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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초점/박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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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의 한 계보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을 중심으로
박 찬 일
(시인)
1. 들어가며
모더니즘은 분열을 전제로 하는 것. 분열이 모더니즘의 조건이다.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 또한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의 조건이다. 분열과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 모두 모더니즘의 조건이다. 병렬 양식, 의식의 흐름, 몽타주들이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들이다. 분열과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는 식민지 모더니즘 시절에는 이상, 김기림, 정지용의 시들로 ‘구체화’되었고, 해방 이후 독립 모더니즘 시절에는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의 시들로 구체화되었다. 물론 (광의의 의미에서의) 모더니즘은 그 안에 다양한 범주들을 포함하고 있다. 한일합방 이후(혹은 개항 이후) 지금까지의 우리의 문예사조는 ‘양식다원주의’로서 서양이 근대 이후(계몽주의 이후) 밟은 문예사조사의 압축 파일인지 모른다. 다양한 문예 사조가 병존, 혼존하였다. 특히 1920년대 이후의 식민지 모더니즘이 그러하였다. 유종호는 1920년대 이후 “상이한 문학적 경향이 사실상 동시병존적으로 공존하였”던 것을 “현실 체험”이 아닌 “교양 체험” 탓으로 돌리고 있다(「20세기 前半 한국시의 형성」. ꡔ내일을 여는 작가ꡕ, 2002. 겨울, 36면). 그러나 필자는 교양 체험과 현실 체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한일합방 이후의 양식다원주의의 현상은 그 당시의 현실 때문이었다. 어느 ‘정신사’도 이입․이식 가능한 현실 때문이었다. 다름아닌 ‘개화의 현실’ 때문이었다. ‘개화의 현실’이 다양한 교양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본 글에서는 분열과 분열을 봉합하려는 시도로서의 모더니즘이 김수영, 김춘수, 이승훈의 시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고 보고 이들의 시를 분석해보려고 한다. 모더니즘의 양상을 분명히 적시해보려고 한다.
2. “개 같은 빙하”-이승훈의 모더니즘
이승훈의 모더니즘은 내면성의 모더니즘이다. 이승훈은 내면성의 그의 시를 “비대상시”(「非對象」, ꡔ당신의 肖像ꡕ, 1981)라고 불렀다. 자연을 노래하거나 일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과 일상에 있는 것들은 구체적인 대상이지만 내면에 있는 것들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 긴장 우울들도 대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자연의 사물들, 일상의 사물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내면은 분열되어있다. 이승훈의 자아는 분열된 자아이다. 분열된 자아로 고통받는 자아이다. 첫 시집 ꡔ사물 Aꡕ(1969)의 표제시 「사물 A」를 보자.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의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命令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빛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분열된 자아가 아닌 ‘완전한 자아’(?)를 찾고 있다. “팔이 달아”난 “사나이”가 분열이고, “목을” “잃어버린” “흰 닭”이 분열이다. 닭은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사나이도 달아난 팔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좇는 것이 봉합이고 찾으려는 것이 봉합이다. 분열과 봉합은 동전의 양면이다. 모더니즘의 양면이다. 봉합은 “따스”하다. “생각의 따스한 닭들”은 봉합의 따스한 닭이다. 목을 다시 찾은 닭이다. 옆에는 따스한 “등불”이 “켜”져 있다. “겨울 지하실”도 따스하다. 따스한 것 투성이다. 따스한 것들의 나열이다. 기표가 계속 미끄러지는 모습의 이러한 ‘환유의 연쇄’가 이미 초기시에 나타났었다.
따스한 것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봉합에 대한 열망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망은 열망으로 끝난다. 모더니즘의 열망은 열망으로 끝나는 열망이다. 세상은 분열되어있기 때문이다. 분업화되어있기 때문이다. 한 눈에 조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주체는 전체로서의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주체는 온전한 주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주체는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된 주체’이기 때문이다. 소외된 주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발판[매개항]이 외부에도 없고 내부에도 없다. 의식의 흐름, 병렬 양식, 몽타주 등으로 소외되지 않은 주체, 소외되지 않은 세상을 그리려는 시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소외되지 않은 주체, 소외되지 않은 세상은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주체가 아닌 것, 전체의 부분으로서의 세상이 아닌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의 ‘전체’를 말한다.
