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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소설 계간평/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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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빈틈, 의식의 뒷면
서 영 인
(문학평론가)
1.
여름에 나온 문학지를 빠짐없이 챙기지 못 했는데도 읽어야 했던 소설은 어림잡아 50편이 훨씬 넘었다. 때가 때인지라 이라크 전쟁에 관한 언급이 군데군데 끼어든 소설도 몇 편 되었고, 매트릭스 이후에 일반화되다시피 한 가상현실에 대한 상상도 간혹 눈에 띄었으며, 컴퓨터 게임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그렇지만 섣부르게 일반화시킬 수 없는 이야기들이 혹은 일상의 이름을 빌리고 혹은 상상의 힘을 빌려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끊이지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새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끊임없이 자아내는 힘은 아마도 한편으로는 우리들 삶의 단순함에서,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삶의 불가해함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간단 명료하게 요약 정리된 각종 사건과 사고들, 나라 안팎의 뉴스들에 둘러 쌓여 크게 다를 것 없는 업무와 일상사들을 처리하면서 하루를 열고 마감하는 우리들 모두의 삶이란 크게 다르지 않다. 학교나 직장, 혹은 가정 역시도 일반적으로 따라야할 관습과 규칙들 속에서 쉽게 벗어날 수도 쉽게 만족할 수도 없는 대동소이한 여건과 환경 속에 놓여 있으니 일상적 하루하루는 대체로 누구에게나 패턴화되어 있음도 물론이다. 이처럼 크게 다르지 않은 삶들 속에서 크게 다르지 않은 하루하루를 겪어가면서도 삶이 불가해한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비슷비슷하게 패턴화된 삶을 온전히 장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 하기 때문이다. 일상적 삶과 그것을 지배하는 규칙과 관습을 수용하고 그것에 순응하는 자에게 삶은 불가해하지 않다. 크게 달라질 것 없는 미래와 그저 고만고만한 사연을 품고 있을 뿐인 과거를 안고 변화없는 현재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삶이라고 이해하는 자에게 삶은 크게 어렵지 않다. 정해진 행로를 벗어나 다른 삶을 꿈꾸는 자들, 그래서 일반화된 삶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자들에게만 삶은 불가해하다. 변화없는 일상을 수용하고 그것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무감각해진 삶을 다시 돌아보면서 그것이 과연 당연한 것인가, 안정적으로 지속되리라 여기는 삶의 기반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도 않은 억측과 소문에 의해 구성된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러한 삶의 문법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되고 있는 일종의 폭력이 아닌가 하고 묻는 순간 삶은 불가해한 것이 된다.
소설은 이 단순하고 변화없는 삶과 그것에 묻혀 사라지고 숨겨진 여러 순간들이 불균등하게 맞부딪치는 지점들 속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 불균등한 맞부딪침의 순간들을 극대화하고 그것을 의미화하면서 때로 그 불균등함을 역전시킨다. 이 균열들 속에서 일반화되어 사라졌던, 무감각하게 잊혀진 사건들과 기억들이 새롭게 발견되며, 또한 그것은 이미 알고 있다고,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삶의 규칙과 관습들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 의심과 그것이 유발하는 해부의 과정 속에서 소설은 삶을 새롭게 읽고 발견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이 불가해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불가해함의 조건들을 응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발견 이전의, 의심 이전의 불가해함과는 다르다. 이 불가해함을 구체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소설들, 그리고 그 속에서 다른 삶을 위한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은 흥미롭다.
2.
불가해함에 관해 말하자면 ‘죽음’만한 것이 있을까. 사실 죽음은 시간이 흐르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자연적인 현상이며 누구도 거부하거나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서는 회의할 수도 해부할 수도 없는 자명한 사실이다. 정작 ‘죽음’에 의해 회의되고 해부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삶’이다. 지나온 삶의 수많은 순간에 대한 기억들이 그것이 완전히 소멸되는 순간 앞에서 다시 되살아나며 그래서 아무 일 없이 지나왔던 삶이, 당연하게 스쳐 사라졌던 많은 일들이 새로운 의문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뇌종양으로 투병하다 죽은 아내의 옆에서 그 죽음을 지켜보는 과정을 담은 김훈의 「화장(火葬)」(≪문학동네≫)에도 이러한 회의와 성찰의 순간들이 있다.
