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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시 계간평/이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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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09회 작성일 05-03-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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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활’의 시적 영토를 건너는 몇 가지 풍경들

이 기 성
(시인, 문학평론가)



1.
최근에 발표된 시에서 젊은 시인 이장욱은 ‘너와 나를 투명하게 비추는 카페 프란츠/대형 통유리 너머로,/사생활의 역사가 흘러간다. 장엄하다’(「사생활」, 세계의 문학)고 말하고 있다. 역사에 대한 열광이 소거되고 내성과 환멸의 언어들이 주를 이루었던 시기를 거쳐 온 우리 시의 흐름에서 ‘사적인’ 것들의 영토가 증대되는 양상은 그다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거대서사의 붕괴와 미시적 세계의 팽창이라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는 90년대 이후의 시적 흐름에서 일상, 내면화, 내성화, 서정화의 경향 등은 무수히 반복되어 온 주제어들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시들이 다시금 ‘사생활’의 영토를 시적 화두로 삼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주지하듯 사생활의 영역이 시적 화두로 출현하게 된 데에는 공유된 기억의 붕괴라는 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광대한 이미지의 폭주와 공허한 반복의 시간으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시적 주체들이 경험하는 것은 실존에 대한 끝없는 불안과 자기 해체의 위기감이다. 이러한 주체의 위기와 불안을 유보시키는 기능을 하는 것이 열광의 담론으로 채워진 지난 연대에 대한 기억이다. 이때 공유된 역사에 대한 기억은 이념의 공백을 대치하고, 삶의 공허함을 가려주는 가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일상적으로 반복적으로 재현된다. 월드컵 당시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옷의 상징적인 체험이야말로 역사의 부재를 대치하는 환상의 기능을 잘 드러내준 예이다. 이러한 프로젝트화된 집단 환상은 공동체의 이념에 호소함으로써 주체를 지배적인 동일성의 체계로 복속시키는 한편, 일상과 비일상을 분리시켜 일상과 역사 사이에 깊은 간극을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집단적 열광의 환각이 사라진 지점에서 남루한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주체들은 다시금 공허한 세계의 권태와 무의미함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역사를 대치하는 가상의 체험은 일상에 잠입한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은폐하고, 현실을 망각하게 함으로써 개체들을 일상적 삶의 코드화된 체계 속으로 안착시키는 기능을 하게 된다.
최근 사생활의 영토에 시선을 돌리는 시인들이 문제삼는 것은 이러한 지점이다. 이들은 그간 시의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해 온 신서정 혹은 생태주의 시가 보여주는 정서의 투사와 동일성의 시학을 거부한 채, 건조한 시선으로 현실의 음영을 응시하면서 균열된 삶의 단면을 포착해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이 환기하는 새로움은 일상에 스며든 자본의 권력적 지배를 냉정하게 응시의 시선 속에 내장되어 있다. 반복적이고 코드화된 세계에 대한 반성적 시선이야말로 이들의 시가 새롭게 주목되는 이유인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몇 편의 시들은 단편적인 ‘사생활’의 조각들을 만화경처럼 얽어매어 이 시대의 문화적 지형을 비추어내는 복안(複眼)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시선에 비추어지는 시적 자의식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역사적 무의식을 징후적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생활의 영토를 횡단하는 몇 개의 시적 공간을 둘러보며 ‘역사’의 이면에 그려진 삶의 무늬를 따라가 보는 일은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2.
