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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시 계간평/이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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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매트릭스와 육체의 건축술
이 기 성
(시인. 문학평론가)
오늘의 시쓰기는 흰 백지의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포를 기다리는 백지’의 거대한 공간에서 요절한 선배시인의 공포와 절망의 두께가 사라진 곳, 다차원 공간의 평면적인 전이인 모니터 위에서 새로운 세대의 시쓰기는 진행된다. 모니터 안 커서의 깜빡거림은 시간의 흐름을 가시화하면서 시쓰기를 재촉하고 감시하는 시선으로 작동한다. 부재와 현존 사이를 오가는 시선의 운동. 광대한 백지 앞에서 시인들이 느끼는 공포의 공간적 부피감은 이 시선 앞에서 시간에 대한 공포로 변질된다. 커서의 이동이 지시하는 선(線)은, 더 이상 획을 그어 공간을 메꾸어 가는 작업이 아니라, 수평적 이동을 통해서 시간의 궤적을 가시화한다. 이러한 시간의 선 위에 세워진 문자/언어는 오늘날의 시쓰기가 얼마나 시간의 강박에 포획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메타포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쓰기의 변화는 시인을 둘러싼 현실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대문명의 광폭한 속도는 미래를 향해 질주하는 시간 원리를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무한한 변화와 질주의 시간은 끝없는 반복의 회로에서 빠져나가지 못 하는 아이러니를 내포한다. 미래를 향한 진보의 이념과 그 안에 내장된 텅 빈 현재 사이의 불일치는 근대적 주체가 놓인 숙명적 모순을 드러내주는 징후이다. 이제 주체를 관통하는 촘촘한 시간의 그물망은 시가 태어나는 모체인 동시에, 탈주를 꿈꾸는 억압적 공간으로 변화된다. 끊임없이 현재를 초월하면서 동시에 현재에 붙박힌 시간의 역학 속에서, 시인들은 현대문명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독특한 존재양식과 미학을 발견하고 있다. 이렇게 주체를 긴박하는 시간화의 원리는 최근 시인들의 시적 사유를 관통하는 지배적 요소이며, 이러한 시간의 인공자궁에서 이들의 시쓰기는 출발하는 것이다. 이질적이고 다양하게 분화되는 시적 경향의 내에서 시간에 대한 사유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시인들이 놓인 이러한 현실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 속에서 가장 허약한 것은 인간의 육체이며, 끊임없이 소멸을 향해 사그라드는 육체야말로 시간에 종속된 인간의 운명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매개물이다. 최근의 여러 시편에서 시간에 운명지어진 존재의 양태를 가시화하는 육체의 이미지가 시간적 화두에 대한 물음과 더불어 새롭게 솟아오르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
오늘의 시쓰기를 지배하는 최종심급은 강박적인 문명의 속도에 대한 반성의 지점에 놓여 있다. 이러한 시쓰기의 근원에는 주체를 포박하는 시간의 그물망을 벗어나려는 긴장된 의식이 자리 잡는다. 주지하듯 끊임없는 변화와 속도로 표상되는 현대의 시간은, 그 내부에서 어떠한 질적인 변화도 낳지 못 하는 공허한 시간일 뿐이다. 무수한 반복으로 채워진 현실은 내부적으로 텅 빈 시간이며 동시에 외부적으로는 동질적인 삶의 파편들이 과잉된 시간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세계에서 주체는 시간의 강박에 의해서 조형된 육체의 형상에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그들의 육체는 새로운 권력으로 등극한 문명의 시간이 새겨놓은 흔적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신영배의 시 「나비와 엘리베이터」(≪para21≫)는 억압적인 현실의 속도에 대해 주체가 경험하는 불안과 육체적 균열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는 상자 속에 들어있다
내 몸 하나로 가득 메워진 상자
다리가 휘청하고, 가슴이 납작하게 눌린다
희미한 조명이 깜박깜박 어둠을 긁어모으고
한쪽에 붙은 거울이 내 긴 머리카락을
빨아들이고 있다 얼굴이 팽팽하게 당겨진다
상자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인다
위로만 한없이 올라가고 있다
내 손가락은 빌딩의 맨 위층을 눌렀지만
상자는 이미 빌딩을 벗어나 있다
도시의 하늘 위로 계속 올라가는
어둡고 고요한 기계 소리의 상자
머리카락을 다 뜯어먹은 거울은
내 이목구비를 노리고 있다.
