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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젊은시인조명 작품해설/박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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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낯선 풍경들
―이영주의 시
박 남 희
(시인)
옥따비오 빠스에 의하면 한편의 시는 끝없이 새로운 의미를 산출하는 상형문자 같은 한 줌의 기호들이 투사되는, 진동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는 말라르메의 시를 논하면서 한편의 시를 창작하는 행위를 ‘주사위놀이’에 비유한 바 있다. 시인에 의하여 던져진 주사위들은 시적 공간 위에 새로운 별자리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별자리들은 간혹 일정한 형상을 띠고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형태로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별자리들은 모여서 우주를 형성한다. 그것은 시의 우주이다. 우리는 그 우주를 다 읽어낼 도리가 없다. 다만 그 일부 별자리들의 자태를 보면서 그 별자리만의 상징을 읽고, 별의 나이를 추측해 볼뿐이다.
이영주의 시는 우리에게 우주 속에서 새로운 별자리를 찾아내어 새롭게 읽어낼 것을 끊임없이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그의 시는 의미를 파괴하거나 난해성을 지향하는 해체 시는 아니다. 그의 시는 우리가 흔히 만나게 되는 의미시와 의미를 파괴하는 해체시의 중간에서 다채로운 시적 공간을 창출해 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영주의 시는 낯설고 새롭다. 물론 이러한 새로움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지만, 그가 던지는 주사위는 때로 엉뚱한 곳으로 굴러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낯선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시는 우연한 몽상을 꿈꾸지는 않는다. 그의 예민한 감각은 전혀 엉뚱한 대상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유추해 내는 능력이 있다.
물론 이러한 유추는 은유의 영역에 속하지만, 그의 시는 의미를 향하여 응축되어 있지 않고, 대상을 또 다른 대상에 전이시킴으로써 의미를 환유적으로 미끄러뜨려 유예시킨다. 그럼으로써 그의 시에서 의미의 폭은 좀 더 확장되고, 상상력 또한 관습적인 틀을 벗어나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쪽으로 확장된다. 그의 눈은 자아와 대상 사이에 액자 모양의 창틀 하나를 준비한다. 이 창틀은 시인이 세계와 자아를 관습적으로 읽어내려는 자동화된 인식을 막아주는 특수한 기능을 가진 상상력의 창틀이다. 이 창틀은 어둠 속에서 때때로 거울로 둔갑하여 자아의 모습을 반성적으로 비춰주기도 하고, 때로는 자아와 대상을 단절시켜서 창 밖의 풍경들을 낯설게 변형시켜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영주가 세상을 바라보는 창틀은 의미와 무의미의 언어들이 유추와 전이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은유와 환유의 중간지점에 존재하는 창틀이다. 이 창틀의 안쪽에는 시인의 말이 산다. 그런데 그 말이 사는 곳은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지하 방이라는 점에서 시인의 무의식의 말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람은 푸른 얼굴로 창문을 쑥 밀고 들어와 누웠지
창 밖 붉은 하늘을 더듬다 휘어진,
저녁이면 날고 싶은 늙은 나뭇가지 휩쓸려와
책상에 떨어졌지 보고 싶었니,
네가 곁눈질로 훔쳐본 텅 빈 이 방?
주인 없는 말들이 어슬렁거리다
벽에 이빨을 박는 딱딱한 방.
퇴화된 뒷다리, 마르고 뻣뻣한 갈기가
밀랍인형처럼 굳어가는 방,
이따금 잡상인이 누른 초인종에
후다닥 말들이 공중으로 흩어지지만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지
창 안 쪽으로 몰려드는 파르라한 빛이
어둠을 향해 꼬리를 흔들 때
거대한 짐승이 벗어놓은 껍질 같은
어두운 허공으로 뛰어가지 못하지
그건 찾는 이 없는
이 방에 사는 말들의 운명
빛의 점을 따라 뛰쳐나가다
부서진 창에 다리가 잘리고 말지
창 밖, 작은 마당에 수북이 쌓인 말들의 시체
보고 싶었니, 말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낳아
내 입 속에서 터질 듯 웅얼거리는
말의 망령들이 떠도는 이 지하방을?
