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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북-리뷰/정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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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석 연극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연구라는 이름의 연극
―김남석의 '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
정 우 숙
(희곡작가)
오태석이라는 연극인이 없었다면? 농담처럼 이 글의 서두를 열어도 된다면, 이런 어리석은 가정법 질문으로부터 글을 시작할까 한다. 희곡적 측면에서나 연출적 측면에서나 한국연극계는 지금보다 훨씬 심심한(?) 풍경을 그려 보이며 관객을 섭섭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무엇보다도 한국연극 관련 전공 연구자들의 향학열이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파내면 파낼수록 새로 꺼내고 싶은 의미로 가득 찬 마법의 연극 창고 같은 존재로, 오태석은 그렇게 자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도 객관적 연구의 출발점과 밑바탕에 주관적 애정과 이끌림의 계기가 숨어있은 경우가 적지 않지만, 특히 오태석에게 다가가는 한국연극 연구자들의 내면에는 유난히 그 매혹의 기운이 짙게 스며들어 있는 인상이다.
김남석의 새 책 또한 최근 한국연극 연구자들의 중요한 관심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태석에 대한 학문적 관심 이전에, 합리적으로 설명되기 힘든 애정과 매혹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동적이고도 틀 지워지기 힘든 애정은, 연구 과정이 진행될수록 논리와 분석의 든든한 뼈대로 바뀌어져 온 듯하다.
ꡔ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ꡕ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이 책은 오태석 연극을 고립시켜 이해하기보다 가능한 한 관련된 다른 작품들이나 주변 상황들을 고려하면서 이해하려는 의도 위에 집필되었다. 이 책의 독특하게 열린 지평은, 연구자가 오태석이라는 연구 대상에 다가가게 된 경로와 무관하지 않다. 그 길은 「오태석에게 가는 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학부 1학년 때 그의 희곡집을 읽고 세미나를 했던 경험으로부터 대학원 과정, 문학평론가로서의 등단 등 저자가 거쳐온 학문 여정에 군데군데 선명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오태석의 모습이 보인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전체 구분의 단위를 ‘막’으로 설정하고 있으며, 1, 2막과 달리 글의 묶음 층위를 하나 더 설정해야 했던 3막에선 1장에서 3장까지를 두고 있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고마운 이들에 대한 인사말에 이어 “이들의 출연과 헌신으로 3막 3장의 연극(연구) 한 편을 만들 수 있었다.”(11쪽)라고 쓰고 있듯이, 저자 스스로 이 연구를 하나의 연극으로 비유하려 한다.
이 책의 눈에 띠는 특징은 각 논고의 키워드가 제목보다 앞서 명기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적으로 오태석 희곡 연구의 핵심에 놓일 수 있는 글들을 모은 1막 ‘오태석 희곡의 미학과 맥락’의 경우에도 다섯 편 논문의 제목을 일일이 읽기 전에 ‘영화’ ‘재담’ ‘생태’ ‘차용’ ‘심리’라는 다섯 개의 핵심어부터 눈에 들어오며 그 미학의 다양한 거점을 한눈에 떠올리게 만든다. 최근 학술논문을 대상으로 정보 검색의 기능을 강화해 가는 추세와 맞물려 키워드 제시 방식이 일반적 규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기도 하지만, 그런 사정과 무관하게 보아도 이 책의 핵심어 제시 방식은 친절하고 효과적으로 보인다. 그 선명한 핵심어의 길을 따라 한편 한편 글을 살펴보기도 용이해진다.
