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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소설> 머뭄, 그리고 스침/송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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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544회 작성일 04-01-25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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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뭄, 그리고 스침

송 혜 근



“소름이 돋더라구. 한참을 찌릿찌릿 떨었다니까. 날카로운 것이 으음 전기 같은 것이 가슴을 훑어 아래쪽으로 뻗어내려가더라구. 무릎이 시릴 지경이었다니까.”
적은 당시의 느낌을 되살리려는 듯 미간과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잡고 미선을 바라보았다. 자신도 표현의 과장스러움을 안다는 듯 눈에는 멋쩍은 웃음기가 담겨있었다. 미선은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예측할 수 없는 행동 패턴은 이번에는 웃음으로 터져 나왔다. 밝고 힘 찬 웃음. 적은 그녀의 그런 싱그러움이 좋다.
그녀들이 있는 곳은 서울 시내 한복판 지하에 있는 대형 음반점이다. 미선은 음반점 앞에 자그마한 좌판을 임대하고 있는 중규모 음반제작사의 파견 직원이다. 그곳에는 그녀네같이 장소를 임대하고 있는 다른 음반회사들 좌판들도 나란히 늘어서 있다. 좌판들은 음반점 앞 통로 한귀퉁이를 점령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토요일 오후라 서점이나 음반점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통로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는데 그 틈바구니에 좌판을 차려놓고 있으니 비좁기 이를 데 없다. 그곳에서 적은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어깨와 등을 툭툭 채여가면서 좌판 안쪽에 콕 박혀 있는 미선에게 얘기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다.
미선은 적을 바라보면서 참 어울리는 이름이야라고 생각했다. 피아니스트인 그녀의 아버지가 붙여준 것으로 피리라는 뜻이라고 얼마 전에 말해준 적이 있지만 미선이 생각하는 적은 정적의 적이다. 지금처럼 익살스럽게 얼굴을 잔득 찌푸리고 있어도 그 이면에 바다 속 같은 적요가 느껴져서이다. 지금과 같은 과장된 표정은 죽음과 같은 정적을 스스로 깨기 위한 안간힘처럼도 느껴졌다.
“‘리 오스카’의 음악을 그런 식으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대개는 평화롭다거나 시골적이라든가, 나이든 사람들은 옛날에 불던 하모니카를 생각해서인지 고향 언덕의 송아지라든가 느티나무같이 향수를 일으키는 대상을 연상해요.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은 없었어요.”
“그래서 소름이 끼친다는 거야. 그 대책 없는 평화로움에, 그게 오버되니까 오히려 공격성을 띠고 마구 감정을 휘저어버리는 거야. 지난 주는 내내 ‘리 오스카’를 들었어. 특히 ‘Before The Rain’을. 음악이 끝나고 비가 쏟아질 때는 온몸이 촉촉이 젖는 것 같았어. 봄비에. 그래서 소름이 돋았나? 음악 때문에 한 주일 내내 몸이 나른하게 펴지고 마치 봄비를 맞는 것처럼. 좀 슬픈 감상이 커피맛을 돋구더라구. 공연히 멜랑콜릭해져가지고……. ”
적의 얼굴에 따스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표면만 웃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특히 웃음기를 띠고 있는 눈이 그렇다. 외부의 자극에 대해서는 무심한 채 고정돼 있는, 오로지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만 담아내고 있는 것 같은, 그 눈을 볼 때마다 미선은 그녀가 꼭 사고를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샌프란시스코 베이’를 들을 때는 바다갈매기 소리, 항구에 밀려드는 파도소리, 자동차 소리,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케이블카 종소리가 들리는 거야. 마치 배를 타고 금문교를 지나 깊숙한 만으로 들어서서 육지에 내린 다음 도심으로 진입하는 것 같았어. 아! 아! 샌프란시스코에 가고 싶다.”
“참 ‘클로드 볼링’ 내한공연이 있어요. 표가 금방 동이 났어요. 두 장을 남겼어요.”
미선은 맨 처음 적이 그녀 좌판 앞에 발걸음을 멈췄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클로드 볼링 음악이 흐를 때였다. 홀린 듯 음악을 들으면서 저 음악이 뭐냐고 물었다. 그날도 이렇게 사람들로 혼잡한 토요일 오후였다. 음악을 듣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거꾸로 찍힌 오자처럼 인파 속에서 홀로 고적했다. 그 후로 그녀는 매주 토요일 오후 미선에게 찾아와 음반을 샀다.
“아아! 고마워.”
