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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정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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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화
버들피리의 소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버들피리를 만들어 연주해 보았지
空腹의 버들피리는 내 생각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제법 그 뜻을 번역해 소리로 옮겨놓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소리 공중에 심기에는 특별석에 앉은 뭉개구름들과 일반석에 앉은 나뭇잎들의 귀가 불편해질 것 같았어
버들피리를 供養한 버들가지가
저린 무릎을 펴며 소리에 왜 감미로움이 없는지
“버들피리만 탓하지 말라”고 핀잔 주기에
그제야 나는 버들피리의 생각을 번역해 읽으며 다시 연주의 연주를 시작했었지
그러자 어느 순간 버들피리 멜로디 속으로
버들치를 앞세운 시냇물이 들어오고
골짜기를 가쁘게 내려온 진달래꽃이 맨발로 들어서고
엉덩이춤을 추며 너럭바위가 걸어오고
흑백 사진 속에 살고 있던 그 옛날의 삼촌들과 고모와 이모들 누나 형들이 오래된 풍경을 깨우며
어제인양 환하게 소리 속으로 들어오고 있는데
들어온 저녁놀 지지 않고 살림을 차리고 있는데
어쩐 일인가 싶어 나도 그 멜로디 속으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 보았더니
버들피리가 지어낸 소리도
내가 지어낸 소리도 아닌
자연과 인간이 합작해 지어내는 우주적 소리가 아닌가
나, 버들피리 불며 숲 사이로 난 시냇가를 오르다가
문득 스치는 생각, 예전에 떠난 그대의 몸을 버들피리처럼 다시 연주해 봤으면……
버들피리 연주 그만 깜박 잊어버리고.
뼛속까지 닿는 소리
누가 저렇게 많은 열매들을
가는 가지에 한꺼번에 달아놓았을까
저 많은 식솔들 건사하느라
활처럼 휘어진 허리로 서있는
꽃사과나무
그래도 生은 단 한번의 잔치라는 듯이
즐거운 마음으로 빛을 모아다가
얼굴 하나 빠뜨리지 않고 반질반질하게 닦아주고 있네
한때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도 저러했었지
저 위태로운 생의 잔치
저러다 휘어진 허리 꺾여지면 어떡하나 싶어
가지를 잡고 손길 닿는 대로 솎아주려고 보니
윤기나는 이마에서 처녀 적 사촌누이들 얼굴이 떠오르고
나도 모르게 그 틈에 끼어들어 이마 맞대고 싶고
해서, 휘어진 가지 가슴속에 넣고 안쓰럽게 바라볼 수밖에
비바람 몹시 불어 저 가지 꺾여지면
그 꺾여지는 생명의 소리
내 몸의 뼛속까지 깊게 닿겠지만
뉘우치기에는 때늦은 손길이네
지금도 그녀에 대한 나의 사랑 솎아내지 못 한 아픔 견뎌야 하는 시간인 것처럼.
정유화
1962년 경북 선산 출생
1988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ꡔ떠도는 영혼의 집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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