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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특집/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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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아래로 흐르는 청계천의 상상력
김 남 석
(문학평론가)
1. 문화적 원류로서의 청계천
지금 서울은 청계천을 살리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청계천을 덮고 있던 도로를 뜯어내고, 그 자리에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과 시민들의 휴식 공간을 만들겠다는 포부와 기대로 가득하다. 생각보다 교통 불편에 대한 민원이나 생계권 박탈에 대한 항의도 적은 편이고, 주변 상가나 주거 지역에서 제기되는 불만이나 반발도 크지 않은 것 같다. 이것은 청계천 복원을 우리 모두가 필요로 했다는 심증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청계천은 당초의 예측대로 우리 곁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선전 광고에서 그려진 것처럼 푸른 하늘과 예쁜 건축물과 아기자기한 주변 조형물을 거느린 하나의 낭만적인 쉼터가 될 전망이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논점은 장담하기 힘들다. 청계천이 물리적․자연적 생태 환경이 아닌, 인문학적 혹은 예술적 상상력의 원류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비근한 예로 한강을 보자. 한강 주변을 정리하고 둔치를 만들어 시민 공원으로 제공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인근 주민들이 한강에 나가 시원한 물줄기를 보면서 더위를 식히거나 마땅한 데이트 코스를 정하지 못한 연인들이 손을 잡고 주변을 걷기도 한다. 최근에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 달리기를 하는 사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으로 한강 주변은 북적이고 있다.
그러나 어떤 시(詩)에서도 새로 정비된 한강과 그 주변 공간이 상상력의 원천으로 작용하여 성공을 거둔 예를 보지 못했다. 어떤 소설에서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으로 한강 둔치가 묘사된 것을 찾지 못했다. 기껏해야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은밀한 만남의 거처로 제공될 뿐이었다. 그것도 정작 인상적이고 중요한 만남은 한강의 자연적 모습을 간직한 상류에서 촬영되는 것을 확인하곤 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었던 한강이고 심혈을 기울여 정비한 한강이지만, 그 한강은 인문학적 상상력의 중요한 원천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주변 예는 청계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문화란 인간을 둘러싼 환경에서 자양분을 얻어 시간과 열정의 힘으로 자라나는 일종의 정신적 나무이다. 인문학적 혹은 예술적 상상력은 그 나무의 싹과 같다. 상상력이 제대로 발현되어 올곧고 튼실한 싹을 틔워야만, 우람하고 건실한 문화의 나무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한강이 우리 문화의 중핵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은 상상력의 싹이 거처할만한 환경적 토양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문화적 감각과 정서, 사고 체계와 미학, 현실 인식과 대응 방식과 밀착되지 않고 한강은 흘러가고 있다.
이 글은 청계천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희곡적 혹은 무대적 상상력을 점검함으로써 앞으로 청계천이 우리 문화의 어떤 역할과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청계천이 아름다운 우리의 주변 환경으로 재생되는 것에 반대할 명분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나 역시 청계천이 맑고 깨끗한, 그 이름 그대로 정비되어 삭막한 서울 위에 정감과 온기와 평온을 실어나르는 물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학과 연극과 영화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기를, 흐르는 물줄기 위에서 피어난 상상력의 씨앗이 문화계 전반에 골고루 퍼져 우리 문화의 중요한 원천으로 자리 잡기를, 우리의 정신적 수준과 문화적 감각을 고양시키고 자연에 대한 외경심과 인간에 대한 우호감을 선양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정작 이러한 경지에 올라왔을 때에야, 우리는 청계천을 제대로 복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글은 그렇지 못했던 과거 100년의 한국 연극을 돌아보고 그 한계를 통해 미래를 향해 작은 한 발 내딛겠다는 목표이자 다짐에 다름 아니다.
2. 하천 소멸, 도시 재앙, 그리고 혼란
오영진의 「정직한 사기한」은 1949년 5월에 발족한 연극학회가 주최한 제 1회 남녀대학연극경연대회(10월 18일부터 23일까지)의 참가작으로 정치대학이 시공간에서 공연한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단막극으로 짧은 상황을 통해 당대 사회나 현실 풍경을 풍자할 의도를 지니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매우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청계천에 대한 언급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무대)
둘로 나뉜 넓은 양실. 두 방은 도어로 서로 통한다.(중략)사무실이라기보다는 응접실 같은 설비이다. 막이 열리면 관리인과 사장과 사원 갑․을․병․정이 복도로 해서 하수 출입구로 등장. 제각기 보따리를 하나씩 들었다.
관리인 (창을 열어 붙이며) 자아 보십쇼. 이만큼 넓고 큰 방이 그리 쉬웁갑쇼. 거기다가 사무도구꺼정 그냥 고스란히 어디 한 곳 빈틈이 있으며, 손질할 데가 있습니까? 본래가 우리 삘딩은 무역회사나 외국 사람들 상대로 했기 때문에 의자 하나에 이르기꺼정 소홀치 않습네다.(중략) 남향 창이 탁 트이구 또 저 복도의 창꺼정 열어놓고 계시면 오뉴월 복절에도 세상 더운 줄 모른답니다.
사원 정 신문광고엔 한강이 뵌다드니, 청계천두 안 뵈네요.
관리인 헤헤…… 아씨, 이리 좀 와 부세요. 글쎄 지금으로부텀 30년 전 우리가 이 집을 지었을 땐 시퍼런 한강이 바루 눈앞에 흘렀던 것이 저놈의 삘딩이 턱 가루막어 놓지 않았습니까?
