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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소설> 스캔들/김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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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450회 작성일 04-01-25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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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캔들

김 연 화



이 도시의 시민인 이영수 씨가 흡사 저격을 당한 듯이 갑자기 고꾸라진 것은, 이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젊은 시장의 스캔들이 터지기 바로 전날이었다.
계절은 아직 겨울이었으므로 하늘은 음산한 잿빛을 띠고 있었고,아파트 숲에는 난데없이 까마귀떼가 날아와 기분 나쁜 울음소리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도시는 어딘가 역병이 돈 마을과 닮아 보였다.
이영수 씨는 그때 까악까악 울어대는 까마귀떼를 흘끗 올려다보며 달리던 중이었다. 그는 시청 공보관이기도 하였지만 아마추어 마라토너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하루의 업무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운동화끈을 질끈 매고 시에서 깨끗하게 조성한 마라톤 코스를 고독하게 달리곤 하였다. 하지만 그가 마라톤을 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와도 같이 고독이라는 고차원적인 감각을 음미하기 위해서 그가 마라톤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표정으로 오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단지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처럼 운동의 한 방편으로 마라톤을 택한 것뿐이었다. 시간과 장소와 경비에 그닥 구애받지 않으면서도 높은 운동효과를 낼 수 있는 탁월한 생활스포츠 종목, 그것이 마라톤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필사적이라고 할 만한 노력을 기울여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지구 위에서 소아바미 바이러스를 99% 박멸했다는 세계보건기구의 발표가 있었고 인간 유전자의 비밀이 밝혀져, 뭔가 대단히 난해하게 보이던 인간이라는 동물이 이제 한 권의 지도책으로 가뿐히 정리될 수 있을 마당인 데도 이 도시의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 늘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것은 젊은 시장의 부인이 알콜중독자라는 사실과 함께 이 도시가 숨기고 싶어하는 비밀 중의 하나였다.
이영수 씨로 말하자면 이 도시가 숨기고 싶어하는 그 비밀에 대표적으로 포함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그의 마음을 안도시켰던가. 언제나 시대가 통계지표로 제시하는 평균율에 주목해온 그는, 자신의 생이 크게 도약하는 것도 처참하게 주저앉는 것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의 그것이 평균적인 모습을 띠게 되기를 갈망하면서 그렇게 되기 위해 성실히 노력해온 그로서는, 바로 자기가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늘 모호한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이 도시 시민의 평균적인 초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흡족함을 느껴왔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마라톤을 한 이유의 전부라고 말할 수만은 없었다. 아무리 그 존재의 신비가 한 권의 지도책으로 가뿐하게 정리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해도 인간이라는 동물은 여전히 난해한 무엇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영수 씨에게는 마라톤에 빠지게 된 자신만의 이유가 따로 또 있었다. 지독히 성실하다는 개인적인 특질과 함께 예전부터 그를 매료시켜왔던 하나의 이미지-먼 옛날 마라톤 평야를 달리던 어느 그리스 병사의 빈약한 다리 근육과 거기에 불끈 일어선 힘줄-바로 그것이 시청의 공보관인 이영수 씨가 아마추어 마라토너의 길을 걷게 된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는 특이하게도 늘 고대 올림픽 정신을 경배해왔던 것이다.
이영수 씨가 야간법대를 다니던 젊은 시절 그는 일기장 한구석에, 올림픽의 비극은 근대에 ‘보다 멀리, 보다 높게, 보다 빠르게’라는 슬로건을 부여받으면서 일어나게 되었다. ‘보다’라는 부사어가 순수한 육체의 향연을 기계와 물질의 단순한 경쟁으로 타락시켜버린 것이다,고 쓴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을 할 때면 건전한 시민인 그도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 깊은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근엄한 목소리가 명령을 내린다. 무작정 보다 멀리 뛰고 보다 높게 뛰고 보다 빠르게 뛰라고. 그때 그는, 그래서 올림픽이 첨단 공학이라는 미명과 약물이라는 과도한 긴장과 자본이라는 채찍이 뒤엉킨 투기판이 되어버린 것이다,라고 다소 비통스러운 어조로 일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했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방바닥에 누워 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롯이 육체를 통해서만 가름이 나는 그 희열의 광경 속으로 말이다. 지중해에서 실려온 바람과 맥없이 풀썩이는 흙먼지와 사람들의 함성, 그리고 힘줄이 불끈 솟아있는 달리는 육체의 기쁨. 그것이 청년시절의 이영수를 흥분시켰었다. 영양상태가 나쁘지만 달리는 재주만큼은 누구에게도 뒤떨어지지 않는 어린 병사도 그 환희로운 스타트라인에 섰을 것이며, 그 가난하고 어린 병사는 꼭 자기처럼 생각되었다.  
