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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초점/전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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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321회 작성일 05-02-20 18:52

본문

‘살림’의 시학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유승우 시의 ‘몸’을 중심으로


전 미 정
(시인)


位相學으로서의 몸

우리 몸은 전방위적인 특징을 갖고 있긴 하지만, 그 중에서도 반평면적인 신체구조에서 오는 몸의 반응은 심리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하다. 몸이 모든 생물들의 실존적인 근거라 할 때, 반평면적 몸은 인간을 해석하는 흥미로운 잣대가 되어준다.
우리의 걸음은 언제나 한쪽 발로는 비상을 시도하고 다른 발로는 즉시 추락을 맛보아야 하는 두 가지 심리적 사건의 왕복운동 속에서 산다. 한 쪽 다리로 지탱되던 몸이 넘어지려고 하는 순간 다른 쪽 다리가 그 몸에 다시 균형을 잡아준다. 오른발 왼발을 번갈아가며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공중과 지상, 하늘과 땅, 상승과 추락이라는 심리적인 사건 속에서 살아간다. 마력처럼 시인들을 끌어당기면서 쉽게 놓아주지 않는 상상력 중에 수직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떠한 공간의 형태를 체험하느냐에 따라 그 몸이 일으키는 진동의 의미는 다르다. 그래서 새의 몸이, 두더지의 몸이, 꽃의 몸이, 나무의 몸이, 개미의 몸이, 물고기의 몸이, 흙의 몸이 같은 상황 속에서도 다 다르게 진동할 수밖에 없다. 상상력은 바로 그러한 몸의 떨림과 깊이 연루되어있다.
어떻게 보면 몸은 시간보다도 공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듯 보인다. 몸은 체질적으로 공간에 더 익숙하다. 그렇다면 시간은 몸의 객관적인 대상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몸은 공간만을 체험하지 않는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갖는 걸음을 통해 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을 끌어안고 있는 공간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내재화하고 있는 공간의 체험이다. 생태학은 몸이 거주하고 있는 환경이나 몸과 연관을 맺고 있는 공간을 탐구하긴 하나 그렇다고 시간을 추방하지는 않는다. 생태학은 시간과 공간이 잘 반죽되어있은 몸의 진동에 관심을 둔다.
왜냐하면 몸은 정직하기 때문이다.

살이나 뼈는 거짓을 모른다.
내 무릎의 관절은 요즈음
내 몸무게를 견딜 수 없다고
솔직하게 통증을 호소한다.
살도 마찬가지다. 어디에든
아주 작은 가시만 박혀도
그냥 넘기지 못 하고,
꼭 밝혀내야만 한다.
살이나 뼈는 마음과 달라서
아무 것도 제 속에 숨겨두지 못 한다.
숨겨두었다가는 그것이 암이 되어
죽게 되기 때문이다.
거짓보다는 죽음을 선택할 만큼
살과 뼈는 정직하다.