―오영진 「정직한 사기한」, ꡔ오영진 전집ꡕ 1, 1989, 107면(강조:인용자)
지리적으로 볼 때, 건물이 한강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다면 실제로 청계천을 볼 수 있는 지역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인용문에 나오는 ‘청계천’은 의미 없이 지나가는 표현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단편적인 언급을 통해 희곡 속에 나타난 ‘청계천’의 의미와 이미지를 따지는 작업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에서 등장인물의 간단한 언급은 제법 의미심장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높은 스카이라인을 이루면서 올라가는 빌딩군이 인간의 주거 환경을 파괴하는 일등 공신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빌딩의 건설이 건물의 용적률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환영받던 시절이 있었다. 부의 상징이고 근대화의 상징으로 치부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건설과 확장은 인간의 기본적인 환경이 개선되지 않을 때는 진정한 발전과 성장의 지표가 될 수 없다.
관리인은 ‘시퍼런 한강’이 내다보이는 풍광 좋고, ‘남향 창’으로 인해 살기 상쾌한 곳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아마 이것은 그가 말하는 것처럼 30년 전에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리고 30년 전만 못 하다는 그때 역시 지금(2003년)보다는 훨씬 나았을 것이다. 그런 주위 경관과 기본 환경이 도시화, 산업화에 의해 급속도로 파괴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위의 상황이 설정되었으며, 그때보다 더욱 악화된 지금의 시각에서 도시화, 산업화로 인한 폐해는 더욱 선명하게 인지된다. 다시 말해서 ‘청계천두 안 뵈네요’라는 농담은 이 시대에서 더욱 뚜렷하게 그 의미를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청계천’의 의미를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겠다(이러한 해석이 침소봉대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바이지만, 빈약한 문화적 자원과 문학적 기호를 탐색한다는 면죄부를 안고 시도할 생각이다). 이 희곡의 상황을 40년대에서 50년대로 넘어가는 시기라고 간주하면(이것은 발표 시점을 참고한 것이다), 이미 청계천의 상황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청계천은 일제 강점기에 이미 ‘불결과 재난과 가난의 상징’이었다. 천변은 빈민가와 색주가, 우범지대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청계천은 오물과 폐수로 인해 악취를 풍기는 버려진 하천에 불과했다. 일부 구간은 복개되었으며 전면 복개만이 유일한 대안으로 인식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이것은 도시 기반 시설이 충분히 확충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의 과대 팽창과 인구의 고도 밀집 여파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차별적 정책과 편파적 시각에 의해 소외된 결과였다. 서울 시민들에게도 청계천은 더 이상 맑은 물이 흐르는 생활 주거지가 아니었다. 가려지고 감추어져야 할 기피 대상이었다. ‘청계천두 안 보인다’는 말 속에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조적 인식이 담겨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청계천을 쓸모없는 것으로, 그리고 눈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길래 (맑은) 한강은커녕 (쓸모없는) 청계천도 여기서는 볼 수 없다는 농담이 가능했던 것이다.
훼손된 자연 환경일망정 여기(빌딩으로 설정된 무대)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것은 한편으로 우리 마음속의 훼손된 풍경을 말하기도 한다. 「정직한 사기한」은 수준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사회를 보는 비판 정신이 담겨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측면이 있다. 오영진은 위조 지폐범 가족의 사기 행각을 통해 혼란에 처한 사회의 일각을 조명한다. 정직한 사람과 사기꾼이 제대로 구별되지 않고 진짜와 가짜의 분별이 모호한 극중 상황을 그려내어, 옳고 그름과, 가치 있고 없음이 혼재된 세상의 모습을 옮겨낸다. 그리고 세상의 혼란을 조장하고 이용하고 때로는 그 혼란에 피해를 당하는 인간들의 마음을 표현하려 한다. 이것은 오염된 세상이고 질서의 혼란이다.
그 혼란은 자연의 이법이 무시되고 경제와 이윤의 논리가 득세하는, 세상과 내면의 문제와 상통한다. 즉 빌딩과 같은 고층건물과 위조지폐 같은 돈의 가치는 우선시하되 깨끗하고 안온한 자연을 멀리했던 인간의 이기심이 빚은 혼란이라는 점에서, 청계천을 파괴하고 그마저 볼 수 없도록 만든 도시의 재앙과 다를 바 없다. 평범한 대사이지만 위의 대사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사린 이기심과 그 여파 그리고 재앙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위의 언급은 결코 단편적이지만은 않다.
3. 작품 내부로 흐르는 청계천
아무리 찾아도 해방 이전의 희곡에서 청계천에 대한 본격적 언급이나 격식을 갖춘 배경 설정 사례는 찾아지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이미 박태원의 「천변 풍경」이나 허윤석의 「실락원」 같은 작품이 산출되었지만, 희곡에서는 그 자취나 흔적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청계천의 상상력은 유치진에게 있었다.
1953년 여름, 나는 그 지긋지긋했던 피난살이를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어느 누군들 전쟁을 안 겪은 이가 없고 피난 생활을 맛보지 않은 이가 없었겠지만 나 역시 지나간 3년이 마치 30년도 더 되는 느낌이었다.
