 그리고 伊西國」에서)처럼, 청도 사람의 삶의 시작도 끝도 이서국 속에 있다. 그래서 청도 사람에게 이서국은 세상을 보는 거울이며 곧 거울 그 자체인 것이다.
청도 사람의 삶이 이서국 속에서 클라인씨병처럼 흐르는 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생이란 이서국으로 비유되는 지상에서 클라인씨병처럼 흐르다 마감할 것이다. 어쩌면 지상에서는 클라인씨병처럼 흐르다 죽음이후에는 영생을 얻게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최서림의 시적 토대는 아직 영생을 향한 죽음의 노정에 있지 않아 보인다. 이서국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발현된 그의 언어는 청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언어에 아직 집약되어 있다.

이서국 어떤 집에서는 감나무가 거꾸로 서 있고 어떤 집에서는 옆으로 서 있고 어떤 집에서는 간혹 바로 서 있기도 하다 거꾸로 선 집에서는 거꾸로 서서 감을 따먹고 옆으로 선 집에서는 옆으로 서서 따먹고 바로 서 있는 집에서는 역시 바로 서서 따먹는다 그런데 많은 이서국 사람들에게 거꾸로는 옆으로이고 옆으로는 바로이고 바로는 거꾸로이다 이상 모든 것은 오늘 청도에서도 그러하다
―「伊西國으로 들어가다․5」 전문

재차 언급하여, 청도의 이서국 사람들의 삶이란 이서국의 삶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인생 그 모두를 알레고리하는 비유적 기호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서국 혹은 청도에 대한 고유성을 간직하고도 있다. 그 고유성은 “이서국 사람들에게 거꾸로는 옆으로이고 옆으로는 바로이고 바로는 거꾸로이다”는 언술이 지적한다. 이는 이서국의 질서구조가 옳으냐 틀리냐도 아니고, 이서국 밖의 질서 구조가 옳으냐 틀리냐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단지 이서국 사람들은 “감나무가 거꾸로 선 집에서는 거꾸로 서서 감을 따먹고 옆으로 선 집에서는 옆으로 서서 따먹는다”는 이서국의 남다른 삶의 풍경, 혹은 이서국만의 순리에 순응하는 삶의 자세에 대한 시인의 애정에서 비롯된 시적 언술이다. 곧 세상물정과는 무관하게, 즉 세상물정 모르는, 혹은 세상물정을 알아야 할 필요 없이 살아가는 이서국 삶의 풍경을 감 따는 행위가 무언의 항변으로 대변한다.
그것은 특히 “패랭이 눈에 고정된 공사장 하늘, 아래/대구서 온 인부들, 열심히, 아파트, 만들면/그 속에 자리 잡는 것은/토담집이다”(「패랭이 눈에 고정된 하늘」에서)에서, 아파트 속에 자리 잡는 이서국의 토담집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확인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이서국은 이렇게, 공연히,/늘상 술이 취해/한쪽 신발을 잃어버리곤 했다”(「이서국은 술취한, 칼춤을 추고」에서)에서도, 술 취해서 신발 잃기도 하는, 여전히 신뢰가 살아 있는 이서국 풍경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이서국은 이상하게도/창호지 사이로 내민 달걀을 먹고/독감에서 소생되곤 했다”(「창호지 사이로 내민 삶은 달걀」에서)는, “이상한”힘으로 소생되곤 하는 이서국의 생생력을 최서림은 비합리적 순환성을 통해 지적한다. 그 이상한 힘의 이서국, 비합리적 순환의 생생력을 지닌 이서국은 최서림에게 “묵계리까지 여행은, 낯․익․어․아․름․다․운 안개 속에 먼저 가 숨어 있는 나에게로 가는 길이었다”(「푸른빛으로 돌아오다」에서)는 그 길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2. 유토피아도 없는 지상에서
“먼저 가 숨어 있는 나에게로 가는 길”과 다름없는 이서국으로의 길을 향하기 위해, 최서림은 아직은 “유토피아도 없는 지상에서 사는 법”, 혹은 “살아남는 법”에 대해 더 숙지하고자 한다.

