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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신작단편소설/권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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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733회 작성일 05-02-20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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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풀은 꽃을 피운다

권 채 운




지하철의 자동문이 열리자 내리려고 한 발을 내밀던 그는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다. 가슴패기를 밀어붙이면서 들어오는 늙수그레한 여편네 때문이었다. 마지막 지하철이긴 했지만 그렇게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여편네들뿐일 게다. 나가나 들어오나 여편네들이 설치는 통에 주눅이 들어 못살겠다. 에이, 극성스런 여편네들. 그는 투덜거리며 지하철역의 계단을 올랐다.
그가 사업에 실패한 뒤부터였을 것이다. 남편의 말이라면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저 죽으라면 죽는시늉까지 했던 마누라가 슬그머니 그의 뒷덜미를 틀어쥐고 좌지우지하게 된 것은. 아무런 상의 없이 방 하나를 사글세로 덜컥 내놓고 만 마누라의 그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다다음주 수요일이에요, 수요일. 어디 가지 말고 꼭 집에 붙어 있어야 한다구요. 달력에 시뻘건 매직펜으로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다짐을 하던 마누라의 모습이 떠올라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괜스레 방 하나를 놀릴 턱이 없다는 거였다. 남자 혼자 집 한 채를 독차지하고 있어봤자 휑뎅그렁하니 찬바람이나 돌지 좋을 게 없다는 것이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였지만, 보증금 이백만 원에 월세 십오만 원의 수입을 올리자는 수작임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든 마누라가 나서면 아귀가 짝짝 들어맞는다. 지지난 일요일에 와서 뜬금없이 부동산 중개소에나 놀러가  보겠다며 나간 마누라는 하루 종일 거기서 죽치고 있는 눈치더니 그예 세들 사람을 구해 계약을 하고 나서 그에게 통고를 했던 것이다. 아무려면 당일로 사람을 구할 수가 있었을까. 미리미리 전화로 방을 내놓고는 자기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수월하게 척척 된다는 듯이 시위를 하는 거겠지. 그래 잘났다, 어디 잘 해봐라. 나는 모르겠으니 이제는 네가 다 해먹어라 하고 두말 말아야지 하면서도 뒤틀리는 심사는 어쩌지를 못 하였다.
“어쩜, 일이 될라니까 맘에 딱 맞는 사람이랑 계약을 하게 되네. 방 구하는 사람은 더러 있습디다. 과분지 처년지 알 수 없는 여자도 있었고, 한 육십은 넘어 보이는 할머니도 있었는데, 젊은 여자는 그쪽에서 싫다 하고, 할머니는 말이 할머니지 나보다 예뻐서 내가 퇴짜를 놓았고, 다 저녁에 남자 하나가 들어오는데 이 사람이다 싶더라구요.
나이는 마흔 아홉이고, 아들 하나 있는데 군대 갔고, 밥은 해먹지 않기로 했으니 수선스러울 것 없고, 직장은 아침에 나갔다가 밤늦게나 들어오는 회사고, 내가 말하기도 전에 가스, 전기, 수도, 다 합해서 한 달에 삼 만 원씩 내겠다고 하는 걸 보면 사람이 여간 시원시원하지 않습디다. 이 년만 있으면 분양 받은 아파트에 입주할 거라면서 월세도 석 달 치를 한꺼번에 주는 걸 보니 그렇게 째는 것 같지는 않고, 상처한 지 칠 년째라는데 홀아비 티도 안 나고, 깔끔한 게 인상도 좋고.”
마누라는 신이 나서 주워섬겼지만 유독 사람을 가리는 그는 낯선 사람과 한 화장실을 쓰고 날마다 얼굴을 대하고 살 일이 겁이 났다.
“곧 재건축이 된다고 저 야단들인데 사람을 들여 어쩌자는 거야? 당장에 집을 비우라면 어떡헐 거며 집값 오른 김에 주인이 집을 판다고 나서면 또 어쩌려구. 여편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와서는 앞뒤 재보지두 않구 설쳐대기는…….”
“아이구, 그렇게 잘 재구 마르구 해서 요 모양으로 잘 사는구먼요.”
“뭐이 어쩌구 어째?”
“괜시리 혈압 올리지 말고 관둡시다. 만날 지껄여봐야 그 소리가 그 소리니. 언제는 곧 된다구 안 했어요? 광고 전단지 보니까 케이블TV 신청 받습디다. 그 약아빠진 사람들이 설치비도 안 받고 신청 받을 때는 적어도 오 년은 끄떡없다는 거 아니겠어요? 큰 변고가 없는 한, 부동산 많은 집주인이 가만히 놔둬도 저절로 불어나는 재산을 처분할 리도 없고, 설혹 팔린다고 해도 이런 연탄 때는 아파트에 이사 올 집주인은 없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라구요.”
듣고 보니 모두 맞는 말이어서 그는 마누라에게 제대로 대거리도 못 해보고 물러앉고 말았다. 그러나 하루하루 날짜가 다가오자 살이 내릴 지경이었다. 바로 내일부터는 그 인상 좋다는 홀아비와 같이 살게 될 판이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 신용카드회원모집인 같은 놈만 아니라면 참아줄 수 있을 텐데…….
그는 옷깃을 올리고 잔뜩 웅크렸다. 이 칼바람 속에야 전들 버티겠는가. 지하철역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서면서 그는 눈을 들어 아파트 단지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저런, 아직 있다. 끈질긴 녀석 같으니라구. 자정이 가까운 이 시간까지 어느 누가 카드를 만들겠다고 저리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끈기 하나는 대통령 표창 감이다. 지난 연말부터 그의 눈에 가시가 된 사내는 가로등도 못미치는 어둑선한 아파트 단지의 철망 울타리 앞에 겹겹이 껴입어서 눈사람에게 옷을 입혀 논 꼴로 웅숭크리고 앉아있었다. 그는 부러 발을 쿵쿵 울리며 사내 앞을 지나갔다. 사내는 졸다가 그의 발짝 소리에 잠이 깼는지 몸을 흠칫 떨고 나서 좌판에 코를 박을 듯이 엎드리며 웅얼거렸다.
