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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김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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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22회 작성일 05-01-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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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래

매천사(梅泉祠)



대문이 잠겨있다. 문틈으로 마당을 본다.
매화 한 그루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재를 뒤집어쓴 기와 아래
나뭇결 다 삭아 없어진 얇은 마룻널.
산수유 네 그루 담장 너머로 꽃등 내걸었다.
아지랑이 타고 찌르레기 떼 흩어지는 보리밭 길.
담벼락 따라 돌며 집안을 본다.
사당 안쪽으로 또 한 그루의 매화,
볕에 초점 풀린 얼음 동공을 열고 있다.
(녹는 얼음, 추워서 떠는 빛―흰빛, 소름의 빛!……)
저, 뺄래야 뺄 것 없는 무삭(無削)의 뜰에
절명의 시어(詩語)처럼 떨고 있는 싸늘한 향기.
훌쩍 솟은 벽오동 위에서 봉황 대신 까치가 운다.
지리산 시암재에서, 남으로
백운산 도솔봉에서 쉬러 내려온 바람이
한낮에도 어슬어슬 뼈를 시리게 하는 구례 들판.
녹는 땅에 뜨는 뿌리 꽉꽉 밟아주기 위해
그가 오는 들녘은 어디인가.
사당 뒤 대숲의 산비둘기 떼, 대숲 뒤 송림의 맵짠 한숨.
몹시 추웠던 겨울, 되게 앓았던 세한(歲寒) 다 보내고
다시금 꽃샘추위에 몽우리를 맡긴
저 한빈(寒貧)한 이의 새벽, 그리고 죽음.
빙혼(氷魂)과 설산의 흰빛이 봄꿈에 어우러진다.


*매천사는 매천 황현(黃弦 1855-1910) 선생의 사당.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에서 역사서 ꡔ매천야록ꡕ을 저술한 선생은, 한일합방이 되자 네 수의 절명시(絶命詩)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설련(雪蓮)



1.
겨울이 어려웠음을 맑은 운문으로 녹여 낮은 산자락으로 흘려보내는
그의 드물고 정한 노래.

2.
명창이, 죽었다.
축음기에 걸 레코드 한 장 남기지 않고.

그의 노래는 날 때부터 사생(私生)이었다.
태생부터 고아였다. 소싯적
소리의 물길을 더듬어 찾은 스승은 이미 졸하셨고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진 뒤였다.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는 배워야 했다.
소리는 들을 수 없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허공에서, 귀먹은 달팽이관 속에서, 귀 명창들의 무덤 주위에서,
구천에서 떠도는 소리.
그의 소리는 사생이었고 태생부터가 대가 끊긴 소리였고
그의 임종은 절대 가인의 그것처럼 쓸쓸했다.
어쩌면……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그가 입을 다문 게 다행스런 일인지도.
들을 이 없었던 소리, 그 적막한 폐허에서
피를 토하던 목구멍을 기어코 세월이 틀어막은 것은.
절대에 이르고자, 이르고자 안간힘이었던 심장에
재갈을 물린 것은.
자식이 있었으면 소리를 가르쳤을 텐데…… 절세(絶世)의 휘몰아침 끝에
씨앗 하나 남기지 못 하고 명창은, 죽었다.
향년 팔십이었다.

3.
계관(鷄冠)의 피…… 계관의 피……

4.
채 거랭(去冷)하지 못 한
지난 상처에서
언 곳이 살짝 비칠 듯한 노란 꽃잎들.

고라니 발자국 찍힌 삼월 산중턱의 눈.
그리고,
또 누가 다녀간 것일까?

조막손 여럿으로 잔대를 받친 제주(祭酒) 속에서
햇볕과 눈이 함께 녹고 있다.
복수초.

*설련은 이른봄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복수초의 다른 이름.

김영래
1963년 부산 출생
1997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2000년 ≪문학동네≫ 소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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