―「내 방에 사는 말」 전문
≪시안≫ 2001년 가을호에 발표된 이 시는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말의 풍경을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다. 창문 안 쪽의 지하방은 시인의 말이 서식하고 있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 방에 사는 말들은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폐적 성격이 강한 무의식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말은 창 밖으로 수없는 탈출을 꿈꾸지만, 부서진 창에 다리가 잘려서 마당에 수북이 시체로 쌓일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지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하방에 사는 말들은 그 안에서 “말이 말을 낳고 또 말이 말을 낳”아 결국엔 말의 망령이 되어 떠돌 수밖에 없는 소통 불가능의 언어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이렇듯 자폐적인 말들을 거느리고 지하방에서 웅크리고 앉아 창 밖을 내다보면서 입 속으로 터질 듯한 말들을 웅얼거리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이 시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영주의 모든 시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국면들이다. 그의 대부분의 시에는 이 시처럼 창밖에 나무가 있고 하늘이 있고, 그 나무 위에는 비상을 꿈꾸는 새가 있다. 시인은 끊임없이 창 밖으로 탈출을 꿈꾸지만 그 시도는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이영주의 등단 작 「터널을 지나며」에는 창문이 ‘차창’으로 변주되어 나타나는데, 이 시에서 ‘차창’을 달고 터널을 지나 어디론가 달려가는 버스 안에는 졸음에 겨워 “버스 안의 침묵을 담금질하듯/쿵쿵, 창에 머리를 박는 그”가 있고, 시적인 화자인 ‘나’는 그런 ‘그’를 창에 비친 흐릿한 모습으로 보고 있다. 터널 끝에는 “긴 혓바닥을 내밀고 터널의 골조물을 핥는,/불빛 환한 방”이 있지만, 사내는 단지 피곤한 자신의 육신의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깊게 고개를 숙이고/제 몸 속의 방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이영주의 시에 나타나 있는 군상들은 창 밖의 세계를 동경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되기를 바라지만, 이러한 소망은 단지 중얼거리는 자폐적인 묵언(黙言)에 그칠 뿐이다.
이영주의 시에서 자주 등장하는 창 밖의 나무는 사실 따지고 보면 창 안에서 창 밖의 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시적 자아와 겹쳐지는 대상이다. ≪문학동네≫ 2001년 봄호에 발표된 「집 앞의 나무를 잘라 낸 사내」는 창 밖의 나무가 창 안의 사내와 동일화된 타자임을 증거하고 있다.
언제나 사내는
창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본다
가지는 사내의 얼굴을 뚫고 하늘로 뻗어 올랐다
허공에 매달린 가지의 그물에 걸려
창문 속 사내는 헐떡거렸다
달이 흘리고 간 얇은 허물처럼
시퍼런 잎들이 공중에서 뒹굴었다
집 앞의 나무 잘라내고
불 꺼진 방안에 갇혀 제 얼굴을 찾던 사내는
발을 뗄 수가 없다
발바닥에 조용히 스며드는 검은 딱정이들
지문을 따라 길을 찾는 동안
자꾸만 방바닥에 발을 문지르는 사내
―「집 앞의 나무를 잘라낸 사내」 부분
사내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지만, 그 모습 속에 겹쳐지는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숨이 차 헐떡거리게 된다. 사내가 창문에 비친 나무를 보면서 헐떡거리는 행위는 “달이 흘리고 간 얇은 허물처럼/시퍼런 잎들이 공중에서 뒹”구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다. 여기서 “달이 흘리고 간 얇은 허물”은 인용되지 않은 이 시의 첫 번째 연의 “허물을 벗는 달의 꼬리를 따라”라는 구절을 참고하면 ‘뱀의 허물’임이 쉽게 드러나는데, 이영주의 시에서 뱀은 “긴 척추를 뒤틀며 낼름, 하늘을 훔치는/뱀의 몸통”의 형상을 한 “벗겨진 나무의 속살”(「맹인」-2000년 ≪문학동네≫ 당선작)과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시적 화자와 동일화된 타자인 사내는 곧 나무로 전이되고 나무는 또 다시 뱀으로 전이된다. 이러한 환유구조는 이영주의 시에 자주 나타나면서 그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무의식의 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사내가 자신의 무의식적 환상에 시달리다가 결국 나무를 베어 버리지만, 그 나무가 자신과 동일화된 타자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타자인 ‘사내’에게 투사된 시인의 무의식적 욕망과 연관되어 있다.