―유승우 「살과 뼈는 정직하다-관념시․8」

무모할 정도로 보인다, 거짓보다 죽음을 선택하는 몸의 정직함이. 죽음을 선택할 만큼 살과 뼈는 정직하다는 몸에 대한 이 시적 통찰은 예사롭지 않다. 물론 몸은 어떠한 병도 통증도 숨기지 않는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새삼 언급하는 의도가 무엇이냐고 아무도 반문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이 메시지가 던지는 화두가 결코 가볍지 않기 때문이다. 몸은 그냥 도구도 아니다. 몸은 정치적이지도 않다. 몸은 건강한 것과 병든 것, 생명과 죽음을 통해 우리 삶의 위상을 철저하게 진단하는 의사이다.
이 시에서 암은 단순히 병명이 아니다. 암은 몸 떨림의 한 형태요, 세계에 대한 씨니피에이다. 몸에 뚫려있는 수많은 구멍들로 우리는 매 순간마다 세계를 흡입하고 흡인하기도 할 뿐만 아니라, 세계 속에 자기 의지를 공기화하여 방출하기도 한다. 몸의 구멍은 삶의 공기를 정직하게 마시며 정직하게 토해 놓는다. 몸은 그 떨림을 의미로 온통 문신하고 있는 장소이다.
그런데, 유승우 시인에 따르면, 그 떨림을 의미화하고 있는 시도 또 하나의 몸이 된다. 그는 ꡔ한글 시론ꡕ에서 시를 살과 얼이 있는 살아있는 몸으로 본다. 세계에 대한 몸의 떨림을 가장 정확하고 정직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가 시인 것이다. 시를 몸이라고 할 때 이렇게 생각해봄직도 하다. 개구리가 지구의 오염 정도를 나타내는 생태 지표가 되듯, 언어의 세계에서 시가 그러한 생태 지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인간은 평면으로만 이동이 가능한 달팽이도 아니고, 지상에서 발을 완전히 뗀 채 날 수 있는 새도 아니다. 인간이 지상으로만 만족할 수 없고, 늘 공중으로의 비상을 꿈꾸면서 허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수직적이고 비상적인 상상력은 시간과 공간의 동시적 확장이다. 개가 소가 날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까. 지상에 네 다리를 단단히 붙이고 땅 밑만을 바라보는 그들에게 비상하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비상하려는 욕망의 유무에 따라서 존재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불순한 생각은 추호도 없다. 비상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맞먹는 욕망이 다른 형태로 분명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상의 상상력은 지상에서 반평면적인 인간의 몸이 이룰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유토피아적 갈망이다. 그래서인가. 공간 탈출을 시도하는 수직적, 비상적 상상력은 얼마나 확고한 의지로 우리를 매료시키는가.

아지랑이에 떠밀려
자꾸 떠오르는
종달이가 되고 싶다.
떠오르다가,
떠오르다가,
봄의 키만큼한 높이에서
몸을 그냥
바람결에 맡기면
꽃봉오리가 터지듯
터져 나오는
종달이의 목청처럼
그렇게 피어나는
목숨이 되고 싶다.

―유승우 「꿈」

비상의 상상력을 생성하는 시인이나 그것에 반응하는 독자들이나 동질적인 몸을 지닌 자들이기 때문이다. 수직적인 상상력에 어렵지 않게 매료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동일한 구조의 몸을 지녔으며, 상상력은 몸의 정직한 자기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목숨과 생명은 어디서 생성되는가. 바로 몸이다. 몸이 자연의 흐름에 부드럽게 잠길 때 목숨이 유지된다. 목숨은 무겁지 않다. 거추장스럽지 않다. 때가 되면 일순간 저절로 가볍게 피어나서 대자연 속을 유영하는 부드러운 힘이 목숨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몸에 관심을 두는 시인은 어렵지 않게 생명으로 충만한 우주적 삶과 자연스럽게 조우하게 된다. 평면적인 존재로서 수직을 꿈꾸는 이 몸의 위상을 어떻게 경험하고 반응하느냐에 따라 내연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고 외연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이 두 종류의 존재를 헬라어로 생명을 나타내는 두 단어, <비오스>와 <조에>로 설명할 수 있다. 비오스는 외연적인 생명에 안주하면서 완전 평면적인 껍데기로서의 삶을 사는 생명이다. 그러나 조에는 내연적인 생명을 누리기 위해 수직적인 삶을 사는 생명이다. 이러한 수직적인 삶은 시간의 폭과 장소의 폭을 넓혀 산다는 점에서 다분히 조에적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적인 시공간에서 벗어나 우주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한다.
생태학에서 추구하는 몸은 개체화된 몸이다. 개체화라 하면 자기 중심적이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주기에 충분하다. 실은 아니다. 자기 중심적인 세계가 잘못 빠진 길을 돌이키려고 한 생태학이 아닌가. 개체화는 특정한 세포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포 살리기를 통한 참 생명의 희구이다. 특정한 개체의 몸이 더 큰 우주의 생명을 유지하는 중요한 세포인 셈이다. 그러니까 생태학은 개체 하나 하나가 모두 중요한 세포로 살아 움직이면서 우주적 시공간을 꿈꾸는 것이다.
유승우 시인은 육감과 영감을 나누어 설명한 바 있다. 육감이 자신의 생존을 살리기 위한 감각이라면 영감은 자신을 죽이기 위한 감각이다. 그 영적인 존재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영원한 ‘우리’, 곧 ‘공동체 생명’을 살릴 수 있다고 한다. 조에로서의 생명이다. 몸의 말에 귀기울이는 시인은 영적인 생명을 구가할 가능성이 높다. 몸은 위상학적으로 물질과 신성이 맞물려 있으며, 상승과 하강 사이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단조로움은 죽음이다
우리들이 호흡하는 산소도, 음식물도, 음식물의 성분도 그리고 필시 인간 관계에서나 생물 관계에서의 모든 구성 요소의 지나친 것은 적당한 것만 못 하다. ……전투가 없는 관계는 생기가 없고 전투가 지나치면 관계는 독성을 가지게 된다. 바람직한 것은 전투성이 최적치에 있는 관계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 「정신과 자연」에서

