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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문화산책/김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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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679회 작성일 05-02-20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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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추억하는 영화 ꡔ살인의 추억
―치명적 시점 화면에 관하여

김 서 영



1. 날 보러와요
봉준호 감독의 ꡔ살인의 추억ꡕ을 500만 이상의 관객이 보았다. 대중적 열기와 더불어 영화는 제40회 대종상 영화제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조명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하며 승전고를 울렸고, 영화의 해외 판매고는 36억 원을 넘어섰으며, 영화의 투자와 배급을 맡은 CJ엔터테인먼트의 7월 주가는 4월초 10,000원대에서 70퍼센트가 상승한 17,000원대로 접어들었고, <파로마 가구>는 <할인의 추억>이라는 패러디 광고를 제작했다. 리허설 없이 즉흥으로 연기된 송강호의 이단옆차기가 화제로 떠오르고, 백광호를 연기한 박노식의 10년 무명생활이 청산되었으며, 영화의 원작인 연극 ꡔ날 보러와요ꡕ는 영화 개봉 이후 상연된 8차 공연 동안 5주 연속 전회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영화의 흥행 열기에 힘입어 오는 9월에 공소 시효가 만료되는 7차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재수사 여론이 점차 고조되고 있으며, 6월 2일자 <문화일보>에는 3차 사건에서 9차 사건까지 7건의 수사를 담당했던 화성사건의 실제 형사 하승균 경기경찰청 강력계장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형사는 말이야 범인 못 잡으면 할 말이 없는 거야. 10명의 여성이 무참하게 살해됐고, 그 가족들은 지금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어. 그리고 내 부하들이 구속되고 뇌출혈로 쓰러져 불구가 됐어. 그 많은 희생이 있었는데도 결국 난 범인을 잡지 못 했잖아. 근데 무슨 할 말이 있겠어 ……. 난 형사야. 그렇기 때문에 잡는 것만 생각해. 범인은 분명히 살아서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어. 난 반드시 그놈을 잡을 거야.

하승균 계장의 이러한 범인에 대한 분노와 그를 잡겠다는 의지는 ꡔ살인의 추억ꡕ의 곳곳에 배어있다. 형사 박두만이 지나치게 차분한 목소리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박현규에게 “밥은 먹고 다니냐?”라고 물을 때 관객은 그 한 줄의 대사 안에서 격한 감정이 용해된 폭력적 분노를 읽는다. 배수관 안 시체에 들끓는 벌레들과 무참히 살해된 희생자들의 모습에 의해 극명하게 드러나는 그 분노는 궁극적으로 카메라가 볼 수 없는 프레임 밖 어두운 세상의 한켠을 향한다. ꡔ살인의 추억ꡕ은 <전두환 대통령 각하>로 시작되는 현수막 아래에서 시위 진압 경찰대와 문귀동 형사의 모습을 보여주며 매 화면에 배어있는 분노의 그림자를 통해 화성의 원혼들을 깨워 일으킨다.