적이 티켓을 살펴보는 사이 미선은 재빨리 좌판을 훑어보았다. 적에게 음반을 골라주기 위해서이다. 단지 판매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성의껏 음반을 골라주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지식은 많지 않지만 음악을 온몸으로 듣고 느끼고 즐기기 때문이다. 좌판 위에는 살타 첼로, 클로드 볼링 같은 클로스 오버 음반들, 챨리 파커, 마틴 홀, 대니 정, 마일드 데이비스 같은 스탠다드 재즈나 퓨전 재즈 음반들 그리고 월드뮤직이나 뉴 에이지 음반들이 놓여있다. 좌판은 작지만 취급하는 음반은 마음에 든다. 소규모 레이블회사지만 그녀가 그곳에서 일하는 이유이고, 손바닥만한 좌판이지만 그녀의 존엄을 지키는 자리이기도 하다.
미선은 ‘베르덴스 오케스트라’ 음반을 골라 그녀에게 권했다.
“이걸 들으면 장담컨대 덴마크에 가고 싶다고 할 거예요.”
미선은 홍보용으로 셈플링한 CD에서 베르덴스 오케스트라의 ‘트와일라잇 타임’을 틀었다.
“덴마크의 재즈 오케스트라거든요. 많이 듣던 음악이지만 이 사람들의 연주는 달라요. 클라리넷, 기타, 아코디언, 퍼쿠션의 화음이 끝내주죠.”
“클라리넷이 나를 울리네. 황혼녘의 엉엉 울고 싶은 심정. 바로 그 막막한 고독의 아름다움을 정말 잘 표현했네.”
“이 악단 창단자인 ‘눌’은 코펜하겐의 레스토랑 ‘Cap Horn’에서 연주하며 커리어를 쌓았어요. 덴마크에 가면 그곳을 잊지 말고 찾아가세요.”
미선의 눈이 빛났다. 아, 아! 파리나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재즈 공부를 하고, Cap Horn 같은 곳에서 연주를 들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적은 베르덴스 오케스트라의 것과 ‘압둘라 이브라힘 트리오’의 음반을 사들고 아수라장 같은 지하를 빠져나왔다. 지상은 한결 한산했다. 습관대로 근처에 있는 델리샵으로 향했다. 그날 밤에 먹을 케이크를 사기 위해서다. 주말이라 델리샵 인도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에는 연인이나 친구들이 어깨를 맞대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고 있다. 그 틈에 홀로 앉아 광화문 거리를 바라보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금발의 이국남자가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 적은 케이크를 고르다가 가끔씩 그 남자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한순간 그녀와 그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화창한 날의 바다색 같은 눈이 카스피해나 흑해 같은 낯설고 먼 바다를 연상시켰다. 먼 바다의 파도 소리 같은 쓸쓸함이 남자를 감싸고 있다.
안녕하세요?
활짝 웃으면서 적은 그 남자 앞에 마주 앉았다. 주말이지요? 이런 날이면 고국에 두고 온 가족이나 애인 생각이 더욱 간절하지요? 이방인이 되어 이국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 전 너무나 잘 이해해요. 전 늘 이방인이거든요. 지금도. 당신과 나는 맞는 코드를 갖고 있다는 걸 첫눈에 알았어요. 나한테 좋은 CD가 있어요. 덴마크의 Cap Horn에서 연주를 하던 욜이라는 사람이 만든 악단의 연주래요. 당신과 나의 기분에 딱 맞는 음악이에요. 아! 덴마크 사람이라고요? 그 레스토랑을 너무나 잘 안다고요? 지금 그곳 생각을 하고 있었다구요? 어쩌면! 저의 집에 좋은 와인이 있어요. 맛있는 케이크도 살 거고요.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서로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어요. 어때요 멋진 계획이죠?
적은 뉴욕 치즈케이크를 사들고 델리샵을 나왔다. 나오다가 금발의 남자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자신과 그를 위해 좋을 수도 있었을 놓쳐버린 소통의 기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자아의 한쪽을 잘라 그 남자 앞에 남겨두었다. 남겨진 자아는 상상 속에서 그 남자하고의 소통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세종문화회관 앞의 꽃집에서 향기가 좋은 분홍장미를 샀다. 저녁을 먹고 디저트로 치즈케이크를 먹은 다음 장미 향내를 맡으면서 음악을 들어야지.
거리엔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세종문화회관 분수대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한결 여유로워 보이는 걸로 보아 이젠 완연한 봄이다. 겨울 내 황량한 시멘트 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분수대에서 기운차게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다. 광장은 분수 하나만으로도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다. 광장을 가로지르던 적은 비어있는 벤치에 앉았다. 광장은 주변의 빌딩에 둘러싸여 아늑했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차량의 경적소리가 분수에서 뿜어내는 물소리에 묻혀 아득하고, 건물 사이로 지는 해가 낙조를 드리우고 있다.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의 장소인 그 광장의 망중한 속에는 보헤미안의 정서가 깃들어 있었다. 나른함 속에서 점차 그녀의 의식은 자아로부터 놓여나기 시작했다. 의식은 과거 속의 장소들과 미지의 장소, 그리고 상상 속의 장소들을 마냥 떠돌면서 그리운 사람들과 낯선 사람들을 만나 슬프고도 아름다운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수도 없이 분열된 자아가 수도 없는 장소에서 수도 없는 모습으로 수도 없는 드라마를 만들고 있었다. 졸고 있는 고양이 수염에서 아롱지는 햇살처럼 가물가물한 감미로움이 그녀를 현실에서 이탈시키고 있었다.