아내의 후각 중추가 온전했을 때, 아내가 맡던 냄새가 음식의 본래 냄새였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었다. 알 수는 없지만, 아내가 치를 떨던 그 구린내는 본래 음식 깊은 곳에 종양처럼 숨어있던 냄새가 아니었을까.(166쪽)
뇌종양 수술 과정에서 후각신경을 다친 아내는 모든 음식들에서 구린내를 맡는다. 냄새 때문에 어떤 음식도 먹지 못 하는 아내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남편은 오히려 그 냄새가 우리가 먹고 마시면서 즐겨왔던 음식들의 속에 본래 숨어있었던 것이 아닌가를 의심한다. 모든 신경을 관할하고 일사불란하게 감각하는 중추기관인 뇌 속에 그 신경을 치명적으로 마비시키는 종양이 숨어있듯이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양분인 음식들 속에도 이미 구린내가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 이 의심은 또한 당연하고 정당했던 삶의 모든 순간들이 사실은 고약한 냄새와 치명적인 독소를 숨겨놓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의심은 화장품 회사의 이사인 남편의 일상적 업무 속에서 되살아난다. 그의 삶은 어쩔 수 없이 정당화되었던 수많은 부정과 모의들로 가득 차 있으며 애초에 어쩔 수 없어서 발을 들여놓았던 그 부정과 모의들, 꺼림칙함은 어느새 무감각하게 일상이 되고 업무가 되어버렸다. 화장(化粧)이란 본래 맨얼굴을 포장하고 가리기 위해 필요한 행위이며 가리기 위해 덧씌운 포장을 다시 벗겨낼 수 없어서 화장한 얼굴이 어느새 본얼굴이 되어버리는 가장(假裝)의 자동화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화장품을 소비하게 하기 위하여 제작되는 광고는 욕망을 자극하고 그것을 자동화, 가속화하기 위해 허구의 이미지를 극대화한다. 아내의 죽음을 앞에 둔 순간에 다음 계절의 광고전략을 준비하면서 남편은 “헛것들이 사나운 기세로 세상을 휘저으며 어디론지 몰려가고 있는 느낌”(163쪽)을 받는다.
그러나 삶이 헛것들로 가득 차 있다는 인식은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지기보다는 헛것이지만 감당하고 치러내면서 지속할 수밖에 없다는 순응으로 이어진다. 화자인 남편은 아내의 장례를 치러내는 것처럼 허구의 이미지 중 하나를 선택하여 광고를 준비하고 회사의 일상 업무들을 처리한다. 그래서 소설은 죽음과 소멸의 일상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속에 만만치 않은 성찰을 담아내기도 하지만 그것을 말하는 어조는 회한에 가득 차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내의 병상을 지키면서 죽음과 삶을 쓸쓸하게 되짚는 서사 속에 끼어드는 난데없는 화자의 내레이션, 회사 여직원의 젊음과 관능을 탐하는 시선은 소멸의 정서인 회한과 대비되면서 서사를 자극하지만 또한 그 회한을 단지 위로하기만 하는 타자이기도 하다. 화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그 여직원은 빗장뼈나 가슴선, 혹은 허리와 둔부를 잇는 완연한 곡선으로만 존재한다. 그녀의 젊음은 몸의 젊음이며 그것은 화자의 회한을 강조하고 또 위로하기는 하지만, 화자가 발견한 삶의 허위성과 관계맺지는 못 한다. 그것은 오직 죽어가는 아내나 전립선의 약화로 소변을 배설하지 못 하는 화자의 쇠잔한 몸에 대비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오로지 화자의 시선에 의해 일방적으로 보여지기만 할 뿐이므로 그녀의 몸은 서사에서 배제된 타자의 몸이다. 그녀의 젊은 몸에 관한 서사가 죽음에 의해 발견된 삶의 불가해함을 파고들기보다는 화자의 관음적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시적 충족과 위로에 의해 죽음과 삶의 빈틈에서 솟아난, 삶의 방식과 세상살이의 관행들에 대한 회의의 시선은 회한으로 마무리된다. 죽음과 병, 헛것인 삶에 대한 응시와 이 관음적 시선이 서로 결합하면서 소설은, 삶은 불가해하고 그래서 헛것인 줄 알지만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수용과 관조의 주제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하성란의 「무심결」(창작과 비평)은 사소한 착각과 오해를 통해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의식의 빈틈, 혹은 삶의 허약한 기반을 읽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화자가 ‘실랑이’를 ‘가랑이’로 읽는다든가, ‘두 자식을 앞세우고 뒤따라가는 산책길’을 자식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읽는다든가 하는 것은 사소한 착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사소한 착각은 일상적 업무와 사고 아래에 숨겨져 있던 무의식의 강박이나 사물에 대한 관습적 시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예컨대 ‘실랑이’를 ‘가랑이’로 읽는 무심결의 착각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다툼을 성적인 코드로 일반화시켜 읽는 무의식에 의해 일어난 교란이다. 