단조로운 가치는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 고집은 죽음으로 가는 가장 확실하며 빠른 길이다. 고집은 고착이다. 고집하게 되면 질량에 불균형이 생기고 병들기 시작한다. 고착은 전투가 발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여기서 전투란 생명력을 지탱하는 최적의 긴장 상태를 의미한다. 베이트슨의 말대로 물질이나 경험에는 최적량이 존재하기에, 어떤 양이 초과하게 되면 독성이 발생하며 그 양이 부족하면 결핍감을 느끼게 된다. 생태시학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고 이성 중심적이고 서구 중심적이던 불균형적인 세계에 균형을 주려는 세계관이다. 그렇다고 앞서 기존의 우위, 우열의 관계를 역전시켜서 새로운 주종의 관계로 위치 이동하려 함은 물론 아니다. 그동안 결핍되어있거나 죽임을 당해 왔던 자연에, 감성에, 동양에 힘을 실어주려는 균형 잡기이다. 그것은 다양성과 다원성을 높이 산다.
단조로움은 모든 생명에 있어서 독성이다. 여기서 “공격에 대한 생명의 가장 훌륭한 방어는 그 생명이 구현된 개체들의 무한한 다양성”이라고 지적한 미셸 투르니에의 말을 음미하는 것도 좋으리라. 다양성에 대한 옹호는 생명에 대한 예의이다. 이렇게 우주와 인류와 지구와 인간 사회의 다양한 요소들이 상생적, 상호적으로 움직이면서 힘과 생명을 분출하기 원하는 역동적 상상력의 세계가 바로 생태시학이 될 것이다.
생태시학은 이 인류가, 우주가, 지구가, 사회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억눌려 있는 가사 상태에서 벗어나 생명으로 충만하여 춤추기를 원한다. 죽어있는 것들은 춤을 출 수가 없다. 살아있는 것은 율동을 가지고 있다. 춤은 율동에서 나온다. 생명은 춤이다. 생명과 춤은 단조로울 수가 없다. 그것은 수많은 변화와 움직임 속에서 매순간 새로운 몸짓을 생성한다. 변화와 움직임은 닫힌 것에서 막힌 것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다. 열림과 뚫림과 만남이 있어야 건강하게 되고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생태시학은 근대의 단조로운 가치를 지양하고 그동안 공공연히 폭행당해 왔거나, 살해되어 왔던 자연이, 육체가, 감성이, 인간과 영혼과 이성과 잘 어울려 생명의 춤을 추기를 바란다.
이 글에서는 언어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인간 중심적인 시학은 언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춤을 잃어버리고 지냈다. 신토불이의 관계처럼 몸과 말은 분리시킬 수가 없다. ‘우리말 살리기 운동’이라는 말은 그동안 우리말을 죽여왔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살리기 운동이 바로 생태학이 아닌가. 생태는 거주지나 집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살림은 ‘살리다’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이다. 집을 살리는 존재가 어머니라면,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이 인류를 올바로 살리기 위한 학문이 생태학이며, 그러한 생태학적 정신을 가진 시들에 대한 연구가 생태시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태시학은 살림의 시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유승우 시인은 우리말은 한국시의 몸이라고 믿는다. 순우리말로 시를 쓸 때 우리의 가락이 그 기초를 이루게 되고 한민족의 얼과 넋의 춤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죽여 왔던 우리말을 살림으로써 우리 민족의 숨통을 다시 트이게 하는 시적 정신이 바로 살림의 시학이다. 몸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값진 발상이다.