“카드 부탁드립니다.”
“흥, 멘트가 또 바뀌셨구만.”
행인의 발걸음을 붙잡는 사내의 문구는 수시로 바뀌었다. 그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서너 가지는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십일 세기의 필수품, 국민카듭니다. 카드 하나 만드시죠? 선물 받아 가세요. 특별 기간입니다. 자기 딴에는 고심해서 내놓았을 문구였지만 그의 귀에는 거슬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도 용한 것이 사내의 손전등 불빛에 의지하여 신청서를 작성하고 있는 여자들도 간혹 눈에 띄었고, 스무 살 남짓의 노랑머리 애녀석도 등을 구부리고 무언가를 적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직 아무 분별이 없을 것 같은 애들한테까지 무턱대고 카드 만들기를 권유하는 사내의 낯판대기를 후려치고 싶은 것을 참느라고 그는 종종걸음을 치곤 했다. 낫살이나 먹은 놈이 무슨 할 일이 없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며 오밤중까지 길바닥에서 덜덜 떨고 있단 말인가. 내 언제고 저놈의 좌판을 걷어차 버리고 말아야지. 그는 그예 뒤를 돌아다보며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오늘? 오늘 붙어 볼까? 소주 한 병으로는 용기가 부족하다.
‘건축심의통과를 축하드립니다.’
그는 눈앞을 가로막는 플래카드를 향해 한껏 눈을 흘겨주고 맨손으로 코를 휑 풀어 바닥에 패대기를 쳤다.
“흥, 십 년 안에 하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지. 암 지지구 말구.”
사업자금이 모자라 집을 줄이면서 재건축한다는 말을 믿고 이사 온 지 15년이 넘었다. 86아시안 게임을 하기 전에 할 것이라던 재건축은 88올림픽을 할 때도 입주자들을 한껏 달뜨게 해놓고는 그냥 넘어갔고, 그간 몇 번의 선거 때마다 후보들의 첫 번째 공약으로 올라앉았으나 입때껏 소문으로만 질기게 질질 끌고 있을 뿐이다. 실내체육관에 단지 내의 총 입주자가 모여서 재건축할 업자를 선정한다고 코미디언을 불러다 사회를 보게 한다, 가수가 축하공연을 한다 했을 때는 금세 맨션아파트의 주인이라도 될 듯이 얼마나 뿌듯했었던가.
“하려면 진작 할 것이지, 남의 집 다 날아가고 나니까 이제 와서 하겠다고? 나하고 무슨 원수졌냐? 미친놈들.”
그는 발끝에 걸리는 연탄재를 냅다 걷어찼다. 어이쿠, 하며 그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수관이 터져 빙판이 되면서 길에 얼어붙은 연탄재가 무쇠덩이 같았던 것이다. 부딪친 발가락이 부러지기라도 했는지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사사건건 되는 일이 없다. 그는 절뚝거리는 걸음마다 욕설을 뱉었다. 저 녀석 낯짝만 보면 재수가 옴 붙는다니까.
저 신용카드회원 모집인은 아파트 단지의 정문 옆에 자리를 잡을 때부터 이상스럽게도 그의 눈에 거슬렸다. 마침 아들이 카드 빚에 내몰려 직장에서 쫓겨나고 살 길이 막막할 무렵이기도 했지만 왠지 자기가 그 곳에 전을 벌리고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굽실거리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지하철역의 출구와 마주보고 있는 데다 아파트 단지의 정문 바로 옆이라서 유동인구가 많아 목이 좋다고는 해도 이 한 겨울에 바람 한 점 막아줄 담도 없는 곳에 전을 벌린 것은 얼어죽겠다는 게 아니고 무엇인가 말이다. 지하철이 지나갈 때마다 땅속에서 밀어 올리는 바람까지 고스란히 받고 앉아있는 이유는 또 무언가.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것 같은 개털모자를 눌러 쓰고 먼저 자리 잡은 군고구마 장수와 자리싸움을 벌렸을 때도 그는 속으로 군고구마 장수 편을 들었다. 하고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신용카드회원모집인인가. 나라에서 보장해주는 고리대금업의 하수인이 아닌가. 말이 좋아 신용 사회요 신용 사회의 필수품이 신용카드라지만, 결국은 외상 인생들만 쏟아내는 제도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신용카드만 내밀면 먹을 거며 입을 거며 치료비에 해외여행에 만사가 오케이라고 무슨 횡재나 한 듯이 뒷갈망은 생각 않고 긁어대지만, 따지고 보면 전 국민이 모개로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기야 집도 절도 없는 데다 그 흔한 통장 하나 없고, 휴대폰도 없고, 직업마저 없는 그에게는 신용카드야말로 꿈에서도 만져볼 수 없는 도깨비방망이였다. 어쩌면 애고 어른이고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지갑에 가득 넣어 가지고 다니는 카드를 자기만 가질 수 없다는 데 대한 원한으로 애꿎은 신용카드회원 모집인이나 미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며칠이나 갈까. 밥벌이가 될까. 공연히 마음을 쓰고 있는 자신에게 화를 내면서도 그는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사내에게서 마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사내는 처음엔 야외용의 간이 식탁에 선물로 주는 잡살뱅이를 올려놓고 오가는 사람들에게 굽실거리며 똑같은 말을 반복하더니, 며칠 후에는 스티로폼 판에 붙인 형광색 종이에 ‘카드, 대출’ 따위를 써서 바람막이로 울을 두르고 그럴듯하게 자기 구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군고구마장수와는 타협이 잘 되었는지 인도의 양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군고구마 리어카와 마주보며 가끔가다 장작불도 봐주는 것 같았다. 아무리 비좁아도 어떻게든 비비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마는 사람이 있는데 사내도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는 사내가 그 자리에서 밀려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기를 바랐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리 기온이 내려가고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겨우내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자동차의 경적이 길게 울렸다. 택시다. 집 앞에까지 택시를 타고 들어오는 인간은 누구야? 그는 한쪽으로 비켜서며 툴툴거렸다. 그도 가끔 택시를 이용하지만 아파트 단지의 정문에서 내려 걸어들어 오곤 했다. 시간이 곧 돈이라든지, 짐도 없는데 현관 앞에까지 가서 내리는 손님이 제일 얄밉다든지 하는 얘기를 택시 기사들에게서 들어서라기보다는, 머지않아 그도 택시 운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알지도 못 하는 택시 손님을 향해 볼멘소리를 하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까짓 택시운전자격증쯤이야 눈감고도 따겠지 하고 얕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렇다할 사고 없이 운전한 지가 이십 년인데, 응시자 중에서 열 명에 한 명은 떨어진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자신이 그 속에 낄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운전면허를 딸 때도 단번에 합격했던 실력인데 택시운전 자격시험에서는 두 문제 차이로 필기시험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 문제라는 것이 운전면허 시험과 마찬가지로 객관식이었는데 말을 이리저리 배배 꼬아놓아서 답이 모두 그게 그것 같았다. 서울서 나서 입때껏 살아왔으니 서울지리는 훤하다고 내심 자부해 왔건만 시험문제 중에서 제일 헷갈리는 것이 지리 문제였다. 시험이야 자주 있으니 또 보면 될 터이지만, 60점도 못 받은 시험 점수가 꼭 그의 인생 점수를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떨떠름했던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벼랑에 몰렸다고 해도 이 김석준이가 그래 택시 운전이나 할 팔자겠나?”
