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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인상/고현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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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거리에서 생긴 일
고 현 진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은 ‘요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였다. 둥글게 생긴 판에 실을 감아 굴리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리듬감 있게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르는 요요 하나만 가지면 나이가 어쩌구 학벌이 어쩌구 하는 문제 따윈 딴 세상 얘기처럼 되버리는 곳이었다. 모임이 있는 날, 사람들은 단출한 스포츠복 차림으로 오른손에 쥔 요요가 마치 호텔 VIP 예약권이나 되듯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났다. 부산 근처에서 회를 썰다 온 나이든 삼십대서부터 해남 근처인가에서 중이 되겠다고 머리를 깎고 들어섰다가 아니다 싶어 그만두었다는 이십대 후반의 남자,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손가락을 혹사시킨 나머지 손의 마비가 오는 바람에 꿈을 접었다는 열아홉 여자애까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겐 몰라주면 서운해할 갖가지 내력들이 쏟아져 나왔다. 게 중엔 무리 속에서 조명받고 싶은 욕심에 자신의 지나온 삶을 조금 부풀렸거나 아예 지어낸 사람들도 없진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어쩌면 그런 거짓말들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들은 지독히도 삶에 지쳤거나 터무니없이 삶이 나른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요요는 열심히 교과서를 넘기는 수험생이나 도마 위에서 양파를 썰고 있는 주부, 가방 속에 보험계약서가 가득한 쎄일즈맨에겐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었다. 머리를 밀고 목에는 굵은 은목걸이를 하고 남자애나 지하철 한 귀퉁이에서 동전을 벌고 있는 늙은이, 퇴직을 당하고 대낮 공원 벤치에 앉아있는 삼십대 은행원처럼 요요는 시간을 벌거나 생각에 잠기기 위한 사람들의 것이다.
채희와 인우도 마찬가지였다. 시내 어느 낯선 까페에 앉아 우유와 콜라와 녹차와 레몬티와 매실과 생강차까지 펜과 메모지를 준비해온 종업원이 아니었으면 일일이 다 기억하지도 못 했을 스무 명의 갖가지 다른 기호에 서로 놀랐던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천일야화처럼 갖가지 사연들이 쏟아지고 낄낄낄 웃음보가 터지고 누군가가 맥주를 시켜대고 씹다만 땅콩 찌꺼기를 흘려가며 체면 따윈 던져버리던 그날의 모임에 그들도 은근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려운 자리 한구석에 쳐박혀 무릎을 꿇고 앉아 쓰잘 때없이 고개나 주억거리고 있거나, 딱딱한 의자에 앉아 네 아니오 만을 반복해오던 일상이 어느덧 뭐 별거나 싶은, 이제껏 콩알만했던 배포가 슬금슬금 자라나는 기분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그들은 꼬부라진 말씨로 고향이 같은 K시라는 것과 게다가 나이까지 동갑이라는 것에 시시덕거리면서 두 손을 마주잡고 과장된 의기투합을 했다. 뭐 술이 있고 낯선 남녀들이 우르르 몰려있는 자리에서 늘 있을 법한 얘기였다. 대수롭지 않은 우연에 감탄해서 친밀감을 만든 다음 술에 취한 여자의 가슴께를 더듬거나 입술 근처를 헤매다가도 다음날 아침이면 말짱 깨어 모든 것을 그놈의 술 때문이었다고 여기고 마는 뭐 그런 심산 말이다. 시작은 있지만 끝은 애매한 그런 모임의 성격상 3차 정도까지를 몰려다니다가 그들은 무리들과 떨어져 외곽 모텔로 들어갔다. 쥐 오줌 무늬가 그려진 침대 곁 사이드 테이블 위에는 두 사람의 요요가 그들을 구경하듯 얌전히 놓여있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적어도 상대의 이름 정도는 기억하는 눈치였고, 채희 역시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요요가 오렌지색이라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묘한 흥분을 느꼈다. 침대 위의 코드 역시 서로를 밀칠 만큼은 아니었다. 다음날 알몸으로 일어난 두 사람은 서로의 요요를 빙그르르 돌리다가 재미있는 계획을 생각해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도망가서 함께 살아보자고. 단 각자의 삶에서 또 다시 어줍잖은 이런 모임을 찾아다니게 될 때까지만. 그들은 복합 영화 상영관에서 낯선 제목의 프랑스 영화 티켓을 쥔 사람들처럼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삶에서 쉽사리 찾지 못 할 새롭고 희한한 골목길을 만난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서울 근교 낯선 신도시에 원룸을 얻어 들어갔다. 약국과 미니 슈퍼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던 사거리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3층 짜리 건물이었다. 그들은 십만 원짜리 싸구려 단면 매트 침대에 이만 원짜리 17인치 텔레비전과 냄비 두 개와 숟가락 몇 벌, 그리고 아무리 나사를 꽉 조여도 흔들거리는 행거 따위가 전부인 소꿉장난 같은 살림을 사들였다. 아침이면 텔레비전을 보고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위해 신문 쪼가리를 들여다보다가 배고프면 닥치는 대로 섞어 만든 비빔밥을 비벼 먹었다. 노을이 지는 어스름이 되면 창문을 열어놓고 요요를 연습했다. 빙그르르 떨어지는 요요는 자전과 공전을 함께 하는 지구처럼 스스로 팽글팽글 몸을 굴렸다.
