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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특집/강성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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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881회 작성일 05-02-2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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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이다
―청계천 복원과 한국영화에 대한 단상―

강 성 률
(영화평론가)


1. 바람 부는 날이면 청계천에 갔다
15년 전 촌놈인 필자가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너무도 크고 넓은 서울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었다. 서울의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 2호선을 타고 한바퀴 돌기도 했고, 마구잡이로 시내버스를 잡아타고 종점까지 가면서 서울 경치를 구경하기도 했다. 그때 필자는 재수를 하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나면 서울 구경도 하고 외로움도 달랠 겸 자주 갔던 곳은 종로였다. 지금은 영화의 중심이 강남으로 넘어갔지만, 그때만 해도 강남은 영화 불모지였으며, 영화가 1번지는 역시 종로 3가였다. 현재 복합상영관 공사를 하고 있는 단성사나 피카디리 극장, 건너편 서울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곤 했다. 낡고 오래된 시설이 불편했지만, 지방보다 일찍 개봉작을 보는 즐거움은 무엇보다 컸다.
고등학교 때부터 1주일에 두 편 이상의 영화를 보았던 버릇은 서울에서 재수하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필자는 그때 아세아 극장에 처음 가 보았다. 주윤발이 한창 인기를 끌던 당시 주윤발, 유덕화 주연의 <정전자>(왕정, 1990)를 보기 위해서였다. 연인들이 많은 종로와 달리 철물점이 주로 자리 잡고 있는 청계천, 그곳에 있는 아세아 극장은 호감이 가는 극장이 아니었다. 종로에서 청계천으로 난 세운상가를 따라 가면서 어둡고 탁하고 꺼림칙한 분위기 속에서 생각했다. 도대체 극장주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극장을 지었을까 하는 생각. 영화는 현실성보다는 낭만성이 다분한 매체인데, 그것을 보여주는 극장이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나는 청계천에 있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 웬만한 영화라도 아세아 극장에서 개봉하면 굳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필자의 기억 속에서 아세아 극장은 지워졌고, 정말로 얼마 지나지 않아 아세아 극장은 문을 닫았다.
필자에게 청계천에 대한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별 호감이 가지 않는 곳. 청계천과 한 블록을 사이에 두고 같은 방향으로 뻗어 있는 종로, 을지로, 퇴계로, 충무로에 대한 거부감은 상대적으로 적다. 특히 종로는 젊음의 거리로 각광 받는다. 거기에 비해 종로와 을지로 사이에 있는 청계천은 철저히 소외되어 있다. 마치 가서는 안 되는 거리처럼 음습한 곳이 청계천이며, 더군다나 밤의 청계천은 더더욱 그러하다.
청계천에 대한 필자의 감정이 호감으로 바뀐 것은 군대에 다녀온 뒤부터였다. 흔히들 그렇지만, 예비역이 되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게 된다. 3년 동안 ‘박박 기면서’ 세상의 냉혹함을 맛본 필자는 연인으로 출렁거리는 종로가 긍정적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필자의 발걸음은 청계천으로 옮겨졌다. 기분이 울적하거나 공부가 잘 안 되는 날이면 청계천에 나가 헌책을 사거나 황학동을 둘러보곤 했다. 거기에는 종로와는 또 다른 삶의 활기가 있었다. 오래된 책을 사거나 낡은 LP를 보거나 각종 생활 중고품을 보면서 생활의 다른 면을 발견하곤 했다. 낭만이 생을 배부르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 필자의 청계천 순례는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다. 어느덧 종로보다 청계천이 더 편안한 장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2. 영화 속의 청계천, 그 다양한 스펙트럼
두루 알다시피, 청계천은 도심을 흐르는 냇물이었다. 북악산과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궁궐을 지나 청계천을 거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푸른 냇가라는 뜻의 청계천(淸溪川)은 그러나 푸른 날이 많지 않았다. 도성의 온갖 썩은 것들이 청계천을 통해 흘렀고, 청계천 주위에는 거지들이 모여 살았다. 일제 시대에는 청계천을 경계로 일본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이 나누어졌다. 청계천 북쪽의 종로 지역을 북촌, 청계천 남쪽의 을지로, 명동 지역을 남촌이라고 해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상권과 생활권이 완전히 나누어져 있었다. 일제 초창기, 영화가 조선에 도래될 때 화려한 극장은 주로 남촌에 있었다. 북촌에는 단성사, 우미관, 조선 극장 같은 극장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그렇게 청계천은 경계였다,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지어 주는.