겁에 질린 하얀 얼굴, 나비 한 마리
멈출 수 없는 두려움의 내부에서
나비가 파닥거리고 있다
상자를 벗고 날고 싶어
―「나비와 엘리베이터」 전문
이 시에는 속도가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초조, 불안은 상자라는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드러나고 있다. 시인은 ‘내 몸 하나로 가득 메워진 상자’의 내부에 있다. 이렇게 상자와 내 몸이 하나가 되는 상황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육체가 상자의 규율과 속도 속에 포박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상자’로 표상 되는 육체의 용적은 분절되고 조각난 현실의 시간을 가시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육체의 물질성은 ‘상자’라는 시어에 내포된 금속성의 언어적 질감으로 조형된다. 이렇게 조형된/강요된 육체야말로 물질로 객체화된 시간의 억압성을 가장 절실하게 드러내는 상징물이라 할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상승의 운동이 지배하는 세계의 관성 속에서 자아는 ‘빌딩’을 넘어서 하늘로 치솟아 가는 끔찍한 속도에 내맡겨진다. ‘하늘’이라는 개방적 공간 속에서 ‘위로만 한없이’ 치솟는 엘리베이터(상자)의 이미지는 광대한 큐브에 갇힌 채 질식해 가는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체가 느끼는 불안은 ‘상자’로 규격화된 육체와 내면 사이의 틈새에서 드러난다. 상자 속의 ‘거울’은 코드화된 육체와 자아의 균열을 드러내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시에서 거울은 자신의 모습을 비춤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보장해주는 매개물이 아니라, 육체를 빨아들이는 공포스런 괴물의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치솟는 현실의 속도와, 주체를 위협하는 내면의 블랙홀 사이에서 주체는 ‘겁에 질린’ 채 떨고 있을 뿐이다. 주체가 감지하는 공포는 ‘하얀 얼굴’ ‘파닥거리는 나비’의 형상으로 표출된다. 현대문명의 폭력성과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는 나비의 대조적 의미는 이 시에서 다양한 의미의 층을 담지하고 있다. 수직 상승하는 상자-육체의 남성성과 그 내부에 놓인 나비-육체의 여성성의 대조는 운동과 정지, 내부와 외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 문명과 자연 사이의 균열과 불화를 가시화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근대 문명의 횡포와 억압이 전면화되고 있다.
이렇게 ‘파닥거리는 나비’로 변해버린 내면의 불안한 움직임은 광대한 시간의 그물망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주체의 운명을 보여준다. 일찍이 근대적 세계의 ‘수심(水深)’을 알지 못 해 피로에 젖어 귀환하던 주체의 상징물이었던 ‘나비’는 이 시에서는 금속성의 세계에 갇혀 질식하는 나비의 이미지와 겹쳐지고 있다. 두 나비의 공통점은 근대적 시공간의 장력을 벗어나지 못 하는 주체의 불행한 자의식에 놓여 있다. 그러나 신영배의 시에서 나비가 감지하는 불안의 궁극적인 요인은 외부적 세계의 억압이 아니라, 돌아가야 할 내면의 붕괴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환기한다. 사실 근대의 시간이 내포한 폭력성과 과잉된 속도에 대한 이러한 반성적 시선은 우리의 시에서 그렇게 낯선 주제는 아니다. 이 시에서 세계의 폭력에 의해 내면의 반성적 공간을 장악 당한 주체가 겪는 공포의 체험은 시인 이상(李想)이 경험했던 근대적 세계에 대한 절망을 반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은화처럼 맑은 정신’의 여백마저 잠식하는 철저한 폐쇄성과 불모성을 가시화한다는 점에서 신영배가 놓인 시쓰기의 조건은 좀더 불행하다고 할 수 있겠다.