최근의 시에서 발견되는 ‘사생활’에 대한 탐구의 경향은, 오늘의 시가 놓여진 현실적 지반에 대한 탐색과 성찰의 태도와 연관되어 새로운 문제 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사생활’이란 현실의 지배적 장치에 포섭되어 가는 일상의 다양한 영역을 의미하는 동시에,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응하는 시적 주체의 긴장된 의식이 발현하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사생활’은 사회적인 억압에 의해 끊임없는 해체의 위기를 겪고 있는 주체들의 불안정한 내면을 드러내는 통로이며, 따라서 억압적인 세계에 둘러싸인 주체의 내적 고백이 실현되는 새로운 시적 영토로 떠오르게 된다.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한 이장욱의 시(「사생활」)에서 그는 도시의 이면을 느리게 걸어가는 산책자의 시선을 통해서 이완된 일상의 단면을 포착하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일상의 권태를 배음으로 하여 카메라의 렌즈처럼 생활의 외피와 미시적인 결들을 동시에 훑어나간다. 이러한 시선에 포착되는 것은 서로의 외면을 스쳐 가는 개체들의 표정 없는 얼굴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시적 주체의 우울한 자화상이다.

어떤 사생활이든
활보가 가능한 거리인 것이다. 비둘기가,
지금 막 생애 최고의 활강을 마치고 안착한다.
이 도시에서 지금 그것을 목격한 자는 나뿐이다.
나는 그 활강의 자세를 기억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고요한 비둘기를 향해 아이는
아주 사적인 돌을 던진다.
비둘기의 사생활은 손쉽게 무너진다.
나는 후퇴하고 싶다. 나의 사생활로
사적인 채로 사적인 표정으로 나는,
약간의 손짓을 섞어 말하는 너를 바라본다.
그래, 너와 나는 동지다.
내일 아침에도 아파트먼트에는
재활용수거 음악이 울려 퍼지겠지
동지들은 광장을 가득 메우고
나는 장엄한 역사를 건너간다
오후에는 츄리닝에 쓰레빠를 끌고 당당하게
창림김밥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거야
생애 최고의 활강을 위해 다시 이륙하던 비둘기가
김밥집 창밖에서 나를 힐끗, 바라보겠지.
―이장욱 「사생활」 부분(세계의 문학)

이 시에서 도시의 모퉁이를 응시하는 시인은 반성적 의식으로 세계를 투시하는 대신, 지루한 삶의 외면을 훑어내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시적 주체의 눈에 비친 도시는 ‘광장’이 사라지고, 그 대신 개별화된 주체들이 소외된 형태로 공존하는 공간이다. ‘거리’는 이념적 열망이 분출하는 장소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에 고착된 개체들이 활보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사적인 것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세계는 ‘사생활이 활보하는 거리’ 혹은 ‘아파트먼트의 재활용수거 음악이 반복되는’ 일상의 풍경으로 채워진다. 이때 공적인 담론으로부터 단단하게 격리된 ‘사생활’의 성채는 반복적 일상의 무력감에 지배당하며, 결국 세계와 단절된 사생활의 영토는 그곳에 유폐된 채 고립된 실존을 잠식하게 된다.  
이러한 사생활의 세계는 개별화된 주체의 부각으로 특징지어진 현대적 삶의 특징적 단면을 드러내 준다. 도시적 세계의 과잉된 이미지에 강박된 주체들은 끊임없이 소외와 불안에 시달리게 되며, 이때 타자와의 소통을 차단하는 ‘사생활’의 세계는 현실을 지배하는 위기와 불안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보호막(protective cocoon)인 동시에 퇴행의 피난처로 작동하게 된다. 권태로운 일상에 대한 부정의 한편에는 끝없는 사적인 공간을 향한 퇴행의 욕망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상이란 ‘사생활’의 자발적인 고립의 세계와 이중의 겹을 이루고 있으며, 결국 사생활과 일상은 서로 안팎으로 누벼진 관계가 된다.  