해는 급속히 건물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성큼 다가온 어둠이 섬뜩하고 바람의 기운에 냉기가 느껴졌다. 광장을 포근하게 둘러싼 빌딩들이 갑자기 위협적으로 우뚝 다가서고, 아득하던 소음들이 신경질적으로 가까워졌다. 어둠과 함께 다가온 불길한 기운에 놀란 의식들이 일시에 그녀 속으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그때까지 유지해 오던 과장된 명랑과 감상을 한순간에 가면처럼 벗어버렸다. 대신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대범해야지 그가 못 온다고 전화하더라도. 나에게는 주말을 보낼 케이크와 음악이 있어.
적은 파리한 얼굴로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정말 안 오면?
적은 그날 한 남자가 간절히 보고 싶다. 그를 만나 그녀가 얼마나 피곤하고 굴욕적인 하루를 보냈는지 털어놓고 위로를 받고 싶다.
편집장이 내 그림이 어두워졌대. 어린이들한테 부적합하다고. 아이들의 엄마들은 그런 어두운 그림책은 사주지 않을 거라고. 동화는 밝고, 희망적이고,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러면서 나한테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는 거야.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 이혼을 해주지 않는 부인이 있는 남자와 5년 동안 사랑을 하다가 지쳤다고, 그 남자의 애를 두 번이나 떼어냈다고, 그 남자가 요즘 멀어져가려 한다는 말을 할 수는 없잖아. 출판사를 나오다가 그림을 두고 나온 걸 알고 되돌아갔을 때 칸막이 안쪽에서 그가 직원에게 하는 말소리가 들려왔어. 이 선생은 이제 끝난 것 같아. 빨리 시집이나 가야 할 텐데. 이 바닥을 뜨지 못하고 맴도는 화가들이 얼마나 많아. 하루에도 그런 사람들을 서너 명은 상대해야 하잖아.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돌려보내는 일도 정말 힘들어,라고 그가 말했어. 아아! 난 오늘 정말 당신의 위로가 필요해.
적은 고통 때문에 파리해진 얼굴로 광장을 가로질러갔다.

대기실로 들어서자 꼬릿한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한다. 김밥에 딸려나오는 오징어무침에서 나는 냄새다. 미선이 들어서는데도 성호는 김밥을 먹는 데 열중할 뿐 쳐다보지도 않는다. 미선은 파김치가 된 몸을 소파 깊숙이 묻었다. 음반점에도 지하철에도 사람들은 구역질나도록 넘쳐났다. 미선은 김밥을 먹고 있는 성호를 바라보았다. 열아홉의 어린 나이, 중성적이고 앳된 얼굴에 나른한 빛까지 더해 무의지성의 식물 같아 보이는 남자애. 게걸스럽게 김밥을 먹는 모습조차 애처로워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애, 스물아홉의 방자한 자신의 모성본능을 자극하고 있는 애. 그녀는 그런 성호를 바라보면서 만일 이 세상에 그 애가 없다면 모든 인간들을 죽여버리거나 아니면 그녀 자신이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때 그녀는 그 식물을 소유했었다.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놓아주고 물을 주고 햇빛을 쪼여주었다. 속옷도 빨아주고 김밥도 만들어주고 품에 안아 재웠다. 전적으로 모든 것을 맡긴 대상에 대해 갖는 완전한 지배권이 주는 희열을 그가 그녀에게 맛보게 했었다. 공을 들인 만큼 싱싱하게 자라나고 무심하면 시들어 버리는 존재가 있다면 책임감 때문에 사람들은 죽지 않는다.
“제때 밥도 못 찾아먹고.”
그날 따라 그는 피로해 보인다. 그런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불러일으키는 질투를 어쩌지 못해 그녀가 잔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그를 잠자리에 끌어들이면서 밥을 챙겨 먹이지 않은 늙은 여자에 대한 원망도 담겨 있다.
“잔소리하지 마. 니가 내 엄마야?”
성호의 짜증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미선은 그걸 엄마 품을 떠나려는 철든 아들의 콤플렉스처럼 받아들였다.
“넌 인제 가수 포기했니?”
질투와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미선이 쏘아붙였다. 성호가 입고 있는 조르지오 아르마니 양복과 롤렉스시계에 냉소적인 눈길을 던졌다.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힌 성호 앞에서 미선이 자포자기적으로 깔깔 웃었다. 가수를 포기했냐고 묻다니. 이미 끝장난 일인데.