스스로의 육체를 상자로 인식하는 신영배의 시적 인식은 성찰적 여백과 거리마저도 휘발시켜버리는 시간의 그물망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시간에 대한 공포가 삶의 근원적인 불모성에 대한 인식과 맞닿을 때, 그것은 세계와 주체에 대한 실존적 허무의식으로 급격하게 전이될 수 있다. 윤의섭은 현재의 불모성에 대한 인식을 시간이라는 광대한 우주 속에 놓인 미소(微小)한 자아의 우연성에 대한 인식을 드러낸다. 그의 시 「사막의 모텔」(≪리토피아≫)의 기저에 배어있는 허무의식은 시간에 의해 축조된 세계의 붕괴와 소멸의 운명에 시선을 맞추고 있다.
또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아래층은 모래에 파묻히고
꼭대기층은 다시 돋아나 감쪽같이 그대로인 천일야화였을 거다
모래 속 지층에선 점차 추억이 늘어나겠지만
누구도 지난날을 말하지 않는다
바깥의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저건 너의 체온이다
함석 찢는 소리를 내며 바람은 길고 긴 행군을 계속한다.
쓰라린 여정으로 지친 너의 몸뚱이
이 생애를 묵고 가려면 모래 폭풍의 꿈을 꾸어야 한다
하염없이 성을 쌓아야 한다
너의 모래시계는 현생을 지우며 폐허를 낳는다
모래알 수억의 행성마다
목마른 물고기가 하룻밤 머물곤 새겨놓은 이 별자리
―「사막의 모텔」 부분
이 시에서 시인은 ‘사막’이라는 광대한 소멸의 공간을 응시함으로써 삶의 불모성에 대한 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시인에게 삶이란 하염없는 모래의 성으로 이루어진 헛된 시간일 뿐이며, 그 모래의 시간 위에 세워진 모텔에서 꾸는 하룻밤의 꿈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모래에 파묻히는 아래층과 또다시 돋아나는 꼭대기층’의 감쪽같은 자리바꿈은, 삶이라는 불변의 외피 속에 은폐된 소멸의 운동을 드러낸다. 시간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허무의 풍경, 거기서 ‘누구도 지난날을 말하지 않고’ 현재뿐인 시간을 살아가는 것이다. 되돌아갈 추억이 없고, 자신을 투사할 미래도 없는 현재의 감옥. 이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서력 이천삼년 이월’이라는 시간의 징표는 ‘무량의 모래알’이 상징하는 허무의 시공간에 삼켜져버린다.
이렇게 끊임없이 사라지고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시인은 점점 차가와지는 ‘외부의 기온’을 감지한다. 식어가는 체온과 ‘여정으로 지친 몸뚱이’는 ‘층층마다 무량의 업보가 쌓인 모텔’의 공간적 부피감과 동일한 의미항을 이룬다. 여기서 ‘모래 언덕’으로 무너져가는 모텔은 시간 속에서 소멸해 가는 육체에 다름아니다.
시인은 모래시계가 상징하는 시간의 무한성과 공허함을 ‘목마른 물고기’로 변주함으로써, 폐허의 현재에 포획된 주체의 공허한 내면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물고기의 운명’을 타고났으면서도, 모래의 바다에 갇혀버린 주체는 ‘모텔’이 상징하는 문명의 건조함과 불모성에 붙박혀 있게 된다. 시에서 ‘모텔’이 상징하는 일회적인 부랑(浮浪)의 이미지는 ‘수억’의 시간의 무량함과 안팎의 겹을 이루고 있다. 시간 속에서 허물어지는 존재의 일회성을 영원하게 만드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생을 꿈꾸는 일이다.