하늘이 하늘 하늘 내려앉는다.
바다가 받아 받아 품에 안는다.
알몸으로 섞이는
커다란 몸짓,
철썩, 철썩……
옷을 벗는다.
벗어서 발치께로 밀어 던지는
사랑 앓는 큰 가슴의 깨끗한 속옷
하이얀 물결이 뭍을 적신다.

―유승우 「속옷」

죽여왔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예이다. 세계와 대면할 때마다 떨리는 몸의 진동수과 반응 양태를 그대로 왜곡시키지 않고 생생하게 전달할 때, 말은 살아있는 얼이 되고 넋의 춤이 될 것이다. 한국인의 몸을 한글로써 표현할 때 그것보다 더 신명나는 춤이 어디 있을까. 몸이 그 몸을 표현하는 말과 균형과 대칭을 이룰 때 그것은 생명을 입게 된다.
말은 몸통에서 나온다. 몸통은 이 세계를 연주하는 악기이며 말은 세계의 의미를 짜내는 곡이다. 세계를 마주할 때마다 우리 몸의 근육이, 모세혈관이 떨려 온다. 떨림은 반응이다. 그 떨림이 목청으로 전달되고 혀를 움직이게 되면 말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모국어는 어머니 나라의 말이다. 한나라는 공동체의 몸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민족의 몸을 잘 전달하는 말이 곧 모국어인 셈이다. 영어에서는 ‘어머니의 혀(mother tongue)’라고 한다. 한 민족의 몸의 떨림을 그대로 담아 내는 곳이 어머니의 혀이다. 한 민족의 몸이 어머니의 혀를 통해 표현되기에 가장 적절한 언어가 시이다.
하지만 「속옷」은 아름다운 우리말에 대한 독자의 감흥으로 끝나지 않고 더 중요한 시학을 터득하게 한다. 알몸은 옷을 벗은 상태다. 옷은 인간적인 가치들이 개입된 것이다. 이 시에서 하늘과 바다가 알몸으로 섞이는 성적 행위 이면에서 생명이 태동하는 원초적인 몸짓을 감지할 수 있다. 시인도 이 시에서의 알몸을 어떤 인위적인 요소가 가미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옷을 입기 전 에덴 동산의 알몸으로, 그것은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천성이다. 유승우 시인의 시에서 가장 많이 쓰인 시어라고 할 수 있는 알몸은 바로 이러한 자연으로서의 몸을 지칭한다. 자연으로서의 몸, 즉 알몸에 대한 시적 탐구는 살림의 시학에 근거하고 있다. 살림의 시학은 몸에 관심을 둔다. 살림의 시학은 단지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생명의 체격을 갖춘 모든 생물들의 넋과 얼이 자연스럽게 조우하며 관계 맺기를 바라는 것이다.
생명은 절대 고독의 세계가 아니다. 존재의 본질이 고독이며 싱거운 맛이라고 할지라도, 생명은 절대로 하나만을 고집하며 고독 속에서 뿌리내릴 수 없으며 무미건조하지도 않다. 생명은 다양한 관계 위에서 구축되는 건축물이다.


