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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초점> 촘스키, 누가세상을지배하는가-그래서,누가더많이돌았는가? /김성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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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425회 작성일 04-01-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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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그래서, 누가 더 많이 돌았는가?

김성균
(번역가)



최근의 미국에서 실시된 몇몇 여론조사 결과 적어도 반 이상의 미국인들이 미․영동맹군의 이라크 침략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 지지율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이른바 대량살상무기의 폐기와 테러의 근절, 그리고 미국인들의 자유(?)를 지키고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전쟁이라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의 결과는 이 세 가지 목적 중 어느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전쟁의 악몽과 처절한 현실의 논리만을 다시금 강화시키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악몽의 현실은 ‘반전과 평화’의 외침을 공허한 메아리로 만들어버린다.
이렇듯 인간이 경험하는 현실의 논리 자체는 끝없는 부정의 논리처럼 보인다. 현실을 괴롭히는 것은 이상도 환상도 비현실도 아닌 바로 현실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은 스스로로 인해 괴로움을 느낄 때 스스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현실 밖의 이상을 동원한다. 즉 현실은 자신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곧 자기 변화를 위해서, 결국은 자기 파괴를 달성하기 위해서 언제나 가장 비현실적인 이상(理想)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변화, 즉 현실을 위한 현실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이상의 희생제(犧牲祭)를 통해서 달성되는 악몽이 되고 만다. 현실의 논리는 자기 실현을 위해서 결코 다른 것이 되려하지 않는 자기 자신의 모순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실은 모든 것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현실은 스스로를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거나 교정 대상으로 간주하여 훈육하는 주기적인 악몽에, 즉 진실로 현실이 되고 싶은 자기 파괴의 꿈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파괴라는 악몽의 승리는 곧 자기 파괴를 통한 현실의 승리를 의미한다.
이상은 이런 현실의 자기 파괴를 위한 수단, 즉 악몽의 승리를 위한, 그리하여 현실의 승리를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이처럼 부조리한 수단으로서의 이상의 모태는 기이하게도 자신의 밖에서 합방을 요구하는 자기 자신의 현실, 즉 악몽 같은 현실이다. 그래서 이상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의 절대적인 모순의 산물이고, 승리가 가까워질수록 용도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되는, 다시는 사용하고 싶지 않은 자기 파괴의 수단이다. 또한 이상은 궁극적인 파멸의 위기에 처한 현실을 대신하여 죽음으로써 현실의 승리에 이바지하는 희생양으로서 오직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만 악몽의 현실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이상은 결국 현실의 자기 파괴적인 자기 실현을 위한 제의를 완성시키는 반현실(anti-reality)로서, 운명적으로 분열적인 현실의 논리에 부역하면서 존재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현실의 논리를 완성하기 위한 희생제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바로 ‘자유와 평화를 위한 전쟁’일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기괴한 희생제는 자유와 평화라는 이상=반현실을 달성하기 위해 현실의 희생을 요구하는 듯이 보이나, 실상은 현실의 논리가 본질적으로 원하는 자기 파괴를 실현하기 위해 간택한-이른바 이데올로기나 애국심과 같은 이상적인 수단으로서의-자유와 평화란 이상을 희생하여 자멸의 위기에 처한 현실을 회복하기 위한 자가전쟁(自家戰爭, zerosum game)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평화’를 위한 ‘전쟁’만큼 불가사의한 현실의 논리는 없다. 물론 자유를 위한 전쟁 역시 자유의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가사의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불가사의한 논리들을 믿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상존한다. 물론 그들 앞에는 이런 불가사의한 악몽의 논리,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의 논리를 생산하고 설파하고 선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로이트는 종교의 기원을 탐문하면서 인간의 고질적인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믿음”을 문제삼은 적이 있다. 프로이트, 이윤기 옮김,〈인간모세와 유일신교〉,《종교의 기원》(열린책들, 1997), pp. 118-119 참조.