그후부터 그는, 달리는 다리가 나오는 꿈을 자주 꾸게 되었다. 고대 올림픽에서 촉발된 상상의 날개가 엉뚱하게도 페르시아전의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황량한 평야를 달리는 병사의 빈약한 다리 근육, 그러나 거기에 불끈 일어선 힘줄로 응집된 끝에 시도 때도 없이 젊음을 자극하는 고약한 정충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그는 사정(射精)을 해야 했다. 그에게는 고대 올림픽과 같은 장이 필요했다. 젊은 시절의 이영수 씨가 6년 간이나 사법고시에 매달린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자신의 재능만으로 가장 빛나는 도약을 할 수 있다는 사법고시의 복음에서 그는 순수한 육체의 향연장이었던 고대의 경기장의 함성을 떠올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병사는 현대라는 시간에는 적응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인지 이영수 씨는 고시마다 줄줄이 미끄러졌다. 그 때문에 중년이 된 이영수 씨는 달리면서 가끔 쓸쓸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빛나는 도약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 그런 따위는 공무원 시험으로 돌아서면서 깨끗이 털어버린 터였다. 그가 쓸쓸함을 느끼는 것은 전생을 체험한다는 수상쩍은 신비주의자들처럼 달콤한 지중해의 바람내음과 평야에 풀썩이던 흙먼지가 이 도시의 잘 닦인 마라톤 코스에서도 문득문득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의 피는 흐벅진 그리움으로 역류했다. 아무리 가축(家畜)으로 전화되었어도 야생 상태에 있는 동류의 울음 소리를 들으면 피가 역류한다는 축생들처럼.
그가 불현듯이 고꾸라지던 순간에도 그의 피는 역류했을까. 그것은 알 길이 없지만 난데없는 까마귀떼의 울음소리에 잠시 몸을 떨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집 나간 큰아들 생각이 섬광처럼 이영수 씨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간 것이다. 자신의 명에 따라 고시원에 들어가 6개월여를 지내던 아들은 어느날 집으로 편지 한 장 보내고는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다. 어머니, 아버지. 경고합니다. 저를 찾지 마십시오. 당신들의 장남은 죽었습니다. 저를 찾는다면 그 이후의 사태에 대해선 저도 책임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엄벙덤벙하면서 미욱한 것 투성이인 작은아들과 달리 큰아들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버지인 자신을 한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물론 거스른 적도 없었다. 그랬던 아들이 갑자기 자기는 죽었다며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의 생은 위기를 맞이했다. 어쩌면 허물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결코 비극이 아니었다. 아내의 말마따나 비극이라는 건 그 아이가 마약 중독자가 되거나 집에 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수배자라거나 사고로 죽은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자신들은 그저 어느 가정에서나 일어나는 약간의 분란 혹은 갈등을 경험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영수 씨는 ‘어느 가정에서나’라는 표현이 썩 마음에 들었다. 아침마다 그를 엄습하는 경미한 변비증세와 속쓰림, 그리고 직장에 출근하기 싫은 심정 등이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증상이듯이 큰아들의 가출 또한 자신이 이 도시에 마련한 33평 아파트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아니 대체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청의 공보관이자 아마추어 마라토너였던 이영수 씨는 그래서 그날도 곧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들은 방황 중이었다. 그 나이의 청년들이 흔히 그렇듯이 말이다. 자신이 인도하는 대로 곱다시 따라오지 않는 것은 괘씸한 일이었지만 결코 참을 수 없는 그런 것까지는 아니었다. 이영수 씨는 난데없는 까마귀떼의 울음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시며 계속 달렸다.