이미 여러 형태로 그 특성이 지적되어온 부분일지라도 논의의 표제어가 무엇이 되는가에 따라 고찰의 방향과 학문적 기여도가 달라진다는 당연한 사실은 특히 이 책의 첫 번째 글 「오태석 희곡에 나타난 영화적 기법 연구」에서 두드러진다. 연극이라는 장르 안에서만 오태석을 설명하려는 편협된 틀을 벗어버리고 나니, 역진 동작(Backward Motion), 합성화면(Superimposition), 슬로우 모션(Slow motion), 동시적 몽타주(Simultaneous Montage), 프레임(Frame), 정지 화면(freeze frame), 유사(Similarity), 평행구조(Parallel Action), 미장센(mise-en-scene), 스틸 사진(Still photographs) 등 영화 분야 용어들을 빌어 「자전거」 「로미오와 줄리엣」 「부자유친」 「사추기」 「아프리카」 「운상각」 등 오태석 주요 희곡들의 기법적 특징들이 더 일목요연하고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음 글의 경우, 오태석의 대사가 전통과 맞닿아 있고 독특한 화법을 구사한다고 지적하는 데서 더 나아가 판소리나 가면극 사설을 연구하는 데 활용되어 온 ‘재담 형성원리 연구’ 방법을 끌어오는 것도 그 특징을 확연히 드러내는 데 적절하다. 그리하여 이제까지 산발적으로 지적되어온 오태석 대사의 특성은 “음담패설의 차용, 단어의 기발한 선택과 재치있는 조합, 엉뚱한 말들의 삽입과 나열, 욕설과 비속어의 거침없는 사용, 말장난의 도입, 아전인수격의 논리” 등으로 다시 정리되면서, “언어적 일탈과 자율성과 극적 전략은 재담으로 통칭될 수 있으며, 이러한 재담은 공연 장면의 구축과 성격과 역할을 조율하는 핵심적 기재로 기능한다”(69쪽)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백마강 달밤에」와 「부자유친」을 중심으로 한 「오태석 희곡의 차용 양상 연구」는 기존 연구들의 지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차용 출처의 다양성 및 복합적 변주 방식을 꼼꼼히 짚어주고 있으며, 「「자전거」에 나타난 두 심리 작용에 관한 연구」는 연구자들이 선호하는 오태석의 난해한 대표작 「자전거」를 대상으로 “화해와 불화의 이중주”(146쪽)라는 길항과 긴장의 원리를 추출해낸다.
작품 세계의 난해성에 이끌린 탓인지 연구 방법론 또한 주로 난해한 방향으로 흘러와 오태석 작품에 대한 기본적이고 편안한 논의가 드문 편인데, 이번 저서에는 다소 소박하게 소재나 주제 중심으로 오태석 희곡을 훑어본 글들도 포함되어 있어 오히려 신선하다. 1막에 실린 「한국 현대 희곡에 나타난 생태위기에 관한 연구」에서는 이강백 희곡, 김상렬 희곡, 마당극의 경우와 더불어 오태석 희곡의 경우를 살피고 있다. 그 안에서 연안해역의 오염을 다룬 「초분」, 독성 폐기물 중독을 다룬 「비닐하우스」, 핵 오염을 다룬 「아침 한때 눈이나 비」, 종 소멸을 다룬 「여우와 사랑을」, 지상에서 사라져 가는 동식물들과 인간들을 다룬 「지네와 지렁이」등이 거론된다. 3막에 실린 「오태석 희곡에 나타난 바다의 의미와 표현 기법 연구」도 바다의 이미지와 상징성을 신화적 의미와 표현 기법에 주목하여 살펴본 점은 단조로운 접근 방식이 아니나, 기본적으로 새로운 배경으로서의 바다에 착안하여 바다 소재 희곡들을 묶어 논의했다는 점에서 오태석 희곡에 다가가는 복잡하지 않은 길 하나를 틔워준 예이다.
전체적 맥락 속의 지평을 짚다보니 특히 3막 ‘오태석 작품의 좌표와 지평’에는, 그 자체로는 오태석 희곡과 직접 연관이 없는 글들도 실려 있다. 1장에서는 오태석 희곡의 바다를 살피기에 앞서 함세덕, 천승세, 정복근, 김길호 등을 대상으로 쓰여진 「어촌 소재 희곡의 상동성(相同性) 연구」가 있는가 하면, 2장의 최인훈․이강백․오태석을 묶어 살핀 「1970년대 희곡에 나타난 희생양 메커니즘 연구」에 이어서는 최인훈의 희곡 뿐 아니라 소설까지 다룬 「최인훈 문학에 나타난 희생제의 연구」, 이강백의 70년대 희곡을 대상으로 한 「군중과 권력의 상관성 연구」가 실려 있다. 3막 3장에는 「계유정난의 연극적 형상화에 관한 연구」라는 같은 제목의 연속 소논문 두 편이 실려 있는데, 그 중 한 편은 이현화의 「카덴자」를 중심으로 한 글이다. 또 다른 한편의 논문 안에서야 유치진의 「사육신」, 김상렬의 「길」과 함께 분석되는 오태석의 「태」를 만나볼 수 있다. 이와 같은 3막의 특성에 대해 저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3부는 오태석의 극적 위상과 연극적 지도를 그리기 위해 고안된 논문들이다. 바다와 관련된 작품의 흐름을 점검하는 와중에 오태석이 있었고, 70년대 현실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희생양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중심에도 오태석은 있었다. 석사 논문으로 구상했던 계유정난의 연극적 수용에도 오태석은 중요한 거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많은 극작가들과 연출가들을 살피면서 그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오태석을 엿보는 형식으로 논문을 썼다.(9쪽)