이영주의 시는 이처럼 자아와 동일화된 무수한 타자를 통해서 시인의 내면풍경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번에 발표된 그의 신작시들 역시 기존의 시가 보여주었던 문법과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나는 <푸른 눈>을 목에 걸고 있었다 모스크* 앞마당에 머리를 밀어 넣고 까마귀가 송곳 같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푸른 눈>을 목에 걸고 노인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낡은 카펫에 갈라진 입술을 댔다 자, 행운을 건져 봐 <푸른 눈>이 속삭였다 까마귀처럼 웅크린 노인의 등에서 나지막한 울음이 흘러나왔다 노인의 구부러진 부리가 딱딱거렸다
일생 동안 공중을 가득 메운 기도들이 지붕에서 꼬물거렸다 사원에 사는 노인은 神의 둥근 소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러나 단 하루도 거르지 않은 기도는 이제 썩은 객혈을 토해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그의 이마에 검붉은 핏자국이 배어 있었다 입 밖으로 수백 개의 혀가 날름거렸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푸른 눈>이 속삭였다 카펫 위를 굴러다니는 잘린 혓바닥들을 노인은 부리로 쪼기 시작했다
나는 더러운 사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사원 너머에는 하늘로 뻗은 빌딩들이 가득했다 나는 천천히 광화문 지하도를 건넜다 늙은 청소부가 엎드린 채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내고 있었다 내 귓불을 물고 <푸른 눈>이 더운 입김으로 속삭였다 자, 행운을 건져봐 나는 어느새 머리를 땅에 박고 있었다 툭 튀어나온 부리로 껌딱지를 쪼고 있었다 잡풀이 무성한 무덤 안에서 수많은 노인들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모스크 : 이슬람 사원을 일컫는 말
―「푸른 눈」 전문
이 시 역시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로 전이되는 환유구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우선 1연의 공간은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가 있는 공간인데, 2연에 오면 이러한 공간은 빌딩이 가득한 서울이라는 공간으로 전이된다. 시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인 ‘나’와 ‘노인’ 역시 ‘까마귀’로 전이되어 나타나고, ‘나’와 모스크의 ‘노인’은 2연에 오면 광화문 지하도 안의 ‘청소부’와 ‘노인들’로 각각 전이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나’와 ‘노인’이 모두 부리를 가진 새로 전이되어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새는 이슬람 경전인 <코란>에서 운명의 동의어로 나타나 있기도 한데, 이 시에 등장하는 ‘까마귀’ 역시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고 있는 새로서, 푸른 보석인 <푸른 눈>의 신탁의 말씀을 경청하는 대상이다. 이 시에서 <푸른 눈>이 말하는 “자, 행운을 건져 봐”라는 진술은 ‘행운’으로 표상되는 현대인의 불확실한 삶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언표이다.
이 시의 1연 후반부의 “카펫 위를 굴러다니는 잘린 혓바닥들”은 무수한 소원을 신에게 빌지만 결국엔 신의 응답을 듣지 못하고 좌절된 채 지상에 나뒹구는 소통 불가능한 인간의 말을 상징한다. 이 시는 신에게 자신의 소원을 비는 인간의 애절한 ‘기도’와, <푸른 눈>이 말하는 “자, 행운을 건져 봐”와 “당신은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라는 상반된 진술 사이에 개입되는 아이러니의 긴장 관계를 축으로 하고 있다. 즉 이 시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단절되어 있다. 여기에 이 시의 비극성이 있다. 