한때 그들은 가수였던 시절이 있었다. 이년 전이었다. 준 재벌쯤 되는 사람의 철부지 막내아들이 심심풀이로 음반기획사를 차렸을 때였다. 그때 그들은 삼인조 프로젝트 그룹으로 반년을 합숙하며 가수교육을 받았다. 음반을 내고 몇 번 방송도 탔으나 부진했고 인내심 없는 부잣집 막내아들은 레스토랑을 한다면서 기획사를 집어치웠다. 그게 그녀에겐 그 바닥에서 성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스물일곱 살이었다.
범수가 들어섰다. 범수는 춤에 미쳐 사는 아이다. 둘 사이에 흐르는 험악한 공기를 눈치 챈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자자 왜들 이래? 사랑싸움하는 거야? 이 좋은 봄날에?”
그는 휙휙 휘파람을 불며 머리를 매만졌다. 여자하고 꽃맞이 드라이브라도 하고 들어온 듯한 간지러운 분위기이다. 클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자고 제의한 건 미선이었다. 숙식을 제공해 주던 음반기획사에서 쫓겨난 후 달랑 가방 하나 들고 그녀의 반지하 셋방으로 불법 침입한 성호를 두어 달 가까이 지켜보다가 내린 결정이었다.
토요일이라 클럽은 만원이었다. 강남에 위치한 데다가 새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논다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술값이 비싸서 손님들은 경제력이 있고 소비문화에 익숙한 삼십대가 많았다. 젊은 사람들은 홀에 몰려서 놀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룸에서 놀았다.
“4번 방이요.”
웨이터가 대기실로 고개를 내밀고 소리를 질렀다. 양주를 마시고 있던 삽십대 후반의 여자 세 명이 막 들어선 그들에게 술부터 권했다.
“어머 멋쟁이 언니들이시네? 오늘 분위기 화끈하게 책임질 저는 써니고, 여기는 데니, 그리고 저쪽은 타미.”
미선은 한 옥타브 끌어올린 음성으로 분위기를 돋운 다음 가라오케의 버튼을 눌렀다. 어느덧 밤이 이슥했다. 룸 세 곳을 돌면서 받아 마신 술이 제법 많았다. 성호와 범수는 처음에 들어간 사 번 방을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 여자들이 세련되고 팁도 두둑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른 곳에 가지 말고 여기만 있어. 내가 사장한테 얘기하지.”
그날 자리를 책임진 것 같은 여자가 지갑에서 세 번째로 수표를 꺼냈다. 성호와 범수는 그날 따라 있는 대로 흥이 올라 있다. 끼를 어쩌지 못해 복도로 뛰쳐나갔다가 방문을 무대 커튼처럼 이용해 들어서며 깜짝쇼를 벌이기도 하고 테이블 위로 뛰어올라가 팔짝팔짝 뛰기도 했다. 여자들은 젊은 남자애들의 재롱에 혼이 빠져있었다. 흘러내리는 땀 때문에 성호가 양복 상의를 벗어 젖히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언제나 가면 언제나 가면 쓸쓸한 너희 아파트.”
레퍼토리는 점점 통속적으로 흘러가고 그럴수록 여자들이 자지러지는 소리를 냈다. 성호는 마이크를 잡은 채 여자 무릎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깔깔거리며 손뼉을 쳐대던 여자가 얼음을 성큼 집더니 그 손을 성호의 셔츠 안으로 집어넣었다. 성호가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어댔다.
“왜 내가 카바레 끊었는지 알아. 냄새가 달라. 젊은애들이 있는 곳에 가서 땀 냄새를 맡으면 몸이 확 열린다니까.”
미선의 눈에 불길이 일고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녀는 들고 있는 마이크로 여자를 내리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대신 가라오케의 버튼을 누르고 터져 나온 반주에 맞춰 목청껏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미선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경사진 길을 오르다보니 저만치 환하게 불이 켜진 콘서트홀이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도 연주자와 관중의 긴장감이 만들어내는 공연장 특유의 들뜬 기운이 느껴져 잠시 그녀를 흥분케 했다. 하지만 그 밤의 나들이가 실은 고통스런 발걸음이라는 인식 때문에 금방 우울해졌다. 콘서트홀 앞에 도착한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되지 않는 행복에 대한 미련이 발걸음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민 티켓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성호가 뒤늦게 반성하고 서둘러 달려오는 그 감격적인 장면을 수도 없이 떠올리면서 어둠 속으로 성큼 다가서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공연이 임박하기까지 서성대는 그녀에게 암표장사들이 와서 표가 있느냐고 넌지시 묻는 걸로 보아 공연은 성황인 것 같았다. 공연시간이 다되자 그녀는 가시거리 끝까지 두었던 시선을 모질게 거두어들였다. 표를 구하지 못해 서성대는 사람에게 티켓을 그냥 줄까 하다가 시종일관 고마워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 구경하는 것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안으로 들어와 좌석을 확인해 앉은 다음 적이 왔나 살펴보았다. 그녀의 좌석은 세 줄 뒤쪽이다. 비어있다. 피아노, 베이스, 드럼, 플루트으로 구성된 재즈앙상블이 무대에 등장하자 관중들이 열광했다. 그녀도 손뼉을 쳤다. 하지만 더욱 신나게 손뼉을 칠 수도 있었다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그녀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연주 중간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적이 보였다. 그녀의 옆자리도 비어 있었다.