그는 이런 “기묘한 양상은 정신병자의 망상”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반 이상의 미국인들 역시 이러한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인가? 더구나 그러한 ‘망상’을 주장하고 선전하고 전도하는 자들, 즉 미국의 정치가들, 거대 다국적 기업의 경영자 및 투자자들, 언론인들, 그리고 그들과 공생․기생하는 지식인들 역시 ‘정신병자들’에 불과하단 말인가?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그들이 정신병자라거나 망상에 빠져 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기묘한 논리나 망상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망상에 대한 믿음, 즉 악몽을 부르는 현실의 논리에 대한 믿음의 생성 메커니즘을 명민한 언어학자이자 “미국의 양심”이라고 회자되는 노엄 촘스키의 대담집 ꡔ촘스키,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ꡕ를 통해서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촘스키는 ‘세상’을 ‘지배’하는 자들의 지배 수단과 방법은 정부-기업-언론의 가공할 커넥션을 통해서 그들의 권력과 이익에 반하는 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갖은 강제적․비강제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제한하면서, 대중의 삶을 자본주의 욕망에, 즉 표피적이고 피상적인 소비와 대중문화에-되도록이면 최소임금, 그도 아니면 다음날 ‘겨우’ 다시 러시아워의 대열에 참여할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만 지급하여-몰두하게 만들고, 소외된 인간관계를 양산하는 인공의 감옥들-예컨대 법, 제도, 사회안전망 같은-속에 감금시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 불행한 대중의 삶을 표피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주체, 즉 ‘세상을 지배하는 주체’가 바로 강대국, 특히 서유럽과 미국의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그리고 그들의 권력에 부역하는 지식인들 간의 네트워크라고 지목한다. 이 네트워크가 ‘세상’의 물질적․정신적 재화들을 독점하고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 즉 자국의 국민, 민중, 대중, 그리고 특히 제3세계의 민중들의 삶을 유린하고 있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이해하는 ‘세상’은 이러한 권력 네트워크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확장하는 무대이자 배우, 자원이자 공장, 스크린이자 관객, 시장이자 소비자, 이상이자 현실이다. 이러한 시장의 현실에 지배받는 민중, 시민, 국민, 제3세계, 그리고 자연은 바로 지배자들의 논리-현실의 논리-악몽의 논리를 따르고 복종해야 한다. 그런 복종을 이끌어내는 수단은 무수하다. 그러나 모든 지배 수단은 궁극적으로는 폭력에 기반하고 있다. 폭력이 최후의 수단인 것은 폭력의 효과가 큰만큼 폭력에 대한 반발력도 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장구한 실험의 역사를 통해서 배워서, 혹은 본능적으로-알고 있는 지배자들은 폭력을 대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도 가장 반발력이 적은 수단을 강구하기 마련이다. 그런 수단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지식, 이데올로기, 담론, 언론, 선전, 광고 등 인간의 정신적인 활동 일체를 담당하는 언어다. 촘스키 역시 언어학자답게, 혹은 다행히도 언어학을 전공한 덕분에, 그러나 아쉽게도 무의식적으로, “세상일을 잠시만 잊고 언어학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더 없이 행복할 것입니다.”(노엄 촘스키, 강주헌 옮김, ꡔ촘스키, 누가 세상을 지배하는가ꡕ, 시대의창, 2002, p.226.)고 말하는 그는 ‘세상일’과 자신의 전공인 ‘언어학’을 별개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이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언어를 통한 지배야말로 폭력과 유혈로 인한 비용과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언어는 비단 인간의 정신활동뿐만 아니라 그런 정신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욕망, 즉 정신과 물질을 매개하는 감각, 감정, 욕구, 충동, 욕정, 정보, 지식, 이상 등을 통어하는 욕망의 표현력의 견인차이기 때문이다. 촘스키가 이러한 욕망의 언어를 장악한 지배자들, 특히 언론 권력과 지식인들의 횡포를 질타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연창(連唱)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언어의 위력 때문일 것이다. 현실이 자신의 모순을 악몽의 논리를 통해서 벗어나고자 할 때 현실의 악몽은 폭력과 유혈의 궁극적인 무의미를 언어의 의미로 충족시키고자 하는 악몽의 현실이 된다. 본질적으로 그리고 자체적으로 끊임없이 부서지는 현실은 역시 스스로를 부스러뜨리는 언어를 통해서 현실성을 회복할 수 있다. 언어는 스스로 부서지면서 표현의 길을 개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의 언어 역시 표현의 욕망을 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언어 역시 제대로 된 표현의 자유를 누리자면 부서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촘스키가 연창하는 표현의 자유는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표출을 보장하라는 요구로서, 그런 다양한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 가능성이야말로 모순으로 가득한 현실을-여기서의 현실은 지배자들이 회복해야 할 그런 현실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무의미하게 만든 것을 피지배자들이 의미 있게 변화시켜야 할 현실이다.-제대로, 올바르게, 자유롭고 평등하게 회복시킬 수 있는 시금석이다. 즉 언어를 부스러뜨림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촘스키가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저변에는 이처럼 현실의 언어를 부숨으로써 보다 나은(?) 현실을 도모하자는 바램이 깔려있을 것이다.