2. 부활의 딜레마
그렇다면 과연 이 부활의 의미는 무엇인가? 군부독재에 유죄를 선고하는 광주의 혼령들을 위한 것일까? 그렇게 보기엔 화성연쇄살인사건이라는 소재 자체가 너무나 외상적이다. 아니면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경찰의 강압수사를 고발하기 위한 것일까? 그러나 영화는 형사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너무나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학적 수사가 불가능하던 당시의 열악한 상황에서 직감과 집념만으로 범인과 맞서야했던 경찰들의 모습을 그리고 싶은 걸까? 그래서 악랄한 사건으로부터 그들이 입게 되는 정신적 충격을 호소하기 위한 것일까? 하지만 이 가설로는 김광림의 연극 ꡔ날 보러와요ꡕ에 등장하는 풍 맞은 반장 김세곤과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형사 김인중의 모습이 영화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 설명되지 않는다. 연극에서 사건의 후유증으로 풍을 맞는 김세곤 반장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들었으며 왼팔은 꺾여있고 비틀어진 손가락들이 오른편 가슴에 닿아 있다. 얼굴은 찌그러들어 삐뚤어진 입술 아래로 침이 흐른다.” 개인의 이러한 고통은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영화는 지나치게 억세지도 과도하게 섬세하지도 않은 형사들보다는 오히려 2003년이 아닌 <80년대>에 일어난, 그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을 중심적인 소재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영화에서 화성사건은 공권력의 민생치안에 대한 무기력을 표상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민방위훈련과 야간 등화관제의 시절, 과학보다 육감에 의지하여 수사해야 했던 시절, 사건현장의 기본적 현장보존조차 쉽지 않던 시절, 지원군보다는 시위 진압군이 많았던 시절을 배경으로 제시하고 정부가 적기의 야간공습으로부터 국민의 생명을 구하고자 할 때 사이렌 소리 밑 어둠에 잠긴 농촌 마을에서 여유롭게 자행되는 참혹한 살인사건을 보여준다. 미해결 살인사건의 피해자들과 80년대의 부조리를 함께 영사막으로 투사하는 봉준호의 연출은 탁월하다. 영화는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 아래 웃음과 삶의 원기가 가득한 마을 구석에서 무참하게 도륙당한 여인들의 시신을 오래 응시하며 그들이 스스로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이때 영화가 직면하는 자가당착적 상황은 영화가 그리는 형사들의 모습에서 드러난다. ꡔ살인의 추억ꡕ이 그리는 형사들은 그 당시 의무라는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말 없이 수행하며 시대라는 모순의 덫 안에 걸려서조차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사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적절한 타협으로 빚어내는 구도에서 야기되는 문제는 봉준호의 형사들이 고문하는 문귀동이 될 수도, 정신적 외상을 입고 정신병원에 수감되는 김인중 형사가 될 수도 없다는 점이다. 이미 거론한 바 있듯이 ꡔ살인의 추억ꡕ의 형사들은 전자의 역할을 소화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며, 후자의 경우를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굳건히 상징의 질서에 편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다소 어색하긴 하지만 남은 유일한 방법이란 역할을 분담하는 것이다. 즉 지하 취조실에서 오른발 워커 위로 덧버선을 신고 용의자를 폭행하는 조용구 형사는 전자의 모습을, 어린 소현의 죽음에 이성을 잃는 서태윤 형사는 후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관객에게는 조용구가 다리를 절단하는 장면도, 서태윤이 점점 선명해지는 소현의 모습에 폭력적인 광기에 사로잡히는 모습도 보여지지 않는다. 다리 절단의 암시는 병원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지만 시나리오에 적힌 태윤의 광기가 영화에서는 삭제되었기에 우리가 터널 장면 이후 태윤의 심리 상태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묘연하다. 다시 말하면 두 경우 모두 극한을 제시하지 못 하는 애매함으로 적당히 중도를 걸으며 관객에게 약간의 벌과 약간의 고통, 아니 약간의 서운함을 넌지시 비출 뿐이다.
극단을 제시하지 못 하는 서사구조는 연극과의 비교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김광림의 ꡔ날 보러와요ꡕ에서의 대립은 고문을 일삼는 조남호 형사와 서울에서 전근을 온 시와 음악을 애호하는 감수성을 가진 김인중 형사 사이에서 선명하게 제시되며 사건 후 남호는 계속 경찰 생활을 하지만 인중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게 된다. 영화는 조남호라는 인물을 분해하여 조용구와 박두만을 만든다. 즉 과도한 폭력성을 조용구에게 남겨두고 관객이 동일시할 수 있을 정도의 분노로 박두만이라는 인물을 창조하며, 연극의 김인중을 서태윤으로 변모시키는 과정에서 연인, 시, 음악을 거세하고 서류에 대한 집착만을 남긴다. 그러나 태윤을 두만의 대립쌍으로 간주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그의 신념을 끝까지 관철시키지 못 한다는 데 있다. 첫 등장부터 일관되게 과학수사를 주장해온 태윤은 영화의 후반부에서 두만에게 “목격자구 나발이구 다 필요 없어. 자백만 받아내면 돼. 박현규 그 새낄 죽도록 두들겨 패는거야”라고 말함으로써 둘 사이의 대립을 해소한다. 또한 영화의 전반부에 “서류는 절대 거짓말 안 하거든”을 연발하는 태윤은 박현규와 범인의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DNA 감식결과 서류를 구기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뭔가 잘못됐어! 이것 다 거짓말이야. 필요없어!” 이는 마치 연극 속 김인중이 한 순간 그가 즐기는 시와 음악을 포기하고 용의자를 고문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신념과 쾌락이 수시로 갈아입을 수 있는 겉옷으로 탈바꿈할 때 대립의 구조도 개인의 특수성도 심리의 극한적 상황도 사라진다. 영화는 김인중 형사의 음악을 권귀옥 형사에게 배당하고, 조형사의 폭력성을 조용구에게 전가시키므로 둘이 넷이 되는 과정에서 대립의 긴장감이 박탈된다. 동시에 80년대라는 시대배경이 영화의 곳곳에 삽입되고, 이는 미미하게나마 남아있던 대립구조 위로 군림한다. 적당한 중도를 선택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담기에 지나치게 외상적인 사건들을 영상화하기 위해 봉준호가 사용하는 전략은 안락한 환상 시나리오로 영화의 산만한 토막들을 얽어내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박두만의 역할이다.

