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2호 젊은시인조명/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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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 신작시
푸른 눈 외 6편
나는 <푸른 눈>을 목에 걸고 있었다 모스크* 앞마당에 머리를 밀어 넣고 까마귀가 송곳 같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푸른 눈>을 목에 걸고 노인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낡은 카펫에 갈라진 입술을 댔다 자, 행운을 건져봐 <푸른 눈>이 속삭였다 까마귀처럼 웅크린 노인의 등에서 나지막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노인의 구부러진 부리가 딱딱거렸다
일생 동안 공중을 가득 메운 기도들이 지붕에서 꼬물거렸다 사원에 사는 노인은 神의 둥근 소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은 기도는 이제 썩은 객혈을 토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그의 이마에 검붉은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입 밖으로 수백 개의 혀가 날름거렸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푸른 눈>이 속삭였다 카펫 위를 굴러다니는 잘린 혓바닥들을 노인은 부리로 쪼기 시작했다
나는 더러운 사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사원 너머에는 하늘로 뻗은 빌딩들이 가득했다 나는 천천히 광화문 지하도를 건넜다 늙은 청소부가 엎드린 채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내고 있었다 내 귓불을 물고 <푸른 눈>이 더운 입김으로 속삭였다 자, 행운을 건져봐 나는 어느새 머리를 땅에 박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부리로 껌딱지를 쪼고 있었다 잡풀이 무성한 무덤 안에서 수많은 노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모스크 : 이슬람 사원을 일컫는 말
집으로 가는 길.2
모두가 떠나고
헤드라이트를 끈 56번 버스들이
빽빽하게 잠든
종점을 에둘러 나오는 길에는요
미로 속을 잘 더듬어야 하는데요
버스 지붕들이
지친 이마를 맞대고 쓰러진
그 끝을 잘 봐야 하는데요
바퀴와 바퀴 사이
밤이면 열리기 시작하는
블랙홀의 입구를 잘 피해서 가야 하는데요
자칫하면 폐쇄당한 지하의 묘지로
빨려들어 간다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데요
쉿, 천천히 걸어주세요
달빛에 깊숙이 찔려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
어느 종족의 그림자를 밟을지도 모르는데요
하루 종일
그들의 모든 길을 훔쳐오느라
과부하에 걸린 굉음의 흔적이
얼마나 따끈따끈한지
귀를 대어보면 알 수 있는데요
버스 밑바닥에 붙어 있던
붉은 난쟁이들이 떼굴떼굴 굴러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드릴로 뚫어대는 공중의 틈을
재빨리 피해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요
왜 이리도 발걸음은 더디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는지요
내가 스쳐온
버스가 잠든 자리마다
점점 작아져가는 내 뒷모습이
번뜩이는 달빛에 비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는데요
야근을 마치고
56번 버스 종점
그 거대한 카타콤에서
모든 길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었는데요
온 몸에 바람을 맞으며
나는 지워지고 있었는데요
집으로 가는 길.3
빗속을 뛰어가던 아이가 자동차에 부딪친다
나무 사이를 헤치고 지붕 위로 흘러가던
길다란 도로를 따라가지 못하고
아이는 없어진 길 위에서 울고 있다
포플러나무가 백미러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는다
비에 젖은 도로를 움켜쥐었다 놓은
아이의 울음을 들어올린
뭉툭한 여섯 개의 손가락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백미러에 검은 얼룩이 져 있다
거울이 닫혀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알지 못해요
고소한 치킨 냄새가 가득한 거리
빈 도시락 가방이 빗물에 흠뻑 젖는다
자동차에 기댄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을 뚫고 배고픈 나뭇잎이
내 방 창틀로 툭 떨어진다
무거운 구름을 끌어내리며 솟구치던 비명을
나는 가만히 문질러본다
축축한 손에 검은 얼룩이 번지고 있다
응급차가 피 묻은 경적을 울린다
집으로 가는 길.4
여기 행복한
해파리를 보세요
말랑말랑한 위 속에 어린 물고기들이 가득하네요
붉은 촉수들이 다글다글 붙어 있는
한 익사체가 뱃길에 늘어져 있어요
한생에서 한생으로 건너가면서
지느러미들을 게워내고 있어요
이 선박에 닿기까지
너무 많이 먹었나봐요
그의 위는 언제나 충혈되어 있지요
바다의 내장 속으로 말려들어간
수많은 해파리들이 피를 빨고 있어요
파도는 멈추었구요