화자는 K선생의 산문이 지닌 쓸쓸함과 회한의 색조 때문에 ‘두 자식을 앞세우고’를 자식의 죽음으로 읽지만 이것은 삶의 쓸쓸함이 육체의 노쇠함이나 예기치 않은 사고에서 주로 기인한다는 화자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아무런 사고나 충격이 없어도, 두 자식이 모두 건재하고 평온한 일상이 계속된다 하더라도 삶은 충분히 쓸쓸하고 서글플 수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 사이의 다툼은 ‘여자가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리는’ 일 말고도 여러 국면에서, 여러 방식을 통해 여러 근거를 가지고 일어날 수 있다. 이 무심결의 착각은, 너무나 당연해서 전혀 의식조차 할 수 없이 스쳐 지나간 일들이 사실은 근거 없는 확신에 의거한 오해일 뿐이라는 것을, 그래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의식의 명료성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가를 일깨운다.
이 작품이 절묘한 것은 이러한 사소한 착각의 과정에 다른 이야기를 중첩시키면서 착각이 불러낸 성찰을 심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가 살고 있는 상가 골목은 한때의 호시절도 있었으나 이제 쇠락하였으며 상가마다 불을 밝혔던 간판의 글자들이 다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묵은 먼지들만 가득하다. 재개발 붐은 도로 건너편에서 멈추었으며 이제 상인들은 한때의 호시절을 기억하면서 그날그날을 겨우 연명해 나갈 뿐이다. 몇 해 연속으로 물난리를 입으면서 지역에는 상습침수지역이라는 딱지가 붙어 버렸으며 수해는 상가의 쇠락을 더욱 가속화시킨다. 첫해의 수해 때 사람들은 난리가 난 것처럼 법석을 떨고 우왕좌왕하였으나 해를 거듭하면서 능숙하게 짐을 싸고 인근 초등학교로 신속하게 대피한다. 물난리가 지나간 후 사람들은 말없이 흙탕물을 씻어내고 벽지를 새로 바르면서 이 대책 없는 재난에 익숙해진다. 그러나 재난이 일상사가 되어버리는 상황 속에서 화자는 삶의 기반을 뒤흔드는 빈틈을 발견한다.
빗물을 쓸어내다 방바닥에서 시작되는 틈을 발견했다. 틈으로 검지손가락이 쏙 들어갔다. 해마다 빗물에 지반이 쓸려가면서 집의 뿌리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몇 해가 지나면 물위로 둥둥 떠다니는 건 플라스틱 의자나 소쿠리, 가벼운 가전제품이 아니라 집들이 될 것이다.(197쪽)
표면적인 평온과 묵묵한 적응 속에서도 삶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고 그 균열로 말미암아 마침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재난이 자연적인 힘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기에 이 발견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고지대에 자리잡은 아파트 단지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 하는 빗물이 저지대인 이곳으로 모여”(192쪽)들기 때문에 상가는 전에 없던 수해를 거듭 겪고 있는 것이다. 화자가 발견한 균열은 고지대 아파트와 재개발 붐이 불러온 성장과 번영, 그리고 그 그늘에서 푸석푸석한 먼지와 허망한 적응으로 쇠락해 가는 상가 골목 사이의 빈틈이다. 거듭되는 재난을 일상사로 안착시키는 사람들의 적응력은 놀랍지만 그것이 허망한 까닭은 이 적응이 절대로 일상을 평온하게 유지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발적으로 보이는 이 적응은 사실은 개발과 번영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쇠멸해 가야 하는 자들에게 강요된 불가피한 선택이다. 어쩌면 그 적응은 재난의 불운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안간힘일 수도 있겠지만 그 안간힘 속에서도 삶은 어느새 틈새가 벌어지고 지반이 쓸려나가며 그래서 붕괴의 길로 향해 간다. 재난과 쇠락의 대척점에 고지대 아파트와 재개발 붐을 놓음으로써 소설은 삶의 지반을 불안하게 만드는 배경과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삶은 불가해하며 불가피하므로 그것에 적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체념이 결코 삶을 그럭저럭 유지시킬 수 없다는 것, 쇠락과 번영은 함께 연결된 고리 속에서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는 삶의 양면이기도 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가랑이’의 착각과 K선생에 대한 오해가 일상적인 평화와 적응이 지닌 불안한 기반을, 틈새가 벌어져 무너져가고 있는 삶의 불안정성을 암시하는 하나의 징후로 상가 골목의 수난에 닿아있는 것은 물론이다.
