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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북-리뷰/최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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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활화산, 비판적 논쟁의 불꽃을 피우다
―고명철의 ꡔ비평의 잉걸불
최 강 민
(문학평론가)
1.
가열찬 연대의 함성이 끊어진 세기말의 거리. 소규모의 소장파 문학 전사들은 새로운 모색을 꿈꾸며 타락한 문학제도와 교활한 상업주의라는 황야의 무법자와 맞서 싸우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다. 이미 문학마을은 민족, 분단, 계급이라는 거대서사가 위축된 채 미시서사에 점령된 상황. 후대의 사람들은 이 시기를 환멸의 바이러스에 유린된 거대서사의 암흑시대라 호명할지도 모르겠다. <비평과 전망>의 동인인 평론가 이명원, 고명철, 홍기돈 등은 동맥경화증에 단단히 걸린 문학의 위기를 정면 돌파하기 위해 논쟁의 대장정을 시작한다. 문학 주류의 타락성을 감히 비판하는 그들의 전복적 행위는 ‘다윗과 골리앗 싸움’의 재판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나는 그들을 감히 고독한 왕따(?)라 부르고 싶다. 물론 그들만이 불온한 왕따였던 것은 아니다. 권성우, 김정란 등의 선배 문인들도 그 대열에 동참해 새로운 문학 지형도를 창출하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던가.
이 글은 왕따 중의 한 사람이었던 고명철의 두 번째 평론집인 ꡔ비평의 잉걸불ꡕ(2002)에 대한 단상이다. 그는 첫 번째 평론집인 ꡔ쓰다의 정치학ꡕ(2001)에서부터 두 번째 평론집에 이르기까지 문학을 둘러싼 다양한 제도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줄기차게 시도한다. 이때 고명철의 비평적 칼날은 문학 외부의 조건보다 문학 자체에 대한 반성에 좀더 주력한다. 이것은 내부의 체질 개선이 무엇보다 시급히 필요하다는 절박한 인식의 소산이다. 문학의 진정성을 훼손하는 기존 주류 비평가들의 ‘주례사 비평’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도 바로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이처럼 이 책의 제 1부는 문학 안팎에서 쟁점이 되었던 사항들에 대한 메타비평의 글들이 주로 묶여져 있다. 특히 고명철은 「메이저에서 상품화된 마이너들의 농담」에서 스타작가로 군림하는 은희경의 ꡔ마이너리거ꡕ에 대한 기존의 평론을 검토하면서 메이저 출판사인 <창비>와 스타 작가 은희경의 상징 권력에 짓눌려 하인으로 전락한 평론가들의 옹색한 자화상을 준엄하게 꾸짖는다.
또한 고명철은 「문학권력 비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곡해들」이라는 글에서 류보선이 보여준 ‘비판적 글쓰기’에 대한 서열화된 인식과 비평의 착종을 매섭게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비판적 글쓰기의 한 실천 형태인 문학권력 비판을 한국문학의 고매한 품격을 훼손한다는 식으로 마녀 사냥하는 한 생산적 대화는 요원하다. 이처럼 그가 토해내는 비평의 지향점은 건설적인 상호 비판을 통한 문학의 건강성 회복이다. 이것을 위해 고명철은 기꺼이 비평계의 ‘똥개’(?)가 되기를 자임한다. 문학의 진정성을 오염시키는 세력이라면 누구나 이 똥개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 조심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다시 시작이다! 문학권력 논쟁 속에서 불거진 비합리적 요인들을 냉철히 검토해 보고, 한 국문학의 내실 있는 질적 도약을 위해서도 불필요한 오해와 곡해를 뒤로하여, 논쟁의 타자를 존중하고, 무엇보다 잘 정비된 문학제도의 관개수로를 통해 창작의 대지 구석구석 자양분을 원활히 실어나를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문학권력 비판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곡해들」, ꡔ비평의 잉걸불ꡕ, 70쪽
고명철의 비평적 시선은 주례사비평에 대한 비판을 발판삼아 문학계의 타락을 촉진시켰던 외부적 조건인 출판상업주의, 매스미디어 등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그는 「매스미디어어의 문화권력에 예속된 책」에서 문화부 기자, 출판자본가, 저자, 리뷰의 필자 등이 공생의 카르텔을 형성하면서 독서 시장을 왜곡한 것은 아닌지 비판한다. 또한 매스미디어의 제왕인 TV의 책 소개 프로그램이 특정 출판사를 지원함으로써 출판사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가속화시킨 것은 아닌지 우려를 표명한다.