피난 중인 1951년 늦은 가을, 중공군이 밀려난 지 한 반년쯤 지나서 나는 어떤 일로 서울을 찾아왔었다. 그때, 폐허가 된 시가에는 부서지다 남은 굴뚝이 혼나간 사람처럼 우뚝우뚝 서 있었고,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만이 쓸쓸히 뒹굴 뿐, 사람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던 용산 근방의 뒷골목 같은 데는 대낮에도 혼자 지날 수 없을 만큼 으슥하고 음산하였다. 우리 문화의 보금자리였던 서울을 우리만 살겠다고 내다 버려두고 간 것이 죄스럽게 생각되기도 했다. 나는 남대문에서 동대문으로, 동대문에서 마포로 온종일 돌아다녔다. 그렇게 넋을 잃고 돌아다니다 보니, 정든 서울에 대해서 얼마간 속죄가 되는 듯도 싶었다.
―유치진 ꡔ동랑자서전ꡕ, 서문당, 1975, 275면
유치진은 북한군의 일차 서울 침공에서는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 살아야 했다. 그 시절 그는 여차하면 죽을 결심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이 재차 침략당했을 때는 고향 통영으로 피난을 떠나 일종의 은거 생활을 했다.
위의 진술은 피난 생활에서 돌아온 1951년의 행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즉 1951년 가을에 유치진이 서울을 다녀갔다는 진술이 끼어든다. 그는 서울 거리를 배회한 듯하다. 특히 남대문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중심로와 마포 쪽 사정을 소상히 살핀 것 같다.
이러한 배회와 관찰은 훗날 하나의 작품으로 정리된다. 그의 눈에 포착된 서울은, 인간들의 이기심으로 파괴된 문화의 터전이었다. 그 안에서 꽃피워야 할 것들을 잃어 버린 쓸쓸한 문화의 유적이었다. 이러한 문화적 상실감을 담아, 6.25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이 「한강은 흐른다」이다.
이 작품은 연구자들 사이에서 유치진의 후기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히곤 한다. 또 유치진이 록펠러 재단의 후원으로 해외 시찰을 다녀온 이후(1956년 6월부터 약 1년) 그 축적된 경험과 문화적 충격을 집적한 작품으로 간주되며, 60년대 무렵 활발하게 전개되는 사실주의에 대한 저항과 이탈의 연극적 흐름(혹은 수정 사실주의)의 선두에 서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사실 이 작품의 수준은 기존의 평가를 밑돌고 있다. 그러나 연극사적 의의나 변모 과정상의 징후로 인해 주목을 요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는데, 나는 여기에 청계천의 상상력을 도입한(비록 주변적이긴 하나) 최초의(내가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작은 꼬리표를 하나 달아두고 싶다.
(환경)
수도 서울을 재침한 공산군이 UN군에게 격퇴당한 지 얼마 안 된 1951년 4월초, 아직 추울 때.
시가전으로 폐허화된 서울은 바리케이트, 가시 철망 등에 묻혔고, 공산군이 버리고 간 각종 포, 탄피는 물론, 시체까지도 노변에 방치되어 있다. 이것들을 치우지 못할 만큼 아직도 전선은 바쁜 것이다. 노변 가옥들은 모두 파괴되었고 성한 집일지라도 탄흔을 입지 아니한 데가 없다. (중략) 이 연극은 서울 동대문시장 부근에서 벌어진다. 당시 서울 장안은 인적이 끊어져 있어 명동거리일지라도 대낮에 지나다니기가 무시무시했고, 종로 네거리조차도 호젓했다.
그러나 동대문시장 부근만은 제법 사람이 많았다. 장이 섰기 때문이다. 이 장은 잔류 서울 시민들의 유일한 생명천이었다. 혹자는 이 장에 의거해서 돈벌이를, 혹자는 이 장에서 장을 봐 먹음으로써 그 생명을 부지했기 때문이다.
―유치진 「한강은 흐른다」, ꡔ동랑 유치진 전집ꡕ 3, 서울예대출판부, 1993, 314면(강조:인용자)
서울은 폐허의 도시로 변해 있다. 그러나 한 곳만은 다르다고 유치진은 무대 환경을 설정한다. 그곳은 동대문시장 부근이다. 동대문시장이 청계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두 지역은 지리적 연접성을 가지고 있으며 지형적으로 상호 의지하는 형세이다. 무엇보다도 유치진은 동대문시장을 하나의 강으로 비유하고 있다.
‘잔류 서울 시민들의 유일한 생명천’이라는 표현은 몰려드는 인파가 마치 서울을 이끄는 강처럼 보인다는 속뜻을 깔고 있다. 이것은 인접한 청계천의 흐름을 보고 유추한 비유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무대의 배경으로 청계천이 직접 제시된 것은 아니며 위의 무대 설명이 관객들에게 말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극작가 유치진의 마음속에서 설계된 「한강은 흐른다」는 파괴된 서울이지만 그 안을 관류하는 재생의 의지를 물의 흐름(인접한 청계천과 결국 이어지는 한강)에 비유하고 있음을 작품의 내부에서 인식할 수 있다.
동대문시장은 그러한 활기와 약동을 느낄 수 있는 지역으로 선택된 것이다. 이것은 자서전에서 살펴본 대로 1951년 서울을 방문했을 때의 유치진의 감회와 인상을 펼쳐놓은 것이다. 서울이 비록 문화적인 폐허로 전락했지만 생에 대한 의지로 재건의 싹이 돋아나는 지역이 동대문시장이었다. 동대문시장은 이웃한 청계천과 그 주변으로 밀려드는 사람의 인파가 모여드는, 파괴된 서울의 심장에 해당한다.
