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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소설 계간평> 불혹 작가들의 유혹과 그 향방/김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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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543회 작성일 04-01-25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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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 작가들의 유혹과 그 향방


김 동 윤
(문학평론가)



눈뜨면 들려오는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그것은 일용할 양식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명분을 내세운 유신헌법은 금과옥조인가 여겨졌다. 그런 훌륭한 일을 오랫동안 밀어붙이는 키 작은 그 사람만 대통령을 하는 줄 알았다. 박스컵 축구대회에 열광하면서 그가 없는 세상은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그가 심복의 총탄에 죽었다. 다른 세상이 오는 것 같았다. 그가 없으면 뭔가 크게 잘못될 것처럼 말하던 사람들까지도 봄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노래는 곧 멈춰졌다. 흑백 텔레비전에 나와 ‘본인은’을 연발하던 군인이 그 자리를 차고 앉으면서 자신의 근엄한 자태를 총천연색으로 보여주었다. 세상은 달라지지 않은 채 ‘선진조국 창조’․‘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깃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1960년대 초반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이들은 이러한 환경을 먹으며 성장했다. 그들은 학교 다니던 기간 대부분을 유신어린이회와 학도호국단의 일원으로서 한국적 민주주의를 토착화하고 북괴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는 데 이바지(?)했다. 그런 그들이었기에 이면의 숨겨진 진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게 되자 겉잡을 수 없는 배신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로 대학생이 되면서 맛본 그들의 배신감은 자연스럽게 1980년대의 민주화투쟁으로 분출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 그 몇 년 후배까지를 포함하여 ‘386’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이 붙여졌지만, 이제 그들이 40대가 되었으니 486이라고 해야 하나? 제 일이 아닌 것에 홀리지 않을 나이라는 ‘불혹(不惑)’. 21세기가 되면서 불혹에 이른 그들의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현현(顯現)되고 있을까. 현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금 삶과 현실의 문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한편 새로운 모색을 시도하고 있을진대 그 변화의 양상은 어떤 형국일까.
특히 20~30대를 열정적으로 살다가 불혹을 맞닥뜨린 작가들의 향방은 국내외 새로운 정세의 흐름과 더불어 관심을 끌 만한 부분이 된다. 그들은 불혹에 즈음하여 문학적 항해에 어느 쪽으로 키를 잡았을까. 우리는 40대 초반인 정도상․공선옥․한창훈이 최근에 내놓은 장편소설들을 통해 그 향방의 일단을 짚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 작품들이 퍽 주목할 만한 유혹을 보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체 그 유혹은 어떤 색깔일까.

1. 개발독재에 묻힌 아스라한 희망의 행방―정도상의 ꡔ누망ꡕ
ꡔ누망ꡕ(실천문학사)을 낸 정도상은 1960년 생이다. 그는 자신이 막 태어나던 시대에 주목했다. 그는 1960년대 초반에 대한 주도면밀한 탐색을 통해 오늘의 현실까지도 꿰뚫어 조망하고 있다.
ꡔ누망ꡕ은 가느다란 희망의 한 가닥이라도 붙잡으려고 애처롭게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사연은 서울 양동․전라북도 군산․강원도 영통․제주도 모슬포 등지로 전국 각처를 옮겨다니지만, 희망은 한 오라기도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이 작품은 3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엘리베이터 살인 사건’․‘사랑, 그게 뭔데요?’․‘누망’ 등 3개 장만이 현재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나머지는 대부분 1961년 봄부터 1962년 초까지의 상황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야에 유방암에 걸린 것을 확인한 60대 중반의 여인이 회칼과 숫돌을 구입하여 칼을 간다. 그녀는 40년 동안 한순간도 잊은 적 없던 동년배의 남자를 향해 그 칼을 찌른다. 그녀는 자신과 연인을 절망으로 밀어놓은 그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서 회칼을 휘둘렀지만 죽이지 못하고 살인미수범으로 재판받으며 생의 마감을 준비한다. 그녀는 손녀딸과도 같은 국선변호인 채운주에게 살아온 내력을 털어놓는다. 그 여인은 배길자이고, 40년 전에 죽은 그녀 연인은 김영식이며, 칼에 찔린 이는 이영필이다. 그들은 모두 군산의 희망보육원 출신이다. 희망보육원 동기인 그들의 희망은 무엇이었고 어떤 굴곡에 처하는가.