촘스키가 보기에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가장 비열한 공범은 바로 이런 생산적인 언어의 쇄신이 아닌 낡은 언어, 현실이 되어버린 언어, 지배자들의 언어, 악몽의 언어, 현실의 언어, 기성의 언어를 독점하고 그런 곪아터진 언어의 현실성을 회복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지식인들과 그들 특유의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언어 행위일 것이다. 비록 이들 역시 쉼없이 언어를 부수고 있는 듯이 보이더라도 실상은 지옥의 아귀처럼 반복적인 언어 먹기-싸기, 현실을 악몽으로 만들고 악몽을 현실로 만들며 경화시키는 언어의 반복, 반복, 반복 생산에 몰두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지배 언어의 아귀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바로 미국을 본거지로 하는 다국적 기업들의 녹을 얻어먹고 씨부리고 긁어대는 주류 언론인들과 학자들과 갖은 문화 활동인들을 망라하는 지식인(知食人)들일 것이다. 촘스키가 비판하는 이른바 “책임 있는 지식인들”이 우글거리는 현실 속에서 그들의 글과 말이 아무리 진보적이고 인간적인 냄새를 풍기며 회자되더라도, 그들의 “책임”은 다름 아닌 강대국과 지배자들의 이익을 보장하는 자본주의 정신과 자본주의 욕망의 현실화=이상화=체질화에 있다. 그들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자본주의의 현실은, 저 지독한 맑스의 집요한 분석이 아니더라도, 자기 파괴적인 본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다름 아닌 그들의 글과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자본주의란 언어 외부의 현실이 아니라 언어 내적인 현실, 즉 언어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러한 자본주의라는 현실을 끊임없이 회복되어야 하는 현실로 이해하고 그를 위해서 노력한다. 하나 그런 회복을 위해서는 언어 밖의 실제의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파괴를 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 따라 현실 언어의 공장들, 언어의 시장들, 언어의 무대들, 언어의 스크린들에서는 자본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현실 비판=자본주의의 체질화가 만연되고 있다.
촘스키의 미국 언론과 지식인에 비판은 바로 자본의 불평등을 체질화시키는 미국의 언어적 현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보수적인 지식인들의 배역을 바로 무의미한-즉 “표피적이고 피상적인”-자본주의 가치를 미국인들이 추구할 만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선전하고 세뇌시키기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세뇌작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지식인들이 간택한 이상이 바로 자유와 평등이다. 이 이상은 보수 직식인들이 부추기는 표피적인 것에 대한 소비, 자본주의적인 노동, 자본주의 윤리, 그리고 ‘피치 못 할’ 침략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 혹은 ‘욕망’의 화신이다. 촘스키는 이런 주류-지배 지식인들의 부조리한 언어적 꼼수들을 문제삼는다. 즉 이들이 수행하는 자본주의 현실 비판은 본질적으로 진실-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촘스키는 보수 지식인들의 ‘현실 비판’을 ‘비판’이 아닌 ‘선전’이나 ‘세뇌’라고 ‘비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촘스키의 ‘비판’은 기실 칸트 이래로 수많은 학자들, 비평가들에 의해서 수없이 제기되어 온 비판이다. 칸트가 1784년에 발표한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라는 짤막하면서도 중요한 글을 보면 “사람들을 조야한 상태에 머물게 하려고 일부러 획책하는 자”들의 존재를 언급한 부분이 발견된다. 임마누엘 칸트, 이한구 편역,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ꡔ칸트의 역사철학ꡕ, 서광사, 1992, p. 20.
