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1호 북-리뷰/서동인
페이지 정보

본문
영원한 사랑의 시학과 가짜를 풍자한 진실의 언어
서 동 인
(시인)
배인환 시집
ꡔ라라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고ꡕ
리토피아 발행, 값 7,000원
배인환 시집
ꡔ라라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고ꡕ
리토피아 발행, 값 7,000원
눈물은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원초적인 물질이다. 이러한 눈물은 가장 고귀한 생체험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배인환의 시집 ꡔ라라는 블라디보스트크로 떠나고ꡕ(이하 ꡔ라라ꡕ)에 수록된 거의 모든 시들은 ‘눈물’의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사별을 통한 ‘눈물’의 이미지가 시집 전체를 관류하고 있다는 것은 시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크게 자리매김하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눈물의 이미지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의 표출이요, 영원한 사랑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배인환의 ꡔ라라ꡕ는 영원한 사랑의 시학이며, 눈물의 시학이다. 그러하기에 이 시집은 기교나 꾸밈이 없이도 애잔한 미학을 이끌어내고 있다. 사후 세계로 떠나는, 그 세계로 떠나보낸 아내와의 이별의 절절함이 거의 전편에 용해되어 흐르고 있기에 그 절절함은 ꡔ라라ꡕ라는 시집 속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읽는 이의 가슴에까지 전이되고 만다.
시인이 시집 ꡔ라라ꡕ의 ‘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아내와 영원한 이별”을 경험하면서 시인은 ‘영원한 이별’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 ‘영원한 이별’이라는 무게를 감내하면서 쓰여진 ꡔ라라ꡕ에 실린 시들은 별이 되어 우주로 떠난, 살아 생전 시인에게 우주 같은 존재였던 아내와의 간절한 의사 소통의 언어로 보여진다. 시의 행간마다 드러난 이별의 고통은 눈물과 그리움이 뒤엉킨 사랑의 시학으로 변전되고 있다.
예컨대 시인은 「아내에게․1」라는 시에서 떠나버린 아내의 존재를 ‘나무’ ‘숲’ ‘바람’이라는 존재의 변용을 시도하다 급기야 “바람보다/숲보다/나무보다/더 높은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를 “우리들의 귀한 시간”과 “숱한 사연”이라고 얘기하면서 지나온 삶의 궤적 속에 함께 걸어온 생의 모습을 반추해 내고 있다.
이러한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의 통한은 반복되어 나타난다. 가령, “선고는 10초/한 사람의 생명을 10초에/9개월 치료하고 뱉은 말이었다” (「영원한 이별」)는 아내를 향한 죽음에 대한 선고, 그것도 단 10초 만에 내리는 비정한 ‘말’들이 꿈틀대고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시인의 혈압을 200으로 올려놓고 만다. 그러나 시인은 아내를 사랑하기에 이별을 허락하고 싶지 않다. “만남과 이별/이별할 수가 없어 따라가고 싶다/그러나 아내도 내가 아니다./나는 무엇인가?/우주란 무엇인가?”에 드러나듯이 아내를 “따라가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내도 내가 아니”기에 따라가지 못 하는 냉엄한 현실 속의 ‘나’라는 존재를 인식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그 안타까움은 최고조에 다다르고 만다. 그러하기에 떠나야 하는 ‘아내’와 살아있는 ‘나’의 존재의 차별성을 느끼면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시인은 아내와의 동행을 허락하지 않은 ‘우주’ 본원의 속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죽음’을 통해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을 강요하는 우주의 속성이 시인에게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오래되고, 또한 근원적인 수수께끼이며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과 종교의 중심과제인 생과 사는 벗어날 수 누구나 한 번은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이것은 또한 자연의 냉엄한 질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내를 떠나보내는 시인의 애절한 사랑의 추구는 이러한 질서마저도 무너뜨리고 싶어진다. 아내를 떠나보낼 수 없는 통한의 흐느낌은 다음 시에서도 확인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왜 땅을 파고 묻는지/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그냥 그렇게 하니까 그런가보다./싫증이 나도록 죽음의 향기를 맡고 싶은데/빨리빨리 서둘러야 한단다.//머리에 있던 피가 심장으로 내려와/상황 파악이 안 된다.//할 수만 있다면/나도 저 구덩이에 묻히고 싶다.