김영식의 어릴 때 별명은 예삐였는데 싸움을 잘했다. 보육원 시절 그는 양아치 재크(병수)가 길자를 겁탈하려던 것을 막는 과정에서 잭나이프에 귓바퀴 윗부분이 잘린 이후 짝귀라는 다른 이름을 얻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짝귀는 길자가 보육원 원장에게 성폭행당해 온 사실을 알게 되자 격렬하게 항의하고 나서 상경한다. 그 8년 후인 1961년 봄, 그는 남산공원 언덕에 자리잡은 씨라이막(넝마주이막)의 조마리(왕초)가 되어있었다.
이영필의 아버지는 일제 때 전주경찰서 고등계 형사였다. 해방과 함께 어머니가 뭇매 맞아 죽었지만, 아버지가 미군과 가깝게 지내면서 왕자처럼 대접받고 살았다. 그러다가 전쟁통에 아버지가 전사하자 희망보육원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는 짝사랑하던 여고생이 자신을 후원하던 미군과 나이트클럽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상경해 폐인처럼 지내기도 했으나, 짝귀 등의 도움으로 육사에 진학하여 장교가 된다. 1961년 봄에 그는 제주도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배길자는 보육원에서 나와 서울 거리를 거지처럼 떠돌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식모살이나 할까 하고 직업소개소를 찾아갔던 것이 화근이 되어 창녀로 전락했다. 한일여관이 그녀의 직장이자 거처로, 그곳에서 혜영이로 불리는 그녀는 3년 동안 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짝귀와 다시 만난 때는 이미 그녀가 양동의 창녀가 된 다음이었다. 1961년 5월에도 그는 여전히 몸파는 여자였다.
이 세 사람에게 5․16쿠데타라는 역사의 광풍이 몰아친다. ‘재건’ 구호가 난무하면서 사회정화의 대상으로 찍힌 짝귀는 국토건설단에 끌려가는 처지가 된다. 장교에게는 유배지나 다름없는 제주도에서 근무하면서도 출세길만을 찾던 영필은 정치범으로 수배돼 도피생활을 하던 친구를 밀고하고 부잣집 딸인 그의 여자까지 빼앗음으로써 출세의 발판을 마련한다. 짝귀의 청혼을 애써 거절했던 길자는 창녀촌을 도망 나온 후 국토건설단에 끌려간 짝귀를 만나려고 강원도를 거쳐 제주도에까지 찾아간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대우 속에서 한라산 횡단도로 건설에 동원되던 짝귀는 동료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고 길자를 만나기 위해 탈출하다가 영필의 총에 맞아 죽는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여겨볼 인물은 영필이 아닌가 한다. 영필은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체현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던 논리에 충실했던 영필은 철저하게 권력 지향적이며 냉혈한인 인물이다. 그는 소년기부터 말년까지 줄곧 그런 삶을 영위한다. 그는 일제 고등계 형사로 활동하는 아버지를 자랑으로 여겼다. 아버지의 세 번째 여자를 자연스럽게 어머니라고 불렀고, 보육원 원장의 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조사 나온 형사들에게 발설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다. 수배자의 신분으로 믿고 찾아온 친구 범택을 밀고하여 10년형을 받게 만든다. 게다가 범택의 애인인 인희를 차지하기 위해 보안대에 있는 친구에게 그녀 아버지의 약점을 알아낸 후 그것을 미끼로 결혼에 성공한다.