그동안 윤의섭의 시는 삶이 다른 자아에 의해서 꿈꾸어진 환영에 불과하다는 장자적 해석에서 모티프를 얻어왔다. 그의 독특한 시간관은 과거와 현재, 전생과 현생, 꿈과 현실이 서로 바뀌며 중첩되거나 얽혀있는 양상으로 드러난다. 그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솔개의 깃’이거나 ‘길 떠난 지 수수억 년 된 바람’(「솔개」)인 것이다. 이렇게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원근법을 파괴함으로써, 시인은 자신이 놓인 현재의 공허함을 두드러지게 한다. ‘(시간의) 성을 쌓는 것’은 ‘폐허를 낳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도저한 허무의 밑바탕에는 선형적 시간의 인과론 속에서 세계를 파악하는 사유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윤의섭의 시에는 시간의 허무함을 응시하는 주체의 생을 변전시킬 사건이나 격절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시에서 반복과 소멸을 거듭하는 허무의식은 복수적 시간의 열림이 아니라 폐쇄적인 시간의 유희일 뿐이다. 이 시에서 ‘별자리’는, 다양한 계기들이 충돌하면서 새롭게 구성되어지는 별들의 지도를 드러내는 성좌(konstellation)가 아니라 정해진 운명의 회로에 붙박힌 부동성을 드러낸다. 이렇게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문명의 시간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소멸의 허무주의는, 새로운 운명의 시간을 열어가지 못 하고 주체의 운명을 부동의 별자리 곧 동일성의 세계로 포섭해 버리는 것이다.
신영배의 시에서 가속화되는 삶과 내면의 균열을 담고 있는 폐쇄된 육체의 물질성은 윤의섭의 시에서 생성의 시간을 열어가지 못 하는 허무주의적 육체와 만난다. 시간의 억압에서 비롯되는 공포와 허무는 폭력적인 동일성의 시간 원리에 기반한 현대문명의 쌍생아이다. 이렇게 광적인 속도와 무상한 소멸의 시간이 낳은 닫혀진 육체의 이미지는 시간의 인공 자궁에 유폐되어 있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닫혀진 시간의 자궁으로부터 소통과 열림의 시들이 어떻게 제 숨구멍을 열어갈 수 있는지, 그들의 시적 싸움은 여기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3.
현대문명은 시간을 분절하고 공간화함으로써 시간의 다양한 질감을 끊임없이 동질적인 것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러한 시간의 폭력성이 자연과 문명, 주체와 세계의 단절과 불화의 요소로 작용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현실에 대응하는 오랜 시적 무기인 서정성은 여전히 파편화되고 양화된 시간을 극복하는 미학적 대응물로 유용한 것처럼 보인다. 손택수의 시 「放心」(≪작가세계≫)은 주체를 포박하는 시간의 억압으로부터 비껴섬으로써 소통의 숨구멍을 열어놓는다.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뒷문을 열어놓고 있다가, 앞뒷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 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放心」 전문
이 시에서는 ‘뻥’ ‘확’ 등의 부사어가 담고 있는 언어의 탄력이 시간의 그물망을 유유하게 빠져나가는 자아의 여유로운 태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집’의 공간적 폐쇄성을 뚫어놓는 바람의 운동은, 집으로 날아든 제비의 날개짓을 타고 ‘몸’의 숨구멍을 열어젖히는 흐름을 만들어 놓는다. 즉 바람이 통과함으로써 사면의 벽으로 닫혀진 공간인 집은 트인 공간으로 변화되며, 현재의 피로를 담고 있는 나의 몸은 제비의 날갯짓이 스치는 순간 새로운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열린 집과 숨구멍을 열어젖힌 몸의 개방성. 그것은 현대문명의 시간에서 놓여난 새로운 가능성을 담지한 육체인 것이다.
이 시에서 비가시적인 대상인 ‘바람’은 ‘제비’라는 사물을 통해서 구체성을 얻으며 동시에 자아의 존재를 변화시키는 비의적 에너지로 작동하고 있다. 일상적 시간의 여백을 뚫고 들어오는 질적인 시간의 비약은 ‘숨구멍’의 열림으로 가능해진다. 각질화된 삶의 답답함을 제거하는 것. 이렇게 총알처럼 날아와 존재를 관통하는 경험 속에서 시인은 일상적 세계의 경계를 비껴가는 질적인 비약의 시간을 보여준다.