그러는 그를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가로수들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반듯하게 맞춰진 보도블럭은 묵묵히 그의 몸무게를 받아주었고 자전거 하이킹을 하는 다른 시민은 깊은 동질감으로 친절히 손을 흔들어주었다. 서서히 땀에 젖어가는 머리카락은 그의 두피 위에서 조용히 들썩거렸으며 머나먼 산자락을 돌아온 바람은 그의 뺨을 고요히 어루만져주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뉴스에 나왔던 어느 미국인 남자가 떠오른 순간에 사고차량의 유리처럼 깨져버리고 말았다. 이영수 씨는 문득 부아가 치밀어올랐고 그 때문에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움직였다. 총구에서 뿜어져나오는 화약 연기와 푸른 잔디를 물들이는 선혈이 할딱거리며 흘레붙은 그림 같은 집의 평화로운 정원. 그 일을 저지른 것은 허우대도 멀쩡하고 직장도 좋은 데 다니는 선량한 시민, 즉 톰 혹은 샘이라고 하였다. 그는 퇴근을 하던 어느 날에 마당에 나와 잔디에 물을 뿌리고 있는 이웃집 노부부를 향해 총을 난사하고는 자신의 머리통도 갈겨서 자살해 버렸다고 했다. 이영수 씨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림 같은 집과 푸른 잔디가 있고 현역에서 은퇴한 자애로운 인상의 노부부와 그들의 인자한 백발 위로 감미로운 바람이 살랑이는데 무참한 사격과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 피, 피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영수 씨는 순간적으로 치미는 분노 때문에 머리가 약간 어지러울 정도였다. 지리멸렬한 생이라든가 세상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 따위, 지독한 권태와 환멸 따위는-병사가 돼보라, 흙먼지를 풀썩이며 마라톤 평야를 달리는 병사의 빈약한 다리근육과 그 위에 불끈 솟아오른 힘줄을 한 번 봐보라. 이영수 씨의 심장이 더욱더 격렬하게 팔딱거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별안간 거리가 화사한 봄볕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너무도 따스해서 흡사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볕이, 구더기처럼 자글자글 끓고 있는 거리. 이영수 씨는 조금 놀랐다. 마치 자신이 달리고 달려 피안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까마귀떼도 사라지고 스산한 칼바람도 산 너머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거리는 온화하기만 했다. 마라톤 코스의 냉랭한 시멘트 바닥도 어느새 융단 같은 푸른 잔디로 변하여 상냥한 처녀선생님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이영수 씨는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땀을 훔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 역시 화사한 봄볕에 물들어 있었다. 거기다 맞은편에서는 어떤 남자가 흡사 슬로우 모션으로 달리는 듯한 포즈로 불쑥 나타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이영수 씨는 아지랑이처럼 나타난 그가 누구인지를 분간하려고 애썼다. 이럴 수가! 그는 다름이 아니라 뉴스에 나왔던 선량한 시민, 톰 혹은 샘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이웃집 노부부를 쏘아 죽이고는 자신의 머리통까지 갈겨서 낭자한 선혈의 축제를 벌였다는 그가 감미로운 실내악처럼 퍼지는 봄바람에 맞춰 슬로우 모션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영수 씨는 숨을 고르며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그, 톰 혹은 샘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었다. 당신은 왜 그런 것인가. 그 그림 같은 집과 어여쁜 푸른 잔디. 노동으로서의 잡초 뽑기가 아니라 생활의 단장으로서의 풀베기가 존재하는 그런 집을 언젠가는 가지고 싶었었다. 총격전은 철저히 그 울타리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인데, 당신은 왜 그런 것인가.
이영수 씨는 기다리고 있기가 감질나서 자신이 직접 톰 혹은 샘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이영수 씨는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맞은편의 남자는 톰 혹은 샘이 아니라 자신의 큰아들이었던 것이다. 자기가 성(姓)을 물려주고 특정한 유전자 조직을 제공함으로써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된 한 생물체.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을 배반하며 집을 나가버림으로써 자신의 생을 위태롭게 만든 한 마리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그런 아들이 해사한 봄볕을 거느린 채 춤을 추듯 슬로우 모션으로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영수 씨는 순간 멈칫했다. 아들이 저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아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고. 그는 아들을 향해 달렸다. 모든 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할 참이었다. 네가 대체 나의 사랑을 아느냐고.
하지만 그의 아내는 달랐다. 사랑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는 순간 공기 속으로 흩어져 실체가 사라져버리는 어떤 것이었다. 그건 그렇게, 아무렇게나 입 밖으로 발화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 그의 아내가 있었다면 그 사실을 알려주었을 것을. 그랬다면 모두의 인생이라는 것은 좀 달라져 있을까.