2.
썩은 환부는 침묵의 카르텔이 지배하는 한 결코 노출되지 않는다. 진실을 드러내려는 소수의 혁명적 담론이 중심의 담론에 의해 감금된 채 은폐될 때, 우리는 그 사회를 병든 사회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역사는 소수의 담론이 그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투쟁해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론가 고명철은 논쟁의 활성화로 윗물과 아랫물의, 중심과 주변의 카니발적 소통을 역동적으로 시도한다. 그렇지만 갑론을박의 불꽃 논쟁이 은폐된 검은 내막을 노출시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측에서 이것을 달가워할 리 없다. 그들은 ‘물타기 수법을 통한 논점 흐리기, 침묵하기, 패거리를 동원한 왕따 시키기’ 등의 온갖 전술을 동원해 ‘비판적 글쓰기’에 재갈을 물리려고 애써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전술은 일정 부분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진실이 담겨진 ‘판도라의 상자’가 개봉되는 것을 일시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고명철은 무관심을 빙자한 침묵보다 남진우나 류보선처럼 비판적 글쓰기인 ‘문학권력 비판’에 자지러지게 대응하는 아전인수(我田引水)의 언어를 사랑한다. 그가 절실히 열망하는 것은 “자신과 타자에 대해 혀 끝에 고인 언어를 집어삼키지 않고 과감히 뱉음으로써 논쟁의 난장을 부추길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기꺼이 스스로 망가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데 있”(14쪽)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명철은 잘못 첫 단추가 끼워진 논쟁이라도 서슴없이 뛰어들어가 문제의 시정을 도모한다. 이때 논쟁의 승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보다 중요한 사항은 “혼신의 힘을 쏟은 치열한 혈전 속에서 어느덧 서로는 서로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44쪽)하는 것이다. 문제는 ‘적과의 동침’이라는 순수한 의도를 상대방 측이 삐딱하게 보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명철의 뜨거운 입술은 빈 허공과 키스한 채 짝 잃은 기러기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명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초대받지 않은 논쟁에도 스스로 끼어들어 난장의 비평을 시도한다. 그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죽음이냐, 갱신이냐」란 글에서 최근에 있었던 ‘리얼리즘/모더니즘’의 논쟁을 90년대 이후 우리 문학의 진보성에 대한 성찰적 과제를 제공해주는 유익한 논쟁으로 판단한다. 그는 임규찬을 80년대 문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하면서도 90년대 새로운 문학에 인색하다고, 윤지관을 견고한 리얼리즘적 원리가 90년대 이후 문학 작품에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적용되었다고 평한다. 고명철이 보기에 <창비> 에콜에 소속된 임규찬과 윤지관은 자유주의에 대한 세밀한 접근을 하지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과 민족문학의 갱신을 매번 다짐하면서도 그에 값하는 ‘사유’를 충분히 담지하고 있지 못 한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에 모더니즘의 입장에서 리얼리즘을 포용하려는 <문학동네> 에콜에 소속된 황종연에 대해 고명철은 현학적 이론과 90년대 문학에 대한 과잉 해석을 자행했다고 평한다. 특히 황종연의 이론적 토대인 버먼의 모더니즘론이 구체적 현실 속에서 현실정합성을 가지고 있는지 딴지를 건다. 고명철은 이 논쟁이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진행되는 이론 논쟁보다 작품 해석이 매개된 ‘해석논쟁’으로 전개되기를 피력한다.
이번 논쟁이 답보상 태에 있는 비평계에 생기를 불어넣어 모처럼 비평이 비평다운, 비평의 진경(珍景/眞景)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앞의 논의에서 강조했듯, 이번 논쟁이 ‘이론논쟁’으로만 치닫지 말고, 작품해석이 매개된 ‘해석논쟁’으로 다각도로 전개되었으면 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죽음이냐, 갱신이냐」, ꡔ비평의 잉걸불ꡕ, 17쪽
이 논쟁에 덧붙여서 「민족문학 비판담론, 그 상투적 수사학」에서 리얼리즘의 입장에서 모더니즘을 끌어안으려는 최원식의 소통론에 대해 황호덕의 비판을 소개한다. 이때 고명철은 1990년대에 실제비평을 등한시한 최원식의 문제점을 언급하면서도 민족문학의 유효성을 부정하는 황호덕의 논지를 함께 비판한다. 이러한 그의 글에서 우리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전통적 애증 관계를 새롭게 재편하려는 모색의 징후를 발견한다.