더 이상 내 詩가 꿈꿀
고향은 없다. 자연조차 없다.
「내셔널 지오그라픽」속에만 존재한다.
더 이상 내 詩에 성스런 힘 실어줄,
자본의 가속도에 브레이크 걸어줄 민중도 없다.
오랫동안 물을 갈지 않아 썩어가는
우울한 이 수족관 도시,
빠져나갈 껀수도 길도 없다.
오존주의보가 내려도
폐에 구멍이 뚫려도
남극 뻥 뚫린 오존층 구멍이
내 머리 위까지 덮친들,
땡볕에 드러난 지렁이처럼
말라비틀어지며 기어갈 수밖에 없다.
황페해진 여름날, 가로수 없는
달구어진 콘크리트 바닥을
내 詩는 그렇게 기어가야 한다.
아황산가스 오존을 마시며 삭여내며
모질게 독하게 싹 틔워야 한다.
지구가 돌아가는 데까지,
사는 데까지 살아봐야 한다, 내 詩는
―「오존주의보가 내려도」 전문

“내 詩”가 가는 길을 위해서, 왜냐하면 “더 이상 내 詩가 꿈꿀/고향은 없고, 자연조차 없으므로”, “내 詩”가 가는 길을 “내”가 찾아주기 위해서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을 숙지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물을 갈지 않아 썩어가는/우울한 이 수족관 도시,/빠져나갈 껀수도 길도 없다”, 그럼에도 “땡볕에 드러난 지렁이처럼/말라비틀어지며 기어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가듯이, “내 詩” 역시 그렇게 기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황산가스 오존을 마시며 삭여내며/모질게 독하게 싹 틔워야 한다./지구가 돌아가는 데까지,/사는 데까지 살아봐야 한다, 내 詩는”, 왜냐하면 내 시가 사는 길은 곧 시인이 사는 길이므로. 비록 유토피아가 없어도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찾기조차 폐기할 수는 없는 시의 길, 시인의 길이므로 그러하다. 또한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찾기 끝에 유토피아를 찾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그러하다.
“사는 데까지 살아봐야 한다”는 말은 물론 자조적이다. “지구가 돌아가는 데까지”라는 언술도 그러하다. 그것은 이서국을 향한 깊은 애정의 시선에서 유토피아 없는 현실로 향한 최서림의 시선이, 주어야 할 애정의 길을 찾지 못한 방황에서 비롯된 자조적 어조이다. 자조의 어조는 아직 자폐에 빠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자폐에 빠진다는 것은 불행의 길에 빠지는 것과 다르지 않다.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 찾기도 아닌, 희망조차 잃었을 경우, 이는 진정 자폐적 불행의 시간대에 다다른 것이리라. 그러므로 자폐적 불행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스팔트는, 자본주의적 회전 속도와/오토바이 회전 속도가 서로/으르렁거리며 맞물리는 접선이다./그 접점에/이 세상 벗어나가는/아슬아슬한 門이 숨어 있다”(「세상 밖으로․1」에서)는 인식의 눈조차 감고 있을 수는 없음이다. “으르렁거리며 맞물리는 접선, 그 접점에 있는 세상 벗어나가는 숨어 있는 문”을 찾아서 불행의 시간대를 빠져나갈 일인 것이다.

공원 벤치에 쓰다 버린
걸레처럼 구겨져 있네,
녹슨 건전지처럼 이리저리 나뒹구네,

(중략)
몸보다 무거운
몸과는 어긋나 삐그덕거리는
쉴 자리 찾지 못하는 영혼,
빨랫거리 두고 있으면
신경성 피부염 도질까
머리 속이 빨래처럼 엉키네,
한번 입은 잠옷도 삶아 빨고
실크 블라우스까지 물빨래하고 마네,
이 도시라도 이 세상이라도
빨아 버리고만 싶네,
간이라도 창자라도 끄집어내어
흐르는 물에 탈탈 털어
문질러 두들겨 빨고 싶네,
지쳐 잠들 때까지,
―「빨래하는 노파」 일부