휴식시간에 휴게실로 나오면서 미선은 반사적으로 적을 외면하고 지나쳤다. 자신의 기분도 그렇지만 눈앞의 그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듯 깊이 생각에 몰두해 있는 적의 얼굴도 누구의 간섭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음악이 너무 투명해. 특히 플루트 소리가. 너무 가벼워서 연주되는 순간 천장에 붕 떠올라서 맴도는 것 같아 내내 천장을 바라봤다니까? 아아! 파리에 가고 싶다. 클로드 볼링의 음악처럼 구질 맞은 일상이 증발된 가벼움과 우아함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그런 음악을 만든 나라로, 그런 음악이 사랑받는 나라로.”
“그렇게 좋았군요.”
미선은 끝까지 완전범죄를 꾀했다. 적의 공허한 모습을 본 기미조차 내비치지 않고 싶다.
“정말 좋았어. 음악을 들으면서 클래식과 타 장르 음악의 혼합인 클로스오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어.”
그런 미선의 마음은 모른 채 적은 말하는 내용에 따라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얘기에 열중했다.
“클래식 음악이 주는 영원성과 재즈가 주는 변화에 대해서 말야. 이게 세상을 해석하는 두개의 방식이거든. 그 양자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타인 속에서 영원한 휴식처를 찾으려는 욕망과 타인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대해서.”
토요일 오후 떼를 지어 지나치는 사람들과 나란히 늘어선 좌판에서 제각각 틀어대는 음악이 만들어 내는 살인적인 소음 속에서 적은 자신의 말에 취해 한껏 목청을 높였다.
“죽음의 영원성과 삶의 유동성 사이에서 방황하는 우리들에 대해서.”
적은 서둘러 그 말을 덧붙였다. 미선은 그 말끝에 떠오른 적의 표정에서 예의 그 바다 같은 적막을 보았다. 전보다 더 깊고 확고해진 그 느낌이 섬뜩했다. 미선은 적이 그녀에게 음악을 빙자해 무언가 간절히 호소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다. 바다 속에 빠져드는 것 같은 무거움. 그날 따라 적의 그런 분위기가 갑갑함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 트랙을 돌고 있는 음악처럼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지루함이 공포를 몰고 왔다. 미선은 바다 속 같은 적의 내면에 파문을 일으키고 싶었다. 바다를 통째로 뒤집어버릴 것 같은 치명적이고 강력한 어떤 것. 무엇인가 끝장을 보고 싶었다.
“그 좋은 기회를 놓치다니. 클로드 볼링은 나이가 많이 들어 이게 한국에서의 마지막 연주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적은 끝내 아쉬워했다.
“마지막!”
미선이 중얼거리면서 ‘쳇 베이커’ 의 CD를 집어들었다.
“이거야말로 정말 마지막 콘서트예요. 쳇 베이커는 이 콘서트를 끝내고 자살을 했으니까요. 이 앨범은 88년에 하노버의 푼크하우스 콘서트를 실황 녹음해서 두 장의 앨범으로 만든 거예요. 이 콘서트를 한 후 꼭 두 주 후에 쳇은 자살했어요. 그가 섹소폰을 불면서 부른 ‘My Funny Balentine.’을 들어보세요.”
“그리고 이건.”
미선은 ‘푸란시스 고야’의 CD를 집어 들었다.
“푸란시스 고야가 러시아 작곡가 ‘알렉산드라 파크무토바’의 곡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멜로디 열두 곡을 선정해서 연주한 거예요. 이걸 들으면 아마 러시아에 가고 싶다고 할 거예요.”

적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래 결국 이번 주도 안 오는군. 골프 치고 저녁에 온다고 했다가 다시 전화를 해서 피할 수 없어 저녁은 먹고 가겠다고 했었다. 다음에 전화해서는 술자리를 피할 수 없다고 하더니 기다리다 지쳐 전화한 그녀에게 혀 꼬부라진 소리로 제발 구속 좀 하지 말라고 소리치며 전화를 끊었다.
그래 지쳤겠지. 법적으로 방법이 없다는데 막막하겠지.
이 세상하고 홀로 인연이 없는 사람처럼 막막한 얼굴로 적이 중얼거렸다.
아니면 그건 핑계고 사실은 우린 이 세상 인연이 다한 걸 거야.