“이 진동이 얼마나 짜릿한 줄 알아? 요요는 이런 게 생명이지. 마치 심장을 가진 인간처럼 부르르 떨어댄단 말이야. 마치 오르가즘을 느끼는 남자가 사정하는 것처럼 말이야. 대개 세상의 많은 남자들의 목적이 그런 순간이듯 몸을 떨지 않은 요요는 죽은 것과 다르지 않아.”
인우는 그 흔한 요요 기교조차 없이 단조롭게 왔다 갔다를 반복하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피아노 위에서 은빛 화살을 좌우로 흔들어대던 메트로놈처럼 그의 손목이 리듬감 있게 솟구쳤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채희의 눈에 요요를 잡느라 굳은살이 박혀 있는 그의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이 보였다.
“난 요요를 굴릴 때 그런 생각 안 해.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 요요를 하는 사람이 어딨어? 다만 우리는 요요를 통해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잖아. 반복하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긴장을 늦추면 엉망이 되어버리는 요요 때문에 우리는 시선을 빼앗겨야하니까.”
“그건 요요 초보 때 얘기지. 우리 그날 같던 모임에서 들은 얘긴데, 요요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거야. 술판이 진탕이라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요요를 깊이 알아가면 알수록 사람들은 요요에 중독이 되게 되어있데. 요요라는 단어만 해도 그렇잖아.”
“요요?”
“그래, 요요. 어쩐지 구차한 우리 인생을 비웃는 것 같지 않냐? 혀를 내밀거나 가운뎃손가락을 빼는 일같이 유치한 비웃음 말고, 한차원 업그레이드 된 냉소 말이야. 입에 잔뜩 공기를 빼고 입술을 둥글게 모아 이죽거릴 때나 나는 소리잖아.”
“너처럼 복잡하게 사는 사람, 재미없어. 그런 얘기 따분해.”
채희는 핫팬츠 차림으로 껌을 문 채 앉아서 골을 냈다. 그런 심각한 얘기를 하고 나면 어쩐지 수십 개의 다리로 서로의 몸뚱이를 옭아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채희는 인우의 까칠한 뺨에 키스를 하고 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몸의 균형을 잃은 그의 요요가 핑그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리듬감을 잃은 그가 오른손에 달린 요요를 내팽개치고 그녀의 길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현재만 생각해도 이렇게 복잡한데. 그지?”
채희는 인우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인우의 가운데 손가락 사이에는 아직도 요요의 실이 끈덕지게 붙어있었다.
신도시의 원룸은 삶에 정착해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쪽이거나 반대로 정착된 삶을 밀어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비싼 전세금을 내지 못 하는 형편 때문에 원룸에 들어와 보증금 얼마에 월세를 꼬박꼬박 내가면서 적금을 붓고 보험료를 내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방 하나에 보증금 얼마를 쳐 박고 다달이 밀려가는 월세를 고스란히 보증금에서 제하며 우편함에는 언제나 서너 군데의 독촉장들이 가득 찬 사람들이거나.
두 사람은 삶에서 새롭게 찾은 희한한 골목길을 금방 없애고 싶진 않았으므로 하루에 몇 시간씩은 도서대여점 데스크에 앉아 만화책을 빌려주거나, 갈비 집에서 목살을 썰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면 새로 생긴 PC방을 찾아다니며 게임을 하고 컵라면을 먹고 요요를 쥐고 밤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시간이 남으면 할인마트에 가서 도브샴푸나 신라면 한 박스를 사기도 했다. 인우는 쇼핑 카트를 밀다가 가끔 마트 한 귀퉁이에 있는 시계점에 멈춰섰다. 시계는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어떤 비디오 테잎을 빌리거나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봐도 상관없지만 벽시계만은 그렇게 안 된다는 식이었다. 그는 원목으로 되어있는 동그란 시계, 식당에나 걸려있을 법한 검은 테두리의 큼지막한 바늘의 플라스틱 시계, 메탈 소재로 되어있는 날렵한 은색 시계 등을 찬찬히 구경하다가는 이내 표정이 일그러지곤 했다.
“저런 시계를 보면 너무 화가 나.”
“평범한 시계를 왜?”
“저런 건 어제와 오늘이 겹칠 수밖에 없잖아. 어제의 한 시와 오늘의 한 시가 너무도 똑같은 모양이란 말이야. 지겨워. 저런 시계를 방안에 걸어두고는 단 한 시간도 살고 싶지 않아.”
“그럼 니 맘에 드는 걸루 골라봐, 어차피 집안의 시계는 하나 있어야 하잖아.”
인우는 마치 결혼 예물을 고르는 신랑 같은 얼굴로 곤혹스러움과 신중함이 뒤범벅된 채 물끄러미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시계 하나를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저 정도라면, 시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은 바늘이 없는 디지털 시계였다.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알릴 때나 보았던 네모난 모양들의 숫자들이 붉은 색을 띤 채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채희가 아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연도부터 월, 일, 몇시 몇분에 AM이나 PM까지 표시된 저 복잡한 걸 집에 걸어두겠다고?
