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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류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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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외향
일 몰
산행의 끝에서 맞닥뜨린 일몰
불사조의 거대한 날개 깃 같고
살풀이춤을 추는 무희의 귀기 서린 왼손 같은
하늘길 속으로 휘몰아치는 핏빛의 구름
점등을 시작하는 세상은
일몰의 하늘 아래서
아무래도 읽혀지지 않는 추상화로 남으니
바위 위에 앉아 일몰의 끝을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저 고요한 사라짐을 오래도록 바라볼 것이니
바위를 뚫고 자라는 수목들
때로 생의 경이로움으로 읽혀지기도 하나
애달파라 잔바람에도 밑둥치까지
흔들리는 목숨이여
등성이를 내달리던 바위가 멈춰서서
벼랑을 만들지니
바위 위를 내달리던 홀씨들이
자못 장엄하게 뛰어내리는
어느 저녁의 일몰
그리하여 때때로 자신의 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이 있을지니
사슬에 묶인 혀
퇴근 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시지 않는 허기가
부산스럽게 찌개를 끓이고 오래 방치되어 있던
고기 한 덩이 볶아 TV 앞에 앉았네
사슬로 서로의 몸을 묶은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에 서있었네
달려오던 열차는 가까스로 멈춰서고
경찰들이 절삭기를 들고 달려왔네
통행권 보장을 외치는 그들의 입안 가득
외로움덩이들이 재갈 물려 있었네
세상은 이미 어느 한 자락도
마음속에 담을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렸다고
한 상 걸게 차려 혼자 앉았네
그들의 몸은 절삭기로도 끊기지 않는
사슬이어서 통째로 들려나갔네
열차는 그들의 묶인 발목을 짓이기고 지나갔네
그리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네
밥을 퍼넣고 밥을 씹고
고기를 씹고 고기를 삼키고
찌개를 떠넣고 찌개를 삼키고
오랜 우물거림의 시간이 목구멍에 걸려있네
그리고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도시의 황혼이
빌딩숲 사이로 빠르게 침몰했네
침몰한 자리는 거대한 입이 되었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밥상 위로
그 캄캄한 입 속에서 하얀 사슬들이 쏟아져 나왔네
류외향
1973년 합천 출생
199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1999년 ≪시안≫으로 등단
시집 ꡔ꿈꾸는 자는 유죄다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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