여기서 닫혀진 육체에 숨구멍을 내는 시간의 유동성은 ‘닿을 듯 말 듯’이라는 아슬아슬한 공간적 틈새에서 비롯된다. 시인은 나와 제비 사이의 거리가 최소화되는 지점을 포착함으로써 ‘한순간’의 이미지를 공간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실체로서 포착될 수 없는 바람이 ‘제비’의 육체성을 얻게 되는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감각으로 선명하게 가시화된다. 주체와 세계가 ‘스치는’ 순간의 틈새는 기계적 시간으로 포착할 수 없는 질적인 순간을 지시하고 있다. 이러한 틈새의 시간은 그것이 지나간 후에야, ‘어안이 벙벙한’ 시간적 휴지를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이러한 순간 속에서 ‘관통’이라는 직선의 운동을 띠고 있던 바람은, 제비의 ‘하얀 배’가 그려내는 유선형의 곡선으로 변화된다. 직선이면서 곡선인 시간의 움직임이 ‘몸’을 통과함으로써 육체에 숨구멍이 열리는 것이다. 이렇게 육체의 개/폐의 틈이 낳은 순간의 역동성은 시간에 포박된 육체를 해방시키는 미학적 절정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앞에서 읽은 신영배의 시가 기계-되기의 몸을 통해 시간의 억압에 포박된 육체의 폐쇄성을 보여준다면, 손택수는 바람-되기의 몸을 통해서 기계화된 현실의 긴장으로부터 새로운 시간적 가능성을 열어간다. 그러나 손택수의 시가 보여주는 미학은 전통적인 서정의 시선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서정의 문법을 지탱해 온, 세계에 대한 발견과 존재의 전환이라는 미학적 원리는 산문적 현실과 대비되는 단절과 비약의 순간성을 포착하는 데서 가능해진다. 순간의 시간이 내포한 비약적 단절이야말로 존재의 전환을 이끌어내는 비의적 시간 속으로 주체를 상승하게 함으로써, 일상적 경험의 질적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인 것이다. 이렇게 비의적 순간을 빌어 자신의 미학적 세계를 건축한 손택수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의 영토에 안전하게 착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서정의 원리가 현실의 연관성과 무관한 맥락에 놓이게 될 때, 현실의 다양한 질감을 소거하는 주관성의 세계로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점은 우려되는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손택수의 시는 서정의 영토를 벗어나 새로운 언어의 미학을 구사하는 허수경의 시 「그곳으로, 오오」(≪문학판≫)와 비교하여 읽을 수 있다.
그곳으로, 오오 백 년 동안 물을 기다리던 남자가 있는 곳으로, 그 남자가 그린 작은 말이 있는 곳으로 그 말이 달리던 검은 동공 같은 들판으로 그 들판이 그렇게 부지런히 기르던 민들레의 더운 숨 속으로 그 숨 속에서 백년 동안 물을 기다리던 남자에게로 그 남자가 다 막아놓은 문 쪽으로 문이 걸어놓은 퍼런 별 속으로 다시 별 속으로 그곳으로 장갑차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나를 터엉 쏘아서는 내 창자를, 내 근본을 다 여는 그 폭력 속으로 그 속으로 병원으로 실려 가는 길가에서 물을 기다리던 남자는 땅바닥에다 말을 그리고 말이 달리는 들판에서 민들레는 더운 숨을 열어 오오 기다린다, 라는 인간의 언어를 마치 헉헉거리며 쫓아오는 사제처럼 말하는 그곳으로
―「그곳으로, 오오」 전문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종결어를 찾지 못 하고 무한히 이어져 달리는 언어의 흐름이다. 다양하게 변주되면서 반복되는 시적 진술은, ‘터엉 쏘는’ ‘장갑차’ 등의 시어가 환기하는 폭력적인 직선의 시간을 구부리는 나선형의 운동을 보여준다. 시는 ‘물을 기다리는 남자’가 그린 화폭 속의 세계에서 무한히 펼쳐지는 환상적인 흐름을 따라간다. 그런데 ‘물을 기다리는 남자→말→들판→민들레→민들레의 숨’으로 이어지는 진술은 거기서 다시 반복되어 ‘물을 기다리는 남자→문→별→장갑차→총에 맞은 나’의 이야기로 이어지고, 여기서 또 ‘병원으로 실려가는 길가’에서 다시 ‘물을 기다리는 남자’를 만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니까 시에서 ‘물을 기다리는 남자’는 모두 세 번 등장하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중첩되며 포함의 관계를 형성하고, 세 번째와는 병렬적 관계로 놓이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진술은 독자로 하여금 동심원의 파장처럼 외부로 퍼져나가면서 동시에 내부로 응축되는 이상한 시간적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
한편 이러한 진술이 담고 있는 속도와 질감은 ‘달리는 말’이 확장하는 공간적 넓이와 대응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간의 확장은 ‘검은 동공 같은 들판’의 이미지 속에서 깊이로 전환된다. 시에서 검은 들판과 선명하게 대립되는 ‘민들레’의 노란빛과 원환 속으로 공간이 응축됨으로써, 시적 공간은 고정된 평면이 아니라, 깊이와 넓이 속으로 운동하는 역동적인 힘으로 채워진다. 말의 동공 속의 들판, 그 속의 민들레의 원환(圓環)은 무한히 축소되면서 우주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에너지를 발현한다.