3. 참을 수 있는 외상
우리는 첫 희생자를 박두만의 시점으로 본다. 그와 우리가 함께 살인범의 반대쪽에 배치된다. 그러나 희생자의 두려움과 고통이 우리의 응시와 맞물리려 할 때 우리에게 강요되는 역할은 작은 눈의 용의자에게 눈을 똑바로 뜰 것을 지시하는 두만의 대사에 개운하지 않은 웃음을 짓는 것이다. 이 웃음은 영화의 선두에 위치하여 우리가 어떤 자세로 영화를 감상해야 하는가를 알려준다. 우선 이것은 안전에의 약속이다. 영화는 우리를 외상적 경험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다. 두만의 시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것이며 우리는 희생자들이 아닌 두만과 동일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는 모든 것을 보고, 그의 육감은 범인을 향한다. 인생의 어긋남이나 견딜 수 없는 고통, 중풍과 성불구와 정신병을 유발하는 이 세상은 두만의 배경을 이루는 엑스트라들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견디기 힘든 소재를 다루는 이 영화가 박두만이라는 인물의 구성에 의해 견딜만한 것이 된다. 영화가 어떤 전략으로 그를 중심에 위치시키는지 살펴보자. 태윤과의 대립이 결말에서 해소됨은 이미 언급하였다. 이를 통해 영화는 간접적으로 박두만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를 보호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그의 여자친구인 간호사 곽설영이다. 그녀는 그의 애인이고 동료이며 간호사이자 어머니이다. 그에게 섹스와 범인에 대한 정보와 보살핌과 자상함을 제공하는 그녀는 박두만이라는 인물을 영화의 중심에 배치시키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녀의 역할이 흔들리면 그 틈으로 외상이 스며들 것이기에 이는 반드시 사수되어야 할 요충지이다.
이러한 집착이 초래하는 하나의 장면을 살펴보자. 박두만의 애인 곽설영이 늦은 밤길을 혼자 걷고 있다. 맞은편에서 중학생 김소현이 걸어와 설영을 지나친다. 이 장면은 범인의 시점 화면으로 처리되는데 설영과 소현을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시점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곧 한 명을 선택할 것이라고 예감한다. 카메라의 짧은 머뭇거림에서 범인이 된 우리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누구를 선택해야 하는가? 영화의 서사 구조를 충실히 따라온 관객이라면 설영이라는 인물을 살리고자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현을 선택해야 하는가? 카메라는 곧 소현의 뒤를 따른다. 시점화면의 덫에 걸린 관객들은 이때부터 모두 유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순진한 제 삼자가 아니다. 이어지는 범행 현장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의 선택이, 우리에게 강요되었던 선택이, 초래한 결과와 맞닥뜨린다. 이제 대립은 설영을 살린 관객과 우리의 유죄를 알고 있는 봉준호 사이에 설정된다. 80년대 군부독재에 대한 고발이 범인에 대한 분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관객에 대한 유죄 선고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으로 시점화면을 계획한 감독 자신에 대한 유죄판결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유죄이다. 용의자 미행에 실패한 태윤도, 관객도, 감독도 모두. 놀랍게도 영화는 다시 두만에게 묻는다.  관객이 유죄냐고. 두만은 용의자의 눈에서 진실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용의자 현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니가 정말 아니란 말야? …… 내 눈 똑바로 봐! …… 똑바로 보라니까!” 하고 다그칠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바라본다. 마치 우리가 모두 유죄임을 알고 있는 듯. “니가 정말 아니란 말야? …… 내 눈 똑바로 봐! …… 똑바로 보라니까!”