더구나 시청의 공보관이자 아마추어 마라토너인 이영수 씨의 아내는 남편이 항상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이 질색이었다. 남편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래서 이영수 씨의 아내는 가끔 천연옥장판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기만 할 뿐이었다. 큰아들은 어딘가 몽상적인 구석이 있었으므로, 그 아이를 생각만 하면 이영수 씨의 아내는 돈을 많이 벌어야 했다. 유언의 내용도 미리 생각해둔 터였다. 그것은 작은아들에게 남길 것이었다. 부디 네 형을 잘 돌보아주라는 말과 함께 재산의 모든 관리는 너에게 일임한다고 할 생각이었다. 큰아들은 자기 소유의 재산이 있으면 어느 날 갑자기 부랑자들에게 다 내놓고 자신이 거꾸로 부랑자가 될지도 모르는 아이였다. 이영수 씨의 아내는 새삼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기가 죽기 전에 그 애가 일을 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산을 모아서 작은아들에게 관리를 일임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슴속에서는 사랑이,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이 눈물과 함께 흐르고 있었으므로.
그리하여 하늘은 음산한 잿빛을 띠고 있고 뜬금없이 까마귀떼는 날아와 까악까악 울어대고 있는 일요일 한낮, 이영수 씨의 아내는 남편이 운동을 하러 나간 후 락스를 풀어 목욕탕을 빠득빠득 닦아대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잠깐 속울음을 울었던 것이다. 어디선가 큰아들의 목소리가, 대체 그렇게 열심히 닦아낼 게 뭐가 있나요? 하던 그 목소리가 타일벽을 울리며 그의 귓가를 아프게 때려왔다. 아들은 그때 베란다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엄마인 자신을 향해 엉뚱하게도 그런 말을 중얼거리듯이 했었다. 락스하고 빨래할 때 넣는 표백제 있잖아요, 그거 둘을 섞어서 쓰면 큰일나요 엄마. 아들의 그 말에 이영수 씨의 아내는 걸레를 놓치고 말았었다. 아들이 그런 말을 그런 목소리로 할 때마다 이영수 씨의 아내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를 불길함이 독가스처럼 자신의 사랑을 질식시키고 말 것 같았다. 아들은, 마치 나무꾼을 버리고 가는 선녀처럼 자기가 낳은 새끼라는 사실을 뛰어넘어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인가. 이영수 씨의 아내는 아들의 말을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떨리는 목소리를 억누르며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뿌듯해하는 단어를 크게 소리내었다. 아들! 그러나 아들은 대답이 없었다. 이영수 씨의 아내는 상관하지 않고 아들을 한번 더 부른 뒤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락스며 표백제라니. 그런 데까지 신경 써서 어떻게 해. 그런 건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우리 아드님은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그러나 아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엄마의 말 따위는 괘념하지 않았다. 락스는 염소계 표백제고 빨래할 때 엄마가 쓰는 표백제는 산소계라서 둘이 섞이면 매우 유해한 가스를 뿜어내요. 실제로 어떤 주부가 욕실 문을 닫은 채 더 깨끗하게 닦겠다고 그렇게 섞은 걸로 청소하다가 죽었대요. 이영수 씨의 아내는 팔뚝에서 더 큰 소름이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아들의 꿈꾸는 듯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난 이 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을 때 어떤 계시를 받은 것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요. 그리스 비극 못지않게 상징적인 사건이기 때문이죠. 외교적 협상이나 체제의 안정으로도 막을 수 없는 비극이, 아주 아무렇지도 않게, 가만히 앉아서 전쟁을 관람하는 이 집에서, 아주 무심한 얼굴로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엄마는 이 집이 자랑스러우시죠? 하지만 하찮은 세제들 때문에 이곳도 생화학전이 벌어지는 전쟁터 못지않아질 수 있는 거예요. 엄마, 이걸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보다도, 그에 앞서서, 대체 그렇게, 열심히 닦아낼 게 뭐가 있나요?
이영수 씨의 아내는 드디어 그 일요일 낮에 그런 아들을 위해 천연옥장판 판매에 뛰어들기로 결심을 굳혀갔다. 다 사랑 때문이었다. 다단계로 판매되는 천연옥장판이 자신의 사랑을 지켜줄 것이기에 이영수 씨의 아내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영수 씨가 그때 마주 달려오는 아들에게 들려줄 말도 바로 그 사랑, 그것이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거의 다 다가가 그 어깨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에 이영수 씨는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그리고는 흡사 저격을 당한 듯이 길 위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심장마비였던 것이다.