동대문시장은 서울의 도심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뻗은 잘 정비된 종로나 을지로와는 딴판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청계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서울의 분주한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상품들이 이합집산하고, 생산작업도 이루어지는 도심의 이색적인 경제지대라고 할 수 있다.
―오유석 「청계천과 동대문시장」, ꡔ청계천ꡕ, 서울학연구소, 2001, 121면
현재의 동대문시장 상권은 광장시장을 비롯하여 평화시장, 동대문종합시장, 그리고 소위 서부상권으로 불리는 거평프레야, 두산타워, 밀리오레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을 지칭하지만, 6.25전쟁 직후의 동대문시장은 광장시장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원래 광장시장은 단층 245칸, 함석지붕 53칸의 한옥지대였다. 해방 이후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6.25전쟁의 와중에서 전소되었다. 시장 신축이 이루어진 것은 1955년 무렵이었고 1,2,3차 공사를 거쳐 오늘의 광장시장으로 정비되었다. 당시 청계천변은 여전히 한옥가옥이 차지하고 있었기에 광장시장은 한때 초현대식 건물로 간주되기도 했다.
유치진의 「한강은 흐른다」는 1958년 9월 극단 신협에 의해 공연되었다. 유치진은 1951년에 목격한 동대문 인근 지역의 인상과 동대문시장의 활성화와 정비(1955)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대를 구상한 것으로 여겨진다. 광장시장이 재건되기 이전의 시장에서 촉발된 상상력은 경제의 중심으로 자리 잡으면서 삶의 원초적 생명력을 간직한 공간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은밀하게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치진이 제시한 무대 배치를 보자. 그의 무대 배치는 동대문시장의 지리적 상징성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구조를 따르고 있다.
(무대)
ㄴ자로 된 한길. 하나는 동대문 시장으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새 페인트칠을 한 매춘굴로 통했다. 이 두 한길에 끼인 반 파괴된 옥상이 있는 벽돌 이층 건물과 이 두 한길 건너편에 선 양식 목조건물과 한국식 가옥.
―유치진 「한강은 흐른다」, ꡔ동랑 유치진 전집ꡕ3, 서울예대출판부, 1993, 315면
길이 중앙에 놓여있다. 이 길은 서로 다른 속셈을 가지고 대립하는 인물들이 이동하는 공간이고, 엉뚱한 운명으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이 걸어야 할 행로이며, 그럼에도 면면히 생의 의지를 이끌어 가야 할 피난민들의 길이다. 마치 강물의 흐름(이 작품의 제명은 ‘한강은 흐른다’이다)을 담아 놓은 것처럼 무대를 상징화했다.
‘흐름의 미학’은 장면의 전개 방식에도 나타나고 있다. 유치진은 지문의 형식을 빌어 이 작품을 공연할 때에 주의해야 할 점을 밝히고 있다.
(주의)
이 연극의 연출은 되도록 단일장치로서 막 대신에 조명과 음악을 사용하여 막간 없이 진행되었으면 한다. 만일 막간을 설정할 경우엔 제10경의 끝에 둠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막간은 제15경 끝에도 둘 수 있을 것이다.(작자)
―유치진 「한강은 흐른다」, ꡔ동랑 유치진 전집ꡕ3, 서울예대출판부, 1993, 314면.
이 작품은 22경으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되도록 막간 없이 진행해 달라는 주문은 처음부터 이 작품을 일련의 흐름을 담지한 작품으로 집필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22개의 각기 다른 장면을 무리 없이 이어 붙여, 마치 도도한 장면의 물결처럼 구성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작품의 구조에도 ‘흐름의 미학’을 삼투시켰음을 의미한다. 비록 청계천이 물리적 배경으로 등장하지 않고 대사를 통해서 언급되지도 않지만, 이러한 내외적 설정은 작품의 의미와 이미지에 청계천의 상상력(더 나아가면 한강의 상상력)이 발현된 경우로 확신하게 만든다.
4. 무대 위로 드러난 혼란의 다리
청계천의 전면 복개안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해는 1935년이다. 청계천은 본래 조선조부터 근심의 대상이었다. 집중호우와 유입되는 토사 그리고 하천 퇴적물(하수도로 사용되었음)로 인해 범람의 위험을 안고 있었고, 천변 지역에 형성된 주거촌은 비위생적인 시설로 인해 위생과 치안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는 존재였다.
이러한 문제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증폭된다. 청계천은 한양(경성)을 남북으로 가르며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이다. 이로 인해 서울은 북촌과 남촌으로 가름되었다. 조선조의 가름에서 북촌은 남촌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신분상으로나 경제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높은 위상을 가진 사람이 북쪽에 살았고 이로 인해 주거 환경과 기반시설이 북쪽 위주로 조성되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면 북촌과 남촌의 상징적 경계는, 북촌 조선인가(朝鮮人街) 대 남촌 일본인가(日本人街)의 경계로 전이된다. 일본인들은 청계천 이북으로의 상권 확장과 세력 점유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남촌 지역에 대단위 주거 시설과 경제 구역을 건설했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남촌에 집중적인 투자를 했다. 이로 인해 기존의 격차는 오히려 반대로 나타나게 된다.
