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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시/장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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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지
黃泉, 體臭 暴風
노란 폭풍이 몰아치는 황지야,
키가 큰 선인장들이 쓰러질 듯 눕는, 아니,
갈대를 닮은 식물, 노란, 노란 줄기 위에 연분홍 이삭,
꽃가루들이 날려, 제비들이 맥을 못추고 떨어지지,
그게 물떼새인지도 모르겠군, ‘길을 잃은’,
아하, 좋군 좋아, 길을 잃은 내
그림자 위로도 그 가엾은 조류들이 떨어지지,
모래가 죽음을 덮고, 죽음 너머로
메탈 블루의 빌딩이 보여, 그곳으로 들어서면,
그곳엔 늘 비가 온다네, 난
비를 맞으면서 뮤지컬 배우처럼 등장해,
「SINGING IN THE RAIN」처럼 말이야,
수위에게 경례를 붙이고, 복도 위로
물은 흐르네, 구두를 적시고, 역시 장화가 필요하겠어,
나는 장화를 신고 등장해, 장화 코를 씻는
물의 웅성거림, 그밖에 타이핑 소리가 들려,
타이핑 소리에 맞추어 따다닥닥 따다닥닥 前進,
하얀 옷을 입은 똑같이 생긴 직원들이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다녀, 낯익은 풍광이로군,
담배를 피워대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고,
복사기는 같은 이야기들을 게워내고,
하얀 부장은 조간 신문을 훑고, 신문은 실망시키지 않지,
전형적인 이야기가 있고, 그런 건 늘 반쯤은 먹힌다나?
커피가 쉴새 없이 식도로 넘어가고,
바람이 불어오네, 내 귀밑머리가 흔들리지 않네,
직원들은 노란 책상, 노란 컴퓨터, 노란 화면 위로
죽음의 역사들을 만들어, 무덤에는 이유가 있지,
그게 모두 문학이 되는 건 아니지만,
노인의 움푹 패인 눈, 노란 눈곱, 가래 끓는 숨소리,
잦아드는 라디오 소리……
영화 배우는 고층 빌딩에서 날아 올랐네,
그가 연기하고 있던 건 물떼새였을까……
저수지 밑의 반쯤 썩은 중년들……
누군가는 납치 상대를 물색 중이지,
피스톨과 잭나이프의 ‘맛간극’,
신용 카드 속에 들어가 관 뚜껑을 닫는 녀석들……
나는 詩의 彼岸에 와 있어, 죽음이 늘 샘솟는 곳,
댁은 대머리 여가수에 대해 물을지 몰라,
「머리 모양이 늘 그대로야.」,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르겠어,
죽음을 팔고, 사지는 못 하고, 언제나 이 모양이지,
내일이 오면 이곳을 잊겠지,
위선을 떨면서, 「낯익은 풍광이로군!」,
다시 오겠지만, 죽음을 파는 회사로 와서,
긴 복도를 지나, 노란 ‘죽음의 碑文들’을 지나,
사장실이 열리고, 거기 내가 있지,
언제나 이 모양이야, 퇴근 시간이면,
노란색 體臭 暴風에 휩싸여, 지하철에서……
노란 폭풍이 몰아치는 황지에.
아담의 뜰
배배 뒤틀린 ‘과학자의 나무’ 둥치에 앉아
아담은 그의 정원을 내려다본다.
분홍색 香霧가 고여 있었다.
이름할 수 없는 꽃과 관목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숨결을 토해내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기어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느리게 포복하는 뱀처럼.
아담의 뜰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괴이했다.
파아란 장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달콤한 탄식에
대기는 멍들었다.
곤충들을 애태우는 그 입김이
그들의 숨통을 찢어 놓았다.
*
전자 현미경, 메스, 핀셋과 삼각 플라스크, 세포 이식과 전기 융합,
열두 개의 달빛 아스라함과 마음속 바람,
과학의 분수에서 솟아오르는 물도 신비의 靈泉 못지않았다.
*
마스크를 쓰고 고무 장갑을 낀 아담이
분무기를 들고 정원으로 들어선다.
아담의 딸은 키 작은 나무를 돌보고 있다.
앵두와 포도가 한 몸에서 대롱거리는 나무,
나무의 주름진 욕망이 그녀의 둥근 어깨를 만진다.
그러나 납빛으로 변하는 낯빛!
나무는 벌써 시들 기미를 보인다.
그녀의 입김이 가지에 닿자
쪼그라드는 붉고 검은 열매들.
아담의 딸은 아버지의 장갑 낀 손을 보고 있었다.
황량한 응시의 脚光이 차가운 빛으로 걸었다.
마스크 뒤의 아담은 彫像으로 서 있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아담은 神의 맨발을 보았다.
DNA 모양의 움직이는 긴 얼룩이
몸 곳곳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듯했다.
장이지
200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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