죽음이나 수해는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저항해 볼 도리가 없는, 불가피한 쇠멸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 또한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기에 맞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그 불가항력적 위력 앞에서 삶을 다시 읽게 만든다는 공통점도 지닌다. 과연 김훈과 하성란의 소설은 쓸쓸한 쇠멸을 눈앞에 두고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섬세하게 제공한다. 그러나 이 성찰을 의미화하는 과정에서 두 작품은 차이를 드러낸다. 김훈의 소설이 죽음이 드러낸 삶의 불안정성과 불가해함을 젊은 여자의 육체를 통해 위로하고 그래서 회한에 가득 찬 눈으로 봉합하고 있다면 하성란의 소설은 사소한 기미와 예감마저도 삶의 불안정성을 드러내는 징후로 활용함으로써 그 불안정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물론 하성란의 소설 역시 그러니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봉합되지 않은 빈틈들 속에서 안정화된 삶의 불가해함과 불안정성을 탐구하기 위한 다음의 서사가 준비되며 그것을 통해 소설이 완결되더라도 결코 완결되지 않는 우리 삶의 지속성, 진지한 응시의 당위성을 환기할 수 있을 것이다.
3.
도처에서 드러나는 균열들 때문에 삶은 불안하며 그 불안 속에 깃들어 있는 일상은 아무 일 없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또한 늘 불길하고 알 수 없는 징후 속에 휩싸여 있다. 평안하게 지속된다고 믿어왔던 일상은 사실은 불운과 행운의 반복 속에서 스스로를 적응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문득 드러난 빈틈들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 기를 쓰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삶은 어느새 기대와 예측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불가해하다. 불가해함의 발견은 견고하게 지속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숱한 확신과 고정된 패턴들을 하나의 우연이나 온전히 동의할 수 없는 일시적 제도로 볼 수 있게 하므로 삶에 대한 새로운 탐구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탐구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것도 아직 확정되지 않았으므로 절대적이지 않음을 분명하게 전제하는 태도, 불운과 행운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거리 두기의 태도가 필요하다. ‘농담’은 이러한 거리 두기의 적절한 방법이 되기도 한다.
윤성희의 「고독의 의무」(≪문학동네≫)는 삶의 불가해함에 대응하는 농담과 유머의 방법론을 간명하게 제시한다. 만우절에 태어난 저자에게 삶은 출생부터가 가벼운 거짓말이고 농담과도 같은 것이다. 만우절의 생일과 만우절의 결혼기념일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진지한 사건들을 믿을 수 없는 거짓말로 만들어 버린다. 그리고 이 진지한 사건들이 일종의 유머가 되는 것은 단지 만우절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교차되어 닥쳐오는 불운과 행운들 때문이며, 불운이 행운이 되고 행운이 다시 불운이 되는 과정 속에서 삶은 하나의 거짓말 같은 농담이 되어버린다. 아버지의 간암은 가족들을 통째로 시련 속에 빠뜨렸지만 또한 그것은 새로운 행운의 전조이기도 하다. 낙향한 시골에서 캐낸 약초로 아버지의 간암은 완치되었고 그 약초는 집안을 다시 일으킬 기반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간암과 어머니의 위암, 약초로 암을 완치하는 기적, 결혼식 날의 교통사고 등의 다소 과장된 사건의 연속은 행운과 불운이 번갈아 덮치는 삶의 불안정함과 불가해함에 대한 하나의 우화로 보아야 하므로 개연성이나 현실성을 따질 성격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간략하게 사건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요약된 이 남자의 일대기는 삶의 불가해성을 탐구하는 시선이 개입될 틈을 남겨 놓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삶은 불가해한 것이라는,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을 다시 주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해함이 어디서 비롯되었는가를 캐묻는, 혹은 이미 알고 있다고 믿어왔던 삶 자체가 지니는 빈틈들로 그 불가해함을 되돌리는 시선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작위적으로 교차 편집된 불운과 행운들에 의해, 삶은 개인의 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그래서 그 속에서 진지한 응시나 탐구 역시 하나의 유머가 될 뿐이라는 결론만 남는다. 그로 인해 이 불가해한 삶에 맞서는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도 있는 농담과 유머 역시 일종의 허무주의적 태도표명 이상을 넘어서지 못 한다.