“저걸로 사겠어. 내일, 같은 시간이 되어도 날짜를 가리키는 숫자는 바뀌게 되니까 절대로 이 시계는 반복되거나 되돌아가지 않아.”
채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동안 인우는 엄마 맘이 바뀔까 조급해 얼른 물건을 사놓으려는 어린녀석 같은 얼굴로 황급히 시계를 계산하고 카트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미처 그녀의 얼굴도 확인할 겨를이 없이 저 혼자 한결 평온해진 얼굴을 하고서 먼저 유유히 시계점을 빠져 나왔다.
“시계야 아무거나 괜찮지만, 하필 저렇게 복잡한 시계가 필요할 껀 또 뭐야?”
채희는 슬리퍼를 찍찍 끌어대며 마트에서 벗어나 신라면 박스를 어깨에 지고 있는 인우를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글세……, 작년 1월 1일과 올해 1월 1일이 똑같다고 믿는 멍청이들에 대한 반항? 손으로 코를 잡고 그 자리에서 팔십 번씩 맴을 도는 자들에 대한 냉소?”
“그럴 때 보면 너 꼭 싸이코 같더라. 다른 사람들 사는 것처럼만 살 수 없어? 요요 전문가가 되면 다들 그러니? 정말 개똥철학들만 뱃속에 가득 차 가지고. 그거 일종의 변비 아니니?”
채희는 어깨에 물건을 진 인우의 걸음을 앞질러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뒤에서 인우가 뭐라고 지껄여대는 소리가 들렸다. 채희는 귀를 틀어막고 되는 대로 노래를 불러댔다. 밤거리의 가로등에 비춰진 제 그림자가 한껏 길어졌다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야, 제발 같이 좀 가.”
원룸 앞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인우가 퉁퉁 불은 라면을 먹는 사람처럼 악을 쓰듯 소리를 내질렀다. 채희가 홱 돌아 그를 쳐다보았다.
“왠지, 이 사거린 오싹하단 말이야.”
“아깐 젤 왕따 같은 시계를 끌어안고 오시더니, 이젠 괜한 사거리가 맘에 안 든다구?”
“그래. 어쩐지 기분 나쁜 기억이 떠올라.”
“도시에 흔한 사거리인데 왜 그래. 내가 살던 동네에도 약국과 슈퍼가 있는 사거리는 있었어. 꼭 이만큼이었다구.”
“그런가? 이 사거리는 정말이지, 그 동네 사거리와 닮았는 걸.”
“또 개똥철학 나오시네. 우리 동네도 그랬다니깐. 참네. 난 사거리는 질색이야. 사거리에 서있으면 사방 팔방으로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 때문에 시간이 한참씩 정지되는 기분이거든. 사거리는 청춘을 한 움큼씩 잡아먹는 곳이야.”
채희는 낯익은 K시의 사거리가 떠올랐다. 자동차는 횡단보도에 푸른 신호등이 켜졌는데도 씽씽 우회전을 해대고, 한 귀퉁이에선 접촉 사고가 나서 운전자들이 멱살을 쥐고 있고, 또 한 구석에 있는 인형 판매기에선 어린 녀석들이 줄래줄래 붙어있던, 지독히도 바쁘던 그 사거리.
누구에게나 청춘을 보낸 낯익은 사거리가 있겠지만 채희는 어쩐지 그 사거리만 떠올리면 머리채를 잡힌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사거리 한 귀퉁이에 있던 조그만 악기점 때문이었다. 흑백 필름 속에 도드라진 붉은 반점 같은 곳. 악기 광택용 왁스로 반질반질 닦인 기타와 드럼들이 붉고 푸른 반짝임을 뿜어대던 곳.
악기점 주인은 언니 채연의 애인이었다. 바구니에 담긴 노란색 악보 피스들 중에서 아무거나 하나를 뽑아 가지고 내밀면 둥근 콘트라베이스 의자에 앉은 그는 어떤 곡이나 능숙하게 쳐주었다.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언니는 왁스를 묻힌 걸레로 기타를 닦거나 베토벤, 바하 명곡집을 정리했다. 채희는 학교가 쉬는 날이면 악기점에 찾아가 언니의 데이트를 훼방 놓으며 뜨거운 순대를 먹거나 오뎅 국물을 마셨다. 사거리에서 깜빡이는 불빛조차 슬프게 느껴지던 천장이 낮은 악기점의 비의가 어쩐지 고등학생이던 그녀의 소녀적 감성에 잘 맞았던 모양이었다. 남자는 알브라함의 추억이나 스페인 춤곡 따위를 가르쳐주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 옆에 있는 언니는 마치 가게에 놓인 또 하나의 악기처럼 그곳과 잘 어울렸다.