또한 미셸 푸코 역시 「계몽이란 무엇인가?」(1979년)에서 칸트의 이런 선의마저도 자칫 “계몽주의의 협박”을 초래할 수 있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하면서, 고고학적․계보학적인 비판의 중요성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Michel Foucault, ed. by Paul Rabinow, “What Is Enlightenment?,”《The Foucault Reader》(New York: Pantheon Books, 1984), pp. 42-43.
사실 푸코의 거의 모든 저작이 다루고 있는 문제가 바로 ‘권력에 의한 세뇌의 메커니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촘스키의 권력 비판 역시 이러한 인식들과 궤를 같이한다. 그는 미국의 정부와 기업에 기생하는 지식인들이나 기업의 광고 수주에 의존하는 언론인들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자행하는 보수주의적인 ‘비판’은 비판의 본령을 이탈한 선전활동이자 세뇌작업에 불과하며, 바로 이러한 세뇌작업의 결과 강화되는 주류 언론과 학계의 권력이 세상에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소수의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표현의 자유를 교묘하게 제한하고 억압함과 동시에 비주류 지식인들의 권력욕을 부추긴다고 주장한다. 그런 세뇌작업에는 신문, 잡지, 방송과 같은 언론에 의한 기사의 내용의 교묘한 은폐나 조작, 학교․가정․교회․직장․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예배, 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 조절책, 피상적인 소비욕을 부추기는 광고, 교양과 정보를 조작․관리하는 영화․출판 등의 문화산업, 법․의학․정치․경제․종교적 담론, 경찰․군사력의 시위 등 거의 모든 언어적 수단이 총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촘스키가 표현의 자유를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전방위적인 세뇌작업을 저지하고 대중의 각성을 촉발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중은 광고가 일차적으로 노리는 바는 잘 알지만, 광고가 우리의 언어와 욕망을 은폐․자극․왜곡함으로써 심화시키는 현실의 악몽과 자본주의 욕망의 메커니즘은 모른다, 아니, 차라리 모르고 싶어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수 지식인들의 현실 비판이 오히려 세뇌작업의 일환이라는 것, 위대한 이상의 이름으로 감행하는 전쟁은 궁극적으로는 무의미한 현실의 자기 파괴적인 승리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심지어 평화와 반전을 외치는 양심가들의 이상의 본질 역시 참혹한 갈등과 전화(戰火)를 부르는 합법적이고 도덕적인 탐욕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만들기란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릇 지식인의 본분은 어떤 형태로든 계몽, 즉 ‘비판’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문제는 비판이냐 세뇌냐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의 본령에 얼마나 충실한 비판을 하는가에 있을 것이다. 촘스키가 ꡔ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ꡕ를 통해서 추진하는 비판은 그런 점에서 반쪽의 비판에 머물고 있다. 즉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지배의 대상들이 존재하고, 그런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들의 그 ‘무엇’으로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지배관계 현실에 균열과 갈등이 발생하면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지배의 메커니즘에만 시선을 박는다. 촘스키 역시 지배자들과 지배의 부당함, 그리고 그런 부당한 지배 방식만 분석할 뿐, 피지배자들이 지배당하는 이유, 즉 ‘피지배의 메커니즘’을 단순한 언론 공작과 세뇌 외에는 거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언어의 아귀들은 그렇다 쳐도 촘스키마저도 계몽의 장애물을 지배자들의 책동에서만 찾지, 오히려 가장 시급하고 필수적인 계몽의 대상이 되는 민중에게서는, 예컨대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미국민들에게서는, 찾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하다. 촘스키가 ꡔ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ꡕ를 통해서 노리는 목표가 단순히 “지난 세월 미국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잘 아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런 반쪽짜리 비판이 유발할 분노와 증오 만큼은 촘스키가 덤으로 우리에게 주는 괴로운 선물(?) 정도는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평등과 자유를 추구한다”는 그의 “희망”적인 인간관은 머나먼 이상=눈앞의 악몽으로 남을 뿐이다. 