이영주의 시에 노인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죽음과 가까운 쪽에서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관습적인 인간의 삶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삶의 비의를 드러내려는 시인의 내성적(內省的) 결과물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번 발표작 중의 하나인 「항아리를 빚는 노파」에도 노인이 등장하는데, 이 시에서의 노파는 항아리를 빚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신전 벽화 속의 노파이다. 벽화 속의 노파는 얼굴이 지워진 채 문을 열고 들어올 누군가를 기다리면서 “이 벽에서 저 벽으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노파는 벽화 속에 오랫동안 유폐되어 있으면서 이 벽에서 저 벽으로 건너가 보고 싶어 하기도 하고, “기름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공중에 쏟아 붓기도 한다. 그런데 노파가 “기름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공중에 쏟아 붓자 “기름에 둥둥 떠내려 온 쭈글쭈글한 내 얼굴”의 “고약한 냄새”가 신전 가득 퍼진다. 여기서 ‘나’는 순식간에 쭈글쭈글한 얼굴이 되어 노인과 동일화된다. 그리고 노인이 된 나는 벽화 속 노파의 눈 속에서 또 다른 노파를 본다. 노파의 눈 속에 비친 노파는 노파가 기억하고 있는 선대(先代)의 노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처럼 몇 세기에 걸쳐 노파에서 노파로 전해 내려온 “기름이 가득 담긴 항아리의 비밀”은 무엇일까? 시인은 이 시에서 “기름이 가득 담긴 항아리”가 무엇인지 지시해 주지 않는다. 다만 이 시의 문면을 통해 볼 때, 몇 세기가 지나도 마르지 않는 기름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과 생명, 혹은 욕망에 대한 은유이고, 그것을 담고 있는 항아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빗속을 뛰어가던 아이가 자동차에 부딪친다
나무 사이를 헤치고 지붕 위로 흘러가던
길다란 도로를 따라가지 못하고
아이는 없어진 길 위에서 울고 있다
포플러나무가 백미러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는다
비에 젖은 도로를 움켜쥐었다 놓은
아이의 울음을 들어올린
뭉툭한 여섯 개의 손가락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백미러에 검은 얼룩이 져 있다
거울이 닫혀 있어요
집으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해요
고소한 치킨 냄새가 가득한 거리
빈 도시락 가방이 빗물에 흠뻑 젖는다
자동차에 기댄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거울을 뚫고 배고픈 나뭇잎이
내 방 창틀로 툭 떨어진다
무거운 구름을 끌어내리며 솟구치던 비명을
나는 가만히 문질러본다
축축한 손에 검은 얼룩이 번지고 있다
응급차가 피 묻은 경적을 울린다
―「집으로 가는 길․3」 전문
「집으로 가는 길․3」은 이번에 실린 같은 제목의 연작시 중의 하나인데, 빗속을 뛰어가던 아이가 자동차에 치는 사고 현장을 묘사하고 있다. 1연을 보면 차에 치어 죽은 아이는 “나무 사이를 헤치고 지붕 위로 흘러가던/길다란 도로”를 따라 하늘나라로 가지 못하고 “없어진 길 위에서 울고 있다”. 2연에서 포플러나무는 여섯 개의 손가락으로 사고 당시의 끔찍한 아이의 울음을 들어올린다. 이 시에서 나무는 아이의 죽음과 시적인 화자인 ‘나’를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이다. 그런데 나무는 백미러와 소통함으로써 세상을 읽는다. 여기서의 백미러는 뒤를 보는 거울이라는 점에서 시적 화자의 기억과 무의식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러므로 백미러에 검은 얼룩이 져 있는 것은 시적 화자의 과거에 내재해 있던 어두운 기억의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적 화자의 기억은 다만 기억에 머물러 있지 않고 환상과 결합되어 있다. “거울을 뚫고 배고픈 나뭇잎이/내 방 창틀로 툭 떨어진다”는 진술은 시적 화자가 과거에 경험했던 ‘배고픔’의 무의식적 발현을 환상적으로 묘사해 보여주고 있는 예이다.