청계천이 복개를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였다. 그러나 강 전체를 복개한 것은 박정희 시기였다. 1950년대 말부터 조금씩 진행되던 복개공사는 근대화를 내세운 박정희의 파쇼적 밀어붙이기로 1970년에는 완전히 지하로 묻히게 되었다. 청계천에 살던 빈민들은 성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 사람의 시체를 먹는다는 둥 흉흉한 소문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아갔고, 대신 청계천에 자리 잡은 것은 근대화의 상징인 삼일 빌딩과 세운상가, 그리고 청계 고가도로였다. 당시 최고의 부가가치를 누렸던 청계천은 그러나 10년도 지나지 않아 쇠퇴하기 시작했다. 강남 개발에 밀린 청계천은 어둡고 낡고 지저분한 곳으로 바뀌었다. 가끔씩 시간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산책로와 같은 공간이 되었다.
영화 속에 구현된 청계천 역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 일제, 해방 직후, 복개 직후인 1970년대, 낡기 시작한 1980년대 청계천은 각기 다르게 보이지만, 많은 경우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일제 시대에는 거지들의 소굴로, 해방 직후에는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1960년대에는 어린 직공들의 고통스런 삶의 현장으로, 1990년대 이후에는 시간이 정지해 버린 과거의 공간으로 그려졌다.
이제 청계천이 영화에 재현된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복개된 시간의 흔적을 정확히 되짚어보기 위해 복개 전, 복개 중, 복개 후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먼저 복개 전의 청계천 모습을 알 수 있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제 시대에 촬영된 200여 편의 영화 가운데 지금 필름으로 남아 있는 영화가 거의 없는 실정이기 때문에, 당시 빨래를 하고 물놀이를 했다는 청계천의 모습은 아쉽게도 볼 수가 없다. 해방 이후 복개 전까지인 1960년대까지도 청계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는 별로 없다. 가족 희극 같은 영화에서도 단지 서울 거리를 보여주는 풍경으로 잠시 등장했을 뿐이다. 따라서 청계천 자체에 어떤 의미를 두고 만든 영화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청계천이 복개되고 난 후 세트로 청계천을 재현해서 촬영한 영화이다.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은 그런 영화 가운데 대표적인 영화이다. 김두한(박상민 扮)이 주먹패로 들어가기 전 그는 청계천 거지패로 떠돌아 다녔다. 수표교 아래가 그의 잠자리였다. <장군의 아들>은 일제 시대 분위기를 재현하기 위해 종로 거리를 사실적으로 세팅했는데, 청계천의 모습도 꽤나 사실적으로 다루었다. 영화에 나타난 1930년대 청계천은 거지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다리 밑에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그것도 엄격한 위계질서를 갖추고 있는 곳이었다. 김좌진 장군이 죽은 후 의지할 곳 없이 거지로 떠돌았던 김두한에게 청계천은 최후의 안식처면서 동시에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고픈 곳이었다. 결국 그는 그곳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전쟁 고아들이 대거 양산된 1950년대 청계천 역시 같은 이미지의 장소였다. 가급적 벗어나고픈, 그러나 결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장소로서의 청계천의 이미지는 계속 되었다.  
노동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박광수, 1995)은 1960년대 후반, 1970년을 다루고 있다. 주무대는 청계천 평화시장이다. 뿌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전쟁 같은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을 영화는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작업량을 맞추기 위해서 하루 16시간 이상 작업을 해야 했지만, 수입은 아주 하찮은 소녀들의 생활을 통해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묻고 있다. 수출 위주의 정책은 실적 위주의 정책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되니 자연스럽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무기로 해외에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름 없는 10대 소녀들의 목숨을 담보로 한 채 노동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법을 알게 된 전태일(홍경인 扮)은 결국 분신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자본가에게 경고한다. 이 영화 속의 청계천은 죽음의 공간이다. 도무지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노동이 존재하는 공간으로서, 결국 죽은 뒤에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다.