사랑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인 것을. 권력을 낳는 것은 관계였다. 권력을 낳지 못하는 관계는 아예 맺지 않는 것이 좋다. 반드시 권력을 잉태할 관계가 필요했다.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장군의 칼, 장군의 계급장, 장군의 지휘봉을 가질 수 있는 관계라면 반드시 손에 넣고 말리라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318쪽)

그는 오로지 권세만을 추구했다. 그러니 국토건설단의 일원으로 자기 부대에 온 짝귀를 보고서도 출세가도에 지장이 있을까봐 안면 몰수 했으며, 결국에는 짝귀를 총으로 쏘아 죽이기에 이른다. 그는 희망하던 대로 중장까지 오르는 영예를 누렸다. 군복을 벗으면서도 정부 산하 공사의 사장으로 낙하산을 타고 임명되었다. 길자의 칼에 찔린 이후 그는 무기구매사업단장으로 재직할 때 뇌물을 받았던 것이 들통나 구속되는가 하면 아들의 병역을 불법적으로 면제받게 했다는 의혹도 사게 된다. 그는 과연 죗값을 달게 치르게 될까. 그 점에 대해서 작품에서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결과는 거의 분명하다. 아직도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반면, 단지 ‘한 가닥 실낱 같은 희망’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억울함으로 요약된다. 짝귀도 그렇고 길자도 그렇고 밑바닥 인생들이 대부분 그렇다.

어서 빨리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 길자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억울했다.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끌려와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좀도둑질은 약간 했었다. 그 때문에 받아야 하는 형벌이라면 너무 가혹했다. 군인들의 혁명에 왜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양동 골목에서 깽판을 친 것? 그게 그토록 큰 죄였던가?(347쪽)

국토건설단으로 끌려가 3년 동안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짝귀는 억울했다. 약간의 좀도둑질과 창녀촌에서 깽판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다는 것이다. 같은 국토건설단원이던 씨발낙지는 술 한잔 걸치고 시비 붙어 싸우다가 잡혀왔고, 당나구는 깡패도 소매치기도 아니었는데 지서 차석한테 미움 사서 끌려왔다.
길자는 짝귀를 잃은 후 공순이로 행상으로 김밥장사로 전전하면서 40년을 견뎌왔다. 그런 속에서도 고아원에서 데려온 딸들을 셋이나 키워냈다. 임종을 앞두고 길자는 ‘연립주택 반지하의 전세금은 찌끼미한테 기증한다. 통장에 들어있는 삼억 원 중에서 장례비를 제외한 모든 잔액은 희망보육원에 기증한다. 화장해서 남산공원에 뿌려줄 것.’이라는 유서를 썼다. 그러나 그녀는 유서를 쓰고 나서도 홀가분해지지 않았다. 너무 억울했기 때문이다. 세월을 돌이켜볼수록 “억울해. 정말 억울해.”(359쪽)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영화 「친구」라든가 드라마 「왕초」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만큼 잘 읽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짝귀․재크․찌끼미 등의 결투 장면(야만성), 창녀촌의 일상과 영필․혜정의 정사 장면(관능성), 끝내 이루지 못하는 짝귀와 길자의 애절한 사랑(감상성), 토깽이의 어리숙함을 찌끼미가 놀려먹는 장면(해학성) 등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는 점은 이 소설을 잘 읽히게 만드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가 1960년대 초반의 생활사를 꼼꼼하게 그리려고 한 점도 주목된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라는 가요가 등장하고 도라지 위스키와 다이알 비누, 금관 담배, 시레이션 깡통, 미8군의 피엑스 물건, 대한뉴스와 리버티뉴스가 나온다. 당시 서울 풍경은 “전차, 시발택시, 승합버스, 마차, 소구루마, 자전거, 손수레, 지게가 서로 엉켜 도로를 꽉 메우고 있었다. 군데군데 말똥과 소똥이 떨어져 있어 말을 타고 다니는 순경이 그 주인들한테 똥을 치우라고 호통을 쳤다.”라든가 “시커먼 물 위로 개구리참외만한 똥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녔고, 바닥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처박혀 썩고 있었다.”(26쪽)는 식으로 그려놓는다. 좀 이상하면 간첩이 아닌가 의심부터 하고 보던 세태도 잘 형상화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디테일의 불충실을 드러낸 부분도 없지 않다. 특히 작품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국토건설단과 제주의 5․16도로 건설에 관련된 부분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국토건설단은 1961년 12월에 국토건설단설치법(법률 77호)에 의해 설치되었고 1962년 2월 중앙청 강당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따라서 이 소설에서 1961년 5월부터 국토건설단이 활동하는 장면들이 그려진 점은 문제가 있다. 1961년의 상황에 “한라산 자락을 관통해 서귀포에서 제주시까지 이어야 하는 새로운 신작로의 이름은 5․16도로였다.”(236쪽)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 도로의 기공식은 1962년 3월에야 있었으며 ‘5․16도로’란 명칭이 생긴 것도 1967년 4월의 일이다(김봉옥, ꡔ증보 제주통사ꡕ, 324쪽; 제주도, ꡔ제주도지ꡕ 제2권, 1163쪽). 또한 작품 속에 ꡔ선데이 서울ꡕ이 등장하지만(34, 124쪽), 그것은 1968년에야 창간된 잡지였다(한국잡지협회, ꡔ한국잡지 100년ꡕ, 289쪽). 라디오에서 패티김의 「초우」가 흘러나온다면서 그 가사까지 제시하고 있지만(247쪽), 박춘석 작사․작곡의 이 노래는 1966년에야 발표된 것이었다(이영미, ꡔ한국 대중가요사ꡕ, 152쪽).