특히 청계천 일대에 대한 정비를 고의적으로 소홀히 했다. 북촌에 인접한 천변은 개발과 정리의 시야에서 외면된 채 버려졌고, 위험시설 방치와 밀집된 인구 밀도로 인해 당시 사회의 우범지대로 전락했다. 청계천은 불결과 재난의 상징이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복개 구상안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구상안은 병참기지화를 위한 서울의 역할 변모와 연관되며 고가도로 건설안까지 함께 논의되었다.
30년대에 논의되고 40년대에 확정된 청계천 전면 복개안은 전쟁에 휩싸인 일본의 사정으로 인해 완료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복개된 구간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광통교 구간의 일부에 불과했다. 그 후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청계천은 더욱 우범지대로 변했다. 밀려드는 인구로 인해 천변의 인구는 더욱 늘어났고 그에 합당한 기반 시설의 확충은 거의 일어나지 못했다. 청계천 양안은 값싼 집과 피신처 그리고 임대료 없는 장사를 원하는 사람들의 차지였고, 그로 인해 범람․전염병․치안 문제는 더욱 증폭되었다. 청계천의 문제가 불거지면서 복개가 재개된 시점은 1958년이다
오학영의 「심연의 다리」(ꡔ현대문학ꡕ 1959년 11월 발표)는 해방 후에서 전면적 복개가 시행되기 바로 직전의 청계천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먼저 배경 설정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해 보자.
때:炎熱盛夏의 어느 날
곳:서울
(무대)
장마가 지나고 지금은 폭양이 내리쬐는 伏 허리. 날카로운 햇빛이 눈부시게 맑은 서울의 캬바레, 바아, 다방 등 유락장이 즐비한 거리. 앞뒤에 고층건물이 잠자듯 직립해 있는 그 한 구석에 낡은 일본식 가옥이 하나.
무대는 이 가옥의 내부 거실이 구성 중심이 되고 이 가옥 뒤에 말쑥한 캬바레 ‘響尾蛇’가 있다.
가옥 내부의 장치는 일본식 주택에서 흔히 발견되는 다다미방과 흡사하다. 거기 2인용 침대가 하나 있고, 그 앞에 화장대와 거울이 설비되어 있다. 방의 뒷면은 창이 있고, 그 밖에 캬바레의 철층계와 저편쪽 빌딩의 굴뚝과 빨래가 걸려있는 빨랫줄이 보인다. 왼편에 주방과 목욕실이 있고 문 옆에 검은 헝겊을 둘러놓은 현순 親父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방 왼편은 통문이 없이 그대로 마당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마당에는 재목과 낡은 궤짝이 널린 대로 있다. 퇴락한 집 밖을 나서면 작은 개천이 있고 거기 낡고 퇴색한 다리가 있다. 그 앞에 표목이 하나 서 있는데, 거기에 붉은 페인트로 아주 서툴게 ‘注意 건너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다. 이 개천과 일본식 가옥은 불길한 전설이나 지난 듯 우울한 경색을 이루고 있다.(밑줄:인용자)
―오학영 「심연의 다리」, ꡔ꽃과 십자가ꡕ, 현대문학사, 1976, 14면(강조:인용자)
무대는 천변에 인접한 일본식 가옥이다. 개천(開川)은 자연 상태의 하천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작용에 의해 변형된 하천을 가리킨다. 공간적 배경이 서울임으로, 이 집에 면한 개천은 청계천이거나 혹은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지류 혹은 세천일 것이다. 청계천은 북악, 낙산, 인왕산 그리고 남산(목멱산)에서 흘러드는 물이 만나 동류하다가 중랑천을 만나 한강으로 빠져나가는 하천으로 당시 서울의 개천은 모두 청계천과 연관되어 있었다.
청계천이 서울을 수평으로 가르기 때문에 근간 도로는 동서로 배치되었으며 그 세류가 남북 방향으로 합류하기 때문에 인접 소로는 남북 방향으로 설치되었다. 위의 무대 설명을 보면, 거리에 서울의 캬바레․바․다방이 즐비하다. 이것은 청계천의 본류를 따라 조성된 색주가나 술집 거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청계천을 따라 수평으로 이어진 종로나 을지로(일제시대 황금정)의 번화한 거리를 연상시키는 지문도 엿보이고 있다. 이것은 앞뒤로 늘어선 고층건물에서 찾을 수 있다. 천변의 앞뒤에는 북촌과 남촌의 거리를 따라 전통적인 번화가와 신번화가(일본인이 조성한)가 나름대로 펼쳐져 있었는데, 위의 설명은 이러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정리하면 「심연의 다리」의 공간적 배경은 청계천 본류의 천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며 그 앞뒤로 번화해 가는 서울의 모습이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물리적 배경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정신 이상에 가까운 세 사람의 심리 상태를 그리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그들의 심리 상태는 낙후된 물리적 공간처럼 시대에 뒤떨어진 상태로 남아 있다. 그들은 변화하는 시대의 조류에 끼지 못하고 뒤에 남아야 하는 소외자의 운명을 보여준다.
또 그 개천을 건너는 다리를 통해 그들 사이에 단절된 내면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가족적 유대감을 가지고 하나의 집단을 구성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서로 분리되어 있으며 상대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이라면 응당 요구되는 기본적 덕목과 윤리와 질서조차 지켜지지 않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여 있으며,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복잡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는 개천을 통해 나누어진 지형과 확실한 길잡이가 되지 못하는 다리의 상징성으로 형상화된다.