여기서 시인은 ‘통유리’라는 한정된 매개를 통해 파편화된 세계를 응시하면서, 이러한 생활의 세계를 ‘풍경’화 하고 있다. 이러한 투명한 유리를 경계로 한 거리두기의 시선은 사생활의 성채를 가장 완벽하게 보증하는 자기 방어술로 읽힌다. 시에서 사생활의 영역으로 후퇴하고자 하는 시적 주체의 태도는 ‘생애 최고의 활강’을 마친 비둘기와 대조된다. 비상과 착지를 반복하는 비둘기는 일상으로부터 이탈하고자 하는 의지를 상징한다. 그러나 ‘생애 최고의 활강’을 마친 비둘기의 낙하를 바라보는 시적 주체의 시선은 곧바로 ‘사적인’ 것으로 치환된다. 비상의 행위에 대한 이념적 공감의 부재는 비둘기의 활강을 ‘기억’하고자 하는 시적 주체의 태도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기억’하려 애쓰는 행위 속에는 ‘비둘기의 비상’에 대한 정서적 투사나 감응의 태도가 아니라, 비상의 의미를 사물화, 대상화하려는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기억’을 위한 노력은 내면의 ‘사생활’로 후퇴하려는 시적 주체의 욕망에 의해 곧바로 지워져버린다. 일상을 벗어나려는 의지와 가치에 대한 부정은, ‘동지(너)’를 바라보는 무표정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동지’라는 시어는 이념적, 정서적 공감이 상실된 상황을 역설적으로 드러내줄 뿐이다. 이렇게 되면, ‘비둘기/친구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한편으로 ‘나를 바라보는 비둘기의 시선’ 사이에는 소통이 거세된 단절과 어긋남만이 존재하게 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김밥집으로 들어가는 나’와 ‘창 밖의 비둘기’ 사이엔 시선의 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힐끗’이라는 시어는 이들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교차하는 지점에서 어떻게 단절되어 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무감한 관계가 만들어내는 시선의 불일치는 결국 사적인 영토에 국한된 주체들의 고립감을 강조하는 기능을 한다. 한편, 사생활이 모여 있을 뿐인 이러한 현실을 ‘장엄한 역사’라고 부르는 아이러니는 ‘츄리닝에 쓰레빠를 끌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시인의 위악적 포즈에서 극에 이른다. 무감한 일상의 단면을 밑그림으로 하는 이 우울한 풍경화에는 사생활의 영토에 시적 근거를 두고 있는 일그러진 자의식이 자조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장욱이 광장과 김밥집 사이를 당당한 위악의 포즈로 건너가면서 현실의 무감각한 외면을 드러낸다면, 공광규는 「휴일, 권태」(동서문학)에서 이 시대의 거실 풍경을 소묘함으로써 사적인 영토의 새로운 면을 펼쳐 보이고 있다. 녹슬어가는 생활과 해체되어 가는 가족에 대한 보고서로 읽힐 수 있는 이 시의 미덕은 무엇보다 소시민의 무력한 일상의 치부를 전면적으로 과감하게 노출한다는 점에 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멈춘 시계는
건전지를 바꿔 끼워도 돌아가지 않는다.
음극판이 부식되어 드라이버로 벗겨내도
마누라를 닮아 전류가 통하지 않는다
아랫도리에 코드를 꽂아도
권태의 곰팡이가 슬어
전기가 안 온다고 불만인 마누라

똥과 오줌을 꿀꺽꿀꺽 잘 받아먹던 변기도
과식하거나 체했는지
계속 게워내다 마침내
화장실을 똥 바다로 만들어버린다
자기 똥이 섞인 가족의 똥이면서도
도망치는 아내와 아이들
결국 가장만이 똥과 대결해야 하는
비겁한 가족을 거느린 장수의 슬픔
―공광규 「휴일, 권태」(동서문학)

이 시에서 가족들의 모이는 ‘거실’은 낡고 삐꺽거리는 일상의 소품들로 채워진 생의 무감함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이 무대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소품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멈춘 시계’이다. 멈추어버린 시계는 더 이상 생에 대한 흥분과 감응의 ‘전류’가 흐르지 않는, 무의미한 삶의 공허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녹슬어 가는 소품들은 관계의 ‘삐그덕거림’에 대한 비유이며, ‘결혼의 생산품은 저 징그러운 사고뭉치들과 중고가구와 부서져 가는 관계들’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가족 내부에서 서로에 대한 배려와 정서적 소통은 사라진 지 오래이다. 이러한 일상의 ‘똥’으로부터 도망치는 아이와 아내 대신하여, 비루한 삶을 떠맡아야 하는 시적 주체에게 가장이라는 지위는 ‘비겁한 가족을 거느린 장수/무능한 가장의 배역’에서처럼 지탱해야 하는 의무로만 부과될 뿐이다.