이 작품은 육중한 메시지와 지순한 사랑과 통속적 요소를 적절히 엮어냄으로써 시종일관 독자의 눈길을 집중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마치 잘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독자들을 빨려들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위에 예시한 사항과 같은 세부묘사의 문제를 드러낸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그것이 작품의 결정적인 흠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7년 동안 공들였다고 하는 작가의 노력에 걸맞지가 않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역사의 광풍에 철저하게 희생된 사람들과 오로지 권력만을 지향한 인물을 대비하여 제시함으로써 변한 게 없는 현실의 참모습을 진지하게 드러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정도상은 좀더 대중적인 이야깃거리로써 자신이 줄곧 견지해온 현실에 대한 통찰을 지속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2. 여성 현실에 대한 신념과 그 진폭―공선옥의 ꡔ붉은 포대기ꡕ
1963년생인 공선옥은 ꡔ붉은 포대기ꡕ(삼신각)에서 그 동안 견지해 온 제 색깔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었다. ꡔ수수밭으로 오세요ꡕ에 이어 ꡔ붉은 포대기ꡕ에서도 무대를 농촌으로 설정한 공선옥은 여성 현실에 대한 신념을 확고하게 보여 주고 있다.
서른다섯 살의 미혼녀 인혜는 사랑의 상처를 안은 채 미술학원을 운영하며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자신을 배신한 남자가 오라는 파리로 가볼까 하다가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고향 신평으로 향한다. 불이 났던 사랑채가 제대로 수리되지 않아 건물 한쪽은 아예 주저앉은 모습을 한 고향집은 ‘귀곡산장’(198쪽)이나 다른 바 없었다. 인혜를 둘러싼 사람들의 삶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위암에 걸린 어머니(영매), 치매에 걸린 할머니(복녀), 그리고 정신지체 장애인인 여동생(수혜) 등의 심각한 환자들이 그가 고향집에서 상시로 돌봐줘야 하는 식구들이다. “영매는 언제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고 (……) 망령이 든 복녀 수발을 할 사람이 없고 수혜는 생의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의 나이 먹기를 멈춰버렸”(25쪽)으니, 인혜는 정신적․육체적으로 숨막힐 지경이다. 전처 소생들에게 집착하면서도 아내에게는 냉담한 아버지(희조)도 거의 집일을 돌보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서울에 사는 의사인 큰오빠(태건)와 올케(화숙), 고향에서 부모의 속을 썩이며 망나니처럼 살아가는 작은오빠(태준)와 올케(경자) 부부의 일도 만만치 않다. 큰오빠 내외는 추석을 쇠러 고향에 왔다가 부부싸움을 벌인 후 이혼 운운한다. 읍내에 거주하는 태준은 스무 살 난 딸을 두었으면서 바람을 피워 이혼 직전에 있는 상황이다. 읍내의 꽃집여자와 사랑했는데 그녀가 죽었다는 것이다. 남편과의 불화를 견디지 못한 경자는 종적을 감추기도 한다. 고종사촌인 정식네도 다를 바 없다. 정식의 아내(묘자)는 도무지 남편과 못살겠다며 인혜에게 서울 갈 때 데려가 달라고 간청한다. 정식은 애당초 묘자와 애정 없는 결혼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라비 내외들의 세계는 오늘날의 30~40대 부부들이 지닌 애정관과 가족관에 대한 작가의 문제제기임은 물론이다.