―「땅을 파고 묻으며」 전문
아내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떠나보낼 수 없는 시인은 “할 수만 있다면/나도 저 구덩이에 묻히고 싶다”고 처절한 심정을 토로한다. 사자(死者)가 안주할 공간인 ‘구덩이’에 같이 묻히고 싶은 그 심정은 아내에 대한 영원한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집 ꡔ라라ꡕ의 후기에서 시인은 “인생을 다시 살라고 권한다면, 고개를 흔들겠다.”라고 말하면서도 “그러나 만일, 사별한 아내와 같이라면, 실패한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다.”라면서 아내를 향한 못다한 사랑에 대한 회한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떠나버린 아내와의 끊임없는 의사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
얼마나 눈물을 흘려야/그대에게/눈물로 강을 만들어/바다를 만들어/배를 띄워/노를 저어갈까!
―「눈물의 강」 중에서
하루하루/이렇게 속절없이 편지를 씁니다./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견딜 수가 없습니다.
―「편지」 중에서
종이 학을 접어/그리움을 실어 공중에 날립니다.
―「영종도」 중에서
부정하다가도/은사가 짊어진 평생의 화두/나는 무엇인가?/011-784-6250/오늘도 부질없이 돌려본다.
―「011-784-6250」 중에서
시인은 「눈물의 강」에서 이별에 대한 통한의 눈물로 강과 바다를 만들어 배를 띄우고 싶어 한다. 그리고 「편지」에서는 아내에 대한 의사 소통의 행위로 속절없이 편지를 쓰고 있다.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고 종이학을 접어 그리움을 날리기도 하고(「영종도」), 급기야 이미 받지도 않는 아내의 휴대전화 번호를 누르기도 한다.(「011-784-6250」) 떠나버린 아내와의 의사소통을 원하는 시인의 애절한 심정은 다음 시에서도 확인된다.
이 겨울에/아파트 거실에서/커피잔을 들고/당신이 즐겨보던 일출을 보며/당신 사진 앞에 앉아/무언의 대화를 합니다.
―「별이 된 당신」 중에서
「별이 된 당신」에서 보여주듯이 시인은 사진 속의 아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내를 떠나보냈지만 영원히 떠나보낸 것이 아니다. 가령 “내 패스포드에는 당신의 사진이 있고/당신의 영상은/일초도 나를 떠난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혼자 산책을 해요」)에 그려지듯이 비록 혼자이지만 시인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예컨대, “어찌하여 사람은 평생을 사랑해야 하는가요!/짐승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만이/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을 짊어지고 살아야 하나요?”(「새들과 짐승」 일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아내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역설이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아니 사랑할 수밖에 없기에 죽음보다 더한 형벌로 받아들이는 애절한 심정의 토로, 이러한 정황을 통해 볼 때 시집 ꡔ라라ꡕ에서 드러난 배인환 시인의 아내와의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 아니다. 시인 스스로가 그러한 상황을 결코 허락할 수가 없기에 아내를 향한 사랑의 시학은 영원히 지속되리라.