마침 8차선의 도로 위에는 미리 작당이나 돼 있는 듯이 지나가는 차들도 없었고 인도 위를 걸어가는 행인들도 없었다. 인도 한쪽에 단장돼 있는 마라톤 코스에도 마찬가지, 시퍼런 회칼 같은 12월의 바람만이 적막하게 스쳐갈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영수 씨는 자신의 생을 찬찬히 돌아볼 사이도 없이 눈을 감았다.
과오와 추문이 없었던 생. 건전한 시민. 테러도 전쟁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도시. 과연 어떻게 살아야 올바른 것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시간 속에서 당신은 턱을 괸 채 이처럼 성실하고 가련한 인물을 쉽게 죽이는 작가를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다. 우리 생은 그처럼 그 자체가 거대한 스캔들인가.
그때 이영수 씨의 의식이 아직은 꿈틀대면서 무엇인가를 간절히 붙잡으려고 할 때 그 안에 포섭된 것은 허무하게도 젊은 시장의 언짢은 얼굴 표정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도 아닌, 애틋한 첫사랑이나 달리는 고대의 병사도 아닌, 오직 젊은 시장의 찡그린 얼굴이 그의 최후를 배웅했다고 하면 믿기 힘들겠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시장은 그 순간에도 그가 가져간 시정 홍보지 기획안을 들추며 그렇게 말했다. 상상력을 좀 발휘했으면 좋겠네요. 옛날하고는 달라져야 합니다. 관에서 만들었다는 생각이 안 들게, 재미있게, 시민들이 찾아서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하는데, 이건 너무 관에서 만든 냄새가 팍팍 나는군요. 나부터가 읽고 싶지 않아요.
현실에서도 그랬듯이, 이영수 씨는 대답 대신 어느 날 변신하는 나비처럼 보수정당의 옷으로 갈아입고 중산층이 밀집해서 사는 도시에 시장 후보로 출마하여 헌정사상 최연소 시장으로 당선된 30대의 시장 얼굴을 그저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때 그는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씀을 너무 쉽게 하시는군요. 상상력이라니요. 하긴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 저는 그저 마라토너일 뿐이니까요. 오늘 저녁에도 퇴근을 하면 저는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정해진 코스를 달릴 예정입니다. 저는 시장님처럼 명망 있는 대학병원의 외과 과장을 아버지로 두지도 못했고 30대도 아니니 상상력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하겠죠. 그렇지만 상상력이라니 너무 말씀을 쉽게 하시는군요.
왜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대답을 하지 않는 자신을 향해 젊은 시장이 그렇게 되물었을 때도 이영수 씨는 그렇게 대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아들들도 시장님처럼 됐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추문이나 과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생. 시장님께서 부디 더 출세하시기를 저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정말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었을 것을. 그러나 그때 그는 그렇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닙니다. 홍보지 편집팀과 충분히 상의를 해서 새로운 기획안을 만들어보겠습니다. 가능하면 아이디어 단계부터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요.
그것이 마지막 순간에 절실히 후회가 되어 그는 눈물이 나왔다.
많이 도와주십쇼. 이부장님처럼 경륜이 풍부하신 분들께서 저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셔야 제가 새로운 시정을 성공적으로 펼쳐갈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부장님만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장이 이영수 씨의 손을 굳게 잡았을 때도 그는 가슴속에서 푸득거리는 말, 상상력이 풍부할 수 있는 시장님이 정말 부럽습니다,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진심으로 후회가 되어 그는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그 다음날, 길 위에서 죽은 이영수 씨의 시신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병원 영안실의 냉동고 안으로 영치되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이 엉큼한 도시를 꿈틀거리게 한 스캔들이 터져 올랐다.
시장 부인이 실신한 채 그 병원 응급실로 실려왔고 그 원인에 대한 구구한 억측들이 안개처럼 도시를 떠돌았다. 시장 부인이 알콜중독자였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고 시장네 파출부가 경찰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시장의 여자문제와 지나친 정치적 야심, 시장 부인의 무절제한 사생활 등이 편리할 대로 종알거려졌지만 사건의 전말은 속시원히 밝혀진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답답해했는데 오로지 도시의 정경만이, 대체로 진실은 이런 외양을 걸친다는 듯이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시는 시끄러워졌고 스캔들은 그 자체의 떠들썩함에 흥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을 잊고 버스를 탔다. 밥을 먹었다. 섹스를 했다.