또한 주목할 것은 시에서 사적인 공간인 거실이 상품과 소비를 통해 일상에 스며드는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가족들의 무의식에 침투한 자본의 막강한 위력이 가족 간의 관계를 균열시키는 근원적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TV에 매달린 아이들은 아버지가 만든 음식을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광고가 권하는 음식에 유혹당한다. ‘자본의 파김치/밥을 찾아 굽실거리는 벌레’가 되어버린 가장은 더 이상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또한 ‘쥐꼬리만한 내 수입에 목구멍을 의존하면서도/나를 쥐꼬리만큼도 존경하지 않는 가족들’(6연)의 모습에서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의 자조가 직설적으로 표출됨으로써 자본에 압도된 주체의 비애감이 심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인 무능은 성의 불능으로 치환되고, ‘돌아눕는’ 아내의 모습에서 회복불능의 단절된 관계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이렇게 자본의 권력에 의해 벌레가 되어버린 왜소한 주체의 시선에 포착되는 휴일의 풍경이란 훼손된 채 형식적으로만 유지되는 가족의 모습이며 균열된 삶의 표면이다. 이 시에서 ‘마누라’의 이미지는 김수영의 ‘아내’와 닮아 있다. 김수영이 타아(alter ego)인 아내와 속고 속이는 관계 속에서 자기 반성으로 귀결되는 풍자의 언어를 시적 전략으로 사용하는 반면, 공광규의 시에서 그것은 씁쓸한 아이러니로 치환된다. 아내에게 걸려오는 낯선 남자의 전화는 분명, 이 허약한 거실의 풍경을 해체시킬 결정적인 요인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허구헌 날 문화건달들과 술 처먹고 지껄이다/새벽에 들어와 쿨쿨 자는 아내/이 귀한 분을 어떻게 모셔야 할까’에서 드러나는 망설임은 무력한 자조감만을 노출하며 붕괴된 현실을 봉합하고 있을 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휴일의 풍경화를 통해 최근 우리사회의 문화적 징후로 급격하게 도출된 가족의 붕괴의 문제를 포착하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훼손된 가족의 모습은 거대서사가 만들어낸 공허한 현재에 대한 감각과 연관되어 있다. 일상을 지배하는 시간의 공허함은, 미래에 대한 끝없는 불안과 되돌아볼 과거의 부재 속에서 주체의 의식을 무기력한 현재에 긴박하게 된다. 이러한 ‘녹슨’ 시간 속에 갇힌 주체의 질식할 듯한 답답함은 새로운 시간을 꿈꿀 수 없는 삶의 비극성을 두드러지게 한다. 너무나 낯익은 거실의 풍경 앞에서, 비루한 일상에 포박된 우리 중 누가 섬뜩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3.
무표정한 개체들의 집합점이자 소외된 공간인 ‘광장’과, 균열된 가족의 초상을 보여주는 ‘거실’의 공간을 경유하여 우리가 도달한 사생활의 영토는 ‘사무실과 화장실’이라는 이질적인 지점이다. 장이지의 시에서 사회의 가치가 실현되는 공간인 ‘사무실’은 역설적으로 사생활이 연출되는 또 하나의 무대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지배와 개체의 삶이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공간인 ‘사무실’은 개인의 실존적 죽음을 담보로 유지되는 기능적 사회의 표상이다. 다시 말해 사무실은 ‘이미’ 죽어 있는 주체가 외형뿐인 삶을 존속해 가는 현실의 아이러니를 담아내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나는 장화를 신고 등장해, 장화 코를 씻는
물의 웅성거림, 그밖의 타이핑 소리가 들려.