스토리로 생각하기

생명체는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을 통하여 무수한 스토리를 생성시키게 된다. 스토리는 단절을 용납하지 않는다. 스토리로 생각하기란 베이트슨이 말한 대로, 인간을 불가사리나 말미잘 혹은 야자나무나 앵초로부터 분리시키지 않고 연관지어 생각하기이다. 즉 모든 정신이 우리의 정신뿐 아니라 삼나무숲이나 말미잘의 정신도 공유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컨텍스트로서 사고하기이다. 내가 축적해 온 자신의 내적 스토리와 상대의 내적 스토리는 모종의 관계로 연결되어있다.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연결은 상대를 살아있는 대상으로 인식할 때 가능하다. 단조롭게 사물을 외따로 분리시켜 그것 자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형태적 규정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사물의 의미를 살아 숨쉬게 하는 태도이다.
스토리로 생각하기의 수사학이 바로 은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시적 위상이 한층 올라가게 된다. 시는 은유가 젖줄이기 때문이다. 인류학자는 원시부족들에게 비유가 공동체를 통합시켜 주는 주요한 언어 기능이 되고 있다고 본다. 악마라는 말이 떼어놓기diabolic라는 말과 동의어이며, diabolic의 반대어가 상징symbol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수밖에 없다. 상징에 속하는 은유가 궁극적으로 질서와 조화와 통합을 위한 획득 유전형질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생태학자들은 이 은유의 문제, 특히 자연을 은유로 삼는 의인법으로 골치를 앓아 왔다. 의인법을 쓰는 시는 모두 생태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딜레마이다. 몇몇 생태학자들은 자연을 인격화시킨다고 모두 생태학적이라고 하는 판단이 갖고 있는 위험에 대해 언급하였다. 인간으로서 시인의 감정을 형상화하기 위하여 자연을 인격이 있는 대상으로 의인화하는 것은 순수하게 생태학적이라 말하기에 망설여진다.
인간과 자연을 아무리 연결시키려 해도 근본적으로 자연이 인간의 도구적 차원에서 벗어나지 못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생명체라는 인식이 결여된 상태에서 행하는 연결 행위는 아무리 생생하고 독특한 의인법을 구사한다고 해도 언어를 부릴 줄 아는 자로서의 인간이 지닌 오만의 숫자만 더 늘릴 뿐이다.
우리가 이제까지 얼마나 오만하게 자연과 불평등한 협약을 해오면서 살아 왔는가는 생태학자들이 제시한 ‘종이’와 ‘산림훼손’이란 말을 통해 생생하게 입증될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자기 잘못을 적당히 감추기 위한 말들의 포장을 벗기면 종이는 ‘나무 시체’요 산림 훼손은 ‘나무 살해’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말들을 통해 자연에 대한 우리의 감각은 무뎌졌고 그에 대한 추행이나 폭력은 묵인되어 왔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공범인 셈이다.
모든 생명을 네트워크의 망으로 인식하는 세계에서는 열등한 것도 없고 우선 순위도 없다. 모두 중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괴테는 잎을 ‘초록빛의 평평한 물체’로, 줄기를 ‘원통형의 물체’라고 정의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잎이 돋는 것은 줄기이다.” “그 잎눈에서 싹을 가지는 것은 잎이다.” “줄기는 한때 그 자리에서 움튼 싹이었다.”로 정의 내림으로써 잎과 줄기와 싹의 경계를 무화시키고 컨텍스트를 통해 보게 하고 있다. 여기서 잎과 줄기와 싹은 관계 속에서 자기 정체를 드러낼 뿐이지 우등과 열등도 중심도 주변도 없다.
생태시학에서 보는 몸은 더 이상 육체가 아니다. 우주라는 거대한 몸집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몸으로, 자연과 분리되어 논의될 수 없으며, 영과 분리될 수 없는 몸이다. 명사란 술어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이며, 동사란 그 주어인 명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 말로 정의 내리는 한 방식이 생태시학이 다루는 몸이다. 인간과 자연은 서로에게 분리시킬 수 없는 명사와 술어, 동사와 주어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관계를 부각시키는 자리에서 주종이나 우열의 관계는 얼마나 무의미한가.