토요일 밤이나 일요일 오후쯤에 그들은 그녀에게 가게를 맡기고 방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손님이라 해봤자 리코더나 하모니카를 사려는 어린애들이나 사백 원짜리 피아노 피스를 사려는 학생들뿐이었으므로 그녀가 가게를 지키지 못 하리란 법도 없었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나면 그녀는 마치 악기점 주인이나 되는 것처럼 팔을 걷어붙이고 악기점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바이올린, 통기타, 일렉트릭 베이스, 만돌린. 퉁퉁 줄을 튕겨보거나 딱딱 두들겨보기도 하고, 남자가 치던 기타를 놓고 피크를 쥐어 잡고는 둥그르르 줄을 튕겨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딱 한번, 무료해진 그녀가 그들이 몸을 숨긴 방을 엿본 적이 있었다. 방이 딸린 가게가 으레 그렇듯 방에는 조그마한 유리문이 박혀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훔쳐본다는 죄책감도 없이 유리문을 향해 그들을 바라보았다. 언니의 희디흰 몸뚱이 위에 그의 등짝이 얹혀 있었다. 그들은 나체로 레슬링 경기를 하는 것처럼 일정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천천히 언니의 얼굴을 매만졌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떼려고 했을 때 쨍, 하는 햇빛처럼 채희의 눈에 남자의 손가락들이 보였다. 손가락 세 개의 마지막 마디가 없었다. 그는…… 오른손 불구였다. 피크를 쥔 손을 늘 웅크리고 있었기 때문에 보지 못 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가슴이 쿵쾅거려 더 이상 그 장면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언니는 손가락 세 개가 불구인 남자와 사랑에 빠져있었던 거였다.
그제서야 악기점에 공기 입자처럼 떠다니고 있던 비의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악기점 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왔다. 사거리로 나와 어서 그들에게서 몸을 숨겨버리고 싶었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셔츠가 삐져 나왔다. 머리채를 틀어 잡힌 오싹한 기분이었다. 그때만큼 사거리의 붉은 신호등이 미웠던 적은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다신 그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인우의 말이 아니더라도 어쩐지 원룸 앞 사거리는 그 동네 사거리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악기점만 없을 뿐, 약국과 작은 슈퍼가 있는 것부터, 어디어디 족발집이나 한정식당의 현수막들이 줄래줄래 걸려있는 거리, 보습학원과 찻집의 분위기까지 비슷했다. 사거리라는 곳이 늘 야구장 매표소나 터미널처럼 어딘가 정착하기 위해 잠시 모여있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장소라서 그런가.
“살면서보니 우리가 살던 K시와 비슷한 곳이라는 기분이 들어. 이상하지? 오래 전 살았던 곳에 다시 돌아온 느낌이 든단 말이야.”
원룸 복도에서 난 창가에 서면 채희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인우는 전생의 여자를 다시 만난 사람처럼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침에 그들이 눈을 뜨면 맨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디지털 시계의 붉은 색 숫자들이었다. 11월 6일이었다. 어딘지 불길한 느낌이 드는 숫자였다. 채희는 다시 눈을 감고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길게 살고 싶지 않은 날이었으므로 오랫동안 죽은 듯 자야했다. 엎드려 옆에 있는 인우의 목 언저리를 안으려고 팔을 뻗었을 때 갑자기 인우가 장작처럼 뻣뻣한 몸을 바짝 일으키며 말했다.
“너 삼 년 전 오늘, 무슨 일이 일어났는 줄 기억해?”
“우리 수능 봤던 날 아니야?”
채희는 졸음의 끄트머리를 놓치지 않도록 두 눈을 감은 채로 나직하게 내뱉었다. 인우는 두 사람이 동갑내기라는 것이 참 잘 된 것 같다는 식의 소박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너도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난 언어와 수리영역를 절반쯤 찍고는 오후엔 잠이 들었지. 감독관이 날 보더니 피식 웃더라고.”
최면에 빠지는 사람처럼 채희의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이내 채희의 규칙적인 숨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난 아예 시험도 치르지 못 했어. 악마 같은 일이 생겼거든. 모두 그 년 때문이었어.”
인우는 이가 갈린다는 듯이 시계를 노려보았다. 11월 6일이 되면 에베레스트 산을 오르다 실패해 산언저리에 파묻힌 등산가나 알몸으로 전기 고문을 당하다 모든 사실을 실토하기 된 간첩이 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시끄럽게 너바나의 메탈을 듣고 머릿통을 쥐어뜯어 스타크래프트를 하고 의식을 빼앗기기 위해 요요를 굴려보아도 언제나 그 날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시 집요하게 가을은 돌아왔고, 11월의 달력이 벽에 붙고, 사람들은 작년치 외투를 꺼내 입었다. 괴롭고 싫었다.