이처럼 이 작품은 부모와 형제자매가 오순도순 지내지 못하고 부부 사이도 원만하지 못한 모습들을 주로 비춰주고 있다. 모두 뿔뿔이 헤어지고 다투는 문제 가정의 모습을 두루두루 다루고 있기에 독자들은 읽는 동안 혀를 차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뒤얽힌 실타래 같은 양상은 수혜로 인해 더욱 심각해진다.
낮은 정신연령을 지닌 장애여성인 수혜는 30대의 노처녀다. 그런 그에게 남자가 생겼다. 외딴집에 사는 정욱의 대학 후배 한지섭이다. 지섭은 10년간 일해온 출판과 잡지를 겸하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하면서 머리도 식힐 겸 시골에서 살고 있는 중이었다. 수혜가 지섭의 집을 드나들더니 급기야 거기서 잤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데, 수혜와 결혼할 수도 있다던 지섭은 소동 직후 잠적해 버린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가 떠난 후 수혜가 임신한 사실이 밝혀진다.
수혜의 임신에 대한 인혜와 어머니의 생각은 달리 나타나는데, 그것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문맥으로 볼 수 있다. 인혜는 “수혤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 그래서 수혜가, 세상에 대한 저항 능력도 없는 수혜가 아이를 낳도록 내버려두는 건, 수혜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만큼이나 또 하나의 폭력”(245쪽)이라며 아이를 낳아선 안 된다고 역설한다. 반면 어머니는 “그 애도 본능이 있고 이성이 그립고 아이도 갖고 싶고. (……) 그 앤 그 남자가 좋았을 거야. 그래서 같이 잠을 잤고 그래서 아기도 가진 걸 거야. 그러니까, 우린 수혜랑 수혜 사랑이랑 수혜 애기를 지켜줘야 해.”(244쪽)라며 무슨 일이 있어도 수혜의 아이를 낳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혜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를 지우기 위해 수혜를 병원에 데려간다. 그러나 수혜는 수술이 무섭다며 도망친다. 그것은 중절수술을 하지 않겠다는, 아이를 꼭 낳고 싶다는 수혜 나름의 의견표현 방식인 것으로 보인다. 인혜는 처녀 때 낙태한 경험이 있는 반면 어머니는 처녀로서 아이(태준)를 낳았었는데, 그런 모녀의 과거는 사랑과 출산에 대한 각 세대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결국 어머니의 생각대로 수혜의 아이는 지켜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처지이든 사랑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존중되어야 한다는 작가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아이를 지켜내고 나서 어머니는 죽음을 맞는다. 어머니의 죽음은 뿔뿔이 흩어진 문제의 가정에도 끈끈한 가족애가 저변에 흐르고 있었음을 확인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행방을 감췄던 경자가 돌아와 태준과 화해 무드가 조성되는가 하면 갈라선다던 태건 부부도 함께 모습을 나타낸다. 특히 작가는 사랑과 포용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매개물로 ‘붉은 포대기’를 잘 챙겨 놓았다.
황희조(아버지)는 아내 영매의 초상을 치른 후 안방의 반다지에서 온갖 것들을 꺼내서 분류한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찾는데 그것은 붉은색 무명 포대기였다. 그 포대기는 태건, 명혜, 태준, 인혜, 수혜 업어 키운 것이다. 이들 다섯 남매 중에는 희조 첫 부인이 낳은 아이가 둘(태건, 명혜)에 영매가 낳은 아이가 셋(태준, 인혜, 수혜)이며, 희조의 아이가 넷(태건, 명혜, 인혜, 수혜)에 영매의 죽은 애인의 아이가 하나(태준)이니 꽤나 복잡하다. 희조가 포대기를 찾는 것은, 아내가 살아있을 때 태준을 지나치게 구박하는 그를 보고 “내가 봐도 당신이 나빠. 평생을 살아도 왜 정을 못 주고 애먼 애만 가지고 지랄 발광이야, 엉? 난 태건이, 명혜도 태준이나 인혜나 수혜나 똑같은 포대기로 똑같이 업어 키웠어, 그런데 당신은 뭐야.”(196쪽) 하고 악을 썼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리라. 황희조는 포대기만이 아니라 하얀 무명 배내옷, 강보, 기저귀, 발싸개, 손싸개, 모자, 턱받이 등을 줄줄이 찾아낸다.