타이핑 소리에 맞추어 따다다닥 따다다닥 前進,
하얀 옷을 입은 똑같이 생긴 직원들이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다녀, 낯익은 풍광이로군,
담배를 피워대고, 어딘가 전화를 걸고,
복사기는 같은 이야기들을 게워내고,
하얀 부장은 조간신문을 훑고, 신문은 실망시키지 않지,
전형적인 이야기가 있고, 그런 건 늘 반쯤 먹힌다나?
커피가 쉴 새 없이 식도로 넘어가고,
바람이 불어오네, 내 귀밑머리가 흔들리지 않네,
……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어,
죽음을 팔고, 사지는 못하고, 언제나 이 모양이지,
내일이 오면 이곳을 잊겠지
위선을 떨면서, 「낯익은 풍광이로군!」,
다시 오겠지만, 죽음을 파는 회사로 와서,
긴 복도를 지나, 노란 ‘죽음의 碑文들’을 지나,
―장이지 「黃泉, 體臭 暴風」(리토피아)

시인은 시 전체를 이끌어 가는 발랄한 어조를 통해서, 동일한 배역을 반복해서 연기해야만 하는 비극적 현실을 한편의 부조리극으로 치환하여 보여준다. 시에서 일차적으로 두드러지는 것은 구절 사이에 도출되는 쉼표들의 행렬이다. 문장과 단어 사이사이를 끊어놓는 쉼표는 종결에 이르지 못하고,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는 일상의 세계를 가시화하는 기능을 한다. ‘하얀 옷을 입은 똑같이 생긴 직원들’, ‘전형적인 이야기’, ‘낯익은 풍광’ 등의 구절이 지시하는 것 역시 반복되는 삶의 진부함과 공허함인 것이다.
시적 주체는 지루한 삶이 공연되는 ‘사무실’에서 자신의 배역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로 등장한다. ‘비를 맞으며 뮤지컬 배우처럼 등장한’ 나는 담배를 피우고, 전화를 걸고, 커피를 마시며, 복사를 하는 일상의 배역을 수행한다. 이러한 연기(演技)의 행위들 사이에 ‘피스톨과 잭나이프’의 막간극이 끼어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소한 해프닝처럼 여겨질 뿐이다. 균열된 지점은 단단하게 봉합되고, 멈출 수 없는 톱니바퀴처럼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는 일상의 속도는 멈추지 않은 채 시적 주체로 하여금 무표정하게 자신의 배역을 수행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의 행위들을 연극적인 제스처로 치환함으로써 시인은 스스로를 사회적 퍼소나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이중의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한편 시인은 삶이란 ‘죽음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사무실이라는 생활의 세계는 ‘죽음을 파는 회사’와 동일하다는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시적 주체가 놓인 사무실은 ‘황천(黃泉)’이 환기하는 ‘노란’ 빛깔로 덮여 있다. 일상적 삶이 진행되는 사무실의 공간이 ‘노란 책상, 노판 컴퓨터, 노란 화면’ 등 ‘노란’으로 채색되는 소품들과 ‘노란’ 죽음의 비문 등 죽음의 색으로 칠해진 환상적 공간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또한 시적 주체는 지하철을 채운 ‘노란 체취의 폭풍’ 속에서도 죽음의 냄새를 맡고 있다. 현실의 뒤덮은 노란색은 변질된 육체의 빛깔이면서 죽음의 냄새를 품고 있는 불길한 색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모든 가치와 빛깔이 휘발된 뒤에 남은 이 죽음의 빛깔과 냄새는 ‘낯익은 풍광’처럼 익숙한 세계의 이면에 은폐된 서늘한 죽음의 풍경을 가시화하고 있다. 시적 진술을 이끌어가는 발랄한 어조와 죽음의 폭풍에 갇혀 있는 존재의 비극성이 어긋나게 배치됨으로써 일상의 비극성이 더욱 고조되고 현실의 부조리함은 효과적 극대화되고 있다. 장이지는 폭풍처럼 밀려오는 노란색을 통해 일상을 잠식한 죽음의 냄새를 환기하고 이러한 삶에 포박된 주체의 절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사무실’이 사회라는 권력이 작동하는 공간이라면, 육체적 배설의 공간인 화장실은 내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된 화장실의 흰 벽은 함부로 노출된 개인의 욕망과 타자의 시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소외된 현실의 주체들은 자기 고백을 위해서 사원을 찾거나 일기장을 펼치는 대신 화장실의 벽을 선택한다. 그러므로 무수한 낙서가 쓰여진 화장실의 벽은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 의사(擬似) 고백의 글쓰기가 실현되는 백지가 되는 것이다. 관음적 시선과 노출의 욕망이 엉키는 지점에서 형성되는 고백의 수사학은 지배담론이 균열되는 가장 첨예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다음에 살펴볼 이기인의 시는 냉혹하고 폭력적인 기계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주체의 절망을 그로테스크하게 보여준다.