“쓰라리게” “완강하게” “정신의 땅을” 파지만 분열을 극복할 수 없다. “새벽 문지방”은 여기와 저기를 연결하는 문지방이 아니라, 단절, 고립의 문지방이다. “소리들은” 문지방을 넘지 못 하고 “피를 흘린다.” 피는 이승훈의 피이고 “하이얀 액체”는 흰 닭의 피이다. 피가 하이얀 액체로 변하고 하이얀 액체는 흰 닭으로 변한다. 흰 닭은 여전히 “목이 없는” 닭이다. 분열된 닭이다. 분열이 극복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의 모범적 예이다. 이승훈은 모더니즘의 모범생이다.
분열된 자아가 ‘완전한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은 「겨울 저녁 일곱 시의 풍경」(ꡔ밝은 방ꡕ, 1995)이라는 시에도 나타난다.
겨울 저녁 일곱 시 낯선 남자가 이승훈 씨 방으로 들어온다. 웬일이시오? 이승훈 씨가 묻는다. 낯선 남자는 의자에 앉으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도대체 당신 시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무얼 말하려는 거요? 이승훈 씨가 대답한다. 내가 쓰는 시는 나를 찾아가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가는, 그러니까 타자를 찾아가는, 일종의 여행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시작만 알고 끝은 모르는, 미지의 빙하같은 개와 개 같은 빙하의, 해질 무렵의 광기가-
“낯선 남자”는 또 하나의 “이승훈 씨”이다. 실제의 이승훈도 “의자”(“내가 관심 두는 건 의자”, 「오토바이」, ꡔ나는 사랑한다ꡕ, 1997)를 좋아하고 “담배”를 피운다. 낯선 남자는 이승훈 씨의 분열된 자아이다.
낯선 남자는 이승훈 씨가 아닐 수 있다. 이승훈 씨 시의 독자일 수 있다. 이승훈 씨 시를 욕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당신 시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소. 무얼 말하려는 거요?”라고 말하는 것은 욕하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승훈 씨의 대답이다. “나를 찾아가는” 시가 이승훈 씨의 시라는 것이다.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나에 불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자아는 분열된 자아이기 때문이다(“광기”에 붙잡혀 있는 자아는 분열된 자아이다). 지금의 자아는 분열된 자아이므로, 불완전한 자아이므로, 그렇지 않은 자, 분열되지 않은 자, 완전한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찾고 있는 자아를 “타자”라고 한 것이다. 간단히,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타자라고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타자는 분열되지 않은 자아이므로, 지금의 자아와는 다른 분열되지 않은 자아이므로, 타자라고 했을 것이다. ‘나’를 찾아가는 것은 “타자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찾으려는 나는 분열되지 않은 나이고 찾으려는 타자는 분열되지 않는 타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무의식으로서의 타자(프로이트, 라깡), 잠재태로서의 타자(들뢰즈)일 수 있다. 무의식을 알면 나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된 자아의 원인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열이 봉합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타자는 ‘나’의 “가능성의 범주”를 구성해주는 타자로서의 타자이다. 예를 들면 “무서워하고 있는 얼굴”의 타자이다. 무서워하고 있는 얼굴을 통해 ‘나’는 무서움을 지각한다. 그러기 전까지는 무서움이 지각되지 않는다. 서동욱, 「들뢰즈의 주체 개념」, 실린곳: ꡔ현대 비평과 이론ꡕ, 1997. 가을․겨울, 83면 이하 참조.
들뢰즈의 경우에서는 ‘나는 타자다’라는 결론이 강조되는 것이므로 이승훈의 이 시에서의 타자는 ‘무의식의 타자’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미지의 빙하 같은 개와 개 같은 빙하의”에 대해서 : 수면 속에 잠겨 있는 ‘빙하’는 곧잘 무의식에 비유된다. 이승훈은 무의식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을 ‘개’라고 한 것은 무의식을 욕하는 것이다. 무의식에 의해 그동안 시달렸기 때문이다.
요컨대 분열된 자아가 있고 분열된 자아는 분열되지 않은 자아, 곧 타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모더니즘의 자아는 분열된 자아이고 분열된 자아는 분열되지 않은 자아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분열되지 않은 자아를 그리워하는 것이 모더니즘인 것처럼.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메타시이다. 자신의 시가 ‘자아 찾기’의 과정, 즉 또 하나의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려고 한 것이므로 메타시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메타시 역시 시에 대해 말하는 것이므로, 시에 대해 분열되어있은 것이므로, 모더니즘의 특성에 부합한다.