고정국의 신작 시집 ꡔ서울은 가짜다ꡕ는 가짜가 판치는 세상과 세태에 대해 풍자의 형식을 빌어 메스를 깊숙이 들이대고 있다. “하늘나라 고관대작의/밀실 서랍에서/슬쩍해 온//수입산 발모촉진제를/사람 몰래/뿌리는/봄//경칩녘 대머리오름/화색 벌써/푸르다” (「봄비」 전문)에 드러나듯이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봄의 전령은 ‘봄비’마저 생명을 발아시키는 진짜 ‘봄비’를 뿌리지 않고 수입산 발모촉진제를 뿌려댄다. 그것도 “하늘나라 고관대작의 밀실 서랍에서 슬쩍”했다고 하지 않는가. 어쨌든 경칩녘에 푸른 것은 대지가 아니고, 대머리오름이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 봄비에 머리 빠질 걱정하는 사람들의 화색이 ‘벌써 푸르다’니, 이는 곧 풍자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시인의 풍자는 한 시대의 어두운 역사의 일면을 자연물의 울음으로 변조시켜 재음미하기도 한다. 가령 “그때 그 물고문 당하던/사내처럼/저렇게/운다.”(「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1-황소개구리」)에서 보여주듯이 “물고문당하던 사내”와 황소개구리와의 조금은 낯선 비유를 통해 우리 시대의 서글픈 역사를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자연물의 울음을 통한 풍자는 계속된다. 가령 “천왕사 소쩍새가/날음식에 맛을 들여//밤하늘 멸종 위기/전갈성좌를 넘보다가,//큰스님 면전에 대고/소쩍소쩍/말대꾸한다는……”(「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2-소쩍새」), “낭설처럼 피었다 지는/산딸나무/창백한/꽃잎//순전히 딴세상 어투의/法名 하나가/내려진다”(「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3-밤뻐꾸기」)등의 시편에서 타락한 종교적 세태에 대해 자연물인 새들의 울음을 통해 해학이 가미된 풍자적 고발을 시도하고 있다. 이 자연물의 울음소리는 모두 다 <밤에 우는 것들>이다. 밤은 곧 어둠의 지속이다.
즉 시인은 시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밤에 우는 자연물을 통해 해학과 풍자를 통해 성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이기도 한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려고 하지만 어쩌면 미물로 생각되는 소쩍새, 밤뻐꾸기보다 더 못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연물 연작시는 ‘피리새’와 ‘청개구리’의 울음으로 변조되기도 한다.
비 오면 하루벌이로/한 끼니를 때운다는//장님 안마사가 젖은 지폐를 헤아릴 때//누군가 지붕에 올라/깨진 피리를/불고/있었다
―「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4-피리새」 전문
혹시 그 개구리마을/개구리소년이 돌아왔는지//백주에 생트집 같은/개망초 개화가 멎고//달빛도 나무도 마을도/청개구리/소리로/운다
―「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6-청개구리」 일부
장님 안마사의 한을 달래는 피리새의 곱디고운 울음 역시, 이 시대 어둠의 장막을 가르는 소리다. 피리새의 울음은 대금산조보다 더 기막힌 소리가 묻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시에서 피리는 깨진 피리다.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는 불구적인 소리로 울고 있는 처절한 울음소리. 시인은 자연물의 변조를 통해 하루하루 끼니를 연명하는 현실 세계에서 자칫 소외되기 쉬운 장님 안마사의 슬픈 현실을 폭로, 풍자하고 있는 것이다.
‘청개구리’의 울음 역시 풍자의 울음이다. 미궁에 빠진 개구리 소년 사건을 풍자하고 있는 이 시는 모두가 청개구리 소리로 운다고 단언하고 있다. 청개구리 울음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은폐된 사회에 대한 풍자의 울음인 것이다.
시집 ꡔ서울은 가짜다ꡕ에서 시인이 성토하는 서울을 향한 풍자의 울림은 길게 이어진다. 이 풍자의 울림은 모순된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서울은 어떤 의미인가? 자본의 중심지이며, 물질 획득을 위한 치열한 싸움의 현장이다. 서울은 물욕에 눈 먼 위선자들이 얼치기 판을 짜나가는 곳으로 비춰지기도 하며, 온갖 거짓이 난무하기도 한다. 시인은 이러한 우리 시대 서울의 현실을 예리하게 풍자하고 있다.