인우는 자신이 벅벅 민 머리로 요요나 굴리며 이작저작 살게된 것이 모두 그날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였을는지도 몰랐다. 아무리 저명한 과학자나 수학박사라도 나쁜 일의 원인으로 명백한 과거의 한 시점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한 법이다. 나쁜 일은 병균처럼 스멀스멀 인체에 기생하다가 어느새 톡, 암세포를 터트리는 것이니까. 어쩌면 그날의 사건이 아니었을지라도 인우의 부모는 언젠가 갈라져버릴 균열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또 모를 일이어서 그날의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달그락거렸던 인우의 부모도 갑자기 아무렇지도 않게 관계가 좋아졌을는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들은 늘 악연처럼 굴었다. 저렇게 싸울 남녀가 왜 붙어서 교접을 하는 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들이 싸우는 날이면 책상에서 수학정석 책을 끌어안고 있던 인우는 귓구멍을 막고 싶어졌다. 어머니는 이제 지쳤다고 울부짖었다. 어린애들을 상대로 한 장사가 호황이라는 소문을 듣고 흔들 그네라면서 녹슨 고철 더미를 집안으로 매고 들어는 아버지의 그 어수룩함에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고. 아버지는 한 시간에 만 원 하던 노래방이 한시간 반에 이천 원으로 떨어질 때 노래방을 계약하고, 새로 손을 대기 시작했던 땅은 곧이어 개발 제한구역으로 정해지던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손에 닿은 물건들은 모조리 흑색 돌덩이로 변하는 것만 같았다. 만 원짜리가 없는 가정은 웃음소리도 없었다. 어머니는 보험 설계사로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집안의 천장은 낮아지기만 했다. 인우는 마른 얼굴을 쓸어내며 그들이 싸우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책상 앞을 지켰다. 씨그마와 로그와 미분과 적분이 가득 메운 연습장엔 붉은 피가 톡톡 떨어지기도 했다. 흑연투성이의 연습장에 붉은 피가 번지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꼭 좋은 대학엘 들어가 K시를 떠나야겠다고 다짐하곤 했다.
수능시험 날이 마지막 도전의 기회였다. 인우는 에베레트스 산을 등정하기 위해 탄탄한 가슴을 쓰다듬는 등산가처럼 컴퓨터용 수성 싸인펜과 오답노트, 그리고 수험표를 챙겨 넣었다. 출발선에 선 육상 선수 같았다. 정신은 맑았고 머릿속은 노란 백혈등이 반짝 하고 들어왔다. 외출을 삼가던 아버지가 오랜만에 고물차의 시동을 걸어 운전석에 앉았다.
“인우야. 열심히 해라. 아버진 널 믿는다. 아버지는 운이 나빴지만 넌 아닐꺼야. 알았지?”
아버지는 백미러를 향해 인우에게 말했다. 아버진 인생의 전반을 실패한 자들이 으레 그렇듯 나름대로 설득력 있는 근거들로 자신의 삶을 변명할 줄 알았다. 어쨌거나 그 역시 아버지 같은 삶은 살기는 싫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왔지만 도로는 꽉 막혀 있었다. 인우는 땀이 나는 두 손을 모아 쥐고 교차로마다 붉은 신호등을 사형선고나 되는 것처럼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푸른 신호등이 닥치면 아버지 빨리요, 라면서 운전석을 재촉했다. 차는 RPM을 높여 속력을 내었다. 그럴 때마다 인우는 가슴이 쿵쿵 내려앉았다.
인우의 머릿속에 집합부터 방정식, 함수와 지수와 로그에 이르는 수학 정석 책이 한 장씩 그려졌다. 그는 눈을 감고 차근차근 되씹으면서 숫자들의 감각을 익혔다.
“이러다간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 할지도 모르겠는걸.”
아버지는 막힌 정체 구간을 피하기 위해 한산한 외곽도로를 택해 급커브를 했다. 인우의 몸이 왼쪽으로 기우뚱했다. 외곽도로는 넓었고 차들은 한산했다. 아버지는 80킬로미터로 속력을 높였다. 거리의 간판들이 씽씽 지나갔다. 교차로의 신호등은 푸른색이었다. 아버지는 푸른 신호등이 켜져 있는 동안 반드시 저 사거리를 지나쳐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 지그시 엑셀을 밟았다. 차가 속력을 못 견디는 듯 윙, 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자동차가 푸른 신호등 밑을 지나려는 순간이었다.
퉁.
끼익익.
그때였다. 인우의 몸체가 순간 앞으로 꼬구라졌다. 아버지의 둔탁한 비명소리에 귀가 찢어질 것 같았다. 핸들 앞에 머릿통이 부딪친 아버지가 고개를 바싹 들고 앞쪽을 바라보았다. 한 여자가 본네트 위에 쓰러져 있었다. 인우는 뼈 마디마디가 바싹 말라붙은 듯 몸이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유리창은 머리통이 붙은 여자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 붉은 피로 범벅이 되고 있었다. 무서운 광경이었다. 아버지는 차에서 내려 여자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여자는 아스팔트 바닥으로 픽 쓰러졌다. 인우는 정신이 몽롱했다. 워낙 시험 때문에 긴장했던 탓인지 인우의 머릿속에서는 뒤섞인 지구와 로그, 함수와 적분 따위뿐이었다. 도로 위는 뒤에서 상황도 모르고 울려대는 클랙션 소리와 핸드폰을 꺼내 연락을 하면서 웅성거리는 행인들, 여자의 몰골에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로 엉망진창이었다. 어쨌거나 인우는 피 흘리는 여자의 걱정보다도 시험을 보러가고 싶다는 욕심이 앞섰다. K시를 떠나기 위해서 오늘을 기다려오지 않았던가.