유토피아를 향한 꿈꾸기조차 쉽지 않은 현실태에서 시인이 찾아낸 방법은 “빨래하기”인 것 같다. “공원 벤치에 쓰다 버린/걸레처럼 구겨져 있네,/녹슨 건전지처럼 이리저리 나뒹구”는 “빨래하는 노파”는 “빨래하는 노파”이면서, 동시에 시인이 동일시된 대상으로도 보인다. 단순히 “빨래하는 노파”에 대한 풍경화라면, “간이라도 창자라도 끄집어내어/흐르는 물에 탈탈 털어/문질러 두들겨 빨고 싶네,/지쳐 잠들 때까지”라는 언술은 불필요할 것이다. 노파는 이미 지쳐있는 상태에 있으므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시인이 진정 하고자 하는 말은 “이 도시라도 이 세상이라도/빨아 버리고만 싶네”에 있음이다.
특히 “공원 벤치에 쓰다 버린, 걸레처럼 구겨져 있는, 녹슨 건전지처럼 이리저리 나뒹구는 존재”로서의 “노파”에 비유된 자신에 대한 발현은 자학적 의식의 발로이다. 자학적이면서도 또한 “빨래하는” 노파라는 점에서, 시인의 자학은 자폐를 향한 자학이 아니라, 불행의 현실을 견지하기 위한, 즉 역설이 내재된 자학의식이다. 역설이 내재된 자학의식은 최서림의 시 도처에서 발견되는데, 가령 “속물주의자가 되어 비로소/정신의 자유를 얻었고/자유를 위해/달디단 이 세속도시 속으로/점점 더 파고들고”(「속물주의자」에서) 등의 언술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유토피아도 없는 지상에서의 시 쓰기는 창조적 상상력이 불필요할 만큼 시적 소재가 도처에 널려 있음을 최서림의 두 번째 시집 ꡔ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ꡕ(세계사, 1997)이 보여주고 있다. 김준오는 80년대 해체시 일군을 일컬어 “창조력 제로화의 상태”라고 명명했다. 시적 창조력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현실이란 그에 비례하여 불행한 현실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유토피아를 향한 꿈조차 꿀 수 없는 불행한 현실에서의 시정신은 그 불행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비판정신으로 일색을 짓는다. 그러나 시인은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 없어서, 곧 자조적 비판정신에서 멈출 수 없어서, 급기야 세 번째 시집 ꡔ세상의 가시를 더듬다ꡕ(문학동네, 2000)에서 풍자의 필치를 전면에 내세운다.
3. 풍자국으로
유토피아 없이 살아야 하는 세상은 풍자되어야 할 세상이나 다름없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성의 시선은 유토피아 없는 세상에서 단지 견뎌내야 하는 자세에서 멈출 수 없는 시선이다. 지성의 필치로 유토피아 없는 세상에 참여해야만 한다. 단지 유토피아 없는 세상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그 세상을 개조시키고자, 그 결과는 나중으로 하고, 지성의 정신으로 참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최서림의 시선은 유토피아 없는 현실을 단지 “견뎌내기”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 참여의 시선으로 관여하는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냥 습관적으로, 소음에
부르르 떨어보는, 타이어 가루로 도배된,
빌딩 앞 엎드러진 바위여,
나처럼 이 도시처럼 삭아 버린 콘크리트여,
눈먼 아황산가스여, 불쌍한 부르주아여,
필리핀에서 팔려온
푸르딩딩 프롤레타리아여,

너의 귀가 아니라,
내 말이
너의 입으로 들어가기,
내 말의 살점이
너의 이빨로 질근질근 씹혀지기,
내 말의 뼈다구가
너의 밥통에서 엿물처럼 삭혀지기,
참말로 내 말의 입자가
그 쌀가루가 밀가루가
너의 귀가 아니라,
너의 창자에서 소화되기,
내 말의 불기운이
너의 융털로 흡수되기, 참말로
그것이 너의 똥구멍에서
똥으로 나오기,
다시 그 똥가루가
쌀가루 보릿가루 되어
내 입으로 들어오기,
참말로 내 말의 혀로
너의 똥구멍 핥아주기.
―「말의 혀․1」 전문