날선 아픔이 가슴을 찢고 지나갔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기다란 가죽 소파에 찢긴 몸을 뉘였다. 두 손을 상처투성이 가슴에 얹고 의문으로 확장된 눈을 크게 뜨고 고통스러운 숨만 가만히 내쉬었다. 그녀의 모습은 견디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수술대 위의 환자 같다. 느낌을 지우고 생각도 지우고 죽음에 가장 가까운 수동적 형태로만 존재하는.
그런데 이 우울하고 슬픈 트럼펫 소리라니.
그녀의 바램하고는 달리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번거롭게도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오디오를 끄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일은 더욱 번거롭다. 무차별적인 음악의 공격에 반응하지 않으려 작정했던 그녀의 가슴속으로 음악이 파고들었다. 지나간 생의 파란만장함을 희로애락이 여과된 담담함으로 속삭이는 것 같은 음악, 이제 지나간 세월 속에서 받은 상처와 슬픔에 사로잡혀 어디로도 누구에게도 도망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음악…….
적은 그 콘서트를 끝내고 이주 후에 자살했다는 쳇 베이커의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해 테이블 위에 있는 CD 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창백한 푸른 색조의 바탕에 검은 톤으로 찍힌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움푹 들어간 눈과 깊은 주름이 패인 얼굴에는 슬픔과 공포가 담겨 있고 눈빛은 한발 죽음 쪽에 발을 딛고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의 것처럼 아스라이 멀다. 죽음의 냄새가 완연한 그의 얼굴이 무언가를 절박하게 애원하고 있고 무언가 용서를 구하고 있다. 적은 사진 뒷장에 있는 해설을 읽어 내려갔다.
쳇 베이커는 이 CD에 담긴 콘서트를 마친 2주 후, 우리나라가 올림픽 준비에 한창 분주했던 88년 5월 13일 금요일 새벽 3시 10분경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한 호텔 2층 방에서 창밖으로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목격자도 없었고 다만 순찰하던 경찰에 의해 트럼펫을 안고 추락한 장면이 발견됐을 뿐이다. 재즈계의 제임스 딘이라 불리며 팬들에게는 영원한 청춘의 심볼로 각인되어 왔던 그가 트럼펫터로서의 완숙함에 더하여 보컬리스트로서 부른 My Funny Valentine을 들으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죽기 직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삶이란 따분할 뿐이다.”
삶이 따분한 사람들은 도처에 넘쳐나. 그렇다고 다들 죽지는 않지. 그가 죽은 이유는 단순해. 표지 사진을 보면 모르나? 간절히 죽고 싶은 얼굴이잖아. 그냥 죽고 싶어서 죽은 거야.
적이 CD 표지를 내려놓으면서 중얼거렸다.
오디오에서는 ‘My Funny Balentine’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든 걸 포기한 사람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감미로움이 그녀를 에워쌌다. 그대로 아무 것에도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리라. 그렇게 누워 영원히 꼼짝하지 않으면 그게 바로 죽음이다.
갑자기 복도 쪽에서 소요가 일면서 빌딩 전체를 한바탕 휘저었다.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마구 문을 두드려대는 남자, 거기에 맞서는 주민들의 항의가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소요는 아래층으로부터 차차 위로 올라오고 있다. 남자가 한층에 두 개씩 있는 문짝들을 두드려대며 올라오고 있는 중이다. 적은 꼼짝 않고 누워 자신하고 상관없는 먼 세상의 소동을 무심히 들어 넘겼다. 자신의 집 문을 두드려대더라도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이제 남자가 일으키는 소요는 바로 문밖으로 다가왔다. 그가 마구 악을 쓰며 앞집 문을 두드려대고 있다. 적은 그가 많이 취했다는 것과 연자라는 여자를 간절히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씨발. 문 안 열 거야? 안다구. 다 안다구, 연자가 여기 숨은 거. 제발 이러지 말라구. 이러면 나 죽고 연자 죽고 몽땅 다 죽을 수밖에 없어. 연자 없이는 난 못살아, 죽는다구.”
앞집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남자는 적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녀는 발딱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다가가 스스럼없이 문을 열었다. 연이은 전투로 뻘개진 얼굴의 남자가 문은 활짝 열어 제키고 그 앞에 서 있는 그녀를 덮칠 듯 노려보고 있었다.
“여기 연자 있지.”
“내가 연자예요.”
“무슨 수작이야!”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경계의 눈초리로 남자가 소리쳤다.
“내가 바로 연자예요.”
“연자는 너 같은 여자가 아니야.”
“내가 연자가 아니라는 이유를 대세요.”
뻔뻔하게 적이 대들었다. 그녀 자신도 이해 못할 뻔뻔함이었다.
“이 세상에 연자는 하나야. 너 같은 건 연자가 아니야.”