“분명 파란 불이었으니, 아버진 걱정하지 말아라. 어서 시험을 보러가야지.”
아버지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인우에게 택시를 태워주었다. 시간에 촉박했지만 시험을 못 치를 정도는 아니었다. 수험장에 도착한 인우는 낯선 고등학교의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로 손을 씻고 얼굴을 때렸다.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할 수 있어, 다짐했다.
하지만 심호흡을 훅 내뱉은 인우의 머릿속에 아까 본 여자의 붉은 피가 떠올랐다. 잔인한 살인사건처럼 1미터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여자의 터진 머릿통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붉은 핏물. 깊은 밤 인터넷 엽기동영상에서나 보았던 배를 난자 당한 채 죽어가고 있는 시체가 자신의 몸뚱이 앞으로 던져진 듯했다. 인우는 머리를 뒤흔들고 고사장으로 들어왔다. 숨을 죽인 채 시험지를 받았다. 미칠 것 같았다. 칠판으로 고개를 들면 급훈이 적어진 작은 액자의 유리창이 쨍하고 빛나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거울처럼 반짝이는 유리창들이 햇빛을 받아 어른거렸다. 인우는 머리를 쥐뜯고 싶었다. 인우는 시험지 위에 샤프를 콕콕 찍어 내리며 그녀가 죽지 않았으면 제가 그녀를 죽여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싸이렌 소리처럼 지독했던 끝 종이 들릴 때까지 그는 한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 했다.
11월 6일 하루종일 두 사람은 의미 없는 코메디 프로그램이 왕왕대도록 내버려두었고 벽을 향해 돌아앉아 요요를 돌렸으며 상대에게 묻지도 앉고 혼자 컵라면을 끓여먹었다. 디지털 숫자가 2에서 3으로 5에서 6으로 변하는 한 찰라를 지켜보기 위해서 시계를 한참을 노려보고 있기도 했다. 시간은 누군가가 죄여놓은 듯 더디게 흘러갔고 그들은 지겨운 시간이 늘 그렇듯 졸음도 밀려오지 않았다.
해가 지자 마라톤을 끝낸 선수들처럼 파김치가 된 두 사람이 몸을 가누지 못 하고 벽에 기대어 널브러졌다.
“너 혹시 전에 먹다 탈나서 절대 안 먹는 음식 있어?”
채희는 인우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단조롭게 중얼거렸다.
“음……, 땅콩?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씹어먹고 버스를 타는 내내 토하느라 몸을 가누지 못 했지. 그 후로는 땅콩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아.”
“땅콩 따윈 먹지 않으려고 마음먹으면 먹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루란 도무지 살지 않을 방법이 없어서 짜증나. 11월 1일부터 절대 잠을 자지 않았다가 6일날 몰아 자는 방법이 아니라면 말이야.”
“너…… 혹시 오늘 생일이야?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생일, 뭐 이딴 거 가지고 마음 상한 거야?”
인우가 눈이 똥그래지자 채희가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니야. 말하자면 너무 길어서 오늘이 다 갈까봐 얘기 못 하겠어.”
“오늘이 다 갈까봐 걱정인 게 아니라 매년 오늘이 되면 너도 모르게 아무나 붙잡고 그 얘기를 하게 될까봐 싫은 거겠지.”
“그렇게 비꼬지 마. 너에게 11월 6일이 무슨 일을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만큼은 아닐 테니까. 니가 고작 하는 얘기라고는 언어영역이 어려워서 10점이 떨어졌어, 갑자기 기침이 나오는 바람에 영어듣기를 제대로 못 들었어, 따위일 거면서.”
“알지 못 하는 거 가지고 넘겨짚는 여자애만큼 재수 없는 스타일은 없다, 너.”
“그럼 말해 보시던지. 누구 인생이 어느 만큼 어그러진 일인지 재보자고.”
“그날은 내 아버지가 얼마나 운 나쁜 인간인가를 철저하게 깨달았던 날이었지. 어머니는 그 사건으로 인해 불행은 대물림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말이야. 난 수능을 망치고 재수생이 되어 다음해 입시학원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았지만 집안은 이미 이혼이다 위자료다 난리법석이었지. 쥐뿔도 없는 집안에서 터지는 이혼은 막말로 고물냉장고와 스프링이 고장난 침대를 누가 갖느냐고 싸우는 것과 같았지. 난 집을 뛰쳐나와 요요를 굴려대며 거리를 배회했어. 아, 부아가 치밀어서 더 이상은 말 못 하겠군.”
“누군가 죽는 일은 날짜를 모른다면 참 좋을 텐데. 11월 6일 날, 언니가 죽었어. 난 그것도 모르고 태평스럽게 수능 고사장에서 언어영역을 답을 찍고 수리영역 시험지 위에서 사다리타기를 했다니까. 지금 생각하면 시간이라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노릇이지. 언니가 죽는 순간, 나는 태평하게 햇살이나 쳐다보면서 발을 까딱이며 시험지를 풀었을 것 아냐? 어쩌면 언젠가 죽을 언니였는지도 몰라. 언닌, 손가락 세 개가 불구인 기타리스트를 사랑했었거든. 언닌 임신 중이었고 어머니는 언닐 찢어 죽이겠다고 달려들었어. 차라리 자취를 감추는 게 나를 돕는 일이었으련만, 왜 하필 잊혀지지 않을 그날에, 파란 불을 지나는 자동차에 얼굴을 박고 자살을 했는지 몰라.”