허공에 대고 소리를 내지르고 나니 기운이 나는 것도 같다. 무슨 다른 일을 하라는 신의 계시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직장 고마운 줄 모르고 내 사업합네 하고 호기롭게 사표를 내던졌던 시절만 해도 혈기가 왕성했었다. 그러나 이 일 저 일 벌이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여 종당에는 이 작은 아파트마저 날리고 말았다. 그나마 아파트가 경매로 넘어가기 직전에 전세로 눌러앉을 수 있었던 것도 마누라의 수완이었다. 하기는 아들의 사교육비로 들어간 돈만 고스란히 모았어도 이까짓 13평짜리 아파트쯤은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누라는 아들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그 덕에 아들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잡을 수 있었고 제 마음에 드는 짝도 만날 수 있었다. 마약 같다는 증권에 손을 대지만 않았어도 제가 구정물에 손을 담그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기가 팍 죽어서 허연 밀가루 범벅의 앞치마를 두르고 만두를 빚고 있는 꼴 하구는. 증권을 했어도 그렇지, 빌어먹을 카드를 그렇게 많이 만들어서 현금서비스다 대출이다 분수 없이 긁어대지만 않았어도 아비까지 생홀아비를 만드는 불효는 저지르지 않았을 터이다. 마누라는 가스보일러였던 전셋집을 연탄을 때는 전셋집으로 줄여 이사하면서 그 차액 삼천만 원을 며느리에게 주었다. 다행히도 며느리는 발벗고 나서서 제 친정 동네인 부천에다 만두집을 냈다. 두 돌이 지나 말을 배우기 시작한 손자를 맡아야 한다며 마누라가 아들네로 거처를 옮겼을 때는 차라리 시원했다. 지긋지긋한 마누라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기쁨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막상 혼자 지내려니 불편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혼자 먹는 밥은 목구멍을 넘어가지 않았고, 혼자 보는 TV도 아무 재미가 없었다. 역사물을 보겠네, 멜로물을 보겠네 하며 채널 싸움을 하던 마누라에게 번번이 밀려서 녹화해 놓았다가 다음날에나 보던 연속극도 마누라가 있을 때와 똑같이 마누라가 보던 걸 보곤 했다. 하다 못 해 아파트의 경비원이나 택시 운전 같은 것이라도 해서 먹고 살 궁리를 하지 않는다고 마누라의 잔소리가 빗발쳤지마는, 한 해 전까지만 해도 사장소리를 듣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말처럼 어디 그리 쉬운가 말이다. 아들한테 하듯 남편에게도 사업자금을 융통해 주었으면 이 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빈 지갑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을 나서봤자 갈 데라고는 한강 둔치밖에 없었다. 대낮부터 맥이 풀린 눈으로 멀거니 강물만 바라보는, 늙지도 젊지도 않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들과 마주칠 때면 꼭 거울을 보는 듯해서 저절로 고개가 돌려지곤 했다. 서푼벌이라도 해서 남은 인생을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건 바보천치라도 알 것이었다. 두 식구 살림이야 마누라가 어떻게든 알아서 꾸려갔다. 그러나 용돈까지 달라고 손을 내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택시 운전이라도 해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긴 했지만 여간해서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한강 둔치에 나갔다가 말을 붙이는 남자를 알게 되어 그를 따라 택시운전 자격시험도 보게 되었다.