남자가 무자비하게 적을 밀치고 안으로 뛰쳐들어가 온 방을 뒤지고 다녔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잡은 적이 날뛰는 남자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지친 듯 남자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적은 그가 내뱉는 고통스런 숨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남자는 삼십대 전후로 약간 여윈 몸매에 거친 행동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슬픈 눈매를 지니고 있었다.
“없지요?”
“그렇다고 네가 연자는 아니야. 한 번만 더 우기면 가만두지 않겠어.”
남자가 경고했다.
“그렇다면 못 찾아요.”
“왜?”
남자가 대들듯 물었다.
“숨은 사람은 찾을 수 없어요.”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아파트 쪽으로 가까워졌다.
“경찰을 불렀네요.”
갑자기 남자가 정신이 든 듯 조용해졌다. 경찰차가 아파트 바로 앞에 멈추었고 곧 밖에 모여 있던 주민들과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이제 완전히 술이 깬 것 같았다. 구둣발 소리가 점점 그녀집 쪽으로 다가오더니 초인종이 울렸다. 남자가 문 쪽으로 걸어가는 적을 겁먹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실례합니다. 이 집에 소동을 일으킨 남자가 있다고 하던데요?”
적에게 거수경례를 간단히 붙이고 나서 경찰이 물었다.
“네 막 잠이 들었어요.”
적이 거짓말을 둘러댔다.
“술김에 집을 잘 못 알고 소동을 벌였군요. 술이 과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는 조심시키죠. 죄송합니다.”
적이 정중히 사과했다.
“댁이 연자라는 사람입니까?”
경찰이 물었다.
“네.”
“다음부턴 이런 소동 일으키지 않게 조심시키십시오.”
경찰이 간 뒤 문을 걸어 닫고 다가갔을 때 남자가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녹차를 끓여드릴게요. 그거 마시고 돌아가세요.”
“됐어. 물이나 줘. 찬물.”
적은 찬 보리차를 남자에게 주었다. 물을 벌컥 벌컥 들이키고 난 남자가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앞에 앉은 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는 이미 전의는 사라지고 없었다.
“당신은 이상한 여자군요. 나에게 문을 열어주다니.”
“자신이 있어서예요. 최소한 당신이 나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지요?”
“내 스스로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삶에 미련이 없군요.”
적이 희미하게 웃었다.
“당신은. 그 눈이 참 특이해요. 보고 있으면 진정이 돼요.”
남자가 끈질기게 적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연자라고 우기는 거지요?”
“나도 모르겠어요. 그저 지금은 연자로 있자는 생각 외에는. 아니 그게 아니에요. 난 정말 내가 연자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낯선 남자들 앞에서 내가 제니퍼나 순정이나 수지나 정애가 되어 있는. 이러다가 나는 점점 없어지고 말 거예요. 아 정말 이건 설명하기 힘들어요.”
“누굴 죽고 싶을 만큼 보고싶어한 적 있어요?”
남자가 물었다.
“얼마 전까지는요. 하지만 지금은 내가 수많은 나로 분리됐듯 그의 모습을 여러 사람 속에서 찾을 수 있어요. 당신 속에서도.”
“당신 말은 내가 들은 것 중 가장 쓸쓸한 말이에요.”
갑자기 남자가 끅끅 울기 시작했다. 적은 남자의 곁으로 가서 울고 있는 그를 안았다. 연자를 부르면서 남자가 적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밖의 날씨가 화창하면 할수록 지하의 분위기는 침침하고 무겁다. 화창한 봄날 토요일 오후의 지하매장, 미선은 밀어닥치는 인파가 일으키는 소요와 그들로부터 풍기는 몸 냄새에 멀미를 하면서 새벽까지 마신 술을 탓하고 있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룸쌀롱 일을 하기 때문에 낮, 밤일이 겹치는 토요일은 죽을 맛이다. 하지만 미선은 종일 서있느라 다리가 퉁퉁 붓고, 지하의 탁한 공기와 고객들과의 입씨름으로 목이 잔득 쉬면서도 소득 면에서 큰 도움이 안 되는 음반가게 일에 집착하고 있다. 몸을 혹사시킬수록 몸 안의 불순물이 씻기는 것 같은 정화의식 같은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윤리적 경계를 지키려는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마저 놔버리면 겉잡을 수 없이 타락해 버릴 것 같은 우려가 그녀에게는 있다.
날이 저물자 지하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불어나고 멀미도 점점 심해졌다. 미선은 그녀를 불쾌하게 하는 멀미가 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시원한 동치미냉면 생각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한가한 오전시간이라면 옆 좌판 판매원에게 잠깐 맡길 수도 있으나 지금처럼 사람들이 밀려드는 시간에는 꼼짝 할 수가 없다. 혹시 씹어 먹을 게 없나 해서 좌판 밑을 살펴보니 전날 먹다 놔둔 햄버거가 눈에 띄었다. 게름직하면서도 아쉬운 대로 한입 베어무니 육질은 딱딱하게 변했어도 맛은 괜찮다. 그 탁한 공기 속에서도 상하지 않다니.