공장과 공장 사이에 있는 화장실
흰 문짝은 오랫동안 페인트를 벗으면서, 깨알 같은 글씨를 토해내고야 말았다
……
기계가 나를 핥아 주었다, 나도 기계를 핥아먹었다, 쇳가루가 혀에 묻어서 참
지 못하고 뱉어냈다,
기계가 나에게 야만스럽게 사정을 한다고, 볼트와 너트를 조여달라고 했다

공장 후문에 모인 소녀들,
붉은 떡볶이를 자주 사먹는 것은 뜨거운 눈물이 흐를까 싶어서이다
아니다, 새로운 기계와 사귀면서부터이다.
―이기인 「알쏭달쏭 소녀백과사전-흰벽」(창작과 비평)

화장실의 벽에 ‘깨알 같은 글씨’로 쓰여진 것은 기계와 통음하는 소녀의 고백적 진술이다. 이 시의 매력은 불안한 욕망의 담지체인(‘알쏭달쏭’) 소녀와 기계의 폭력적 금속성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불일치에서 비롯된다. ‘공장’에서의 사랑은, 정서적 소통과 교감이 배재된 ‘기계’적인 것이며, 기계와의 사랑이라는 이 도발적인 진술은 ‘쇳가루’의 이물감을 통해서 더욱 극적으로 환기되고 있다. 시에서 공장의 후문에서 떡볶이를 사먹는 여자아이는 건강한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폭력적 세계와 일그러진 욕망을 드러내는 복합적인 존재이다. 기계의 차가움과 대조되는, 붉고 뜨거운 음식을 먹음으로써 내적인 열정을 발산하고자 하는 소녀의 팽만한 욕구는 이 불모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비극성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그녀의 ‘뜨거운 눈물’이 보여주는 것은 정서적 교감이 부재하는 세계에 대한 절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기계’는 기계공(機械工)의 환유인 동시에 현실을 지배하는 냉혹한 원리, 즉 ‘공장’ 나아가 사회 전체를 의미하는 남근의 상징이다. 남근의 폭력성과 소녀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부조화 속에서 욕망은 더욱 기형적으로 표출된다. 끊임없는 기계의 속도에 의해 지배되는 ‘공장’은 개인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모조리 흡수하면서 점점 거대해지는 남근, 즉 자본의 힘을 상징한다. 반면 공장과 공장 사이에 끼어 있는 ‘화장실’은 공장을 가동하기 위해 배제된 것들이 모인 잉여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잉여의 지점에서 유출되는 사랑의 욕망은 끊임없이 자본과의 통음을 꿈꾼다는 점에서 그로테스크하게 변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곡된 형태로 분출되는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불가능한 사랑과 소통을 꿈꾸는 우리 시대의 음화(陰畵)이며, 일상을 공유하는 모든 자들이 꿈꾸는 매우 사적인 악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최근의 시인들이 일상의 문제에 주목하는 것은 삶의 이면에 내재된 거대한 힘, 곧 자본이라는 권력에 대한 시적 대응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시적인 것의 상실을 대신하는 일상적 세계에 대한 가열한 시인들의 대응도 결국 유통과 소비라는 자본의 구조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의 존재양식에 대한 환멸을 완전히 휘발시킬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다음의 시에서 거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시의 존재 양상에 대한 시인의 곤혹스러운 호소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아무도 산토끼를 끄집어낼 수는 없다
내 낡은 모자 속에 담긴 것은
끝없는 사막 위에 떠 있는 한 점 구름일 뿐
내 낡은 모자 속에서 사람들은