사회의 계급은 사회를 형성하는 필요악일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인간사회는 현대와 같은 경쟁중심의 사회가 아니어도, 경쟁과 유사한 갈등의 요소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부르조아와 경쟁 안 되는 프롤레타리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눈먼 아황산가스여, 불쌍한 부르주아여,/필리핀에서 팔려온/푸르딩딩 프롤레타리아여”라고, 시인의 눈에 포착된 시선을 투여한다. 부르주아도 불쌍하고 프롤레타리아도 불쌍하다는 심미적 시선이다.
그러므로 불쌍한 “너”와 “나”는 적대적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내 말”이 “너의 귀”가 아니라 “너의 입으로 들어가기”라는 언술은 자본화의 물결 속에서 물질화된 동시대에 대한 비판의 정신을 담고 있다. 물질화된 동시대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너의 입으로 들어가기”가 아니라, “너의 귀로 들어가기”가 보다 적절해 보이지만, 시인은 현실추수적 태도로서 역설화하고 있다. 역설은 풍자시학을 형성하는 출발이기도 하다. 그것은 되어 있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지성적 존재의 참여적 태도의 하나인 것이다.
역설의 시학과 함께 비속어에 의한 직설적 찌르기는 부조리한 현실상을 보다 적나라하게 제시하는 효과를 발현한다. 가령 “내 말의 불기운이/너의 융털로 흡수되기, 참말로/그것이 너의 똥구멍에서/똥으로 나오기,/다시 그 똥가루가/쌀가루 보릿가루 되어/내 입으로 들어오기,/참말로 내 말의 혀로/너의 똥구멍 핥아주기”처럼, “너의 똥구멍에서 나온 똥가루”가 쌀가루 보릿가루가 되어 “내 입”으로 들어오도록, “너의 똥구멍”을 핥아주겠다는 자학 혹은 자기 비하에 의한 역설은 모순의 세상을 향한 시인의 첨예한 참여정신을 대신한다.
첨예한 시인의 참여정신은 “마음 깊숙이서/말(言)의 칼날을 간다./폐차장 구겨진 엔진을 그 녹슨 심장을/쪼개어보려 갈라보려,/그 폐차장 지날 때마다/말의 이빨을 간다.”(「말의 혀․3」에서)고 시인의 “말의 혀”가 비속어에 의한 비하적 태도를 취하기도 하는 이유를 말한다. 비록 비실현화 할지라도 “말의 칼날”을 갈기는 갈아야 하고, “녹슨 심장”을 쪼개어보려 노력은 해야 하기에 “말의 이빨”을 가는 것이다.

한 다발 3천 원짜리 장미여,
한 탕에 3만원 오팔팔의 장미여,
바람에 날려가지도 않고 버티고 있는
청량리 로터리의 오존가스여,

내 말의 손가락이
너의 차가운 가시를
그 근방이라도 더듬을 수 있다면,
내 말의 입술이
너의 굳은 입술에
그 그림자에라도 부빌 수 있다면,
내 말의 혀가
너의 쪼글쪼글한 꿈에
그 가장자리라도 핥을 수 있다면,
내 말의 꿈이
그 철책 울타리에라도
어른거릴 수 있다면,
―「말의 혀․2」 전문

풍자국에서의 시적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무궁무진한 시적 소재를 거론만 하여도, 즉 시를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무색케 하는, 풍자국의 풍자적 소재인 것이다. 풍자국이란 무궁무진한 풍자적 소재로서 풍자문학을 위한 노력을 불필요하게 하지만, 풍자국의 국민들에게는 불행한 현실임을 반증한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조차 불필요한 현실이라는 풍자국의 “가시”를 외면하지 않고 더듬고자 한 최서림은 “내 말의 손가락이/너의 차가운 가시를/그 근방이라도 더듬을 수” 있기 위해 “말의 혀”를 날카롭게 돋우고자 한다. 더욱이 “내 말의 입술이/너의 굳은 입술에/그 그림자에라도 부빌 수 있기” 위해서, 나아가 “내 말의 혀가/너의 쪼글쪼글한 꿈에/그 가장자리라도 핥을 수” 있기 위해서 그러하다.
그럼에도 날카롭게 돋운 최서림의 “말의 혀”일지라도, 그것은 “입술이 헌 내 말의 혀”이며, “이빨 빠진 칼날”이라는 사실은 시인 또한 “세상의 가시”와 다르지 않은 상황에 있음을 내포한다. “詩의 녹슨 칼날을 벼린다./이 도시에서 우선, 나부터/미치지 않으려고”라고, 최서림은 풍자국의 현실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즉 “나”로부터 출발한 “세상의 가시”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시인의 노력이다. “이 도시 닮아 독해져 버린/내 몸에 뿌리내리고,/산성비 내릴지라도,/착각일지라도,/잔인할지라도,/돌아올 봄을 그리며/내 핏줄 속에서/새 눈을 깜박이고 있다.”(「내 몸에 뿌리를 내리고」에서)는, 그렇게 있어야 하는 시인의 노력인 것이다. 풍자국이라는 되어져 있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시인이 꿈꾸는 되어져야 할 현실을 향한 최서림의 “이빨 빠진 칼날”로서의 노력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최서림 시의 힘이 지닌 현실적, 역사적 의의가 함께한다.



진순애
․전남 고흥 출생
․1993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추천1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