「심연의 다리」의 등장인물은 네 사람이다. 그 중 네 번째 인물인 ‘여자’는 오브제의 역할을 함으로, 능동적인 인물로 간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오는 인물’을 소개하는 난에도 세 사람의 이름만 적혀 있다. 현순은 무경의 남편으로 죽은 아버지의 유훈을 따르며 천변에 있는 집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이다. 그는 유순한 편이고 마음의 갈등을 겉으로 표출하기보다는 이를 무마시켜 분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소심한 인물이다.
반면 무경과 현웅은 다르다. 그들은 대담한다. 무경은 남편을 속이고 시동생인 현웅과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현웅은 이러한 관계를 대담하게 밝히고 싶어하는 이상 심리를 드러내고 있다. 두 사람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현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정체된 자신들의 상태를 일탈적으로 넘어서고자 하는 대담한 욕구를 내보인다.
그러나 두 사람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무경이 현웅을 잘 달래어 현순을 남편으로 현웅을 연인으로 삼고 있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현웅은 다혈질의 기질을 드러내면서 현재의 상태를 타파하려는 파괴적인 욕구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래서 현순이 버젓이 집에 있음에도 무경을 애무하고, 나중에는 현순을 공격하여 쓰러뜨리고 그 앞에서 무경과 대담한 정사를 벌인다.
현순 역시 정상적인 심리 상태를 보이지 않는다. 그는 암시적인 대사를 통해 현웅과 무경의 관계를 알고 있음을 내비치기도 하고, 죽은 아버지의 유훈에 집착하며 공연한 고집을 부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또 하나의 문제적 인물이 다리 앞에서 서성이는 여자이다. 그녀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고 무대 위의 등장도 단편적으로 처리되고 만다. 그러나 그녀의 대사는 의미심장하다.
여자 (실신한 사람 같다. 천천히 다리 앞에 서서) 건너지 마시오? 흥, 이 다리야말로 건널 수 없는 심연의 다리인가? (입을 삐죽이며 도로 나간다)
여자의 등장은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나타난다. 그 때도 여자는 실성한 모습으로 다리의 주의문을 읽고 의미심장한 중얼거림을 남긴다. 그 중얼거림은 현순과 무경 그리고 현웅의 상황을 요약적으로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무대의 다리는 인간들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심연 위에 놓여 있지만 그 위로의 통행 즉, 의사소통과 상호신뢰는 불가능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그 불가능성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나 철학적 이해를 구하기는 힘들다. 이 작품은 하나의 연극적 상황을 상징적인 오브제와 결합하여 암시적으로 복선화시키는 데에 묘미가 있을 뿐, 그 묘미를 통해 인간의 내면과 사회의 문제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얻기는 어렵다. 이것은 작품의 완성도와 구성이 처음부터 미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 현실적 기류와 분위기를 후대에 제대로 감지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서 청계천과 관련시켜 되새겨보아야 할 것은, 버려지고 외면되던 청계천(혹은 그 지류)이 무대의 후면에 등장했으며 그 위로 놓인 다리가 상징적인 기호로 쓰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불결과 가난과 위험과 소외의 상징인 청계천과 그 천변 유역,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풍경이 의미적 맥락을 이루면서 무대 위로 현현되었다고 판단될 사항이다. 청계천의 상상력은 당시 민중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갈등과 문제를 체현하는 일종의 문화적 약호였다. 어쩌면 이것은 청계천이 당시 민중과 작가들에게 심어놓은 보편적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5. 복개 하천 위의 오염된 세상
청계천 복개가 시작된 시점은 1958년이다. 이 해 6월부터 60년 4월 사이에 광교부터 청계천4가 주교까지의 핵심 공간이 복개되었으며, 1979년 11월에 이르면 주교로부터 마장교까지의 복개가 완료된다. 오태석은 두 작품에서 이러한 청계천 대해 언급한다. 하나는 1973년 2월 까페 떼아뜨르에서 초연된 「약장사」이고, 다른 하나는 1990년 10월 극단 목화에 의해 충돌극장에서 초연된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이다. 먼저 「약장사」를 보자.
예 이놈, 너 바다 건너서 왔구나. 네 얼른 청계천으로 가 그전 수표다리(水標橋)밑이 어디쯤 되느냐고 묻거라. 물으면 길 복판에 뚫린 구녕을 가르쳐 줄 테니 남 보지 않는 새에 얼른 타고 내려가서 수표선생을 찾고 엎드려 절하면, 계가 여기를 어딘 줄로 알고 왔소, 꼭 이렇게 물으실 테니 청계천 하수구 밑으로 안다느니 냄새가 고약하다느니 천장으로 차가 지나간다느니 그런 말 쑥 빼고 큰기침을 하고 눈을 사르르 감고 이리 하거라.(중략)어서 쉬지 말고 배우거라. 얼굴이 곱다 화색이, 태도 곱다 월화선이, 줄풍류 봉하운이, 노래 으뜸에 추월이, 만당춘광(滿堂春光)에 홍연이, 적하인간(謫下人間)에 강선이, 봉래방장에 염주선이, 색 즐기는 음덕이, 행주기생에 차질예, 뽕짝에 고도고 잘 한다 팔등신 왜랑이, 모두 나서 줄줄이 늘어서 열아홉 달포 만에 너 썩어서 나온다는 청계천 밑구녕만 쳐다보고 섰다더라.