다만 언젠가 한 지명도 낮은 황색신문이 시장 부인과의 인터뷰에 성공했다며 요란한 타이틀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신문은 흥분된 어조로 시장 부인과의 인터뷰는 진짜며 그때도 시장부인은 술에 취한 채 횡설수설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내용을 모두 공개했는데, 그것은 사실 인터뷰라기보다는 시장부인의 알쏭달쏭한 독백에 지나지 않았다. 그 기사의 진위 여부를 놓고 도시는 또 한차례 들썩였다. 사람들의 생이 갑자기 축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다음이 축제를 기다리는 당신이 궁금해 할, 그 신문에 실린, 종잡을 수 없는 시장부인의 기나긴 독백이다.


원인이 뭐였냐면, 글쎄 난 화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술을 마신 것도 따지고 보면 그것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 잘 모르겠어요. 그저 전날 어디선가 또 고급 동양란 하나가 선물로 들어왔었지요. 이름은 모르겠지만 정말 아름다운 난이었습니다. 기품 있게 휘어진 잎이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고혹적인 꽃잎은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차라리 아프게 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나는 그것의 이름을 모른답니다. 그 아름다운 난 화분이 나는 싫었으니까요. 그것들이 선물로 들어올 때마다 저걸 어떻게 가꾸어야 하나 하는 생각으로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아아, 제발 난 화분 같은 건 선물 좀 하지 말라그래.”
급기야 난 남편에게 소리쳤지요. 그로써 거실에는 난 화분이 열다섯 개째 자리잡게 되었으니까요.
“난 저걸 잘 돌볼 자신이 없다구.”
물론 남편의 얼굴은 빠르게 일그러졌지요. 그는 꼭 자기 자신이 심각한 모욕이나 당한 듯이 숨을 거칠게 내쉬었습니다.
“어젯밤에도 또, 술 마셨어?”
그리고 나서 그는 목소리를 꾹꾹 억누르며 내게 물었답니다. 나는 대답도 않고 그냥 고개를 돌려버렸어요. 음산한 하늘빛과 난데없이 날아와 까악까악 울어대는 까마귀떼. 제 빛을 잃은 잔디와 나무들. 겨울이었죠. 그렇지만 햇빛 잘 드는 거실 한쪽에서 너무도 화사한 난들.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혔죠. 아아, 난이라니!
“왜 대답을 안 해. 어제도 술 마셨냐니까?”
출근 준비를 하던 남편이 대답을 듣지 않으면 출근이고 뭐고 안 하겠다는 듯이 단호하게 또 물어왔죠. 밖에선 운전기사가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다만.”
나는 침을 한번 삼켰어요.
“나는 다만 아버지 생각이 나. 자기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진 한복 입고 난 치는 게 취미셨지.”
그 대답에 남편이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다는 듯이 매던 넥타이를 도로 풀어서 침대 위로 거칠게 내팽개쳤죠.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습니다. 남편이 입고 있는 와이셔츠는 구김살 한 점 없이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죠.
“그 와이셔츠, 내 친구가 다린 거야.”
나는 중얼거리듯이 말했죠.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내 친구, 아니 나와 한동네서 나고 자라 중학교까지 함께 다녔던 아이가 어느 날 우리집 파출부로 왔던 것이랍니다. 하지만 남편은 그런 사실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신물나는 표정으로 다시 넥타이를 매고는 방을 나섰습니다. 경고를 하듯이 어금니를 깨물며 내게 이런 말을 남기고는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은 시장 부인이야. 제발 그에 걸맞게 행동해줬으면 좋겠어.”
그리고는 출근을 하고 나서 시청 직원들이 더 이상 그의 집무실에 드나들지 않게 되었을 때 핸드폰을 꺼내 조용히 내 친정으로 전화를 했을 테죠.
“솔이 엄마가 또 술을 마십니다. 어머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저러다 소문이라도 나면 큰일인데 말입니다.”