등에서는 땀이 삐질삐질 솟아난다. 등허리도 받친다. 그러나 아기를 내려놓을 수는 없다. 내려놓기만 하면 아기가 울어서가 아니다. 땀도 나고 등허리도 아프지만, 그보다는 그 등허리에서 잠든 아기의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황영감은 그렇게 듣기 좋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포대기 따로, 아기 따로, 업은 모양은 엉성해도 황영감은 포대기끈을 풀 수가 없다. 신평 황영감네 집 앞 은행나무 위에서 매미가 맹렬하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매미는 울어대도 아기는 황영감이 두른 붉은 포대기 속에서 잘도 잔다.(289쪽)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포대기로 수혜의 아이를 업은 황희조의 모습은 영매의 의도가 그대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남성들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 시각이 편견에 의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농촌이 황폐화하는 상황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도 이 작품의 도처에서 포착된다. 농촌의 위기와 변모 양상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점은 작가의 근래 작품에서 두드러진 부면이다.
한때 새로운 터전으로서의 면모를 그런대로 유지했던 신평(新平)이라는 농촌은 사람 소리 대신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리는 쇠락한 마을이 되고 말았다. 사람이 없으니 폐가가 많다. 그런데 그 마을 입구 근처에 신축한 지 얼마 안 되는 모텔(식당 겸 모텔)이 들어서 있다. 그 모텔 이름은 ‘파라다이스’이며 주인은 정식이다. 정식은 여느 농촌총각들처럼 내내 장가를 못 갔다. 그러다가 강가의 배나무밭 갈아엎고 빚을 얻어서 파라다이스모텔의 사장이 되니 색시감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서른일곱 살의 변호사인 동생 정욱은 형에게 농촌 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며 러브호텔을 그만두고 농사짓길 권한다. 이에 정식은 “농사? 내가 농사지을 때 나한테 어떤 년 하나가 오지 않더라. 그래도 딱 이거를 하니까 엄청나게 꼬여들더만. 내가 더러워서 잘난 년들 다 뿌리치고 불쌍한 니 형수 같은 여자 데려왔던 거다. 니가 농사짓는 사람의 심정을 알기나 하냐? 농사는 취미가 아냐, 마. 너 옛날에 순전히 폼으로 운동한다고 그 난리 칠 때 마, 나는 시골에서 뼈빠지게 농사졌어, 마.”(107쪽)라고 응수하더니 급기야 “흥, 삼팔육? 차라리 씹팔육이라고 해라.”(108쪽)고 쏘아버린다. 모텔 마당에는 대낮인데도 차들이 빽빽하고, 농부들까지도 이젠 모텔에서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 농촌을 보고 인혜의 옛 애인 윤호는 “야아, 정말 좋타아, 인혜 너 여기 정말 잘 내려온 것 같다.”(179쪽)고 탄성을 지른다. 농촌에 대한 어긋난 인식과 현장의 실상이 의미 있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남자는 별로 긍정적 인물들이 아니다. 대부분 여자들을 이용하려고만 한다. 애인 윤호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다. 그러면서도 5년 만에 나타나 일주일에 한번씩 인혜를 만나 즐기고 돈까지 뜯어간다. 지섭 역시 아무도 모르게 수혜 곁을 떠난 뒤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며, 얼마 후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에 태준은 “배운 년이나, 못 배운 년이나, 사내새끼들한테 당하고만 있”(224쪽)다며 흥분한다. 여기서 우리는 여성해방은 남성과의 대립구도에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님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해방은 남성해방이기도 하고 그것은 결국 인간해방의 길임을 작품 속에서 의미 있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ꡔ붉은 포대기ꡕ는 그 가능성이 드러나는 작품임은 분명하다. 다만 좀더 정치하고 심도 있는 탐색을 지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공선옥의 우직함과 당당함은 기교와 세련에 치우치기 쉬운 이 이대에 귀감이 될 만하다.