연탄불이나 꺼지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는 절뚝거리며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의 쥐붕알만한 전등은 늘 꺼져있다. 열쇠가 바로 들어가지 않았는지 현관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한쪽 어깨로 문을 밀며 열쇠를 돌렸다. 열쇠는 그제야 찰칵하고 돌아갔다. 문짝이 뒤틀려서 이 모양이다. 캄캄한 집 안으로 들어서는 게 영 싫다. 그는 스위치를 더듬더듬 찾아서 올리고 옷도 벗지 않은 채 거실 귀퉁이의 마룻장을 열고 연탄아궁이부터 들여다보았다. 싸늘했다. 젠장할, 번개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담배를 한 대 물고 연탄집게로 번개탄을 들어올려 불을 붙였다. 파시식, 소리와 함께 노란 불길이 치솟으며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그는 기침을 하며 불이 붙은 번개탄을 휘휘 내둘렀다. 기침을 하는 바람에 담배가 마루바닥에 툭 떨어졌다. 빌어먹을. 그는 발로 담배를 아궁이로 밀어버렸다. 번개탄에 불이 완전히 붙지 않은 것을 아궁이에 넣었다가 몇 번 낭패를 보았다. 벌겋게 타오르는 번개탄 위에 연탄을 올려놓고 두꺼비집을 덮은 다음 허리를 펴니 집 안에 연기가 자욱했다. 그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작은방을 들여다보았다. 한 세 평이나 되려나, 요즘 세월에 단칸방을 얻어 몸을 의탁하려는 인간은 어떤 인간일까. 불기를 구경한 게 언제인지 모르는 방바닥이 얼음장 같아서 발가락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안방이라고 나을 것도 없다. 늘 깔아두는 요 밑에 손을 넣어보지만 겨우 냉기만 면했을 뿐이다. 아무래도 전기장판 신세를 져야겠다. 전기장판에 온기가 돌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동안 그는 TV를 켜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마누라가 있었다면 안방에서 담배를 피운다고 단박에 쫓겨났을 것이다. 작은방에도 연탄불을 피워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이내 귀찮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벌써부터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판이니 앞으로 지낼 일이 걱정이다. 제발 부탁이니 그저 과묵하고, 일찍 일어나 나가고, 오밤중에나 들어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는 초인종 소리에 잠이 깼다. 귀찮게 누구야. 그는 돌아누우며 이불을 둘러썼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이사 왔는데요.”
뭐라고? 이사? 그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신데 벌써 이삿짐을 끌고 왔단 말인가. 여덟 시다. 방바닥이 왜 이리 뜨겁지? 에구, 어젯밤에 연탄 아궁이의 공기구멍을 막지 않고 그냥 잠들었구나. 이런, 또 꺼졌겠네. 그는 투덜거리며 바지를 꿰어 입고 스웨터를 걸치고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형광색 종이를 붙인 스티로폼 판을 한아름 안은 사내가 문 앞에 서있었다. 국민카드, 삼성카드란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놈이다. 세상에, 뭐 이런 일이 다 있는가. 그는 얼떨결에 문을 탁 닫았다. 망할 놈의 여편네, 사람을 들여도 꼭 골라서 들이네. 뭐? 깔끔하고 인상이 좋아? 그렇게 좋으면 좋은 저나 같이 살라지.
“여보세요, 23동 202호 맞지요?”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던 사내가 문을 배꼼이 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는 엉거주춤 물러나며 사내에게 작은방의 문을 열어 보였다. 사내는 소중한 듯이 안고 있던 스티로폼 판을 방에 들여놓고 나서 꾸뻑 고개를 숙였다.
“정상철입니다. 신세 좀 지겠습니다.”
그는 고개만 끄덕이고 부리나케 안방으로 들어가 마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중이었다. 헹궈서 지져먹든 볶아먹든 마누라 맘대로 요리하는 시어터진 김장김치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저 작자하고 한집에서 산단 말인가. 어떡하든 물러야겠다. 연속해서 재다이얼 버튼을 누르지만 통화중 신호만 들릴 뿐이다. 계약을 한 당사자가 나서야 일이 수월할 텐데 웬 통화가 이리 긴가. 하여간 여편네들 수다는 알아 줘야 한다니까.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그는 소리를 버럭 질렀다.
“무슨 일을 어떻게 하고 다니는 거야?”
“아버님, 왜 그러세요.”
며느리 목소리였다.
“시어미 바꿔라.”
“아니, 아침부터 왜 소리를 지르구 야단이에요?”
“지금 소리 안 지르게 됐어? 사람을 골라가며 들여야지 그래, 아무나 들여? 당장 올라와서 내보내구 다른 사람을 들이든지 말든지 하라구. 난 저 사람하군 못살겠으니까.”
“참 영문을 모르겠네. 그 사람이 어디가 어떻다구 이 야단인 거예요? 어쨌거나 그건 안 돼요. 월세보증금을 벌써 써버렸는걸. 이잣돈 무서워서 얘들 빚 남은 것 갚아 버렸다구요. 그리구 지금은 바빠서 꼼짝도 못 하니까, 일요일에나 올라갈게요. 그러지 말구 잘 지내봐요. 사람 좋게 생겼던데 괜한 까탈이야. 나 바빠서 이만 끊어요.”
마누라는 제 할 말만 쏟아놓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는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마누라는 숫제 받지도 않았다. 에이, 망할 놈의 여편네. 그는 전화기를 팽개쳐 버렸다. 뭐든지 제 마음대로다.
연탄 아궁이가 있는 이 전셋집을 얻을 때는 워낙에 지은 죄가 많아 입도 뻥긋 못 했지만 속으로 얼마나 투덜거렸던가. 시골 사람들도 죄 기름보일러를 놓고 편하게 사는 세상인데 아무리 몰락을 했어도 그렇지 연탄온돌이 다 무언가. 곧 재건축 할 아파트에 칠팔백만 원을 들여 가스보일러로 고치기에는 집주인으로서는 생돈을 처박는 꼴이라서 아직도 연탄을 때는 집이 한 계단을 쓰는 열 가구 중에 한두 가구가 있었다. 겨울 한철 연탄을 때는 것이 성가신 일이기는 해도 삼천만 원이면 방 두 개에 부엌을 겸한 거실 하나를 쓸 수 있는 데다, 2호선 전철이 코앞으로 지나가고 사통팔달한 도로가 아파트 단지를 에워싸고 있어서 없는 사람이 살기에는 그만이었다. 방 한 칸에 싱크대 한쪽이 겨우 들어갈 부엌 하나와 겨우 엉덩이를 들이밀 화장실 하나로 설계된 7.5평형 중앙난방 아파트와 맞먹는 전세금이었다. 그는 방이 하나라고는 해도 더운물이 나오는 7.5평형으로 옮겼으면 했지만 마누라는 아들 내외가 다니러 와도 그렇고 우선 속이 답답하다면서 제 주장대로 연탄을 때는 아파트를 전세 내었던 것이다. 마누라가 아들네로 가고 난 뒤로는 물을 데워서 하기가 귀찮아서 세수도 않는 날이 많았다. 전기밥솥에 밥을 가득 지어서는 뜬내가 날 때까지 먹다먹다 밥을 버리기 일쑤였고, 입에도 대지 않던 라면을 박스로 사다놓고 주식으로 삼는 날도 있었다. 마누라의 궁리 덕분에 요즘 들어서 밥 문제는 해결되었다. 뚜껑이 있는 도자기 밥주발을 몇 개 사와서 밥을 일일이 퍼담은 다음 보온밥통에 넣어 놓고 먹으니 밥이 마르지 않았고, 그도 다 못 먹을 양이면 주발째 냉동실에 넣었다가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으면 금방 한 밥처럼 맛이 좋았다. 뱃속에서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끼니는 기가 막히게 챙기는 뱃속이다.