옷깃을 파고드는 봄바람이 몹시 차다.
사람의 체온이 그리운지
꽤 비밀스런 곳까지 파고든다.
아마도 봄바람은 평생 외롭게 살다가
또 외롭게 죽은 이들의 혼령이
차마 인간을 떠나지 못 하고 떠돌다가
우리의 옷깃을 파고드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봄바람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온 몸을 그에게 내주고, 나는 마침내
열이 오르고, 뼈마디가 쑤시는
사랑의 몸살을 앓았다. 실은 그때,
나만이 감기에 걸린 것은 아니었다.
온 세상이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산불도 몇 군데서 일어났고,
황사도 온 하늘에 자욱했다.
모든 나뭇가지들이 생명을 잉태하고,
창 밖의 목련은 어느새 만삭이었다.

―유승우 「봄바람-관념시․9」

이 시는 봄이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한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시인이 세계를 하나의 스토리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봄에 앓는 몸살은 그야말로 인간의 몸과 자연의 몸이 우주가 막 행하려는 거대한 잉태의 과정에서 겪는 바이오리듬 그것이다. 정직한 몸만이 산고의 고통을 겪는 자연을 온몸으로 같이 겪을 수 있다. 봄에 사람들이 자주 걸리는 감기몸살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인식하는 찬바람의 공격 때문이 아니다. 몸살을 아름다운 생명의 파동으로 간파하고 있는 시인은 분명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는 몸의 시인임이 분명하다. 몸으로 세상을 살고 시를 쓸 때 거대한 우주의 스토리를 구성하는 하나의 정직한 몸이 되어 올바로 세상에 반응할 수 있고 영향을 미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은 하나의 거대한 몸이면서, 인간의 몸을 감싸고 있는 집이다. 큰 몸으로서의 그 집과 교감하고 있는 몸의 떨림을 흠집내거나 왜곡함이 없이 가장 잘 형상화하는 시는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몸이다. 몸의 말은 왜곡이 없다. 다른 살아있는 생명체들과 관계 맺으면서 적정치의 긴장을 유지할 때 몸은 우주적 생명의 춤을 아름답게 연출할 수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몸이 있고, 생명이 있고, 춤이 있는 상상력의 세계를 움직이는 의미론적 상수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로 성(性)이다.