가끔씩 죄 짓는 맛에/이 세상은/살만/하다며//저마다 죽자 사자/돈줄 따라/뛴다는/서울//다국적 가발 쓴 꽃들이/검은 강에/내린다.
―「패러디 인 서울․2-검은 강」 전문
부정 부패가 난무하는 곳, 온갖 범죄와 비리의 온실인 서울에서 사람들은 돈에 눈이 멀고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외국 자본이 밀려오는 현실 속에 자생하는 우리 것이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다국적 가발 쓴 꽃들이” 서울을 상징하는 한강, 즉 검은 강에 내린다고 풍자적 조어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풍자는 반복되고 있다.
육백 년 도읍지에/군용담요를/뒤집어 깔고//남산과 북한산이//짜고 치는 화투판 같다//번번이 ‘광값’만 챙기는/총재님도/가짜만 같다
―「패러디 인 서울․2-우리 총재님」 전문
군사 독재 시절을 상징하는 시어인 ‘군용담요’, 그 담요를 무늬만 뒤집어 그 위에서 짜고 치는 화투놀이가 시인의 눈에 비치는 서울이며, 우리의 정치 현실이다. 서민의 생활은 안중에도 없는 정치인들, 당리당략을 앞세우고 제 살길만 모색하는 물욕과 명예욕에 눈이 어두운 정당의 총재를 “광값만 챙”긴다고 픙자한 시인의 시선은 진짜가 아닌 가짜에 대한 강한 어조의 냉소로 읽혀진다. 이러한 정치 현실에 대한 풍자는 “우러러 눈도장 찍던/해바라기/등돌려/피면//기우는 황실 근처/난개발성 가건물마다//서둘러 創氏改名한/문패들을/내건다”(「패러디 인 서울․4-창씨개명시대」)에서 드러나듯이 저속한 정치인들의 삶에 대해 시인은 강한 풍자의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한편, 시인은 “줄줄이/개민들레 시대/낙/하/산/타고/내리는구나”(「패러디 인 서울․8-낙하산 부대」)를 통해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엉킨 사회 현실을 폭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개민들레”는 가짜를 상징한다. 주지하듯이 우리말에서 ‘개’는 진짜가 아닌 가짜를 나타내는 접두사다. 앞서 살펴본 시인의 시에서 개망초(「밤에 우는 것들에 대하여․6-청개구리」)가 등장하여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고 있듯이, 귀화식물인 개민들레와 개망초는 주변에 다른 식물들을 자라지 못 하게 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무서운 번식력과 생명력을 지닌 이런 개민들레와 개망초로 인해 농작물은 시들고 종국에는 개망초, 개민들레의 세상이 되어버린다. 시인은 가짜가 난무하는 시대적 현실을 ‘개민들레’를 빗대어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가짜가 난무하는 시대적 현실에 대해 강한 냉소와 풍자의 언표를 던지지만, 도시 서민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의 시선을 지니고 있다. 가령, “사지관절 삐걱이는/달동네 행 차창 밖으로//봉제공장 야근부에/코피 같은 도장을 찍은//공순이 고단한 눈빛이/감실/감실/거린다.”(「패러디 인 서울․7-누이」)에 그려진 가난한 도시 여성 노동자의 삶을 애잔하기만 하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 처절하게 생활과 싸워나가는 여성 노동자가 “코피 같은 도장”을 찍는 현실을 시인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인이 가짜를 맹렬히 풍자하면서도 살맛나는 세상을 염원하는 진실의 언어로 시적 진정성을 추구하기 때문이리라.
서동인
2002년 ≪리토피아≫로 등단
한국방송통신대 강사
- 이전글11호(2003년 가을호) 제3회 리토피아인터넷청소년문학상 입상자, 대상 작품 05.02.20
- 다음글11호 북-리뷰/김진하 05.02.20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