“저,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새 짐을 다 옮겼는지 사내가 조심스레 안방 문을 두드렸다. 그는 마지못해 일어나 이부자리를 반으로 접어 한쪽으로 밀어놓고 사내에게 들어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내 역시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무슨 이사를 벌써 다 했소? 거 방이 추울 텐데 연탄불을 피워야 하지 않겠소?”
“이삿짐이라고 해야 이불보따리 하나뿐이라서요. 괜찮습니다. 전기장판은 있고, 정 추우면 전기난로를 사든지 하지요.”
“전에는 어디서 살았소?”
“고시원에 있었습니다.”
“왜, 거기가 되레 편하지 않소?”
“곧 아들이 제대하거든요.”
“음, 그러면 두 식구란 말인데, 말이 다르지 않소.”
“예, 그렇긴 합니다만 그 앤 잠만 잘 겁니다. 제대하는 대로 직장에 나가기로 돼 있어서요. 그래서 양해를 구하려고…… 부탁드립니다. 절대로 성가시게 안 할 겁니다. 애가 워낙 조신해서요.”
“이거야원.”
그는 입맛이 쓰면서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계약조건과 다르니 그걸 꼬투리삼아 내보내면 될 일이었다.
“나는 모르겠소. 일요일이면 안사람이 올 테니 그때 다시 얘기합시다.”
사내는 방바닥을 손으로 두어 번 문지르더니 슬그머니 일어나 나갔다. 그만 일에 풀이 죽어 나가는 사내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해서 약해지려는 마음을 내몰았다. 밥을 먹긴 먹어야겠는데 한집에 사람이 있는 걸 번연히 알면서 혼자 먹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저 작자와 마주하고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없고, 난감한 일이었다.
“저, 나가봐야 하는데 열쇠 좀 주시겠습니까?”
한 손으로는 스티로폼 판을 끌어안고 한 손에는 야외용 간이식탁을 든 사내가 안방 문 앞에 서있었다. 그는 여벌로 두었던 작은방의 열쇠와 현관열쇠를 건네주면서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나도 노상 집에 붙어있는 거 아니니까 문단속 잘하고 다니쇼. 그리고 그저 서로 없는 듯이 지내기요.”
“다녀오겠습니다.”
사내는 그의 말엔 아무 대답이 없이 허리를 깊이 숙이고 나갔다. 사내가 나가자 한숨이 나왔다. 그는 담배를 붙여 물고 나와 작은방을 열어보았다. 방바닥에 전기장판이 깔려있고, 구석에 얄팍한 이불이 개켜져 있고, 행거에 걸린 옷가지가 몇 벌 눈에 띌 뿐이다. 노숙자의 짐보다 나을 것이 없다. 저 신세나 내 신세나 참……, 어쩌다가 여기까지 와서 짐 같지도 않은 짐을 부리게 되었을까. 그는 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밥상을 차리지 않고 서성거렸다. 걸을 때마다 엄지발가락이 신경을 거슬렸다. 약간 부었지만 뼈를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발가락을 핑계로 당분간은 택시운전자격 시험을 미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입맛이 돌았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이 아닌가. 그는 어제 먹다 덮어둔 김치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밑반찬을 꺼내 밥상을 차렸다. 연탄불을 다시 피워야 하겠지만 아직은 방이 따뜻하니까 밥이나 먹고 천천히 피울 일이다. 그가 밥을 반쯤 먹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이사 잘 했어요?”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와서 보지 그래? 바쁘다며? 전화 받을 새는 없고 전화 걸 새는 있나?”
“왜 또 그래요. 아직 화 안 풀렸어요?”
“화는 무슨, 내가 화낼 자격이나 있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다 좋자고 하는 일인데.”
“다 누구? 누가 좋은데?”
“관둬요. 일요일에 일찍 갈게요. 전화 끊어요.”
실랑이 해 보았자 만날 그 타령인 걸 뻔히 아는 마누라는 서둘러 전화를 끊어버렸다. 망할 놈의 여편네, 부아를 지르는 데는 선수지. 그는 밥상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어쩌다 신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귀가 얇은 게 탈이라면 탈이었다. 노래방이 잘 된다는 소문만 믿고 노래방을 차렸을 때나, PC방이 뜬다고 해서 덜컥 돈을 디밀었을 때나, 그저 남의 말에 혹해서 좌우 살피지도 않고 덤벼들었던 게 실수였다. 뭐니뭐니 해도 먹는 장사가 제일인데, 아들네 만두집만 해도 그럭저럭 밥은 먹지 않나. 손에 물 묻히는 건 못 한다고 펄펄 뛰는 마누라 때문에 남 보기에 깨끗하고 번듯한 것만 찾다가 망조가 들었던 것이다. 아무려면 그까짓 월급쟁이만 못 하겠느냐고 희망에 부풀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택시 운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택시 운전을 할 생각만 하면 입맛이 썼다. 요즘은 통 소식을 끊고 지내는 친구들은 노후가 어쩌고 건강이 어쩌고 해가면서 몸보신할 궁리나 하고, 어디 무슨 재미난 일이 없나 기웃거리며 여유를 부릴 텐데, 자신은 당장 생활비 걱정에 연연해야 하니 생각할수록 신세가 말이 아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마누라는 아닐 테고, 어디 전화 올 데라고는 없다. 전화벨은 받을 때까지 울리겠다는 듯이 계속 울렸다. 이건 숫제 횡포다. 그는 구시렁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강남 부동산 컨설팅의 조수남입니다. 좋은 물건 나왔는데 투자하시죠? 이보쇼, 지금 누구 염장 지르는 거요? 전화가 뚝 끊어졌다. 그는 전화기의 줄을 홱 잡아채어 코드를 뽑아버렸다. 이것들이 누구 약을 올리려고 작당을 했나? 아무데나 전화를 걸어서 투자하라면 할 만큼 돈 가진 사람이 널렸다는 얘긴데…… 도대체 그놈의 돈이 어디에 몰려 있을까. 나가서 복권이나 한 장 사볼까. 어젯밤에 무슨 꿈을 꿨더라. 정말 꿈다운 꿈을 꿔본 지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밤새도록 어떤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서운 것에 쫓겨다니는 꿈만 꾸다가 벌떡 깨어 일어나면 줄거리도 없는 뒤숭숭한 꿈은 꿈속에서조차 편안할 수 없는 냉혹한 현실감만 남겨 놓곤 했다. 재수 있는 사람이나 돼지꿈도 꾸는 거겠지. 꿈을 꾸고 싶은 대로 꿀 수 있다면 꿈속에서나마 행복할 수도 있을 텐데…… ‘꾸고 싶은 꿈을 꾸게 해 드립니다.’ 이런 간판을 내건다면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 것이 틀림없다.