3. “눈짓”과 “몸짓”-김춘수의 모더니즘
김춘수는 그의 무의미시론 「意味에서 無意味까지」(ꡔ김춘수 詩選ꡕ, 1981)에서 통합된 이미지, 단일한 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은 “한 행이나 또는 두 개나 세 개의 행이 어울려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가려는 기세를 보이게 되면, 나는 그것을 사정없이 처단하고 전연 다른 활로를 제시한다. 이미지가 되어 가려는 과정에서 하나는 또 하나의 과정에서 처단되지만, 그것 또한 제3의 그것에 의하여 처단된다. 미완성 이미지들이 서로 이미지가 되고 싶어 피비린내 나는 칼싸움을 하는 것이지만, 살아 남아 끝내 자기를 완성시키는 일이 없다.” 역시 같은 곳에서의 김춘수의 말이다(197면).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이며 세계관을 거부하는 것은 허무 때문이라고 했다. 무의미시의 이데올로기를 ‘허무’라고 밝힌 것이다.
허무는 어디에서 오는가. 허무주의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니체는 ꡔ힘에의 의지ꡕ에서 허무는 “최고의 가치들이 가치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목표가 없는 것” “왜?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최고의 가치들’은 하이데거의 풀이에 의하면 “신” “참으로 존재하고 모든 것을 규정하는 세계로서의 초감성적 세계” “이상과 이념” (인생의) “목표와 근거”들이다. “진, 선, 미”이다. M. Heidegger, Holzwege, Frankfurt a. M. 1957, 205면 참조.
‘허무’는 지금까지 지녀왔던 세계관이 무너질 때 오는 것이다. 세계관이 가치 없어질 때 오는 것이다. 세계관이 분열될 때 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김춘수의 무의미시들도 분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처용단장」 2부(ꡔ김춘수 詩選ꡕ, 1981)의 5번 시를 보자.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
분열은 필연적으로 봉합을 그리워하게 되어있다. 봉합을 그리워하지 않는 상황은 후기모더니즘의 상황이다. 분열이면 어떤가, 라고 말하는 상황이다. 단편성, 파편성이 전체에 대한 단편성, 파편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의미 부여를 받는 상황이다.
분열이 없는 상황의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역설적이지만 통일된 이미지가 없는 상황이다. 즉 무의미의 상황이다. 리듬만 남는 상황이다. 이미지가 없는데, 의미가 없는데, 무슨 분열이 있겠는가. 리듬만 있는데 무슨 분열이 있겠는가.
한 행이나 두 행이 어울려 이미지로 응고되려는 순간, 소리(리듬)로 그것을 처단하는 수도 있다. 소리가 또 이미지로 응고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으로 처단하기도 한다. 연작에 있어서는 한 편의 시가 다른 한 편의 시에 대하여 그런 관계에 있다. (「意味에서 無意味까지」)
위의 ‘사바다’는 뒤의 행이 앞의 행을 부정하고 또 다시 뒤의 행은 앞의 행을 부정하는, 요컨대 이미지의 정박을 계속 지연시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부정의 수단은 리듬일 수 있고 또 다른 이미지일 수 있다. 모든 행들이 제각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분열의 시이나, 전체가 무의미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봉합의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분열이 봉합’이라는 역설을 만들어내었다. 봉합을 ‘시도’하였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시이다.
‘사바다’를 ‘흐름’의 시로 볼 수 있다. 흘러가는 시로 볼 수 있다. 사실 리듬은 흘러가는 리듬이 아닌가. 그러나 초현실주의에서처럼 통합을 그리워하는 의미에서의 흐름이 아니라 기표만 남아 있는 의미에서의 흐름, 기표가 계속 미끄러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흐름이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 “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들을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기의 없는 기표만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기표만의 흐름이 무의미시이다.
「꽃」(ꡔ김춘수 詩選ꡕ, 1981)도 분열과 봉합(혹은 통합)의 변증으로 볼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통합에 대한 의지로 보는 것이다. 분열된 상황을 지양하고 싶은 의지로 보는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보는 것이다.
이 시를 “몸짓”과 “눈짓”의 길항으로 보는 것이다. 몸짓과 눈짓의 차이로 보는 것이다. 눈짓은 확실하지만 몸짓은 불확실하다. 눈짓은 확실하게 전달하지만 몸짓은 그렇지 못 하다. 시에서도 몸짓에 대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몸짓의 소통의 의미를 부인한 것이다. 이에 반해 눈짓에 대해서는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고 하였다. 눈짓의 소통의 의미를 확실히 한 것이다. 소통이 된다는 것은 분열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분열의 상황에 계속 처해 있다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소통이 안 되는 상황, 분열의 상황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소통이 되었고, 분열의 상황이 통합의 상황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꽃이 통합의 상황이다. “이름을 불러주기 전”의 상황이 몸짓의 상황이라면, 소통이 어려운 상황이라면, 이름을 불러준 이후의 상황은 눈짓의 상황이다. 소통 가능의 상황이다. 그래서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달라고 하는 것은 분열의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분열과 통합의 시는, 더 정확히 말하면, 분열과 ‘통합의 시도’의 시는, 모더니즘의 시이다.