“자살?”
“왜?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소름이 돋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 자동차의 주인은 울 언니 장례식 날까지 쫓아와서 난리를 떨어댔지. 울 언니 때문에 집안이 완전 망가져 버렸다고 소리지르면서. 그 꼬락서니하고는.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남의 차에다가 코를 박았냐더군. 죽은 여자 앞에서 그게 할 말이니? 내가 다시 정체 불명의 그 남자를 다시 만난다면 뺨을 쳐버릴꺼야.”
“혹시? 백동약국 사거리 아니야?”
인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채희가 대꾸했다.
“뭐? 너도 그걸 보았니? 참 우린 같은 K시에.”
“잠깐, 똑바로 말해봐.”
“갑자기 왜 그래, 왜 화를 내려구그래.”
“똑바로 말해봐, 오전 7시 50분? 백동약국 사거리 자동차에 뛰어든 여자가 니 언니였어?”
인우의 입술이 떨려왔다. 심드렁했던 채희의 머리가 순간 독기를 품은 뱀처럼 바싹 쳐들렸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아냐구?”
“니 언니가 날 파멸시켰던 그…… 여자란 말이야?”
인우가 벌떡 일어났다. 두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면서 방안을 서성거렸다. 채희는 참담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인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뻘개진 눈으로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뒷주머니에 찔려있던 요요를 벽 쪽으로 집어던졌다. 파지직, 하며 요요의 플라스틱 본체가 냉동댕이쳐졌다. 깨진 요요 조각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어쩌면 내 언니의 죽음을, 그렇게 잔인하게 생각할 수가 있어?”
“뭐? 그렇다면 니 언니의 죽음 때문에 왜 나는 이런 인생이 되어버린 거지?”
“지독해. 넌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야.”
“오히려 이기적인 건 너의 언니야. 죽음을 선택한 사람은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게 마지막 도리야.”
채희는 머리를 감싸쥔 채 쪼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만해. 우리가 왜 하필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거지?”
“…….”
“11월 6일이라서야. 다른 날이었다면 소주를 열 병을 마셨어도 꺼내지 않았을 얘기를 왜 우린 이 자리에서 해버린 거야?”
“지겨워, 지겹다고. 이 구질구질한 인생들이 너무나 지겨워.”
채희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 하늘에서 차가운 유리조각들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흑백 사진처럼 아스라한 사거리 속 붉은 반점 같던 악기점이 집요하게 따라와 기어이 머리채를 휘어잡는 것 같았다. 근육이 솟은 팔뚝으로 벽을 쾅쾅 쳐대는 인우를 말릴 틈도 없었다. 술에 취한 사람들처럼 지구의 자전하는 속도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어렸을 적 눈을 질끈 감고 손은 코를 잡고 열 바퀴씩 몸을 돌려댔을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이들은 웃었고 선생님은 박수를 쳐댔다. 머리가 어지러워 도무지 계속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하늘은 땅으로 꺼지고 땅은 위로 솟구쳤다. 머릿속이 빙빙 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주받은 자동인형 같았다.
눈물이 그친 것은 깊은 밤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잦아드는 깊은 밤. 정신 없는 홍수에 집이 씻겨나간 것처럼 기분은 허탈하고 추웠다. 인우와 채희는 바닥에 이불도 없이 누워 천장을 보고 있었다.
“우리 모임에 갔던 날, 요요가 인생의 축소판이라던 사람의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필리핀 말로 요요는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래.”
“잊고 싶은 옛 기억 말이니?”
“……옛 기억만 그러는 건 아니지. 시간과 날짜와 계절은 언제나 돌고 돌잖아. 우리는 언제나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면 케잌을 놓고 촛불을 불던가, 죽은 사람이 좋아하던 과일을 놓아두곤 향을 피워대.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난 니 언니의 죽음을 평생 저주하게 될 꺼고, 넌 내 아버지를 저주하며 살겠지. 요요는 항상 회전을 반복하다가도 다른 요요와 부딪치면 실끼리 맞닿아 핑그르르 엉키게 되어있지……. 우린 너무 가까워져 버렸어.”
“……절대 너를 잃고 싶지 않았는데.”
“회전목마를 탈 때 가장 무서운 일은 회전 목마가 멈추는 일이 아니라 회전 목마가 멈추지 않는 일이야. 우린 평생을 이런 짓거리를 계속하겠지. 누군가와 한 그릇에 숟가락을 담가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함께 입을 맞추고 말이야.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이 세상 숱하게 놓여있는 사거리를 지나가겠지. 상대 차가 이 거리를 지나기 전 무슨 일을 벌였는지 우린 아무도 알지 못 해. 부딪치면 우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태에서 내 얘기만 주절대다가 문을 닫으면 그만이야.”
“……이게 우리의 골목길이 막다른 곳에 도착했어.”