후두둑, 빗소리가 들렸다. 그의 마음처럼 잔뜩 찌푸렸던 하늘이 그예 비를 쏟아놓고 있었다. 벌써 봄이 오려나. 하기는 내일 모레면 입춘이니 봄이 멀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오늘 장사는 다 틀렸구먼. 그의 마음은 어느새 사내에게로 가 있었다. 사내는 쫓아도 쫓아도 악착같이 달라붙는 각다귀처럼 이젠 아예 그의 집에까지 차고 들어와 버렸다. 기이한 인연이다.
현관문 따는 소리가 달그락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아무리 끈질긴 인간이라도 이 겨울비 속에서야 버틸 수 있을라구. 그는 공연히 마음이 들떴다. 그는 안방 문을 비죽이 열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비에 흠뻑 젖은 사내가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추레한 꼴이 말이 아니다. 그는 못 볼 것을 본 듯이 문을 탁 닫고 이불을 덮어썼다. 추울 텐데…… 알 게 뭐냐. 제가 알아서 하겠지.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먹다만 밥상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는 부러 덜그럭거리며 밥상을 치운 다음 연탄아궁이를 열어보았다. 매정하게도 연탄은 한 구멍도 남지 않고 허옇게 다 타버렸다.
그는 슈퍼에서 열 개들이 번개탄 한 묶음과 소주 두 병과 햄 하나를 샀다. 그까짓 반찬 없는 밥보다는 소주 한 병이 큰 요기다.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이런 날은 술맛이 더 당기는 법. 혼자 마시는 술인데 밤낮을 가릴 필요가 있나. 그는 연탄불을 피운 후 술상을 보아 방으로 들어갔다. 먹던 김치에다 김을 곁들이고 햄을 구웠으니 이만하면 상급이다. 작은방의 사내를 부를까 하는 생각이 언뜻 들었지만 그는 그 생각을 꿀꺽 삼켰다. 소주 두 잔을 거푸 들이켜니 전신에 술기운이 돌면서 마음이 눅어졌다. 그는 술잔을 들고 작은방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신발이 있는 걸 보니 나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는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취해서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정상철입니다. 저녁 안 드셨으면 저하고 저녁이나 같이 드시지요.”
가까스로 눈을 뜨니 방안이 어둠침침했다. 그는 부스스 일어나 전등불을 켰다. 어이쿠, 연탄불. 그는 안방 문 앞을 가로막은 사내를 밀치고 나가 연탄 아궁이를 열어보았다. 연탄은 맹렬히 피어올라 시퍼런 불꽃이 널름거렸다. 그는 공기구멍을 막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내가 그를 재촉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거절했어야 하는데 시간을 놓쳐버렸다.
잠든 사이에 비가 그친 모양이었다. 젖은 아스팔트에 네온사인이 반사되어 번들번들한 것이 꼭 길바닥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사내는 앞서 걷고 그는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사내는 먹자골목의 감자탕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무얼 먹겠느냐고 물어보지도 않고 제 마음대로 감자탕 집으로 들어가는 사내가 못마땅해서 들어가지 않고 주춤거렸다. 그제야 사내는 뒤를 돌아다보며 감자탕 괜찮으시죠? 하고 물었다. 그는 뭐라고 대꾸하기도 귀찮아서 잠자코 따라 들어갔다. 사내는 저녁 시간이라 바빠진 종업원을 대신해서 제집처럼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고 물 컵을 내오고 했다. 감자탕이 끓기 전에 사내는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는 술잔을 든 채 멀뚱히 사내를 건너다보았다. 길을 가다가 아무데서나 부딪칠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순한 얼굴이다. 이 사람을 왜 그리 미워했을까. 아들이 카드 빚을 진 것은 아들 탓이고, 자격을 제대로 따지지 않고 카드를 발행한 것은 카드 회사지 카드회원모집인이 아니지 않은가. 카드 빚을 갚으려고 강도질을 했네 살인을 했네 하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애꿎은 카드회원모집인에게 눈을 흘긴 것은 스스로 좀팽이임을 시인하는 것일 뿐이었다. 사내는 묵묵히 소주잔만 기울였다. 감자탕이 끓기 시작 할 때쯤엔 벌써 소주 한 병이 바닥이 났다. 밤새 기다려도 사내의 말문은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웬 깡술을 그리 들이켜는 거요?”
답답증을 못이겨 그가 먼저 입을 떼고 말았다.
“예? 그리 됐군요.”
“원래 그리 말수가 적은 거요? 일할 때는 그러지도 않은 것 같더구먼.”
“저 일하는 거 보셨습니까?”