―오태석 「약장사」, ꡔ초분ꡕ, 현암사, 1979, 177~178면
오태석의 「약장사」는 일인극이다. 약장사 역의 배우가 등장하여 입심 좋게 재담을 늘어놓고, 나중에 약을 파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인용된 대목은 약장사가 늘어놓는 재담 중 한 토막이다. 약장사는 자신의 부친이 ‘기생방 출입하는 격식’을 가르치고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수표 선생’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서 끄집어낸다. 수표 선생이 부친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수표 선생이 기생방을 출입하는 격식을 가르칠 수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수표 선생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오태석은 청계천의 복개된 풍경과 복개 전 이 지역의 상징성에 대해 언급하게 된다. 그는 수표교 근방에 유곽과 기생집(색주가)이 많았음을 기화로, 수표다리 밑을 ‘기생방 드나드는 법’을 배울 수 있는 장소로 상정한다. 그의 논리대로 하면 수표다리는 기생방 출입 격식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들이 은거한 곳이다. 더 이상의 논리적 맥락을 찾기는 힘들지만(「약장사」는 일관된 스토리나 잘 짜여진 구조를 보이는 작품이 아니다), 이러한 언급은 청계천에 대한 잃어 버린 향수를 되새기게 하는 귀중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또 복개 전후 무렵 서울 시민들이 청계천을 보는 시각의 일단을 확인시키는 단서이기도 하다.
그 다음, 오태석의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심청이」로 약칭)는 80․90년대의 동대문시장을 공간적 배경으로 채택하고 있어, 청계천이 복개된 이후 달라진 공간적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차용하게 된다.
「심청이」는 투신한 심청이가 세상으로의 외유(外遊)를 결정하면서 시작된다. 용왕은 현실의 어지러움을 고발하는 신문을 보다가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나갈 것을 결심한다. 그의 결심은 질서가 무너지고 기준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일종의 참견이고 비판으로 작용한다. 심청이와 용왕이 당도한 곳은 서울이고, 그 서울 중에서도 물건(프라이팬)을 파는 좌판이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돈을 소매치기 당할 뻔하고, 정세명이 이를 구해준다. 그러나 정세명은 소매치기의 보복으로 불구자가 된다. 그 다음 장면에서 불구자 정세명이 장사를 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은 동대문시장이다.
톱질 골목.
톱날 세워주는 가게가 늘어선 동대문시장 골목. 정세명이 키 낮은 바퀴 달린 좌판대를 앞세우고 악어 모양 기면서 나타난다. 좌판대에는 수세미, 하수구 뚫기대 같은 하찮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톱날쟁이 구인수가 하수구 뚫기대 골라잡고 대거리를 한다.
―오태석 「심청이는 왜 두 번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 ꡔ오태석희곡집ꡕ 2, 평민사, 1994, 16면
일제 강점기의 중요한 상권은 을지로 일대였다. 을지로․충무로․남대문․명동 일대에 형성된 상권이 서울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고, 청계천변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상권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청계천변에 시장의 활기가 찾아온 시기는 해방 전후였다. 그 뒤 급격한 인구이동과 이촌향도 현상이 가중되고 6.25 직후에는 월남 인구 역시 증가하면서 청계천변의 인구는 급증했다. 값싼 무허가 도심 주거 지역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노점상들이 청계천변 시장의 기능을 담당했다. 이들은 서울의 대표적인 판자촌 밀집 주거지인 청계천변의 환경에서 성장했다. 6.25를 겪으면서 이 지역으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 물품과 공구 장비가 유입되면서 이 노점상들 중에서 공구들을 취급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노점상들이 청계천 공구상가의 효시이다.
이들 노점상들은 뚝방길 안쪽 하천 쪽으로 경사진 둑 위에 나무로 돌마루 모양의 좌판을 설치하고 그 위에서 물건을 팔았다. 천변 판자 주거촌과 연속선상에 위치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점상들이 안정된 권역을 유지하게 된 계기는 1958년 이후 광교 하류의 청계천 복개와 1961년 광교―오간수교 사이 도로공사였다. 폭 50미터, 길이 500미터 도로가 하천을 덮고 도로 양쪽에 보도시설이 만들어지면서, 뚝방 안쪽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뚝방 너머 길가 주택 쪽으로 진출했고 차츰 자금이 축적되면서 천변의 주택들을 세 내거나 구입하면서 상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공구상가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송도영, 「청계천 공구상가의 형성과 일상적 관계망」, 앞의 ꡔ청계천ꡕ참조)
오태석이 위 장면의 공간적 배경으로 선택한 곳은 공구상가의 골목을 연상시킨다. 청계 3가에서 4가 일대, 조금 넓히면 삼일고가로에서 배오개길에 이르는 거리에는 기계 공구를 파는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이 거리는 좁고 어둡고 외관상 깔끔하지 못한 인상을 풍긴다. 오태석이 공간적 배경으로 묘사한 톱질 골목 역시 마찬가지이다. 밝고 세련되고 정돈된 인상을 주는 무대가 아니라, 음성적인 이미지의 무대를 요구한다.
공구상가의 음성적인 이미지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공구상가는 비공식적 물건을 거래하면서 호황을 누리고 그 세를 확장한다. 대표적인 물건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공구들이었다. 월남전 이후에는 월남을 거쳐 국내로 유입된 제품도 상당했다. 일제 말기에는 공장들을 뜯어내고 처분된 물건이 유통되기도 했다. 상인들의 증언을 참조하면,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도 모르고 사고파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것은 적법한 절차를 밟지 않고 물건을 유통하고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공물건을 무단 거래했기 때문이다.