청계천이 복개되기 전의 모습을 다룬 영화도 그리 많지 않은데, 청계천이 복개되는 과정을 다룬 영화가 많을 리 없다. <오발탄>(유현목, 1961)은 거의 유일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남긴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가족의 모습을 다룬 이 영화에 희망이라고는 없다. 어머니는 미쳐버리고, 여동생은 양공주가 되었고, 재향 군인인 남동생은 강도가 되었으며, 애를 낳던 부인은 죽어 버렸다. 이제 가장은 어디로 갈 것인가? 미친 노모가 있는 집으로? 부인이 죽어 있는 서울대병원으로? 남동생이 잡혀 있는 중부서로? 그는 갈 곳이 없다. 이토록 암울한 영화에 등장한 청계천이 밝을 리 없다. 재향군인 철호(최무룡 扮)는 취업도 되지 않고 미래도 불투명한 것을 비관하면서 한국은행을 털기로 한다. 친구와 함께하기로 했지만, 밖의 차에서 망을 보던 친구는 총소리에 달아나 버린다. 현금을 자루에 가득 담아 나온 철호는 뒤쫓는 경찰을 피해 복개공사가 진행 중인 청계천 지하로 내려간다. 경찰은 계속 총을 쏘아대고, 무거운 현금을 든 철호는 대응하면서 도망간다. 공사가 진행 중인 청계천은 어둡다. 여기저기 기둥이 박혀 있고, 바닥에 물도 흐른다. 정신없이 도망가던 철호에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잘못 들었나싶어 계속 달아나는데, 철호 앞에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복개 중인 기둥에 목을 맨 여인이 보인다. 쫓기는 철호는 이를 보고도 도망가기에 바쁘고 경찰 역시 추적하기에 바쁘다. 유현목 감독이 철호를 청계천으로 도망가게 한 것은 철호가 떳떳한 지상에서 살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 어두운 지하에서 살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또는 자살한 여인을 통해 세상이 그만큼 어두웠다는 것을, 스스로 어두운 곳으로 내려간 철호는 결코 밝은 세상으로 올라올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청계천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빈민들은 강제 이주 했지만, 청계천 바닥은 이제 더 어두운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나마 밖으로 드러내 놓고 흐르던 물이 이제는 콘크리트로 사방이 가려지면서 빛을 보지 못하는, 완전한 암흑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것이 다시 빛을 보기까지는 무려 40년이 지나야 했다.
청계천이 복개되고 난 후 청계 고가도로를 따라서 헌책방들이 들어서고, 황학동 벼룩시장이 들어서면서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러나 고가도로는 그 위를 달리는 이에게는 편리하지만, 아래에서 생활하는 이에게는 몹시도 불편한 것이다. 하여간 서울 시민들은 종로의 교통 체증을 줄이기 위해 청계 고가도로를 이용했고, 절판되었거나 싼 책을 원한다면 청계천 헌책방을 뒤졌으며, 살아가면서 필요한 온갖 생필품은 황학동 벼룩시장에서 싼값에 살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점점 노후화되어가는 삼일 아파트와 고가도로는 근대의 상징이 아니라 부실의 상징이 되어갔다.
청계 고가도로는 여러 영화에서 등장했다. 서울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도로이기에 이런 설정은 쉽게 수긍할 수 있다. 그런데 1970년대에는 근대의 상징으로 등장하던 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면 음산한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아시스>(이창동, 2002)에서 사회 부적응자 종두(설경구 扮)는 카센터 손님이 맡긴 차를 타고 장애인 공주(문소리 扮)와 함께 청계 고가도로를 달린다. 언제나처럼 저녁 시간이면 도로는 막히기 마련이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도로 위에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나온다. 종두는 자신들만의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는 기쁨에 겨워 공주를 안고 차 밖으로 나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 순간만큼은 그들은 사회 부적응자도, 지체장애인도 아닌, 사랑하는 연인이다. <오아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인 이 장면은, 그러나 그들이 춤을 추는 장소가 곧 철거될 고가도로라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들의 사랑 역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그런 사랑이기 때문이다. 고가도로에서 내려와 세상으로 돌아오면 그들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을 감내해야 한다.