3. 생명과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의 성과―한창훈의 ꡔ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ꡕ
1963년 생인 한창훈은 ꡔ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ꡕ(창작과비평사)에서 유년과 근원으로의 복귀를 통해 현실의 성찰을 도모하고 있다. 1999년에 ‘산문소설’이라는 이름으로 낸 ꡔ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ꡕ와 맥을 같이하는 장편으로, 두 작품 모두 거문도가 공간적 배경이다. 거문도는 한창훈이 생후 8개월부터 열 살 때까지 10년 동안 살았던 곳이다. 그는 다시 그곳을 찾아감으로써 ‘무한정의 적막과 맞대면’하면서 이 시대 사람들 모두가 성찰해야 할 바를 꿰뚫어 제시하였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목요연하게 꿸 만한 줄거리를 가진 작품이 아니다. 섬에서의 생활을 12개의 연작 형태로 에세이를 쓰듯이 차분하고 찬찬하게 풀어 나간다. 1인칭 화자는 외딴섬 안에서도 고개 넘어 홀로 있는 데다 공동묘지를 뒤에 둔 폐가를 수리하여 거처를 정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과거와 현재를 만나면서 섬의 자연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절묘하게 엮어낸다.
동박새를 보기 위해 여행을 왔다가 애인과 하룻밤 지새고 나서 이별했던 여인이 세월이 흘러 쓸쓸한 섬에 홀로 다시 찾아와 뒤늦은 후회를 하는 이야기, 평소와 다름없이 바닷가 절벽으로 버섯 따러 갔다가 떨어져 세상을 마감한 두 할머니의 삶과 죽음에 대한 보고서, 얻어먹기 전까지는 돌아가는 법이 없었던 여자아이가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고쟁이를 내리고 오줌 누는 방식으로 순간을 모면하던 기억과 그녀와의 재회, 흰무늬 들고양이와 사람이 공생하는 양상과 그 고양이가 검둥이 고양이와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 끝에 최후를 맞은 이야기, 두 다리를 심하게 저는 소아마비 열여덟 살 소녀가 죽자 동네 청년들이 장송곡 대신 팝송 테이프를 틀어주며 상여를 나르던 기억, 자식을 버리고 섬을 떠났던 아내가 돌아오자 남편이 바다에서 함께 죽기를 강요하다가 껴안고 눈물 흘리는 달빛 아래의 장면, 그리고 낚시질하다 바다에서 길을 잃고 나흘 동안이나 떠돌다가 제주도까지 흘러갔다 온 뒤 죽음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됐다며 온종일 제 무덤 자리에 돌담을 쌓는 노인……. 이 모든 기억과 사연과 생명들을 보듬고 있는 섬은 파도소리와 바람과 안개에 휩싸인 채 쓸쓸함을 견뎌낸다.
이 작품에서 자연은 대상이 아니다. 모든 것들은 인간과 더불어 있고 함께 호흡한다. 화자는 파도, 흰무늬 고양이, 동아줄, 날치, 부나비 등과 진지하고 사유 깊은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도 그렇다. 할머니는 늘 “마당 테두리에 서있는 무화과, 귤나무, 동백, 수국, 수선화, 국화, 팬지, 목련, 매화, 소철 잎사귀” 등의 가솔들을 거느리면서 그들과 함께 잠을 잔다(149쪽). 할머니는 특히 제주도에서 온 귤나무가 열매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단단하고 동그랗게 보기 좋은 것으로 귤 두 개를 나뭇가지에 묶으며 “어째 그리 열매를 못 맺냐. 이거 봐라,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나뭇잎을 닦아주며 타이름으로써 열매가 열리게 한다(150~151쪽). 이러한 대화의 세계는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우주와 자연의 포용력 속에서 그것에 조건 없이 동화하며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작가의 묘사 태도는 아주 끈적끈적하다. “바다도 잠잔다”거나 “바닷물은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나는 어린아이처럼 움직이기 싫은 모습을 했다”(7쪽), “밤새 파도에 씻겨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바위섬”(8쪽), “그물은 한순간에 휙휙, 바다를 향해 몸을 풀었다”(9쪽)는 등의 묘사들을 보면 작가의 자연에 대한 인식은 사람을 대하듯 한다는 점이 확인된다. 심지어 기계도 기지개를 켠다고 인식된다(7쪽). 그것은 “간밤에 세상 그득하게 퍼져나가는, 바닷물이 모래밭을 타고 오르는 소리를 듣다가 잠이 들었고 새벽에는 그 소리가 나를 잠의 바깥세상으로 끌어냈다”(28쪽)는 기술에서 보듯이, 파도소리에 잠들었다가 그 소리에 깨는 삶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화자는 농염한 바다와 자연스러운 교미를 시도할 수도 있다.