오태석을 직접 다루지 않은 관련 소논문들까지 넓은 관련성의 맥락 안에서 볼 수 있게 한 저서의 전체 구도는 이렇게 저자의 분명한 의도에 따른 독특한 장점이기도 하나, 독자에 따라서는 얼마간 어색한 편집으로 받아들일 염려도 있지 않나 싶다. 3막에 있어서 오태석 희곡 자체를 논의에 포함시킨 글과 그렇지 않은 글로 표나게 장 구분을 해준 후 그 안에서 키워드들이 겹쳐 나타나게 편집해주는 것도 다른 한 방법이 되어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지금과 같은 글의 배열 방식을 따른다 해도, 글 자체의 제목이나 다른 표시 방법을 통해 어떤 글이 오태석 희곡과 관련된 것이고 어떤 글이 오태석 이외의 희곡에 대한 것인지 한눈에 들어오게 목차를 시각화해 주었더라면, 저자의 깊은 의도가 더 선명하게 살아날 수 있지 않았을까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편 1막이나 3막과 달리 연극 비평을 묶은 2막 “오태석 연극의 여백과 질감”은, 독자 입장에서 학술 논문 읽기의 긴장감을 잠시 늦출 수 있는 중간 쉼터처럼 자리하고 있지만, 오태석을 이해하기 위한 길로서의 중요성은 만만치 않다. 2001년 셰익스피어 공연을 결산한 「한국인 셰익스피어를 위하여」는 공연에 따라 그 힘의 비중이 어느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가에 따라 원작 해석의 방법, 연출가, 연기자 중심으로 셰익스피어 공연들을 묶어 비평하고 있다. 글의 소목차는 ‘절충의 「태풍」과 해체의 「한여름밤의 꿈」, 오태석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이윤택의 「햄릿」, 권성덕의 「베니스의 상인」과 김석훈의 「햄릿」’으로 틀 지워지고, 이 틀 안에서 2001년 「로미오와 줄리엣」은 원작과의 관계나 연기자에 앞서 연출가 오태석의 색깔이 두드러지는 공연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역시 2001년 오태석의 주요 연출작인 스미즈 쿠니오 작 「분장실」에 대한 비평 「일본 연극의 낯선 잔영 속으로」도 같은 시기 한국에서 공연된 일본 관련 연극들의 지형도 안에서 오태석 연출의 특성을 부각시켜주는 글이다.
2막 중 「자연에 대한 외경심-오태석과 환경 연극」은 1막 「한국 현대 희곡에 나타난 생태위기에 관한 연구」와 대응되며 각각 ‘자연’과 ‘생태’라는 핵심어를 앞에 내세우고 있고, 「우리말의 수호자, 오태석」이란 글은 1막 「공연 언어의 재담 형성원리 연구」와 대응되면서 각각 ‘언어’와 ‘재담’이라는 핵심어를 앞에 내세우고 있어, 유사한 관심사를 다룬 무거운 글과 가벼운 글을 연결시켜 읽는 기회도 제공받을 수 있다.
잠시, 수록된 글의 배열을 놓고 부분적으로 아쉬운 점을 지적하긴 했지만, 한국 현대극 관련 연구자들이나 오태석 연극의 관객들 앞에 이 책은 분명 반가운 하나의 지도이다. 저자가 「자전거」를 분석하는 데 활용한 이중성의 쌍들을 흉내내 본다면, 이 책은 오태석에 대한 학문적 연구인 동시에 에세이식 서술의 기미도 내비치고 있고, 중요한 극작가에 대한 객관적․합리적 고찰인 동시에 매력적인 연극인에 대한 변형된 팬레터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이 책은, 다시 인용하거니와 저자 스스로 서문에 밝혔듯이 ‘3막 3장의 연극(연구)’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이다. 오태석 연극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연구라는 이름의 또 다른 연극 한 편이랄까.
정우숙
1964년생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희곡집 ꡔ푸른 무덤의 숨결ꡕ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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