4. “작난”과 “생활난”-김수영의 모더니즘
김수영의 모더니즘은 역사적 모더니즘이다. 단순히 서양에서 이식되어 들어온 모더니즘이 아니다. 이승훈, 「모더니즘의 비판적 수용」, ꡔ모더니즘의 비판적 수용ꡕ, 모아드림, 2002, 266면 이하 참조.
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을 때
그는 줄넘기 작난을 한다
나는 발산한 형상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작전 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
1949년 사화집 ꡔ새로운 도시와 시민의 합창ꡕ에 실린 「공자의 생활난」(부분)이다. 김수영의 등단작이다. 첫째 연의 둘째 행에서 “그”는 공자이다. 공자가 “줄넘기”를 하는 것은 “피”어난 “꽃”에 화답하는 것이다. 꽃과 하나가 되어 춤을 추는 것과 같다. “작난”은 놀이이다. 목적이 따로 없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분열이 아니다. 공자와 꽃은 하나이다. 꽃이 자연이라면 공자와 자연은 하나이다. 분열되기 이전의 상황이다. 꽃도 봉오리가 아니고 피어난 꽃이다. 피어난 꽃은 둥글다. 둥근 원환의 세계이다. 분열되지 않은 세계이다. 분열되지 않은 문학이다. 재도지기(載道之器)의 문학, 유교적 문학이다.
분열되지 않은 세계는 그리고 공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공자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분열되지 않은 세계이다. 아직 분열되지 않은 세계이다. ‘아직’이라고 한 것은 분열되기 때문이다. 공자 이데올로기는, 유교적 세계관은 무너지고, 따라서 현실은 분열되기 때문이다. (재도지기의 문학은, 유교의 문학은,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산한 형상을 구”한다고 하는 표현이다. 발산한 형상을 구한다고 하는 것은 현실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이다. 현실의 분열이 모더니즘이고 분열된 현실에 대응하여 발산한 형상을 구하는 것이 모더니즘이다. 모더니즘은 분열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한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통합에 대한 그리움이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의 모습에 도달할 수는 없다. 불가능하다. 전체는 복잡한 전체이고 분열된 전체이고 분업화된 전체이기 때문이다. 전체의 모습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현의 미학과의 단절이다. 유기체적 미학과의 단절이다. 모더니즘은 재현의 미학, 유기체적 미학과의 단절이었다. 김현은 이 시를 가리켜 “복고주의와의 완전한 결별”이라고 하였고(「자유와 꿈」, ꡔ김수영의 문학ꡕ, 황동규 편, 민음사, 1983, 105면), 유종호는 “전형적인 모더니즘 난해시”라고 하였다(「시의 자유와 관습의 굴레」, 위의 책, 245면).
김수영의 모더니즘은 그러므로 서양 모더니즘의 단순한 수용이 아니다. 김수영에 의하여 역사적 모더니즘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은 공자 이데올로기, 즉 유교적 세계관이 무너졌을 때 발산한 형상을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산한 형상을 구하는 것이 모더니즘이기 때문이다.
셋째 연의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에 대해서: ‘먹기 쉬운 것은 나의 반란성일까’라고 한 것은 먹는 문제, 생존의 문제, 리얼한 문제, 리얼리즘의 문제를 말한 것이다. ‘반란’이라고 한 것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란이다. 역사적 모더니즘에 대한 반란이다. 재도지기의 문학관, 유교 문학관의 ‘부정’이 모더니즘이었으나 다시 모더니즘은 리얼리즘에 의해 부정되고 있다. “작난”은 “생활난”에 지고 있다.
작난과 생활난이 병존하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이 병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의 맨 마지막이 꼭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모든 부분이 결론이 될 수 있다.
리얼리즘의 시도 있고 모더니즘의 시도 있다. 모더니즘의 시이면서 리얼리즘의 시도 있다. 리얼리즘의 시이면서 모더니즘의 시도 가능하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시도 모더니즘의 시이면서 리얼리즘의 시이다. 모더니즘의 시이면서 리얼리즘의 시이므로 분열의 시이므로 넓게 보아 모더니즘의 분열의 시라고 할 수 있다.