이 시에서 반복되는 시적 진술은 끊임없이 ‘그곳’이라는 고정점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공간으로 집중되는 것인 아니라 무한히 열려진 시간의 궤적을 보여준다. 시에서 언어들이 도착할 서술어를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론적으로 시적 대상들은 도달해야 할 ‘그곳’에 도착하지 못 한다. 결국 ‘그곳’의 부재로 인해 시간의 운동은 목적론으로 귀결되지 않으면서 반복과 중첩의 주름을 이루면서 흘러가게 된다. 따라서 ‘백년 동안’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무한히 열린 시간으로 전이된다.
시에서 ‘말을 그린다’와 ‘물을 기다린다’라는 언어의 미묘한 차이에 내포된 틈새에서 열리는 상상적 시공간은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 이것은 장갑차, 총성이 암시하는 직선적 시간의 폭력성을 휘어서 구부리는 효과이다. 이러한 시간의 변이 속에서 ‘기다리던’이라는 술어는 ‘기다린다’라는 현재형과 경계 없이 어울릴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언어’와 ‘사제의 언어’ 사이에 놓인 경계도 사라진다. 따라서 ‘헉헉거리며 달려오는’ 언어의 ‘더운 숨’이란 ‘사제의 신성한 언어와 장갑차의 금속성의 언어를 녹여내는 열기이며, 하나의 서술어에 고착될 운명인 주체를 응고된 시간으로부터 구제하여 살아서 움직이게 하는 ‘말’인 것이다.
윤의섭이 하늘의 별/지상의 사막을 대립시킴으로써, 순환하는 영원성의 시간과 지상의 수직적인 시간성을 대립시키고 있다면, 허수경은 문명의 시간에 내포된 수직적 폭력성을 구부림으로써 나선형의 시간으로 열어놓는다. 시간의 기하학을 변주하는 시적 진술의 역동성은 독특한 언어의 사용과 결합되어서 새로운 시적 효과를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허수경은 시간의 질서를 전복하는 발랄한 상상력을 통해서 ‘그곳’이라는 기원을 부정하는 새로운 시쓰기의 양상을 보여준다. 문장의 종결을 거부하고 끝없이 이어지는 진술은 안과 밖, 선후의 시공간적 경계를 해체함으로써 완성된 지점을 향해 흘러가는 인과적 시간 원리를 균열시키고 있다. 동일화된 언술의 바깥으로 미끄러져 가는 시적 언술에서, 다양한 차이를 포괄하면서 비인과적인 우연성의 사슬로 연결되는 보르헤스적 시간의 사유를 읽을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허수경은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근대적 시간원리에 대해 무한한 변이와 차이를 연주하는 언어의 리듬 속에서 고착된 세계를 해체할 미학적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다.
허수경의 시가 보여주는 현란한 시간의 운동을 따라가다가 또 하나의 육체를 만난다. 성윤석의 시 「口」(≪문학과사회≫)에서 시간과 육체는 다시 한번 새로운 양상으로 포개지고 있다.
