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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를 내면서/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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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호를 내면서
이 지독한 시대에 새로운 상상력은 가능한가?
희망이 없는 삶은 죽은 삶과 마찬가지이다. 너무도 많이 들어 이미 익숙한 말이지만,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독한 절망을 몸으로 체험하게 만드는 이 땅에서 우리는 희망 없이 부표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희망 없이 살아간다고 해서, 그런 삶이 평안한(?) 자조적 삶이 아니라는 데 있다. 모두들 너무도 바쁜 일상에 허덕인다.
직장인들은 10년에 10억 벌기에 정신이 없고, 정치인들은 (언제나처럼) 남 탓하기에 바쁘며, 언론은 그런 정치인을 욕하기에 바쁘다. 수능이 끝나면서 (당연하다는 듯이) 몇이 자살을 했고, 학원과 학교는 서로를 탓하기에 바쁘다. 한가닥 희망을 지니고 출범했던 노무현 정권은 미국과 재벌에 아부하면서 지지자들을 멀리했다. 어디에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이민 열풍이 불고 있겠는가. 한국에서 산다는 것은 이처럼 대단한 인내와 고통을 필요로 한다. 제정신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힘든 나라가 한국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인가? 술 소비량이 세계 최고인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과연 이 땅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술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현실에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한가닥 위안을 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답답한 현실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꾸도록 해주는 예술을 리토피아는 추구한다. 현실이 너무나 초라하고 고통스럽기에, 역설적으로 우리의 희망은 점점 더 커져가며, 그런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리토피아는 새로운 상상력을 꿈꾼다.
이번 호 특집 ‘청계천, 새로운 상상력을 흐르게 할 수 있는가?’는 이런 바람에서 나왔다. 우리는 청계천 복원 공사가 청계천 복개공사처럼 정치논리에 의해 밀어붙이기식으로, 그런 작업의 명수인 이명박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청계천 복원이 생태학적 관점에서 서울을 새롭게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에서 지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청계천 복원이 단순한 역사적 유물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팽팽한 물질적 욕망이 덮어버린 청계천을 다시 살려내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를 우리는 갈구한다.
「‘다양화’를 통한 ‘상징적 풍요로움’은 가능한가?」에서 시인 백인덕은 서울을 소재로 한 여러 시들을 통시적으로 관찰하면서 결국 서울이 서구 도시의 문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으로 인식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청계천을 다룬 최승자와 유하의 시를 예로 들면서 청계천이 포근한 기억으로, 문화의 거리로 살아났다고 보았다. 연극평론가 김남석은 「무대 아래로 흐르는 청계천의 상상력」에서 청계천의 역사와 희곡의 역사를 동시에 탐험하면서 각 시대 양자의 변화양상을 매우 소상히 탐구하였다. 더불어 그는 청계천 복원이 “감정을 정화하고 미학을 다듬고 삶의 느낌을 제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영화평론가 강성률은 「문제는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이다」에서 한국영화에 나타난 청계천의 양상을 사적으로 살펴본 후 “주류 영화와는 전혀 다르게 청계천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폐허, 숨을 쉬다>”에서 새로운 상상력의 한국영화를 기대했다.
‘이 시간의 한국문학’을 다룬 초점에서는 박상륭의 소설과 최서림의 시를 다루었다. 박상륭의 사상을 니체로 풀어낸 김성균의 「신을 죽인 자의 행로는 왜 쓸쓸했을까?」는, 어렵기로 소문난 박상륭의 소설을 죽음, 유일신, 초인의식으로 평한다. 특별히 독자들의 열독 부탁드린다. 최서림의 시를 다룬 진순애의 「이서국에서 풍자국으로」는 최서림의 시가 지니고 있는 변모 양상을 무척이나 평안하게 추적해 나간다.
이번 호 리토피아가 초대한 젊은 시인은 누구보다도 개성적인 시를 쓰고 있는 이영주이다. 「닫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낯선 풍경들」에서 박남희는 “의미시와 의미를 파괴하는 해체시의 중간에서 시적 공간을 창출”해내고 있는 이영주의 시 세계를 날카로운 촉수로 짚어 나갔다.
문화산책에서는 이번 호부터 「원작이 있는 영화」 코너를 연재한다. 영미권․불어권․한국어권의 영화 가운데 소설이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원작과 비교하면서 해석하는 이 코너는, 그 동안 외국 문학을 등한시했던 리토피아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첫 회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ꡔ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ꡕ와 엘리아 카잔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비교하였다. 이 글에서 이주연은 매카시 열풍 때문에 냉혹한 상황에 처해 있던 미국의 영화계에서 이 영화가 원작과 어떻게 다르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매우 실증적으로 분석한다. 이 코너를 통해 우리는 문학과 영화의 행복한 만남을 꿈꾼다.
자생적 담론으로 예술의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리토피아는 이 지독한 현실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 기만적이고 독선적인 현실에서 우리는 더더욱 예리한 시각으로 현실을 분석하고 해석하면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상을 욕망할 것이다. 그것만이 지금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같이 갈 독자들의 변함없는 관심 부탁드린다.
―강성률(영화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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