오태석은 이러한 음성적 이미지를 정세명의 생존 공간에 투여하고 있다. 정세명이 생존해야 하는 공간은 대낮에도 음침한 느낌을 자아내는 어두운 골목을 닮아 있다. 또 톱날같이 위협적이고 금속성 물체처럼 차가운 시장의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이 안에서 정세명은 조금씩 파멸해 간다. 「심청이」는 정세명의 파멸 과정을 보여주는 일련의 삽화로 짜여져 있다. 소를 키우던 농촌 총각이 소를 잃고 실의에 빠지게 된 삽화, 남을 돕기 위해 나섰다가 불구자는 되는 삽화, 친구의 꼬임에 넘어가 화염병을 제조하다가 화상을 입는 삽화, 유원지에서 인간 타켓이 되어 고초를 겪는 삽화, 접대부들을 고용해서 어촌 마을을 돌며 장사를 하다가 물에 빠지는 삽화 등이 그것이다.
오태석은 이러한 삽화를 통해 정세명이 당하는 고초와 현실의 잘못된 모습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 현실의 문제를 각성시키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무감각한 동시대인들의 죄책감과 문제의식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물로 뛰어드는 심청의 선택을 제시한다. 물속 세계가 문제가 해결된 세상의 미래에 해당된다면, 산적한 문제로 가득한 세상의 은유가 음침한 동대문시장 공구 골목이다.
이 공간은 정세명이라는 착한 인물이 몰락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기능을 하는 동시에,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혼돈과 몰락의 징후를 상징하는 역할도 부여받는다. 청계천 어림에 위치하며 대낮에도 음침한 인상을 주는 시장 골목을 무대의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암울한 오늘날의 사회를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 공간은 복개된 청계천으로 인해 의미심장한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깨끗한 물이 흐르던 청계천은 심청이가 투신한 바다처럼 정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인간들의 이기심이 증폭되면서 정화의 기능을 잃고 더렵혀진다. 사람들은 하천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겨 버렸다. 그러나 이기심과 더러움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문제점이 감춘다고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이제 세상은 덮고 있던 것을 드러내어 그 안에서 썩고 있는 문제를 도려내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 청계천 되살리기 운동은 이러한 측면에서 현실과 자신을 보는 새로운 시각일 수도 있다. 아니 그래야 할 것이다.
6. 청계천의 진정한 복원을 위하여
청계천을 찾아 희곡 작품을 헤매던 여행을 마무리할 때이다. 작업을 못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미진함이 나를 괴롭힌다(이윤택의 「일식」이나 이문열의 「여우사냥」도 간접적으로는 청계천의 상상력에 포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만 여정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경계 신호도 들려오고 있다. 우리 희곡에서 청계천을 정면으로 다룬 예는 없는 것 같다(아직 확신은 하지 못하겠다. 누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알려주었으면 한다). 그러다 보니 청계천의 상상력을 주변부로 파생시킬 수밖에 없었고, 그 위에 혹은 그 밑에 만들어진 광장시장과, 공구시장과, 천변의 풍경과, 단편적인 언급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말로 하면 상상력의 확장이고, 시니컬하게 말하면 ‘가져다맞추기식’ 해석이다. 그 과정에서 무리한 설정도 있었던 것 같고, 본질을 간과한 부분도 있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 과대 해석된 측면도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필자의 실책으로 언제든지 질책받을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과 준비해야 할 것이 명확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연극적(적어도 희곡적)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청계천은 없었다. 우리에게 청계천은 빨리 눈앞에서 치워버려야 할 더러운 하천에 불과했으며 토지 이용률을 높이기 위한 무관심한 복개 대상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떠나보냈던 청계천을 불러오려 한다. 일부의 불만이나 항의는 주변적인 혹은 절차상의 문제에서 파생된 것이지, 근본적인 회의를 제기한 경우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질적으로 혹은 심리적으로 청계천을 다시 필요로 하고 있다고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
여기서 꼭 점검해야 할 사항은 그 필요가 과연 편의 위주의 발상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생활수준이 나아지고 깨끗한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유행처럼 만들어진 또 하나의 청계천 파괴 행각이 아니냐는 점이다. 우리는 숙고해야 한다. 진정으로 청계천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를. 저녁을 먹고 개를 데리고 산책할 코스로서의 청계천이 필요한 것이라도 이유로 부족하지 않다. 밝고 쾌적한 데이트 장소를 원하는 것이라도 이유가 안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라면 꼭 청계천을 우리 앞에 현현시킬 필요가 있을까. 또 그렇게 현현한 청계천이 과연 우리의 필요와 요구의 전부일 수 있을까.
우리 앞에 드러나지도 않은 청계천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우스운 말일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희곡과 연극 속의 상황을 보면 청계천의 복원은 예술적 상상력과 감수성의 제고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할지도 모른다. 지금의 상태, 그대로라면 말이다. 청계천이 복원되어야 하는 문화적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보물에 가까운 다리를 복원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청계천은 인근 주민과 서울 사람들의 정서와 미학과 삶을 실어 나를 수 있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감정을 정화하고 미학을 다듬고 삶의 느낌을 제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복개된 청계천처럼, 아니 다시 단장한 한강 둔치처럼, 말쑥하지만 우리의 문화와는 그다지 관련 없는 인공 지형물 하나를 늘린 꼴이 될지도 모른다.
김남석
․1973년 서울 출생
․199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등단
․저서 ꡔ오태석 연극의 미학적 지평ꡕ
․현재 고려대, 한경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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