인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로를 끌어안았다. 알맞게 식은 물 같은 서로의 체온이 느껴지자 뜬금없이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낯설고 새로운 곳을 찾아다니길 위해 K시를 떠나왔지만 약국과 미니 슈퍼와 아이스크림 가게와 인형 자판기가 있던 사거리는 늘 그들을 따라다녔다. 자신의 요요가 만드는 공간 속에서 달리고 또 달리다 주저앉아 뒤를 돌아보면 예전에 넘어졌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작년 그 외투를 껴입은 채 피를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제 신도시의 사거리를 벗어나 다른 낯선 곳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모임’이거나 ‘사탕을 아끼는 모임’이 될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카메라를 어깨에 맨 전국 각자의 사람들이나 사탕을 볼에 가득 담은 이들 사이에 섞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술을 퍼 마시고 우습지도 않은 얘기에도 박장대소할 것이다. 그리고 하도 웃는 바람에 눈물까지 찔금거리면서 옆 사람에게 물을 것이다.
“고향이 어디죠? 아, 그 신도시요, 예전에 내가 살았던 적이 있는 걸요.”
“우리는 세 살 차이가 나는군요. 남녀는 세 살 차이가 가장 좋대요.”
그들은 대화하며 손을 만지고 어깨를 기대며 은근한 눈빛을 보낼지도 모른다. 운이 좋다면 취기를 빌미로 근처 모텔에 들어가 서로의 몸을 더듬을 기회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적극적인 사람이라면 혹, 섹스를 시작하기 전 우리 함께 살까요?라고 제안할지도. 낯선 사람의 몸체 위에 몸을 얹을 때 잠시금 어지러움을 느끼겠지만 참아내야 한다. 멈추지 않은 회전 목마를 탄 사람들에게 늘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당선소감
왼손잡이인 제가 처음 글씨를 배울 때 어머니는 제 왼손을 붕대로 묶어두셨습니다. 그리고 제 겁먹은 눈동자를 바라보시면서 이건 틀린 손이라고, 이 손으로 글씨를 배우면 바보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붕대로 왼손을 감은 저는 문고리를 잡을 때나 수저를 들 때, 등을 긁으려 할 때 뭉툭한 손에 쿵쿵 부딪혀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전 물건을 받을 때 무의식적으로 내밀게 되는 왼쪽 손을, 닭싸움을 하게 될 때 버티게 되는 왼쪽 다리를, 팔씨름할 때 괴력을 쏟아내는 왼쪽 팔뚝을 무서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서울 때는 무서움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앞서 그것들이 늘 필요한 곳에 저절로 사용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대할 때마다 쭈뼛거리며 남들보다 한발짝 뒤쪽에서 맴돌았던 것은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는 어느 순간, 번쩍 왼손을 들고 소리치게 될까봐 저는 무서웠던 모양입니다.
얼핏 보면 이 세상은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는 사람만 모여 사는 것 같지만, 개중에는 저처럼 오른손을 억지로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왼손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그렇게 간혹 끼여든 불청객 같은 사람들에 대한 애착은 제 생의 불빛이었습니다.
한평생 방안에 틀어박혀 글이나 읽어도 행복해할 저에게 이런 과분한 상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멀고 아득한 불빛 한 점을 따라 저는 가겠습니다.
고현진
1980년 광주 출생
1998년 이화여대 여고백일장대회 장원
전남대학교 고교생경시대회 산문부 대상, 호남예술제 산문부 장원
1999년 전남대학교 문예특기자 입학
2002년 전남대학 신문사 주최 단편소설 현상공모전 당선
▮심사평
젊은 세대들에 의해 갈수록 문학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고 있는 실정에서 <리토피아 신인상 소설>에 응모된 소설의 수준은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모두 문학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창작의 주제와 그 형상화에서 남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점이 돋보였다.
이번에 응모된 작품들 중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작품은 김설아의 「히피소녀를 사랑하다」와 고현진의 「사거리에서 생긴 일」 등 두 편이다. 두 작품을 놓고 여러 논의를 나눈 끝에 고현진의 「사거리에서 생긴 일」을 당선작으로 선정한다. 김설아의 「히피소녀를 사랑하다」의 경우 신인으로서 기존의 낯익은 서사로부터 과감히 탈피하여 새로운 세대의 문화감각을 충분히 살리고 있는 것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그에 걸맞는 주제가 제대로 형상화되지 못 한 점이 가장 아쉬운 점으로 부각되었다. 고전적인 얘기지만, 형식과 내용을 어떻게 어우러지게 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그에 반해 고현진의 「사거리에서 생긴 일」은 단편소설이 갖추어야 할 구성이 탄탄하며, 무엇보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데 응집력을 보이고 있다. 다만 그러다 보니 치명적인 약점으로 거론되었듯이, 다소 작위적인 결말과 군더기와 같은 삽화가 문제점으로 언급되었다. 이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소설의 미학성에 대해 치열한 탐구를 보이는 고현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신인으로서의 가능성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김설아를 비롯한 낙선자 모두 소설 창작에 더욱 분발하여, 한국문학에 새로운 디딤돌 역할을 맡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리토피아 편집위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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