“이 아파트에 사는 사람치고 당신 못 본 사람은 아마 장님뿐일 거요. 대단해요. 어떻게 하루도 빠짐없이 밤늦도록 한데서 버티는지.”
“젊고 예쁜 아가씨들은 판을 벌리고 서있기만 해도 사람들이 모여들어 실적을 올리지만 저 같은 늙다리한테야 누가 관심이나 가집니까?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가게 낸 셈 치고 붙박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지요.”
“그래, 밥벌이가 되기는 되는 거요?”
“웬 걸요. 다른 젊은 직원들에 비하면 형편없지요.”
“에이. 그래도 벌이가 되니까 그러고 있지. 한겨울에 길바닥에서 진종일 버틴다는 게 아무나 할 일이요?”
“글쎄요. 달리 할 일도 마땅찮고 해서.”
“신문 보니까 거리에서 카드 권유하는 걸 못 하게 할 모양이던데.”
“예, 그러려나 봅니다.”
“그럼 큰일 아니요.”  
“빌딩이라도 타야죠.”
“빌딩을 타다니?”
“사무실이 많은 빌딩에 경비원 몰래 들어가서 회사원들을 공략하는 걸 우리끼리 빌딩 탄다고 해요.”
“재수 없으면 경비원한테 걸려 망신당하기 십상이겠구먼.”
“망신당할 체면이 남았나요. 체면 갖다가 떡 사먹은 지 오래랍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술이 올라 불콰해진 탓인지, 사내의 얼굴은 세상사에 달관한 듯이 보였다. 그는 머쓱해져서 화제를 돌렸다.
“그래, 아들은 언제 제대하는데?”
“다음 달 말이면 옵니다. 그 녀석만 오면 저도 사는 맛이 날 겁니다. 이 녀석이 아주 물건이거든요. 중학교 삼학년 때 제 어미를 잃었는데, 되레 제가 날 위로하더라고요. 십 년씩 앓는 동안 집 하나 있던 것 그 밑으로 다 들이밀었는데도 그 사람을 붙들지 못 했습니다. 의학이 아무리 발달했다고 해도 타고난 명은 어쩌지 못 하는가 봅니다. 녀석이 공부도 곧잘 해서 어떡하든 대학에 보내려고 했는데 입시 학원 다니라고 준 돈으로 미용학원엘 다녔지 뭡니까. 제 말로는 세계적인 헤어 아티스트가 될 거라나. 하여간에 좀 엉뚱한 녀석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펄펄 뛰었지요. 사내 녀석이 무슨 할 짓이 없어 여자들 머리나 만지며 일생을 살 거냐고요. 그 녀석 대답이 가관이었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게 여잔데 그 아름다운 여자들의 머리를 매일 매만지며 살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는 겁니다. 그래도 저러다 말겠지, 미용 일이라는 게 보기보다 무척 어렵다던데 젊은 놈이 얼마나 버티겠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미용사 면허증을 따더니 제가 알아서 보조로 취직도 하고, 보통 오 년은 걸려야 제대로 월급을 받는 미용사가 되는데, 저는 삼 년 안에 일급 미용사가 되고 말겠다며 부지런을 떨다가 군에 갔습니다. 휴가 나와서도 손이 무뎌졌다고 미용실에서 살다시피 하군 했어요.”
사내는 아들 생각만 해도 신바람이 나는지 사설이 길었다. 그것도 자랑이라고 하고 있나. 그는 가소로운 생각이 들어 잔을 들어 홀짝 마셨다. 일류 대학을 나와 재벌기업에 취직해 다닌다면 모를까, 대학은 문턱도 못 넘어본 데다 남 안 하는 남자 미용사가 그리 대견할까. 우리 아들은…… 하고 생각을 이어가다가 그는 무르춤해졌다. 아들 생각만 하면 자랑스럽기는커녕 누가 아들의 안부를 물을까봐 되레 겁이 났다. 일류 대학을 나왔으면 무얼 할 거며 한때 재벌기업에 다녔다고 해서 자랑스러울 것은 또 무언가. 제 여편네 치맛자락을 구명줄이라도 되는 양 꽉 붙잡고 콧구멍만 한 가게에서 만두나 빚고 있는 화상인데…….
“어이구, 이거 제 말만 늘어놨군요.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요.”
“나요? 쓰레기 뭉치지. 청소차 오기만 기다리는.”
“예? 무슨 그런 험한 말씀을…… 저도 이따금씩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아들을 생각하고 기운을 추스르지요.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 했는데 어떡해서든 미용실을 차려줘야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나니까 다리에 힘이 들어가고 세상이 덜 무서워지더군요.”
그는 자기 입을 쥐어박고 싶었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을까. 그는 사내의 어쭙잖은 위로를 듣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서 애꿎은 술잔만 거푸 비워댔다. 급하게 마신 탓인지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소주 한 병에 정신을 놓을 만큼 약한 술이 아닌데 아마도 낮술이 덜 깬 탓인 것 같았다. 일어서는데 다리가 휘청했다. 그는 사내의 부축을 받으며 먹자골목을 걸어 나왔다. 골목은 어디서 몰려들었는지 젊은이들이 넘쳤다. 그는 사내가 이끄는 대로 젊은이들을 헤치며 나아갔다.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지만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사람일이란 참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미워하던 사내에게 비틀거리는 몸을 의지하다니……
그는 속웃음을 터뜨렸다. 이봐, 내가 자네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아나? 자네 엉덩이를 걷어차지 못 해서 내 발가락이 얼마나 근질거렸는지 아느냐구. 그는 사내의 목덜미를 감아쥐었다. 따뜻했다. 사내의 발길이 대형 유리창 앞에 멈추자 그도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미용실 앞이었다. 머리를 황금색으로 물들인 남자 미용사가 앳된 여자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정성을 다해 머리를 땋아 머리 꼭대기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는 사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서서 미용사의 솜씨를 바라보았다. 헤어 아티스트라고 하더니 말 그대로였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내가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그도 자연히 발걸음을 옮겼다.