변화없는 일상이지만 그 속의 개인들은 언제나 이런 저런 사건들과 마음속의 번민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진짜 농담은 사건과 사고들, 마음이 일으키는 삶의 균열들과 그것들이 일반화된 일상 속에 파묻혀 사라지는 광경들을 함께 볼 수 있는 시선을 확보할 때 그 효력을 발휘한다. 이만교의 「농담을, 이해하다」(≪세계의 문학≫)는 농담을 서술 전략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농담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 농담의 발생론적 근거, 그리고 농담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작품이다. 성실한 직장인이며 여자라고는 아내밖에 모르는 화자는 직장 동료들이 주고받는 농담에 적응하지 못 하는 농치, 혹은 농맹이다. 주로 여자들, 아내 이외의 애인에 대한 것인 직장 동료들의 농담을 그가 이해하지 못 하는 까닭은 아내와 애인 사이를 오가는 마음 구조를 알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라고 할 수도 없고 장난삼아 만나는 여자라고 할 수도 없는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인하여 숨겨야 할 비밀이 생길 때 비로소 농담과 진담의 경계를 오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부하직원인 신입을 통해 신입의 첫사랑을 알게 되고 그녀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아내와 가정과 직장생활의 질서를 허물어뜨리지 않는 경계 속에 숨겨야 할 여자가 생기면서 그는 비로소 농담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가 “세상은 무서운 곳”이고 “그래서 세상이 하는 농담을, 알아도 못 알아듣는 척 혹은 못 알아들어도 알고 있는 듯이 적절하게 넘어갈 줄을 알아야 한다.”(79쪽)고 말할 때 그것은 세상을 원만하게 사는 지혜를 일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품은 여기에서 한발을 더 들여놓는다.
두 사람의 과거와 앞날을, 나는 환하게 들여다본 적이 없다. 때문에 문제를 대충 봉합해서 두 사람을 헤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그 두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도움이 될지 어떨지 무슨 수로 내가 장담할 것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어떤 지혜나 자격도 갖고 있지 않다.(77-78쪽)
신입은 첫사랑을 못 잊어 술만 취하면 그녀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남편과 별거 중이므로 그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그래서 신입은 그녀를 두고 직장동 료와 결혼 직전까지 가 있다. 아직 첫사랑의 존재를 모르는 결혼 상대자와 신입이 술버릇 때문에 다툼이 벌어지면 ‘나’는 신입과 친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설득하고 달랜다. 그러나 신입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두 여자를 알고 있는 나는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어쩐지 알 수가 없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서는 수 없는 난관을 겪어야 하고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딴 여자를 두고 번민해야 함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회사 앞 카페마담과 애인 사이인 팀장과 엘리트 여사원과 애인 사이인 본부장에 대해서도 어떻게 왈가왈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무 일 아닌 것처럼, 그냥 스쳐 지나며 한번 던져본 것처럼 농담이 오고갈 수밖에 없는 것은, 일반화, 평균화시킬 수 없는 관계의 다면성 때문이고 진지한 일반성에 개인의 사연과 마음의 비밀을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농담을, 이해하다」는 ‘세상살이 만만치 않으니 말조심해라’라는 상투어를 농담을 화두로 하여 다시 풀어내고 그 속에서 개인적 삶의 다면성과 견고하게 구축된 관계의 위험한 경직성을 함께 발견한다. 