파도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러나 깊은 밤 내 낡은 모자에 귀를 갖다대면
기적 소리와 함께 시커먼 화물열차가 달려 나오기도 한다
내 낡은 모자를 안고 오늘 나는 시장에 갔다
하지만 해 저물도록 아무도 사는 이 없어
나는 구름과 놀다가 기차를 타고 훌쩍
머나먼 사막으로 떠났다

누군지 모르는 그대여
내 낡은 모자를 사다오
달리는 화물 열차 끝에 매달려 오늘 나는
내 모자를 쓸 그대를 찾아 헤맨다
―남진우 「모자 이야기」 전문(문학동네)

모자의 마술이 사라진 시장은 자본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상징한다. 사막과 구름, 파도와 바람이 펼쳐놓는 자연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이미지들은 현실의 원리가 지배하는 시장에서 무용한 것들로 치부되거나 거세된 것들이다. 이러한 상실된 이미지들과 ‘시커먼 화물열차’의 기적소리가 담고 있는 폭력적인 속도를 대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적 주체는 ‘시장’의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시인들의 절망을 드러낸다. 그러나 시인이 꿈꾸는 상상적 이미지의 세계와 현실을 상징하는 ‘시장’의 세계는 사실은 모자의 안과 밖처럼 하나로 꿰매어진 관계이다. 시인은 낡은 모자 속에서 환상과 마법이 펼쳐놓는 세계로 훌쩍 떠나지만, 이 떠남은 ‘화물열차’의 끝에 매달려 가는 것이며, 그것은 시인의 운명이 화물열차가 달리는 영토의 내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달리는 열차’로 상징되는 자본의 속도에 매달려 있는 시인은 ‘누군지 모르는 그대’ 즉 미래의 독자를 찾아 헤매는 독백으로 시를 끝맺는다.
이 시에서 나타나는바, 내적 소통 가능한 독자의 부재와 자본의 과잉이라는 현실은 우리 시가 놓여 있는 황폐한 조건을 그대로 드러내주고 있다. 오늘의 시인들이 놓인 비극적 정황은 화폐로 매개된 거래와 물화된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의 가치가 규명되는 시장의 논리 속에서 시(문학) 역시 상품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사라진 마술적 이미지들로 시장의 논리에 응전하고자 하는 시인들의 좌절은, 어느 시대이든 당대의 현실적 조건들과 길항의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는 시인들의 타고난 숙명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의 영토를 벗어나기보다 그 영토를 파고 들어가려는 최근의 시편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음색을 통해서 이러한 숙명을 긍정하고 초극하려는 시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서정적 동일화를 추구하거나 혹은 언어의 실험을 통해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해 나가려는 모험의 정신 못지않게, 일상의 영역에 내재하는 왜곡된 폭력성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사생활의 역사’를 응시하는 다양한 시선의 깊이 역시 우리시의 새로운 단계를 모색하기 위해서 소중한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부재를 견디는 환멸의 방식이 아니라, 일상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적극인 모색을 통해서 새로운 시적 영토를 꿈꾸는 이들의 시적 노력에 기대를 보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기성
․1998년 ≪문학과 사회≫ 시 등단
․2001년 ≪21세기문학≫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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