그래. 난 타락하지 않을 정도로 이미 너무나 오염돼 있어. 방부제가 듬뿍 들었다구.
그녀는 남은 햄버거를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생각했다. 타락할 수 있는 사람은 좀 덜 오염된 사람들이다. 성호같이. 그런 애들이나 부릴 수 있는 치기 어린 응석, 혹은 특권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에 음식이 들어가니 메스꺼움이 좀 덜했다. 다시 기운을 내서 손님들이 흩어놓은 좌판을 정리하던 미선은 ‘쳇 베이커’ 의 음반을 집어든 순간 적을 떠올렸다. 미선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로 CD 표지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깊게 패인 주름투성이 얼굴 속에 묻힌 음울한 눈빛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넘어올 수 없는 막을 형성하고 있는 것 같은 사진. 순간 그녀는 섬뜩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3주째다 적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그녀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다. 창에서 뛰어내리는 적의 환영이 보였다. 아주 가볍게 훌쩍.
그러고도 남아 그 여자라면. 처음부터 그걸 알았잖아.
그러면서 미선은 속으로 아아! 하고 부르짖었다. 자신 속에 꿈틀대고 있는 어떤 악의가 그녀를 돕고 말았다는 본능적인 깨달음 같은 거였다. 아아! 성호처럼 그녀도…….
성호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깨지고 싶어하는 연약함이, 적을 보았을 때 느꼈던 죽음에 대한 찬미가 자신 속의 악마를 깨웠다는 생각을 했다. 악마는 선의를 가장해 성호를 룸쌀롱으로 이끌었고 적에게 죽음 충동을 일으키는 CD를 건넨 것이다. 아아! 속에는 꿈틀거리는 이 파괴본능. 구제받을 수 없는 이 비틀림.
적이 그녀에게 다가올 때 미선은 마치 죽었던 사람을 보듯 신기한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가 시큰했다. 한 인간을 그렇게 반겨본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안 오셔서 무슨 일이 있나 걱정했어요.”
“러시아에 갔다 왔어.”
“러시아? 아아!”
미선은 3주 전 그녀에게 쳇 베이커와 함께 ‘푸란시스 고야’의 CD를 주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알렉산드라 파크무토바’의 서정성 넘치는 곡들을 얼음처럼 청명한 기타소리로 연주한 그 음반. 음반 표지에 눈 덮인 자작나무숲 배경을 담은. 갑자기 그녀는 아주 가벼운 기분이 되었다.
“‘굳바이 모스코우’를 들으면서 러시아의 인적 없는 자작나무 숲에 가서 울고 싶었어. 그 거대한 고독의 공간에서 눈물과 함께 다 버리고 오고 싶었어.”
눈물을 흘릴 듯 잔득 찡그린 얼굴로 열심히 말을 하는 적의 모습을 다시 본다는 게 정말 기뻤다. 미선은 그리움이 담긴 눈으로 적을 바라보았다.
“무얼 버려요?”
“분노와 욕심을. 특히 욕심을. 욕심은 비겁하거나 혹은 불안한 사람들의 어리석고 무모한 집착일 뿐이야. 그걸 버리고 싶었어. 그래야만 난 나를 칭칭 감고 있는 속박의 끈을 풀어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야만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야만 앞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승자로.”
“그래서 성공했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성공할 거라는 확신 같은 것이 있어.”
미선은 한층 깊어진 적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에 전에 없던 당당함이 담겨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 눈빛은 미선에게 사람에 대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고 있었다.
“좋은 음반 나왔어?”
“이거 어때요?”
미선은 샘플링 CD에서 한 곳을 선정해 틀었다.
“베니 굿맨과 그의 오케스트라의 씽씽씽이에요.”
드럼소리가 천둥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곧 이어 트럼펫, 섹소폰 등이 끼어든 오케스트라의 경쾌한 연주가 터져 나왔다.
“씽씽씽씽 에브리바디 스탓 투 씽…….”
연주에 맞춰 미선이 노래를 불렀다. 적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미선이 드럼 소리에 맞춰 탭탠스를 추다 말고 소리질렀다.
“갑자기 난요, 내가 너무나 많은 혜택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음악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동원되는 인력과 장비와 열정들을 생각해 보세요. 어마어마한 단위일 거예요. 그걸 우리는 단돈 만원에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문명의 혜택이라는 거겠지요?”
그들은 마주보고 씨익 웃었다. 사람들의 소음과 옆 좌판에서 쏟아내는 음악으로 그들의 노래는 멀리 뻗어나가지 못하고 겨우 그녀를 주위만 감쌀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그 순간만큼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송혜근
․1953년 인천 출생
․1990년 ≪현대소설≫ 신인문학상 단편소설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당선
․작품집 <이태리 요리를 먹는 여자>
   장편소설 <립스틱을 바르는 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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