개인과 사회의 충돌과 불화는 문학의 오래된 소재이며 그것은 또한 그 갈등관계의 권력구조와 위계를 첨예하게 밝혀낼 때 여전히 낡지 않은 주제일 수 있다. 농담의 화법을 적절하게 활용하면서 이 작품은 첨예한 갈등과 권력관계를 능숙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그래서 누구도 상처입지 않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이는 얼핏 견고한 관계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세상과 화해하는 자기방어의 방법론으로 농담이 제시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지나치게 진지한 몰입과 엄숙한 비판 속에서 사라질 수 있는 개인적 사연의 다면성들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하다. 다소 애매한 이 전략의 수행과정에서 개인적 사연과 집단적 일반화를, 농담의 가벼움과 그 속에 담긴 진지한 균형잡기를 함께 읽는다면 이 작품을 통해 삶의 빈틈과 그 사이에 담긴 성찰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만교의 작품이 농담에 관해 말하는, 농담의 사회학적 존재론과 발생론에 대한 소설이라면 성석제의 「내 고운 벗님」(≪문학판≫)은 농담을 소설을 서술하는 방법론으로 삼고 있는 작품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성석제의 소설은 농담처럼 웃고 떠들면서 엄숙하고 진지한 모든 것들을 뒤집어 놓는다. 「내 고운 벗님」 역시 예외가 아닌데 나라를 들었다 놓을 만한 무기 거래의 에이전트인 대위가 휴식을 위해 소읍의 낚시터로 내려오고 그를 접대하기 위해 벌어지는 한바탕 해프닝은 무기거래나 권력적 인간관계, 강한 자에 약하고 약한 자에 강한 속물성을 유쾌하게 풍자하고 조롱한다. 대위는 접대도 준비도 필요없는 조용한 휴식을 원한다지만 그 앞에서 그저 즐기다 가시라고 무신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요란스런 접대를 준비하면서 또한 그것을 눈치채지 못 하게 하기 위해 더욱 법석을 떨어야 하는 마을 사람들이나 짐짓 알면서도 모른 채 그 소동을 즐기는 대위나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조용한 휴식을 모토로 한 이 야단스러운 소동은 마치 우아한 백조의 부산하고 경망스런 발놀림처럼 기존의 이미지를 뒤집는 풍자의 매력을 지닌다. 소설을 시정잡사의 기록이라고 한다면 성석제의 소설은 이러한 정의에 가장 가깝게 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소설은 시끌벅적한 소동과 해프닝으로 가득 차 있고 모든 등장 인물들을 희화화함으로써 대위도 시정의 장사꾼도 이 해프닝의 한 등장 인물로 만든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인 속물적 인물로 소읍 사람들과 대위를 동등하게 풍자하는 과정에서 엄연하게 존재하는 그들 사이의 권력관계가 희석될 우려가 있다. 표나지 않게 감동적인 접대를 준비하는 소읍 사람들의 노력은 대위의 변덕과 신경질에 의해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해 버리고 이는 이 소동의 와중에서도 대위와 소읍 사람들 사이의 권력관계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휴식과 명상이 목적이며 시정의 수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근엄하게 말하면서도, 수확 없는 낚시에 대한 신경질을 엉뚱하게 풀어놓고 휭하니 떠난 대위의 위선을 다시 풍자하는 과정에서 이 권력관계는 분명하게 부각되지 못 한다. 권력 자체가 풍자되어 버렸으니 권력관계에 대한 더욱 엄밀하고 구체적인 풍자는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는 것이다. 「내 고운 벗님」은 권력관계를 서사화하면서도 또한 그것 자체를 똑같이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 버림으로써 그 권력관계의 엄연한 현실성을 무화시킨다. 성석제의 소설은 모든 대상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아 익숙한 고정관념들을 해체한다. 그러나 그 해체가 무차별적 평균화가 되지 않으려면, 번뜩이는 입담과 전방위적 풍자는 그 대상을 좀더 정교하게 위계화할 필요가 있다. 그랬을 때 이 해학 넘치는 해프닝들은 독자로 하여금 천진하고 낙관적이면서 또 위선덩어리인 개인들과 그들에 의해 구조화되고 위계화된 이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견고성을 더욱 눈여겨보게 할 것이다.
4.