<로드 무비>(김인식, 2002)로 오면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아예 고가도로 위로 올라가지도 못한다. 동성애자 주인공(황정민 扮)은 서울역 지하도에서 홈리스로 생활하고 있다. 결혼한 경험이 있는 그는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처자식을 남겨둔 채 집을 나왔다. 서울역 지하도에서 부랑자 생활을 하던 그는 주식으로 재산을 날린 뒤 부랑자 생활을 하고 있는 다른 남자(정찬 扮)를 알게 되면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 남자는 동성애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목숨을 끊으려고 고가도로에 목을 맨 남자를 구해 가는 장면은 청계천의 이미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정신을 잃은 이를 리어카에 싣고 달리는 이에게 폭주족이 장난을 하지만, 그런 장난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다. 동성애자, 홈리스는 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철저하게 버려진 인물이라는 것을 감독은 이런 설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청계 고가도로는 그렇게 그림자를 드리운, 낡고 어두운 도로였다.
청계 고가도로 옆에 있는 삼일 아파트 역시 어느 순간 근대의 상징에서 부실의 상징을 바뀌었다. 자동차를 타고 고가도로에서 잠시 둘러보는 것도 혐오스러울 만큼, 서울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변해버렸다. <흑수선>(배창호, 2001)에서 살인 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던 형사(이정재 扮)는, 살해된 피해자의 집을 찾아간다. 마약에 손을 댔던 범인이 사는 곳이 다름 아닌 삼일 아파트이다. 황학동 벼룩시장이 있는 곳, 돈만 주면 대포도 살 수 있다는 대한민국 최대의 잡시장, 삼일아파트는 범죄의 소굴로 재현된다. 카메라는 멀리서 왜곡된 렌즈로 삼일아파트와 그곳에 들어가는 형사들을 보여준다. 마치 범죄의 현장이 된 것 같은 그곳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살던 곳이지만, 더 이상 아파트로서 기능도 할 수 없는 공간으로 재현되었다.
청계천의 명물은 헌책방이다. 싼값에 살 수도 있지만, 이미 절판된 희귀본도 구할 수 있다. <해피엔드>(정지우, 1999)에서 남편(최민식 扮)은 실직자이다. 유능한 사업가인 부인이 벌어오는 돈으로 살아간다. 그는 집에서 살림을 하면서 애를 돌보는, 점차 ‘전업주부’가 되어간다. 그가 가는 곳이라고는 탑골공원과 청계천의 헌책방이 고작이다. 헌책방의 구석에 앉아 사지도 않을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가 주인 아저씨한테 구박을 받는다. 청계천은 그런 곳이다. 새로운 화제를 불러오는 새책이 있는 곳이 아니라 새책을 살 수 없는 이가 와서 사지도 않으면서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지극히 무기력한 공간이다. 살아갈 힘을 잃어버리고 패배의식에 젖어 있는 남편이 잠시 도피하는 공간에 다름 아니다.
청계천은 한편으로 불법품을 거래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품행제로>(조근식, 2002)에서 불량 고등학생 박중필(류승범 扮)은 모범생 여자 친구 민희(임은경 扮)를 따라 황학동 벼룩시장에 가서 LP 백판을 구입한다. 정식 판에는 빠져 있는 금지곡들이 모두 들어있다. 불량학생 중필이 “이런 것 사도 되냐”고 은근히 걱정까지 한다. LP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포르노 테이프를 사는 중필이 일당을 세운상가에서 만난다. 여기서 중필은 스타일 구기고 만다. ‘사업(?)’에 필요한 포르노가 아니라 계집 따라다니며 백판이나 샀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계천은 법망을 벗어난 불법품을 파는 것으로 유명하다. 굳이 불법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는 것까지 과도하게 불법으로 규정한 군사 정부의 규제가 오히려 청계천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청계천은 없는 게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영화 속에 재현된 청계천은 긍정적 이미지보다는 부정적 이미지로 많이 등장했다. 청계천을 둘러싼 실생활의 감각이 영화로 투영되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이리라. 한국 영화에서 현실을 벗어난 상상력이란 그리 흔하지 않는 법이며, 특히 장소에 관한 한 가장 일반적 상상력이 발휘된다. 때문에 가난하고 힘없고 약한 존재들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곳으로 청계천이 그려진다. 단 예외가 있다면 복개가 막 완성된 1970년대에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3. 관습적 상상력을 전복해야 한다