특히 이른바 ‘눈물 젖은 빵의 논리’ 하나만으로도 ‘피지배 메커니즘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다고 믿는 한, 희망의 보답으로 주어질 것은 악몽의 현실밖에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안일한 지식인들의 희망이 미국인들, 더 나아가 제3세계의 민중들로 하여금 지난 세월 미국이 저지른 짓을 정당한 것으로, 아니면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여기에 만드는,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적어도 그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치졸한 현실의 논리를 제공했고 또 제공할 수도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 대담집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민중으로서의, 인간으로서의 미국인들에 대한 촘스키의 태도는 지극히 이중적이고 모순적이다. 그는 대담집의 말미에서 미래의 희망이, 즉 “모든 것이 환경, 그리고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개인은 다름 아닌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인간일 것이다. 그러나 대담의 서두에서 그가 “민중이 우리 멱살을 잡지 않도록 민중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랄프 왈도 에머슨의 말을 인용할 때의 민중은 지식인들이 순종적으로 길들일 수 있는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로 간주된다. 특히 그는 “……윌슨의 선전 조직이 근본적으로 평화주의자이던 미국민을 광적인 반독주의자로 바꿔놓았다”는 식으로 미국민, 즉 민중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여러 차례 피력한다. 그런데 촘스키가 제시하는 대안은 이런 모호한 성격의 민중의 각성․연대․조직화와 지배자들에 대한 정보수집․저항․전투를 통한 평등과 자유의 획득이다. 과연 민중에 대한 이 정도의 이해만으로 최근 미국인들이 부시 행정부에 보낸 과반수 이상의 지지율을 설명할 수 있을까? 촘스키의 시각에서 보면 미국인들은 본디 평화주의자인데, 부시와 그 일당들, 즉 부시 정부와 부시의 당선을 뒷받침한 다국적 기업들과 언론들이 짜고 벌인 교묘한(?) 선전 활동과 세뇌작업이 개인적인 선택 능력이 있는 착하고(?) 자율적인 미국인들의 판단력을 흐려 이라크 침략을 지지하도록 유도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선택을 한 미국인들이 있다 해도 반전시위에 참가하거나 반체제적인 의견을 표현함으로써 당할 모종의 불이익 때문에 침묵하거나 기권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부시 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소수일 것이다. 어쨌거나 촘스키가 제시하는 주목할 만한 문제는 다수의 미국국민들이 비단 이라크 문제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의 거의 모든 부문에서 세뇌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미국인들은 자본주의적인 욕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본주의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그 가치의 획득량에 따라 자유와 평등의 향배가 갈린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미국인들의 가치를 위협하고 자유와 평등을 침해할 수 있는 이라크는 응징받아 마땅하다는 논리를 낳는다.
그렇다면 촘스키는 이처럼 세뇌된 수많은 미국인들의 각성, 연대, 저항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믿고 최선을 다해서 진실만을 폭로하는 것만이 지식인들이 할 최고의 역할이라고 믿는 것일까?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어기찬 지식인들의 진리탐구가 초래한 가공할 역사의 참상들을 촘스키도 충분히 알리라. 그 참상들의 원인은 흔히 지배자들의 실책이나 비도덕성, 잔인성, 탐욕 따위에 돌려지곤 한다. 언제나 피지배자들인 민중은 그래서 지식인들로부터 동정과 면죄부, 그리고 억울한 감정과 분노를 선사받는다. 그들 고유의 가난과 고통과 무지와 무의지를 지식인들에게 대가로 지불함으로써. 그리하여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명인 비판의 총구를 민중을 지배하고 착취하고 괴롭히는 탐욕스런 지배자들을 향해서만 조준할 수 있는 정의(正義)의 사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의의 총성의 메아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배자들의 몰락이나 회개가 아니라, 자신들이 민중을 계몽하는 순간이면 얼떨결에 자인하고 마는 민중의 미숙함, 조야함, 어리석음, 나태, 수동성, 비겁, 무지, 무의지의 창궐만을 목도하게 된다. 공자, 석가, 예수, 소크라테스 이래로 거의 모든 지식인들을 괴롭혀 온 가장 큰 딜레마가 바로 이런 민중의 현실과 계몽 가능성, 그리고 그들의 인간성! 사이의 배리(背離)라는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악몽 같은 진실일 것이다.