4.  살인을 추억하며
봉준호의 세 번째 단편 영화 ꡔ지리멸렬ꡕ에서 그는 대학 교수, 신문사 논설위원, 검사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영화는 그들이 상식에 어긋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 후 에필로그에서 함께 모여 사회악과 범죄에 대해 시사토론을 하는 모습을 비판적으로 담는다. 그의 데뷔작 ꡔ플란다스의 개ꡕ에서 그는 이웃집 개를 납치하여 죽이는 시간 강사를 고발한다. 영화의 결말에 그는 교수로 임용된다. 두 영화 모두 출구는, 각 각 신문 배달원과 아파트 경리 직원으로 제시된, 묵묵히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이들이다. 이 영화들과 ꡔ살인의 추억ꡕ의 차이는 후자에 인물의 대립구조가 불분명하다는 데 있다. 형사들은 모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고 오히려 영화가 고발하는 것은 관객이다. ꡔ살인의 추억ꡕ은 그 치명적 시점화면을 통해 500만의 관객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이때 500만의 고발당한 대중이란, 힘도, 위협도 증인도 아닌 다만 못난 과거의 잔상을 어색하게 들켜버린, 박두만의 눈길을 피하고만 싶은, 가해자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낸 7,000원은 그에 대한 면죄부를 얻기 위함인가?  
대중의 <힘>이 영화의 역사를 결정한 예는 허다하다. 워너브라더스가 ꡔ재즈싱어ꡕ라는 첫 발성영화를 준비한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이 새 기술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마이크의 위치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발성영화에 대해 촬영기사들은 마치 영상의 모든 가능성을 봉쇄하는 재앙이 닥친 듯 반발했다. 그러나 1927년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영화관 앞의 인산 인해를 이룬 대중에 의해 드디어 발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대중의 힘은 또한 어떤 경우에는 분노로부터 피어나 가능성의 장에서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소수의 목소리가 중요시되고 큰 이야기가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라고들 한다. 주체가 파편화되고 진실이 없어지고 자본주의가 영구화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새것이란 항상 가장 새로운 옛것이라는 보들레르의 말처럼 일상의 작은 일들이 과거의 믿음과 소원과 분노와 연결 될 때에만 진정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본다. 80년대 군부독재와 더불어 관객을 고발하는 전략에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할 수 있는 어떠한 생산적 대안도 제시되어 있지 않다. 봉준호의 분노는 방향성을 잃었다. 그는 결국 사회 전체를 고발하고 그의 분노는 우리 모두를 공격한다. 불어의 <상스sens> 란 의미 또는 방향을 뜻한다. 방향성을 가질 때에만 의미가 생성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봉준호의 길 잃은 분노는 어떠한 의미 있는 출구도 제시하지 못 한 채 과거에 갇히며 이 폐쇄적 공간에 부는 분노의 바람은 파괴력도 생산력도 없이 곧 추억 속에 사그라진다. 그의 영화에서는 살인도, 군부독재도 두만과 설영이라는 안정된 구조 속에 묻혀 어떤 사건도 충분히 외상적으로 묘사되지 못 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두만을 위해 기꺼이 대립구조를 포기하며, 서사의 전개와 카메라는 내내 박두만이라는 인물을 편애한다. ꡔ살인의 추억ꡕ은 카메라의 이러한 인위적 시선 속에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수 있도록 바꾸어 살인을 추억한다.
봉준호와 심성보의 ꡔ살인의 추억ꡕ의 시나리오가 출판되었다. 심성보는 에필로그 「<살인의 추억>을 추억하며……」에서 “<살인의 추억> 시나리오 작업에 대한 추억은 제 인생에 몇 안 되는 즐거운 추억 중에 하나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추억하는 ꡔ살인의 추억ꡕ에는 죽은 자의 망령과 그들의 분노가 배어있지 않다. 적당한 비판과 적당한 웃음과 적당한 타협 안에서 방향성을 잃은 분노는 결국 살인을 추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란 본질적으로 파편화된 것이 아니던가. 영사막에 투사된 매 화편(畵片)은 간결한 서사구조 분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세부의 진실을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이어질 작품들에서는 ꡔ살인의 추억ꡕ에서 스치며 만났던 추억하고픈 영상들을 통해 미래를 향한 추억을 만들어가는 봉준호 감독을 보고싶다.

김서영
․1972년 출생
․영국 셰필드 대학교 정신분석학 박사, 고려대 강사

추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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