영화 속에 구현된 공간은 배경으로 기능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 단순한 배경의 차원을 넘어선다. 좋은 영화는 공간의 효율적 활용을 통해 가능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공간에 맞게 구성된 이야기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가령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2000)를 보자.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판문점을 위시한 남북 공동경비구역이다. 공동경비구역이 어떤 곳인가? 남북 대립의 상징이 아닌가. 지금도 우리나라가 분단된 조국이라는 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바로 공동경비구역이다. 그러나 감독 박찬욱은 이 공간을 그런 피상적 의미로만 읽지 않았다. 분단의 치열한 대립 장이지만, 또한 그것을 넘어 통일을 준비하는 장이라고 말한다. 남북의 병사들이 낮에는 대립하지만 밤에는 형제처럼 친하게 지낸다는, 긴박감 넘치는 이중적 속성을 통해 같은 민족이 분단되어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기에 비해 이제까지 청계천을 다룬 영화들은 어떠했는가? 각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이제까지 청계천을 다룬 영화들은 대부분 청계천에 대한 일반적 인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장소로서 사용된 것이 고작이다. 그렇다면 복원된 청계천은 영화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복원 전의 영화에 나타난 것처럼 청계천이 가난한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공간에서 복원 후에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공간으로 바뀔 것인가? 단순히 그런 차원의 공간 설정이라면 굳이 청계천에서 영화를 촬영할 필요는 없다. 청계천보다 맑고 깨끗해서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사용 가능한 하천은 얼마든지 있다. 그런 식의 영화적 발상이 전부라면 청계천은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청계천 복원은 영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때마침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을 하고 있는 영화 가운데, 청계천의 복원을 다룬 영화가 있다. <아라한 장풍대작전>(류승완)이 문제의 영화이다. 내용은 좀 황당하다. 말단 순경 상환(류승범 扮))이 도인들과 아라치의 도움으로 마루치가 되어 세계 정복을 꿈꾸는 흑운(정두홍 扮)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극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애니메이션에 어울리는 내용인데, 이 영화에서 흑운의 존재를 드러내는 방법으로 청계천 복원이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한다. 악의 세력이 깨달음의 열쇠를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7선(七仙)이 공동으로 관리하지만 7선 중 한 명인 흑운이 열쇠를 독차지해 세계를 정복하려다 실패하고 만다. 이에 화가 난 도인들이 그를 청계천 바닥에 봉인시켰는데, 청계천 복원 공사 때문에 흑운이 다시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다. 너무나 황당하고 재미있는 이 설정은, 그러나 청계천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이라기보다는 영화적 내러티브를 더욱 공고히 하는 모티브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이야기 구성에 있어서 재미있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이라고 말하기에는 미흡한 점이 적지 않다. 청계천 모티프보다는 차라리,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류승완의 신작에서 나타난 황당한 상상력이 더 새로워 보인다.
그렇다면 청계천 복원은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을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본 영화 가운데 이런 가능성을 보여준 영화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주류 영화와는 전혀 다르게 청계천을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 <폐허, 숨을 쉬다>(이승준, 2002)이 그 주인공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삼일 아파트 뒤 황학동 재개발 구역에서는 철거 작업이 한창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서도 텃밭에 채소를 심고 물을 주면서 기르는 할머니가 있다. 덥다며 쉬고 있는 다른 할머니와는 달리 땅을 놀릴 수 없다는 85세의 하오종 할머니는 조만간 건물이 들어설 청계천 재개발 지역의 빈터에서 푸성귀, 호박, 파 등을 가꾼다. 할머니의 그런 노력은 조만간 결실을 맺어 벽돌이 나뒹구는 황량한 무너진 집터에 짙은 초록이 피어나게 만든다. 결국 가을이 깊어 재개발 공사가 가속화되면서 할머니는 마지막 수확을 한다. 할머니는 그곳을 떠나 자식이 있는 수원으로 가더라도 채소를 가꿀 것이라고 한다.