그런데 촘스키는 지식인을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자와 진실을 말하는 자로 구분하면서 진실을 말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촘스키는 스스로를 진정한 지식인으로, 아니면 최소한 그런 지식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식인의 운명이랄 수밖에 없는 계몽의 사명이 제기하는 이러한 딜레마 앞에서 목도하는 진실을 말하기란 단순히 민중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용기와 의지를 필요로 한다. 전자의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지식인은 지배세력과 피지배층, 주인과 노예, 부와 빈곤,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과 같은 이분법적이고 대립적인 논리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도대체가 인식의 아교라 할 만한 이런 이분법적인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편협한 세계관, 편협한 인간관에 다름 아니다. 촘스키처럼 민중을 변호하고 지배자들을 비판하는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언제나 민중의 고통의 원흉을 그 대립자인 지배자들에게 전가시키고, 그런 지배자들을 민중의 부자유, 불평등, 고통으로부터 이익을 약취하고 독점적으로 향유하는 비도덕적, 비인간적(?), 비윤리적인 악마들로 비난하면서, 그 탐욕스런 악마들이 착취한 민중의 고혈과 그 탐욕스런 권력자들이 제한한 민중의 표현의 자유를 반환하라고 제창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악몽의 현실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오직 지배자들의 욕망과 논리와 작태만을 분석하여 그들의 비도덕적인 면모를 백일하에 드러내어 ‘알게 하고’, 민중을 위한, 즉 자유와 평등을 위한 대항의 논리를 수립하고, 그 논리에 준하여 조직적인 연대와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비판하는 민중의 대변자로서의 지식인들은 정작 진실로 탐문해야 할 문제를 놓치고 있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벗어나지 못한 무지 중의 무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이분법적인 대립자는 본질적으로 양쪽 공히 동일한 가치를 가치평가의 공준(公準)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흔히 민중의 가난과 지배자들의 부를 비교하면서 지배자들의 부를 부당한 것으로 비판하는 지식인들이 허다한데, 그들은 민중과 지배세력 양자가 공히 가난과 부를 좌우하는 가치-예컨대, 미국이라면,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견인차로서의 자본을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로 공준하고 있다-를 공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자신들을 그런 공준에 사로잡힌 양자 중 한편에-비판이라는 명목으로-편입시킴으로써 비판자가 아닌 비난자가 되고 만다. 문제의 본질은 누가 그처럼 공준된 가치를 더 많이 혹은 더 적게 혹은 평등하게 소유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공준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리고 그런 공준의 가치를 인정할 경우와 무시할 경우에 빚어지는 효과의 치명도나 행복도에 있을 것이다.