똥을 누다가 동전을 눈 적이 있다
그 후 술잔에 띄운 벚꽃 잎을 누었고
해안에 사는 한 여자의 립스틱을
눈 적이 있다
나는 누기 위해 먹었고, 먹기 위해
누었다
감귤, 하면 감귤이 내 속에서 굴러
다니고 명태, 하면 명태의 마른 살들
이 찢어졌다
탐욕이 더해진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그저 유난히 붉은 불빛이
市井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만이 오는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먹기가 싫어졌다
나를 기다리는 저 거대한 입도 그러하리라
―「口」 전문
이 시에서 상형문자 ‘口’는 폐쇄된 공간을 연상시키는 육체의 기호이다. 모든 육체의 생명 운동은 ‘口’의 형상으로 귀속되는데, 그것은 생성과 소멸의 운명을 가장 단순화시킨 언어가 ‘먹다-누다’라는 동사로 축약되기 때문이다. ‘먹다-누다’의 사이의 시간적 연관성 속에서 생명은 생명인 것이며, 이러한 흐름이 막히는 순간이 곧 죽음의 시간일 것이다. 결국 ‘口’는 삶과 죽음을, 세계와 자아를 연결시켜주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누기 위해 먹었고, 먹기 위해 누었다’라는 시적 진술은 이러한 ‘먹다와 누다’로 요약되는 존재의 술어를 하나로 누벼놓은 것이다. 이렇게 먹다/누다가 하나로 꿰매어질 때 주어/술어의 결합은 해체되고, ‘누다’라는 단어는 ‘동전, 꽃잎, 립스틱’ 등의 시어와 자유롭게 결합하게 된다. 관습적인 언어의 관계가 해체된 곳에서, 언어는 근원적 마술성을 획득하게 되고, 이러한 언어의 힘에 의해서 ‘누다’는 배설이 아닌 생산의 언어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탄생되는 언어는 점점 ‘더해지는’ 탐욕이 아니라, ‘붉은 불빛’의 ‘느낌’으로 감지된다. 대상을 향한 탐욕이란, 대상을 나의 내부에 흡수하고 끌어당기는 힘이며, 따라서 ‘더해지는’ 것이란 외적인 대상과 더불어 시간의 누적(累積) 또한 함축한다. 누적된 시간의 질량이 만들어내는 육체의 무게와 폐쇄성. 그러나 먹다/누다가 하나로 결합될 때, 육체는 그 공간적 제약성을 휘발시키고, ‘느낌’으로 세계를 감각하게 된다. 이때의 ‘口’는 폐쇄된 육체의 공간이 아니라 다른 세계, 다른 감각을 위한 문(門)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내부의 열림, 혹은 텅 빔이야말로 ‘먹다/누다’의 이중적 술어를 껴입고 있는 비어있는 육체성을 가시화하는 것이 아닌가. 이때 나를 기다리는 ‘거대한 입’은 죽음의 입(口)인 동시에 생성의 입(口)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육체의 공간을 개방시킴으로써 주체는 죽음과 삶의 시간적 넘나듦을 육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방된 육체는 주체의 내부에 축적된 시간의 무게를 휘발시킴으로써, 시간의 자장으로부터 유유히 벗어난다. 이를테면, 주어와 술어를 붙들어매는 문법의 자장, 혹은 문법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시간적 질서로부터의 탈주.
‘시간과의 싸움에서 허무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으랴’라는 말처럼 인간은 그 누구도 시간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나름의 영토에서 시적 작업을 일구어 가는 시인들의 의식 내부에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화두가 늘 새롭게 제기되는 것은 이러한 실존적 존건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세계와 자아를 투시하는 정공법의 시선에 의해 펼쳐지는 시적 풍경 속에서 우리는 시간에 대응하는 존재의 근원적 문제의식이 내포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최근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은 신서정과 반문명의 의식 내부에서 시간에 대한 공포와 부정, 초월의 의지를 발견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현대문명의 병적 징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지고 있는 시간의 매트릭스 내부에서, 새로운 소통과 생성의 시간을 열어내는 과정이 곧 시쓰기이며, 이런 점에서 시간이라는 인공자궁이야 말로 새로운 시쓰기가 출발해야 하는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이기성
․1998년 ≪문학과 사회≫ 시 등단
․2001년 ≪21세기문학≫ 평론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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