그런데 이영주의 시에 등장하는 ‘집’은 종종 ‘무덤’과 동일시된다. 시인의 기발표작 중의 하나인 「봄빛은 거미처럼」에서 시인은 “집은 무덤이다”는 진술을 한다. 물론 거미의 집은 무수한 곤충들의 무덤이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시인이 유독 자신의 시에 노인을 자주 등장시키는 것도 인생을 삶에서 죽음으로 옮아가는 과정으로 느끼고 있는 시인의 사유에 가장 가까이 가있는 대상이 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길을 따라 집으로 가는 행위는 인생의 길을 걸어 무덤으로 가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시인이 「집으로 가는 길․2」에서 길의 끝에 있는 버스 종점을 “모든 길을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 “카타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이번에 발표된 또 다른 시 「그날 아버지는」에도, 수국을 옮겨 심는 아버지의 행위와 “빗물에 떠내려가는 수국”에 대한 안타까움의 대비를 통해서 과거 시인의 어두운 기억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1연 끝 부분을 보면 “웅덩이에 고인 창백한 생의 흔적들”인 젖은 잎들을 “태풍의 두꺼운 혀”가 순식간에 훑고 지나간다. 이러한 표현은 시인 자신의 불행했던 가족사를 나타내 주는 기표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불행했던 가족사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날 아버지는」에서도 시인은 불행한 가족사 속의 아버지를 자신이 읽고 있던 소설책 속으로 집어넣음으로써 과거의 아픈 경험을 단지 객관적인 ‘이야기’로 가볍게 환치시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먹는 것은 날개의 파편이었다 차가운 총구를 핥는 입술 사이로 새까만 총알이 쏟아졌다 불룩한 배를 쓰다듬으며 펭귄처럼 뒤뚱거리는 아이들이 새는 왜 이렇게 딱딱한 거야 뒤통수까지 길게 찢어진 입으로 아이들이 중얼거렸다 현명한 사제도 예언하지 않았던 새로운 종족들이 바다를 건너왔다 시퍼런 죽창도 승리의 깃털도 없이 자욱한 연기가 골목마다 피어올랐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날아가 버린 머리통을 매일매일 찾으러 다녔다 사제의 예언은 하나도 맞지 않아 내 머리통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기름을 뒤집어 쓴 긴 목 아이가 투덜거렸다 날개 잘린 새가 쿨럭거리며 뜨거운 불꽃을 쏟아냈다 아이의 피 같은 선홍빛 기름이 파편 위로 곱게 물들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몰려온 새로운 종족들이 허겁지겁 기름을 핥았다 이 종족은 죽은 새를 먹는 모양이야 모래 바닥에 떨어져 물렁물렁해진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또 다른 아이가 웃었다
현명한 사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지러운 폭염이 계속되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잘못 찾은 머리통을 목에 끼워 넣고 있었다 키득키득거리면서 서로의 머리통을 주물럭거렸다 주인을 찾지 못한 머리통은 버려진 책가방 속에서 달그락거렸다 막 태어난 아이들은 싱싱하게 파닥거리는 새로운 날개를 꾸역꾸역 씹어 먹었다
―「이제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전문
이 시를 읽다보면 마치 최근의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의 상황이 떠오른다. 이 시의 제목처럼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는 상황을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시에는 미국과 맞서 싸우고 있는 중동의 불쌍한 나라에 사는 아이들에 대한 연민이 들어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새를 먹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데, 이런 이미지는 곧바로 총알을 먹는 아이들의 이미지와 중첩되어서 나타난다. 여기서 ‘새’는 날개가 있다는 점에서 ‘자유’와 ‘희망’, 또는 ‘꿈’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이 총알을 ‘날개의 파편’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나, 아이들에게 총을 쏘는 대상을 “날개 잘린 새”로, 그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을 “죽은 새”로 지칭하고 있는 것은 희망과 꿈이 없는 세계를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관점과 일치한다. 이 시에서 “새로운 종족”은 미국을, “현명한 사제”는 오사마 빈 라덴이나 후세인을 가리키는 알레고리로 읽히지만, 이러한 시 읽기는 사실 이영주의 시 읽기로서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이영주의 시는 너무 뻔한 의미의 틀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의 2 ,3연에는 “새로운 종족”에 의해 날아가 버린 머리통을 찾아 이리저리 맞추어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히 현실적인 상황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머리통을 찾아 맞추어보는 아이들은 죽은 아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영주의 시에는 현실과 환상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길항하면서 매우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영주의 상상력은 현실이라는 테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실과 환상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그만의 독특한 시적 공간을 창출해 낸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시는 때때로 낯설고 거칠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특성은 오히려 장점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관습적이고 진부한 시들이 난무하는 현 시단에서 이영주의 시는 오히려 이채롭게 읽힌다. 특히 ‘사람’을 ‘새’로, ‘집’을 ‘무덤’으로, 현실의 아버지를 소설 속의 아버지로 전이시켜 환유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상상력은, 앞으로 시인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게 될 새로운 시 세계에 커다란 기대를 걸게 해준다.
박남희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ꡔ폐차장 근처ꡕ
․고려대, 숭실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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