에코에로티시즘(Eco-eroticism)에 대하여

다시 위상학적인 몸으로 돌아가 보자. 공간적인 방향에서 언제나 어정쩡한 몸이 지닌 완전한 수평도 완전한 수직도 아닌 불완전한 위상, 섬과 누움이 반복되는 교차적 위상, 인간의 몸에서 탄생하는 모든 의미 근원지는 여기에 있어 보인다. 걸을 때마다 겪는, 아침에 일어나고 밤에 누울 때마다 겪는, 불안과 안정의 역학 운동 속에서 몸은 공간을 체험하고 저장하고 기억한다. 그 불안과 안정이 몸에 새겨질 때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두 가지 일차적 본능이라 말한 타나토스와 에로스의 심리적 각축전도 치열하다.
이렇게 상승과 하강 사이에서, 타나토스와 에로스 사이에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죽음으로 쉬지 않고 움직이는 추가 바로 시공간을 껴입고 사는 몸이다. 몸 위에 빼곡하게 차있는 생명과 죽음의 길을 생생하고 정직하게 상상력의 지도로 그려내는 세계가 바로 에로티시즘이다.
단순한 성욕이나 개체 보존의 본능을 너머 거대한 생명체로서의 우주적인 삶을 탐구하는 시정신 속에서 나온 관능성과 성애의 시적 몸짓을 에코에로티시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관능이 살림의 상상력 위에 구축될 때 그때 몸은 우주적인 차원으로 확장된다. 그 이면에는 인간의 몸을 거대한 우주라는 몸의 일부분으로 보는 미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에코에로티시즘의 시편들은 대개 관능은 생명력의 상징이 된다.
유승우 시인의 시를 살림의 시학으로 조명할 때, 그만의 고유한 시적 상상력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 에코에로티시즘은 그가 계속해서 탐구해 오던 몸의 이론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세계이다. 1920년대 시인인 황석우 시의 관능성을 에코에로티시즘으로 볼 수 있는 것도 그가 자연을 네트워크의 세계로 해석하면서 몸에 대한 남다른 시적 통찰을 지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승우 시인의 시적 정신의 등성이도 역시 에코에로티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살림의 시학이 그의 시적 모체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우주라는 의미론적 원주를 벗어나지 않는 시에서 성적인 상상력은 충일한 생명력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달빛은 젊은 계집의 알몸이다
폭포의 흰 물살에서 이제 막
몸을 씻고 달려온 촉촉한 알몸
내 창가에
가득히 매달려 웅성거린다.
그 풋풋한 몸짓의
알 수 없는 힘에 끌려
새벽 세 시,
잠에서 깨어난 나의 눈망울,
푸르게 빛난다.
달빛에 젖어, 달빛에 젖어
내 마음도 푸르게 춤추는 알몸이 된다.

―유승우 「달빛 연구․1」

밤 열두 시에서부터 새벽 여섯 시까지는 가장 혈기왕성한 시간대이다. 그리고 그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새벽 세 시에 달빛은 나의 눈빛을 가장 푸르게 빛나게 하고 있다. 나는 달빛의 흡인력이 얼마나 강렬한가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한 색채어이다. 달빛과 푸른색은 춤추는 알몸과 만나면서 관능적 이미지를 더 확연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 시는 관능이나 성욕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욕망 표출이 아니다. 새벽 세 시는 관능의 시간대이기도 하지만, 바슐라르에 따르면 모든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기의 시간대이기도 하다. 병들지 않은 생명, 생명으로 충만한 목숨은 결코 무겁지 않다. 생명이 충일할 때 춤이 된다. 춤은 무거움 속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다. 관능이 공기의 시간대에 살 때 관능이 극대화되면 될수록 그에 비례하여 생명력도 더 왕성해진다. 관능의 절정은 충일한 생명력의 극점이다.
여인의 몸을 상징하는 만달 아래서 우리 선조들이 추던 강강수월래가 생명과 풍요에 대한 기원임을 알고 있다. 달의 기하학적 형태는 원형이다. 원은 절대적인 세계가 아니다. 원은 모두 주종도 우열도 차등도 불허하는 세계의 기하학적 상징이다. 달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세계이다. 아우름은 죽이지 않는 것이다. 아우르는 세계에서는 생명이 충일할 수밖에 없다. 그 세계의 상징이 바로 달이다. 그러기에 이 시에서 성욕이 매개된 달은 관능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특히 그 달이 물과 여인과 함께 의미적으로 융해되면서 다산과 생명을 환기하는 은유의 세계로 자리잡게 된다.
살림의 시학은, 몸을 그 상상력의 모태를 삼고 있지만 우주적인 차원으로 상상력을 확장해 가면서 영원한 조에의 생명을 구가하는 구원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전미정
․시집 ꡔ유년의 서가로 가는 길에ꡕ
․저서 ꡔ한국 현대시와 에로티시즘ꡕ
․시립 인천대 국문과 초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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