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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산문/배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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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296회 작성일 05-02-20 18:48

본문

<산문>

동해남부선을 달리네

배 경 숙
(시인)



  스무다섯 살 이후,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나의 가슴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어릴 적 동해남부선의 덜컥거리는 기차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가슴에 비를 내리게 하는 습기였고 달콤한 충동이었다. 무작정 떠나고 싶은 반란이었다. 젊은 날로 회차하는 오래된 편지였다. 가슴속의 남은 열량을 소진해야할 의무처럼 끊임없이 달려가게 하는 유혹, 여행에의 초대장이었다.

  그때 나는 여고를 막 들어갔었고 동해남부선 기차를 타고 서생 바닷가의 국민학교 동창 모임에 갔었다. 그날, 산언덕의 하얀 때죽나무꽃은 은은한 향으로 수십 개의 은종을 살풋이 울리고 아까시꽃향은 설레는 벌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숙소로 정한 작은 방의 낮은 천장에는 서까래가 드러나고, 서까래 사이로 군데군데 황토가 떨어져나간 것이 보였다. 곰팡이 냄새인지 메주 냄새인지도 섞여 케케묵은 벽지는 누렇게 바래 있었다. 방바닥은 구들이 약간 내려앉아 갈라지고 탄 곳의 흙바닥이 그냥 드러나 보였다. 작은 창은 갯내를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세찬 바람도 그 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밤이 깊어지자 해경들이 비추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번쩍번쩍 도깨비불처럼 번쩍였다. 더러는 밖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담소와 통기타에 맞춘 노랫소리로 밤을 밝혔다.
그날 밤 바닷가의 그 집에는 호롱불을 켰었다. 우리는 방 한가운데에 펴놓은 때에 절은 이불 아래에 다리를 묻은 채 밤을 지새웠다. 작은 창은 갯내를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세찬 바람도 그 창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파도 소리가 밤새 귓전에서 떠나질 않았고 달빛도 별빛도 축축한 습기를 머금고 그냥 쏟아지고 있었다.
그날 그 바닷가 오막살이집에서 나는 진수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그후 언제나 나를 동해남부선으로 달려가게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될 즈음의 어느 날 영선과 나는 마을 뒷산자락으로 산책을 나갔다.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산사나무, 팥배나무……. 장대산 자락은 숲으로 가득 차고 도요새, 휘파람새, 꾀꼴새, 파랑새의 울음소리가 더욱 청량했다. 콩밭과 깨밭들의 들을 넘어온 갯내음이 풀냄새와 어우러져 여름 한낮의 우리를 감싸주었다.
동해남부선은 막 기적을 울리며 동래역을 지나 긴 꼬리를 구불구불 감추는 기차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 당시, 띄엄띄엄 느려 터졌던 삼등 기차는 정말이지 우리를 난감하게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거의 제멋대로 왔다갔다하는 기차는 언제나 발 디딜 틈 없이 만원이었다. 몇 시간씩이나 연착을 밥먹듯 하는 그 틈에도 기장 월래 좌천쯤이면 비린내와 갯내로 범벅인 해물 다라이들이 땀내에 찌든 아낙들의 악다구니와 함께 꾸역꾸역 꼭 끼어 들었다. 기다리기에 지쳐빠지게 하던 기차는 한여름 땡볕을 발바닥이 따갑도록 달구곤 했다. 역사 근처의 해바라기, 민들레, 봉숭아들도 뜨거운 땅김에 할딱거렸다.
남자애들은 기차 꽁무니를 따라 냅다 달려가 공짜 기차를 타는 것이 예사였다. 책가방이나 검정고무신을 손에 쥐고도 바람처럼 타고 바람처럼 슬쩍 내렸다. 기차 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숨이 턱 끝에 차 오르도록 경주를 하기도 했다. 다리 위를 지날 때면 통과의례처럼 오줌 세례를 퍼붓기도 했다.
나는 친구들과 동래에서 원동교까지 철로를 따라 자주 걸었다. 딸기밭에 갈 때도 걸었고 비가 올 때도 걸었다. 그럴 때면 몸의 균형을 잡아가며 걸음걸이 연습도 하고 철로에 귀를 대고 기차가 얼마나 가까이 오는지를 걸고 내기를 하기도 했다. 원동교 아래쯤에서는 예의 그 오줌 세례를 받을까봐 오가는 기차를 경계하면서 당연히 조심을 해야했다.
“희주야 난 말야. 멋진 작가가 될 거야. 토스트에프스키 전기를 안고 꿈꾸듯 그의 편지를 읽어. 이제야 네게 고백하는데, 준수 선배 말야. 나 그랑 사귄다. 아, 나는 백설공주고 신데렐라야.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다니, 얼마나 소망했는데……. 그를 왕자로 만들 거야, 나의 왕자님으로.”
영선은 자신에게 다짐의 이야기를 하듯 거의 몽환의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어머, 어쩜 그랬니? 준수 선배는 우리가 다 좋아하잖아. 애들이 뭐라고 하긴 하더니 정말이구나? 이제 대학입시가 바짝 다가오는데 그 선배 마음이 무척 바쁠 거야.”
나는 말끝을 흐리며 저만큼 바라보일 듯한 바다로 눈길을 띄워보냈다. 실금이 가는 울림을 타고 나의 마음에 물기로 배어들었다.
‘그의 눈빛이야. 저 눈빛이었는데, 무슨 말을 할 것 같은.’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그 사이로 나무들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싸-아’하고 지나갔다.
준수에 대한 안타까움은 내 가슴 한 구석에 구멍을 만들었다. 어떤 한마디 말도,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흐르지 못 하는 전류는 창문 안쪽과 바같 쪽을 관통하려는 몽상의 레일을 만들고 있었다.
동해남부선은 부산으로 경주로 기적소리를 내지르며 달렸다. 기차는 지나온 길을 돌아보게 하는 아련한 음성이었고 손을 흔들며 달려가게 하는 힘이었고 미래를 향한 통로였다. 축전처럼 불쑥 왔다가 어느새 꼬리를 숨겨버리는 그것은 꿈이었고 암울하지만 뜨거운 미래였다. 그날, 바닷가 언덕의 때죽나무꽃의 은종소리가 귓속을 내내 울렸다.

지난 봄 나는 서울에서 통영으로 내려가 부산을 거쳐 삼일째 여행 중이었다. 해운대 기차역에서 가장 느리게 가는 통일호, 동해남부선 기차에 기어이 오르고 말았다. 추억이라는 퇴행성을 넘어서서 생생하게 만나고 싶은 회귀라는 의미를 확인하듯이.
봄은 화사하지만은 않았다. 설레면서도 나른하고 뭔가 다가올 듯하면서도 희뿌옇게 희석되어버리는 그 속에 미묘한 색깔을 담고 있었다. 바다는 느린 기차의 옆구리를 스치며 추억의 행진에 기꺼이 동참하듯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기찻길은 바다를 끼고 파도소리를 따라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바다는 잔잔하고 파랗고 멀었다.
봄은 커다랗게 확대되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대비시키는 듯했다. 차창으로 지나가는 낡은 풍경들 위에 새잎과 꽃들은 움트는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봄은 낡은 물건들도 소생시키고 상처받은 것들도 치유된 새살을 내보이게 했다. 햇빛은 눈이 시리도록 맑고 무꽃과 개나리, 벚꽃들은 한창 물이 올라 봄의 기운을 밀어올리고 있었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그리움과 회한을 삭이려는 몸짓이 꽃가루를 다 날려 꽃술은 화사하고 꽃잎이 피워내는 빛으로 햇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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