땅을 투기 대상으로 삼는 현대인의 삶에서 보면 이런 할머니의 노력은 정말 무의미하게 보일 것이다. 들인 노동에 비해 돈이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도 언제 철거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할머니의 행동을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스피노자에 견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녀의 행동이 죽어 버린 청계천 한켠에 새로운 숨을 불어 넣는 것이라는 말은 반드시 해야 할 것 같다. 쓰레기로 뒤덮인, 철거된 땅은 새로운 건물이 자리 잡을 때까지 죽어 있는 소음의 땅이다. 시끄러운 기계의 소음만 난무할 뿐 아무도 거기에 살지 않는다. 흉측하게 파헤쳐진 붉은 마사토와 어지럽게 널려있는 쓰레기더미가 전부이다. 아무도 새로운 생명을 꿈꾸지 않는 그 땅에 할머니는 생명을 불어 넣는다. 대지는 어머니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말을 서울에 사는 우리는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땅이라도 비록 건물은 들어섰지만 생명을 살리는 본래의 땅의 힘은 빼앗겨버렸다. 결코 살아 있는 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또 얼마나 불쌍한가! 남들도 쓸데없다고 하는 행동을 소신을 갖고 하는 할머니는 미련한 사람일 수 있지만, 그러나 정녕 미련한 사람은 그녀가 아니다. 할머니는 귀가 약간 멀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와 주변 할머니들의 비웃음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다시 문제는 영화적 상상력이다. 너무도 식상한 상상력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엄청난 돈을 들이고, 교통 불편을 감수하면서 청계천을 복원하는 것은 그것이 우리 생활의 기본적 리듬과 맞기 때문이다. 자연 속에 같이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수십 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청계천 복원이 죽어 있는 서울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는 작업임을 깨달은 것이다. 필자는 지금 청계천 복원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다.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이명박식 사고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계천 복원의 기본적 명제에 찬성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근대화의 패러다임은 이제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영화는 청계천 복원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지금 한국영화는 최대의 호황을 맞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다. 단지 산업적 위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부족한 상상력과 새로울 것 없는 화면으로 실패한 일련의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한국영화는 전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수준은 갖추었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이 편안하게 안주하고자 한다. 패기 있다는 신인들의 영화도 대부분 장르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감독의 영화도 관습적인 장르의 틀 속에 안주하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라이터를 켜라>(2002)라는 깜직한 데뷔작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았던 장항준 감독의 차기작 <불어라 봄바람>(2003)은 중반까지 끌고 가던 유쾌한 상상력을 후반부로 가면서 급격하게 무너뜨린다. 그래서 결국 안정한 장르적 틀로 안주하면서 어설픈 사랑의 완성과 가족의 화해를 외침으로써 영화를 끝내 버린다. 흥행 감독으로 인정받았던 정초신 감독의 <남남북녀>(2003)는 영화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는 감독인지 처음부터 의심하게 만든다. 충무로에서 가장 상상력이 뛰어나고 엽기적이라는 임상수 감독은 <바람난 가족>(2003)에서 지나치게 무거운 삼대의 이야기를 지겹도록 길게 하고 있다. 도발적이고 엽기적인 상상력과 진중한 이야기 전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임상수 정도라면 전자의 방법을 통해 한국 사회의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이름난 감독들이 이러고 있으니 숱한 범작들과 졸작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최근 한국영화는 초반 30분만 보면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 조폭은 으레 무식한 말장난으로 웃기려고 하고, 남녀의 캐릭터는 고정되어 있다. 옥신각신하던 인물들은 영화 종영이 다가오면 습관처럼 장르적 관습으로 맺어 버린다. 초반에 벌여놓았던 기발한 아이디어도 어느 순간 휘발해 버리고 거의 모든 영화가 해피엔딩, 권선징악으로 마무리된다. 진정 한국영화는 지금 위기에 처해 있다. 한국영화가 청계천 복원에서 배울 것은 새로운 영화적 상상력이다. 그것을 밀고 나갈 패기와 능력이다. 한국영화는 언제나처럼 기로에 서 있다, 바로 지금도.

강성률
․1970년 경북 안동 출생
․2000년 ≪민족예술≫}에 영화평을 쓰면서 평론 활동 시작
․호서대, 한국기술교대 강사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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