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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산문/김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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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139회 작성일 05-02-20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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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부치지 않은 편지

김 영 식
(수필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저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은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하자.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울었다는 말은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윤동주의 '편지'

점심 식사 후, 시간이 남아 책방에 들어갔습니다. 잡지를 이것저것 들춰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한 여성잡지를 넘기는 순간, 내 가슴에 갑자기 쿵하고 돌이 하나 떨어지는 듯했습니다. 그곳에는 낯익은 당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과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 책을 사서, 사무실에 돌아 와 꼼꼼히 기사를 다 읽고, 서가를 배경으로 서있는 당신의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았습니다. 10여 년 만에 나타난 당신은 이제는 꿈을 이룬 듯, 화려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서있더군요. 성공한 여성들 혹은 결혼을 잘한 여성들은 다 그렇게 여성잡지에 나오나 봅니다. 당신은 꿈을 이루었군요. 과거 그대가 내게 이따금 들려주던 그 꿈을, 그대가 나를 멀리하게 한 그 꿈을 말입니다.

몇 년의 직장생활 후 뒤늦게 들어간 대학, 장학금을 받아야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던 가난한 당신은, 스스로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졸업 후 훌륭한 사회인으로 우뚝 서고 싶다는 생각은 모든 젊은이가 가진 꿈이겠지만, 당신의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또 내가 감당할 정도 이상의 그 무엇을 말하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당신과 다를 바 없는 가난한 대학생인 나는, 아무래도 당신의 욕망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 상대가 되지 못 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도울 수 없는 남자였습니다. 아니 적어도 둘이서 마음껏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조차 할 능력도 없는 남자였습니다. ‘가난한 연인’은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못 했습니다. 같은 약점을 가진 사람끼리 껴안은 사람은 바보이고, 멀리하는 사람은 현명하다고 그대는 내게 말하는 듯하였습니다.

도덕적으로, 또는 학문적으로 존경한다는 말을 당신에게서 들었지만, 내가 듣고싶어하는 말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를 확실히 연인으로 규정짓기 위한 의도로 보낸, 밤 새워 수없이 쓰고 다시 쓴 편지 몇 통과, 대화 속의 은근히 반복되는 나의 의도적인 말이 분명 그대에게 전달되었건만, 그대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묘하고 애매한 침묵과 초점을 흐리는 말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은 또 부정이나 거절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대는 여전히 내 곁을 떠나지 않았기에 나의 머리는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나름대로 그대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였습니다. 시간이 좀더 필요할 것이라고 자위했습니다. 그때의 일기장을 지금 들춰보니 하루 건너 기쁨과 좌절의 글이 번갈아 나타나 있습니다. 하루의 그대는 사랑스럽고 머리 좋고 말이 통하는 여자, 또 다음 날의 그대는 눈웃음치며 남자를 홀리는 교활한 여우였습니다. 그렇게 애매하게 붕 떠있는 그대와의 관계가 주는 불안은, 사랑을 모르던 예민한 청년에게 번민으로 잠 못 이루는 숱한 밤을 지내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니 문제는 그대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나는 사랑의 경험이 전혀 없던 미숙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정도가 있지, 나는 그대 앞에서 두근거리는 가슴 때문에 제대로 확실한 의사 표현도 하지 못 하는 바보 같은 남자였습니다. 우물쭈물하기만 하는, 어떤 강력한 행동이 결여된 그저 좋기만 한 남자였을 겁니다. 어느 때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는 당신의 리포트를 대신 써주려고 홀로 사직도서관에서 반나절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다 그 도서관을 지날 때면 그 때의 생각이 나 허탈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내가 쏟은 정성을 받기만 한 당신에 대한 원망은 있었지만, 그대의 매력에 눈먼 나는 그대가 원하는 어떤 일이라도 했을 겁니다.

그때 읽었던 일본 소설, ‘우정’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의 친구에게 빼앗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은 연약한 문학청년이고, 그의 친구는 그저 보통의 지성을 가졌으나, 남성미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여자에게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 여자도 주인공을 존경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몸은 친구에게로 갔습니다. 나는 이 주인공의 이야기가 바로 나의 운명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그리고 어떤 친구는 당신을 보고 이미지가 화려하다고 말했던 것이 떠오릅니다. 옷차림 때문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것은 성취 욕망의 정도가 강한 듯한 여자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제삼자가 보기에, 당신에게는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아, 친구가 보아도 나는 그리도 그대 옆에서는 초라한 남자였습니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적당한 회사에 들어가 적당한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 낳고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에서, 책 읽을 시간도 없이 항상 돈에 쪼들리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과 어울릴 상대가 되지 못 한다는 것은, 나보다 당신이 더 잘 알았던 것 같습니다.

어떤 오해로 우리는 멀어졌던 것 같습니다. 자존심 싸움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 남자, 내 여자로 간주하여 상대의 행동을 따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기에 소통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그대를 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잠시 친척이 있는 동해안으로 여행을 떠났지만, 그대가 없는 곳의 산과 바다는 그저 내 망막에만 머물 뿐, 내 마음 속으로는 들어오지 못 했습니다. 단지 나 혼자서 이렇게 그대가 있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 저린 고통을 줄 뿐이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다시 그대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당신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약국 앞에서 오랜 시간 당신을 기다리던 나는, 어스름한 저녁놀이 비치는 거리의 횡단보도 저편으로 다가오는 당신을 발견하였습니다. 항상 당신과 내가 함께 걸어오던 그 샛길에서 당신은 횡단보도의 저편에서 섰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옆에는, 당신이 언젠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내게 들으라는 듯이 말한 적 있는, 자신에게 많은 도움이 된다는 바로 그 남자가 서있었습니다. 둘은 나란히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가슴은 쿵쾅거리고, 눈은 어지럽고, 호흡은 곤란해졌습니다. 잠시 후 이쪽으로 건너올 당신과 그 남자를 마주할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던 나는, 바로 몸을 기둥 뒤로 숨기고 말았습니다. 저 멀리 산 능선에 걸쳐진 붉게 물든 구름 사이로 저녁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몸을 드러낸 나는 골목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둘의 모습이 사라진 후,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였습니다. 흔들리며 하늘로 올라가는 담배연기가 내 시야를 흐릿하게 하더니, 이내 눈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눈이 아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날의 담배 연기는 너무나 매워서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 나왔습니다. 당신이 사라진 골목길이 어둠으로 점점 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남긴 마지막 여운이 사라져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날 나는 비로소 당신을 완전히 떠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편지를 부치지 못 합니다. 그날의 이별은 어쩌면 나의 섣부른 단정에 의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당신 마음속의 나는 이미 무거운 닻을 내린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차피 이별은 운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나와 당신 모습을 바라보면 그 생각이 맞는 듯합니다. 당신은 꿈을 이루었군요.
나는 여전히 바.보.처.럼. 살고 있습니다.


김영식
2002년 ≪리토피아≫ 수필 등단
<일본문학취미>  싸이트 운영자

추천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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