고명철은 이 책의 제 4부에서 김동윤의 「4·3소설의 전개 양상」을 메타비평 하면서 자신의 고향이자 4·3민중항쟁이 발생했던 제주도에 따스한 시선을 던진다. 고명철은 4·3문학비평의 한 단계 도약을 위해 기존에 주류를 이루었던 수난의 비극성을 알리는 ‘계몽의 서사’보다 ‘성찰의 서사’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4·3의 특수성에 매몰될 게 아니라 분단체제의 모순된 현실과 4·3과 같은 문제성을 지닌 다른 나라의 민중과 연대하는 가운데 ‘바람직한 세계문학’의 일원으로 갱신될 수 있는 비평의 문제의식”(324쪽)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5·18문학이 광주라는 한 지역에 고착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4·3문학도 지역성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는 그의 지적은 정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능하려면 단순히 문학계만의 고군분투로 끝나서는 안 되고, 정치·경제·사회 모든 측면에서 지원 사격이 이루어져야 가능하다고 본다. 이처럼 고명철은 ꡔ비평의 잉걸불ꡕ에서 역사에서 소외된 그늘진 상처에 애정 어린 시선을 던진다.
3.
ꡔ비평의 잉걸불ꡕ을 유심히 읽다보면 여기저기에서 등장하는 ‘나’라는 인칭대명사와 자주 만난다. 쓰다의 주체인 ‘나’가 토해내는 목소리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당면한 문학계의 문제를 예리하게 조목조목 비판한다. 이때 ‘나’와 비판의 대상인 ‘타자’는 대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나’의 비판적 그물질에 의해 포획된다. 여기에서 때때로 쓰다의 주체인 ‘나’의 이미지가 그가 비판한 대상처럼 엄숙주의, 견고성, 고압적 이분법을 연상시킨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러한 느낌은 “아군과 적군이 분명해야 논쟁은 논쟁다운 것이다.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을 보는 논쟁은 차라리 아니 한만 못 하다”(43쪽) “민족문학의 현실적 유효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47쪽) 있음을 피력하는 문장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비평가가 자신의 비평관을 올곧게 유지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지나쳐서 타자를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한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고명철은 주체와 타자가 공존하는 난장을, 생산적 대화를 꿈꾸는 비평가가 아니었던가.
고명철의 확고한 비평적 목소리가 오히려 부정적 측면으로 많이 나타난 것은 이 책의 2부인 소설평과 3부인 시평이다. 여기에서 그의 비평적 언어들은 소설가인 공선옥․천운영․배수아․박완서․한창훈이나 시인인 김동호․정현종․배용제․유하 등의 텍스트를 다룰 경우에도 별다른 변화 없이 하나의 톤을 유지한다. 물론 변함없는 비평가의 목소리는 있어야겠지만 그것은 세계관이지 텍스트를 다루는 방법마저도 동일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혹시 그의 장기인 비판적 글쓰기가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어 텍스트의 섬세한 읽기와 유연한 글쓰기를 방해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무엇보다도 쓰다의 주체인 ‘나’는 넥타이를 풀고 쓰다의 타자인 개별 ‘텍스트’와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격의 없는 수평적 대화를 해야 한다. 때로는 확고한 비평적 목소리도 장롱에 모셔 놓고 텍스트와 깔깔거리며 미팅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것이 주례사로 물든 해설비평과 억압적 이데올로기에 짓눌린 지도비평을 극복하고 참다운 텍스트 비평에 좀더 다가가는 첩경일 것이다.
평론가 고명철을 볼 때마다 매번 느끼는 것은 글쓰기를 향한 왕성한 정력이다. 변강쇠를 떠올리게 하는 그의 글쓰기 정력은 변함없는 신뢰를 던지게 하는 중요한 자산이다. 다만 이러한 글쓰기가 이제는 절제된 형태로 집약되었으면 좀더 좋은 성과를 낼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그는 다소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문학을 향한 활화산 같은 글쓰기는 난관을 뚫고 좀더 성숙한 비평의 숲으로 독자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메타비평뿐만 아니라 실제비평에서도 그의 독특한 아우라가 균형적으로 발산되기를 기대하며 다음 비평집을 기다린다. 아직도 이 경고 문구는 유효하다. 변방의 똥개를 조심하라!
최강민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중앙대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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