김영도의 「나와 함께 춤을」(≪작가≫)은 앞에서 언급된 것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우리 삶의 빈틈과 균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은 드물게 노동과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를 띤다. 그러나 이 작품은 기존의 노동소설처럼 노조의 결성이나 현장에서의 갈등, 쟁의의 과정 등을 중심에 두지도 않으며 노동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이전의 소설들과는 다르다.
“김형, 저, 우리 잠시 연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시기가 안 좋습니다…… 좀더 유연성을 가지고 대처하는…… 오죽하면 모택동이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연기하자고 할 걸. 웬 일보 전진 이보 후퇴냐. 다 쓸데없는 사족이다. 김영도가 뭐라 할까?
“오형, 그럽시다.”
김영도는 말을 끝내자마자 돌아갔다. 나는 김영도가 한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 도저히 그 말의 의미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도와 나의 우호적인 관계는 변함이 없었다.(293)
논문을 복사하고 제본하는 회사에서 공공근로로 일하는 오목토와 김영도는 노조를 결성하기로 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만 정작 행동개시일에 오목토는 우물쭈물 연기를 제안한다. 공공근로 기간이 끝나면 한 차례의 정리를 거쳐 정식사원이 되느냐 해고되느냐가 결정될 것이고 오목토에게는 갚아야 할 빚과 병원에 가야 하는 어머니가 있다. 일상의 곤란과 불안한 신분이 노조결성을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이념적 당위성과 일상의 요구가 부딪치지만 오목토는 그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의 비겁을 스스로 조롱하며 가볍게 스치고 지나간다. 소설은 현장에서의 투쟁이나 조직과 같은 문제보다는 오히려 일상의 부딪침들에 더 주목한다. ‘노동의 4번 타자’ 용접공 출신의 해고노동자 김영도와 오페라와 라틴 댄스에 열광하는 오목토는 기질의 차이 때문에 자주 부딪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우호적인 관계’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남북정상회담이 있던 날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의 건배를 들고 비록 실행되지 못 했지만 노조결성의 필요성에 대해서 의기투합하기도 한다.
취미와 기호가 명백히 다르지만 또한 의기투합하고 함께 분노하며 감격할 수 있는 이 동질성은 과연 무엇인가. 차이가 동질성을 더욱 돈독히 하고 동질성이 차이를 기꺼이 인정하게 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소설은 오목토가 몰두하고 있는 춤을 빌려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를 제기한다. 몸과 몸이 밀착하여 함께 리듬을 타는 춤은 이념과 정치적 입장으로 설명되지 않는 동질감과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민노당 사이트를 드나들고 남북통일과 노조결성에 대해서도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가지지 않지만, 어릴 적의 기억 때문에 노동자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던 오목토가 라틴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그것은 노동자의 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육체와 이념 사이, 일상과 정치 사이에 길게 가로놓여진, 화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거리는 각각에 몰두하면서도 그것 사이의 관계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 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여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나친 엄숙과 경직을 피하기 위해 시종 춤과 노조 사이, 오페라와 민가 사이를 가볍게 넘나든다. 그러나 이 가벼움 속에서 육체가 자연스럽게 이념을 불러오고 이념이 겸허하게 육체를 존중할 수 있는 지점을 고민한다. 그래서 돌연 직장을 그만둔 김영도 덕분에 정식사원이 된 오목토는 김영도에 대한 부채감과 비정하고 건조한 직장생활을 토로하지만 오래 비감에 젖지도 않는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남거나, 노동자라고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육체와 이념 사이의 균열과 조우에 관한 고민은 오래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육체와 이념, 삶과 죽음, 안정된 일상과 느닷없는 재난, 소문과 진실 사이에서 우리의 삶은 문득 불가해하고 불안정한 기반을 드러낸다. 소설은 이 사이와 차이, 그 균열의 틈새에서 새로운 성찰을 이끌어내고 익숙하게 받아들였던 현실의 견고한 구조를 회의한다. 소설의 가장 소중한 미덕은 이분법을 질타하거나 고정화를 혐오하는 것보다는 이 차이와 균열들을 발견하고 그 균열들이 어떻게 이어져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가를 검토하게 하는 데 있다. 차이들을 서둘러 화해시키고 봉합시키지 않는 한, 그리고 그 균열이 삶을 이해하는 새로운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이 빈틈들에서 솟아나오는 우리의 이야기들은 풍요롭다.
서영인
․200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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