남에게 犧牲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 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四十명 가량의 醉客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犯行의 現場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 「罪와 罰」 전문
분열의 모더니즘이 잘 나타난 시이다. “우산대로” 아내를 “때려 눕혔을 때” 많은 “醉客들이/모여들었”는데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있었을지도 모를 아는 사람의 ‘응시’를 두려워하고 있다.
시선은 분열되어 있다. 취객들의 시선, 혹은 ‘아는 사람’의 시선에 분열되어 있다. 분열된 시선이 분열된 의식을 낳고 있다. 취객들의 시선, 혹은 아는 사람의 시선은 라깡에 의하면 ‘응시’이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여기서는 마누라늘 패고 있는 것을-보는 시선이다. 시선은 응시에 의해 분열되었다. 주체는 분열되었다.
이 시에서도 분열된 주체는, 분열의 모더니즘은 「공자의 생활난」에서처럼 지양되고 있다. 응시에 의해 분열된 주체보다, 누가 보았을까 걱정하는 주체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 “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두고 온 우산이 “아”깝다고 했기 때문이다.
분열의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 의해 지양되었다고 해서 이 시를 리얼리즘의 시로만 볼 수 없다. 리얼리즘의 시이기도 하지만 모더니즘의 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시의 맨 마지막이 꼭 결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시는 모든 부분이 결론이 될 수 있다.
시선과 응시의 관계는 김춘수의 처용단장 1부(ꡔ김춘수 詩選ꡕ, 1981)에서도 나타난다. 처용단장 1부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
바다가 왼종일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은 閑麗水道에서 불어오고
느릅나무 어린 잎들이
가늘게 몸을 흔들곤 하였다.
“새앙쥐 같은 눈”은 응시의 눈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보고 놀라는 눈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새앙쥐 같은 눈’은 누가 보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누가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챘을 때 ‘누가 보고 있는 눈’에 대한 명명이기 때문이다. 특히 “왼종일”이 문제가 된다. 왼종일은 ‘항상’과 같고 그러므로 항상 누가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항상 분열되어있다는 것이다. 새앙쥐 같은 눈에 하루종일 시달리는 자아의 시이다. “느릅나무 어린 잎들”도 “이따금” “閑麗水道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흔”든다. 몸을 떤다. 시적 주체가 응시에 의해 시달리고 있으므로 ‘느릅나무 어린 잎들도’ 시달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사실 한려수도에서 불어온다고 했지만 바람도 알 수 없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불안한 바람이다.
5. 결론을 대신하여
인간의 마음 속에는 하나만 저어가지 않는다. 사회가, 사회의 불의가 저어가기도 하고, 죽음이 저어가기도 하고, 사랑이 저어가기도 하고, 죽음과 사랑이 함께 저어가기도 하고, 죽음과 ‘사회의 불의’가 함께 저어가기도 한다. 죽음과 ‘사회의 불의’와 사랑이 함께 저어가기도 한다. 니체가 저어가기도 하고 마르크스가 저어가기도 한다. 니체와 마르크스가 함께 저어가기도 한다. 사상의 혼합주의(Synkretismus), 즉 사회귀족주의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를테면 ‘사회’는 마르크스에게서 온 것이며, ‘귀족주의’는 니체로부터 온 것이다.
모더니즘은 분열의 모더니즘이고 또한 분열을 봉합하려는 모더니즘이다. 분열의 모더니즘은 내면성의 모더니즘이다. 내면이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이의 가장 모범적인 예가 이승훈의 ‘비대상시’의 경우였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도 내적 분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의미시는 통일된 이미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분열의 시이나, 전체는 무의미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가 무의미에 의해 봉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무의미시도 통합을 시도하는 무의미시였다.
김수영이 「罪와 罰」에서 보인 제3자의 응시에 대한 의식은 분열된 인간의 의식이다. 분열된 인간의 의식은 모더니즘의 의식이다. 그러나 분열을 산업화. 도시화, 대중화가 만들어낸 분열로 볼 수 있다. 분열은 사회적 분열의 반영이기도 하다. 분열의 세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분열 그 자체를 강조하면 모더니즘이지만 반영을 강조하면 리얼리즘이다.
재현의 논리의 리얼리즘은 모더니즘에 의해 지양되지만 거꾸로 김수영의 경우처럼 모더니즘이 리얼리즘에 의해 지양되기도 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병존하기도 한다. “마카로니”가 저어가기도 하고 “발산한 형상”이 저어가기도 한다. 발산한 형상이 저어가기도 하고 마카로니가 저어가기도 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병존은 분열이므로 넓은 의미에서 보면 다 모더니즘이다.
박찬일
․춘천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ꡔ화장실에서 욕하는 자들ꡕ ꡔ나비를 보는 고통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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