나는 자꾸 바닷속으로 들어갔고 종내는 성기를 바다의 질에 꽂고 낮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성기는 더 커지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은, 적당히 발기된 상태로 바닷물 따라 천천히 흔들렸다. (……) 이제 저 수십 억의 나이를 가진 자궁과 비로소 만났고 그리고 몸을 떨어댔는데 맞아, 나는 바다와 연애를 걸어버린 것이다.(88~89쪽)

빗줄기 속에 바다와의 은밀한 밀교를 치른 화자는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너무 많이 젖은 탓에 거처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안개의 속삭임을 듣는다. 안개는 옷을 벗어버리라고 속삭인다. 마침내 화자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다. 입고 있기 때문에 고통받는 것이니, 벗어서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과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벗어버린다면 평등의 세상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근엄무쌍 행사장에서 거북했던 것은 올 뜯어진 잠바. 시장통을 밀고 들어오는 자가용의 사내가 쪼그려앉아 냉이를 파는 할머니에게 비키라고 호통을 칠 때 내가 느꼈던 살의(殺意)는 무엇보다도 사내의 불룩한 배를 감싸는 얇고 넓은 운동복 때문. 배고픈 얼굴을 하고 있는 아이가 유난히 가여운 것은 때에 절고 구멍난 셔츠 때문. 오만한 얼굴의 여인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은 그 두꺼운 모피 때문. 갇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푸른색 옷. 살인을 과제로 삼는 자의 표시는 다름 아닌 국방색 전투복. 죄지은 자 고개 저절로 떨어지는 것은 신부(神父)의 사제복 때문. 보리쌀 두 되 무조건 공짜로 주는 이유는 승려복 때문. 억울해도 꼼짝 못하는 것은 판사의 법복 때문. 보는 이가 성욕 이는 것은 알뜰하게 가리고 있는 수영복 때문. 갈보에게 품위와 교양의 장식을 달아주는 것은 열두 폭 비단치마. 사기꾼의 정체를 가려주는 것은 잘 다린 양복. 콧대 하나로 세상을 살아가는 스물두 살 여대생이 팬티를 내리고 항문까지 벌려 보여주는 것은 의사의 흰 가운 때문. 봉건 영주와 귀족의 유일한 표시는 백성의 세금으로 지은 옷.(91쪽)

입고 있음의 허위를 탁월하게 포착한 부분이다. 우리는 사람 자체를 본 것이 아니라 잠바, 운동복, 구멍난 셔츠, 전투복, 수의, 사제복, 승려복, 법복, 비단치마, 양복, 흰 가운 등의 외피를 보고 본질로 착각한다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모두 벗어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이제 섬의 농밀한 안개가 몸 구석구석을 애무하기 시작한다. 또 한 번 대자연과의 교미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화자와 안개는 서로 문질러대고 핥고 쓰다듬으며 사랑의 행위를 수행한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배어나는 존재와 생명에 대한 깊은 사유가 매우 돋보이는 장편이다. 그것은 잠깐의 주시나 순간적인 기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번뜩이는 논리나 분석에 기대어 얻어지는 결과물도 물론 아니다. 절절하게 배어있고 체득되어 곰삭은 상태에 이른 경우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젊은 작가 한창훈이 이런 소설을 썼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ꡔ홍합ꡕ 같은 걸쭉한 작품과 ꡔ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ꡕ 같은 깊은 사유의 작품이 한창훈이 다음 소설에서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자못 기대가 된다.




김동윤
-1964년 제주 출생
-2001년 ≪리토피아≫를 통해 평론 활동 시작
-평론집 <4.3의 진실과 문학>
-연구서 <신문소설의 재조명>

추천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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