이 난파선에는 아무도 없어요
몇십 마리가 붙어서 새로 태어난
거대한 해파리 한 마리가 꾸물거리며
바다 너머로 흘러가네요
어디로 가는 건지
여기 행복한 해파리 좀 보세요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아이들이 먹는 것은 날개의 파편이었다 차가운 총구를 핥는 입술 사이로 새까만 총알이 쏟아졌다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아이들이 새는 왜 이렇게 딱딱한 거야 뒤통수까지 길게 찢어진 입으로 아이들이 중얼거렸다 현명한 사제도 예언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족들이 바다를 건너왔다 시퍼런 죽창도 승리의 깃털도 없이 자욱한 연기가 골목마다 피어올랐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날아가 버린 머리통을 매일매일 찾으러 다녔다 사제의 예언은 하나도 맞지 않아 내 머리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기름을 뒤집어 쓴 긴 목 아이가 투덜거렸다 날개 잘린 새가 쿨럭거리며 뜨거운 불꽃을 쏟아냈다 아이의 피 같은 선홍빛 기름이 파편 위로 곱게 물들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몰려온 새로운 종족들이 허겁지겁 기름을 핥았다 이 종족은 죽은 새를 먹는 모양이야 모래 바닥에 떨어져 물렁물렁해진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또 다른 아이가 웃었다
현명한 사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지러운 폭염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잘못 찾은 머리통을 목에 끼워넣고 있었다 키득키득거리면서 서로의 머리통을 주물럭거렸다 주인을 찾지 못한 머리통은 버려진 책가방 속에서 달그락거렸다 막 태어난 아이들은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새로운 날개를 꾸역꾸역 씹어 먹었다
그날 아버지는
그날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수국을 옮겨 심었지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바람을 업고 아버지의 등이 천천히 부서지고 있었지 나는 낡은 의자에 앉아 미처 옮겨지지 못한 빗물에 떠내려가는 수국을 보고 있었지 금박이 박힌 소설책과 프림 커피를 손에 들고 어둑한 구름의 그림자를 더듬거렸지 소설의 첫 장에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설원을 지나가고 있었지 나는 낯선 이곳 푸른 숲이 둘러싸고 있는 불길한 적막의 한 가운데에 앉아 대설원을 꿈꾸었지
가냘픈 수국잎들이 고랑을 따라 흘러가는 동안 아버지는 웅덩이에 서서 말없이 먼산바라기를 하고 있었지 나는 천천히 일어나 젖은 잎들을 줍기 시작했지 웅덩이에 고인 창백한 생의 흔적들을 태풍의 두꺼운 혀가 순식간에 훑고 지나갔지
나는 태풍의 혀를 둘러쓰고 아버지의 손을 잡았지 또 다른 잎들이 아버지의 손바닥으로 스며들었지 아버지는 가만히, 먼 산에서 돌아온 시선을 나에게 비추고 소설책 속으로 눈보라처럼 새하얗게 흩어져 버렸지
항아리를 빚는 노파
항아리를 빚는 노파가 흙벽에 떠있다 얼굴이 지워진 그녀 먼지 가득한 문을 열고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린다 하얗게 뼛가루가 녹아내리는 적도의 오후 바싹 마른 팔을 내밀어 노파는 허공을 문질러 본다 이 벽에서 저 벽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어린 방문객이 들어와 냄새나는 벽의 입을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나는 얼굴을 대고 벽화를 들여다본다 흙벽에서 꿈틀거리는 탈골된 팔꿈치가 얼굴을 치고 달아난다 남은 한 팔을 들어 기름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노파는 공중으로 쏟아붓는다 기름에 둥둥 떠내려 온 쭈글쭈글한 내 얼굴 고약한 냄새가 신전 가득 퍼지고 있다 나는 노파의 눈 속에 비치는 또 다른 노파를 본다 몇 세기가 지나도 기름이 가득한 항아리의 비밀을
✔시작메모
눈을 떠보니 비행기 안. 거대한 이불 같은 구름 위에서 나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초승달을 보았다. 구름과 초승달 사이에서 길게 늘어진 붉은 석양. 그 주변을 감싸고도는 아릿한 안개들. 창밖으로 비치는 금속 날개가 내 시선을 댕강댕강 잘라내고 있었다. 시간은 붉은 빛과 초승달의 창백한 빛을 천천히 통과했다. 내 눈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창공은 점점 어두워졌다. 비행기 안에서는 미친 듯이 갓난아기가 울어대고 있었다. 아기는 비현실적인 시간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새까만 밤이 창공으로 뚝 떨어졌다. 나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어둠의 입을 닫듯이 창문을 닫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영주
․1974년 서울 출생
․2000년 ≪문학동네≫ 문예공모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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