현실의 자기 파괴-불평등, 갈등, 투쟁 등-의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공준된 가치의 종류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이다. 이런 공준된 가치를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은 주로 언어적인 표현을 통해서 욕망을 충족코자 한다. 이러한 욕망의 언어는 자체의 부단한 부서짐, 곧 다양화를 통해서 현실이 자기 파괴 과정을 거쳐 파멸로 이어지는 것을 막으면서 현실의 현실성을 회복시킨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은 자신의 현실성을 회복하면서 소비하는 언어의 파산을 막지 않으면 즉시 스스로를 부스러뜨리기 시작해야 할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그를 막기 위해서 현실은 언어의 파산을 제어하는 반현실=이상=공준된 가치를 간택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이 간택하는 이상은 공준된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최고의 언어인 동시에, 산산이 부서져도 파산을 면하는 언어의 정수이자 정화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이상은 현실 속에서만 꽃필 수 있고, 또 현실에서 꽃피기를 원하는데, 그 발화의 욕구가 강한 만큼, 다시 말해서, 표현의 욕구가 강한 만큼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있다. 이렇게 볼 때 현실은 이상의 죽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지배자든 피지배자든 지식인이든 ‘똑같이!’ 자본의 평등과 표현의 자유를 공준의 가치로, 위대한 이상으로 추앙하는 한, 모두는 자기 파괴적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의 현실은 바로 이러한 공준의 가치를 놓고-이른바 ‘누가 지배하는가?=누가 많이 가지고 있는가?’를 따지며-자기 파멸적인 사투를 벌이는 늪의 형국일 것이다. 드리워진 덩굴은 하나요 빠져드는 사람은 점점 더 늘어나는 이 비극의 늪은 지배자나 피지배자, 지식인(知食人)들이나 지식인(知識人)들 모두에게 악몽의 현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촘스키는 이런 악몽의 현실을 이상적인 현실로 변화시키기를 희망하고 민중의 각성과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해 왔겠지만, 지금까지의 민중의 각성은 기껏해야 자신들의 현실을 지배하는 자들 혹은 세력이 대략 누구이며 또 무엇으로 지배하는 지를 알았다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특히 촘스키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차이를 저 낡고 낡은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기폭제가 되는 대립적이고 소유론적인 차이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있는 경향이 다분하다. 그러나 이러한 헤겔적인 차이는 지극한 동어반복만을 환산(幻産)하는 차이로서, 이런 차이의 각성을 통해서 벌이는 변화의 노력은 현실의 악몽만을 부추기고 강화시킬 뿐이다.
요컨대, 양자가 공준의 가치, 즉 동일한 가치관, 동일한 이상을 기준으로 양자의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고 동일한 이상을 추구하면서-혹은 추구한다는 선전을 하고-서로의 동일한 욕망을 상대하는 한, 그리고 그런 ‘차이 아닌 차이’의 비판과 계몽을 통하여 동일한 이상을 수단으로 현실의 변화를 꽤하는 한, 모두는 ‘이상적인 현실’이나 ‘현실적인 이상’이 아닌, 악몽의 현실 혹은 현실의 악몽의 쳇바퀴만을 맴돌 것이다. 이 쳇바퀴 속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끊임없이 실족되면서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란 질문만 끝없이 반복되고,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무리들 간의 넌덜머리나는 이해다툼만이 반복되며, 동일한 가치관과 동일한 욕망, 에오라지 자본주의적인 욕망-그것을 도적으로 비난하면서 ‘탐욕’이라고 부르든,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 ‘인권’이라고 부르든-만을 향해서 때로는 아귀처럼 때로는 부나방처럼 달려들어 욕망의 혀를 치대는 자들만 정상적인 인간으로 취급될 것이다. 또한 이 쳇바퀴 속에서는 자유와 평등을 위한 전쟁을 정당화하는 껍질만 남은 현실과 이상의 끝없는 반역야합(反逆野合)이 악몽의 현실을 영구화시키고, 저 불가사의한 희망과 절망의 증오와 시샘이 끊일 줄을 모른다. 그리하여 오로지 자본주의적인 욕망만을 강요하는 악몽의 메트로놈에 매달린 지배자들이, 민중이, 지식인들이 창궐하는 지구라는 늪도, 그런 미국인들의 천국인 미국도, 그런 한국인들의 연옥인 한국도, 그런 이라크인들의 지옥인 이라크도, 급기야는, ‘누가 더 많이 돌았나?’를 따져대며 파멸적인 경쟁을 벌이는 자본주의의 쳇바퀴로 전락할지 모른다.




김성균
-1970년 경남 마산 출생 ․숭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부 및 대학원 졸업(석사)
-논문 <헤겔의 변증법적 이성과 인정투쟁 이론에 대한 비판적 고찰>
<서구 자본주의에 대한 제3세계의 강박적 욕망과 그 전망>
-역서 <명상(가제)>(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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