길 양쪽의 간판들이 저마다 현란한 색깔로 번쩍였다. 비 온 뒤끝이라 불빛이 더욱 선명했다. 눈이 부셨다. 그는 사내에게 몸을 의지한 채 눈을 감고 사내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그동안 누가 자기를 이렇게 이끌어 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밀리고 밀려서 더 이상 밀릴 곳도 없다는 생각에 지레 주저앉아서 누가 손을 내밀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지는 않았던 것일까.
그는 우뚝 멈추어 섰다. 눈을 번쩍 뜨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손을 잡고 가는 사람, 팔짱을 끼고 가는 사람, 어깨를 겯고 가는 사람, 두 팔을 마구 흔들며 뛰어가는 사람,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골목이 좁다하고 휘젓고 가는 사람. 지나치는 사람들 모두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았다. 그는 걱정스레 서있는 사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래 전부터 속속들이 알던 사람 같았다. 이봐, 우리 아는 사인가. 사내는 씩 웃으며 얼굴을 돌렸다. 그는 사내에게서 몸을 떼고 심호흡을 하고 나서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길바닥이 푹 꺼졌다. 사내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됐네, 나 혼자 갈 수 있어. 그는 사내를 밀쳐버렸지만 사내는 한사코 그를 부둥켜안는 것이었다.

근로자의 날에 택시회사의 전 노조원이 관악산 등산을 하기로 했다. 그는 나이도 많은데다 무릎이 시원찮아서 젊은이들을 따라 올라갈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한 사람도 빠지면 안 된다는 노조 위원장의 으름장에 하는 수 없이 집을 나섰다. 갓 돋아난 은행나무 잎사귀를 통과한 연둣빛 햇살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는 괜히 가슴이 뿌듯해서 어깨를 으쓱거리기도 하고 두 팔을 휘둘러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좌우를 둘러보고 나서 지갑을 열어 다시 확인해 보았다. 신용카드는 지갑 안에 얌전히 꽂혀 있었다. 마누라한테는 절대 비밀이다. 암괭이 같은 마누라한테 들켰다가는 당장에 뺏겨서 가위질을 당할 게 틀림없다. 그는 지갑을 소중하게 조끼의 윗주머니에 넣고 자크를 잠갔다.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얼마 만에 불어보는 휘파람인가. 살랑살랑 부는 바람까지도 상쾌했다. 신용카드는 까딱 잘못 쓰면 패가망신하기 좋은 요물단지지만 잘만 쓴다면 요것처럼 편리한 게 또 있을까. 신용카드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던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사람의 마음처럼 변사스러운 건 없는 것 같다. 택시 회사에 취직이 되어 월급이 입금될 통장을 개설하면서 은행직원이 신용카드를 하나 만들라고 권하자 그는 옳다구나 하고 카드를 신청했다. 드디어 이 신용사회에서 행세하게 된 것이다. 카드가 집으로 배달이 되면 마누라에게 걸릴까봐 바로 어제 그가 직접 은행에 가서 찾아왔던 터이다.
아파트 단지의 정문을 나오다가 그는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그 앞에 죽치고 있던 철망울타리를 쳐다보았다. 철망울타리에는 덩굴장미가 무성하게 뻗어나가서 곧 터질 듯한 꽃봉오리를 매달고 있었다.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집을 나가 종적도 없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와 짐을 꾸려서 떠난 사내를 생각하면 가슴이 저렸다. 삶을 지탱하던 버팀목이었던 아들을 잃고 사내는 거반 실성하다시피했다. 안 되는 놈은 엎어져도 꼭 개골창에 엎어진다더니 하필이면 사내의 아들이 말년휴가를 나오는 길에 탔던 군용트럭이 벼랑 아래로 굴렀던 것이다. 아들을 묻고 와서도 사내는 아들을 기다렸다.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멍청하니 좌판을 지키며 가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날짜를 묻고는 했다. 오늘이 며칠이지요? 그는 사내가 좌판을 걷어 돌아올 때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공연스레 미워하기도 했지만 같이 지낼수록 마음이 가던 사람이었다. 지난 겨울의 일인데도 그는 아주 오래 전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관악산 입구는 시장 통처럼 사람들로 북적였다. 똑같이 맞춰 입은 푸른색 조끼차림의 동료들이 모두 모이자 그는 선두 그룹에 끼어 산을 올라갔다. 그는 산중턱에도 이르기 전에 숨이 찼다. 동료들이 한 사람 두 사람 그를 앞질러 갔다. 그는 쳐진 김에 아예 쉬어가려고 길가의 나지막한 바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다. 등산객들이 묵묵히 그의 앞을 지나갔다. 그는 눈으로 그들의 뒤를 쫓다가 무심코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등산화를 피해 간신히 얼굴을 내민 자그마한 흰 꽃이 눈에 들어왔다. 생전 처음 보는 풀꽃이었다. 그는 발을 들어 옮겼다. 등산화에 깔렸던 자잘한 꽃들이 부스스 일어섰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아서 눈에 띄지도 않았나 보다. 그는 그 작은 꽃을 한참동안 내려다보았다. 보면 볼수록 앙증맞은 게 참 귀여웠다.
“시원한 음료수 있어요. 음료수 하나 드시고 가세요.”
낯익은 목소리였다. 그는 귀가 번쩍 띄어서 벌떡 일어섰다. 사내였다. 사내는 한 구비 돌아드는 산길 모퉁이에 전을 벌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한 발짝 성큼 다가서다가 그는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사내 옆에 웬 여자가 서있었다. 사내는 아이스박스를 앞에 놓고 음료수 캔을 양손에 높이 쳐들어 흔들며 신명이 나서 소리치고 있었다. 신수가 훤해 보이는 건 옆에 있는 여자 때문인지도 몰랐다. 왠지 아는 척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사내의 좌판이 있는 곳을 멀찌감치 돌아서 산길을 올랐다. 시원한 음료수 있어요. 사내의 활기찬 목소리가 그를 떠밀어 올렸다. 그는 오늘 꼭 정상까지 올라가 보리라고 다짐하며 한발 한발을 힘차게 내디뎠다.


권 채 운
․2001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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