물론 나도 알고 있습니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알고 있듯이, 남편의 생은 깨끗하다는 걸요. 그가 행한 정치적 선택에 대해서는 비난을 받을 수야 물론 있겠지만 그건 말 그대로 정치적 선택일 뿐이었죠. 정치는 도덕과 비도덕이 다 포함되어 연주되는 어떤 교향악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니, 내 생각입니다. 아니, 아닌가요? 그렇지 않으면 그걸 어떻게 참으면서 바라볼 수가 있겠어요. 어쨌든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남편은 정치적으로 비난받을 수는 있어도 삶이 올바르지 않았다고 손가락질 받을 수는 없답니다. 나는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내가 유일하게 그의 생에 추문의 회오리를 불러오는 씨앗이 될 판이었지요. 시장 부인이 알콜중독자더라! 알고 봤더니 시장한테 여자가 있었다더라! 그래서 그 부인이 혼자 속앓이를 하다가 술을 마시게 됐다더라! 어쩜 부러울 것 없는 여자가 나이 마흔도 되기 전에 알콜중독이라니. 진경이도 그렇게 이야기했죠.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술을 마시니?”
진경이는 그날 아침에도 일을 하기 위해 일찍 우리가 사는 곳으로 왔습니다. 남편은 이박삼일 일정으로 도지사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간 참이었기 때문에 전날도 나는 늦게까지 술을 마신 터였어요. 이미 현관문을 열 때부터 낌새를 알아챈 진경이는 안방 문을 슬그머니 열어보고는 기겁을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었겠죠. 시궁창 냄새 같은 시큼들큼한 내가 방 안에 진동하고 술병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내가 미친년처럼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진경이는 그걸 수습하기 전에 우선 아이들을 깨워 학교에 보냈습니다. 엄마가 아파서 일어나지 못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요. 그리고는 항상 누군가 오게 마련인 이 집의 안주인을 대신해서 집안을 말끔히 정돈한 후 나를 깨웠습니다.
“누가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정신 좀 차려봐. 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술을 마시니?”
나는 그 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중학교밖에 못 나온 게 신춘문예에 도전하겠다니. 나는 순간 그 애가 괘씸해서 참을 수가 없었죠. 그 애의 주제를 똑똑히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나는 낮고 단호하게 말했죠.
“사람들 앞에서는 너라고 하지 마.”
다음에도 또 내 앞에서 잘난 척을 하면 나는 그 애를 해고하고 다른 사람을 고용할 생각이었습니다. 너말고도 내 추태를 못 본 척해 줄 사람은 많다구. 보나마나 자기 아버지처럼 게으르고 술타령이나 하는 남자와 살림을 차렸다가 실컷 두들겨맞기나 하면서 살았을, 그러다가 도저히 못 견디고는 이혼장에 도장을 찍었을 그 애를 바라보며 나는 잔뜩 인상을 찌푸렸죠. 그래도 진경이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나 모욕감 따위가 스치지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 것은 나였어요. 그 애의 의연함이 나를 얼마나 열패감에 휩사이게 했는지, 나 스스로 당황했을 정도였습니다.
나는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하면서 그 원인을 생각해냈죠. 진경이 그 애는 이때껏 한번도 존중받는 존재였던 적이 없었습니다. 집은 가난했고 성적은 늘 하위권을 맴돌았으며 사춘기에 접어들어서는, 그런 여자아이들이 흔히들 그렇듯이 운동화 꺾어 신고 껌 짝짝 씹으며 시내를 돌아다니는 발랑 까진 계집애가 되었습니다. 집이 가난하면 공부라도 잘 하든가,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잘 못하면 성실하기라도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외모라도 예쁘든가! 당연히 누구도 그 애를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너무도 마땅한 일이 아닌가요? 나에게 받는 멸시도 그 애는 멸시로 생각되지 않았을 테죠. 원래 타고난 살빛이나 머릿결처럼 자신을 이루는 한 조건으로 생각되었을 겁니다.
나는 문득 진경이와 맞담배를 피운 행동마저 후회가 되었습니다. 동창 집에 파출부로 왔다는 수치심을 내 딴에는 없애주기 위해 나는 일부러 불량한 행동, 즉 담배를 꺼내 피워 묾으로써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물론 나도 놀라운 사실, 그러니까 새로 온 파출부가 동창이라는 사실에 대해 좀 마음을 눅여야할 필요성이 있었더랬죠. 진경이와 얼굴을 마주친 다음부터 내내 아, 왜 진작 신상정보를 체크하지 못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대학 친구의 말에만 기대었을까 하는 후회가 가슴에서 파문을 일으켰지만, 어쨌든 나는 예사롭지 않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껄끄러운 관계를 껄끄럽다는 이유로 물리칠 수는 없었어요. 오히려 나한테는 친구가 궁한 처지이기 때문에 내가 도와주어야 한다는 아량과 선심이 요구되었죠.
“나는 이 도시에 살면서도 시장 부인이 넌 줄 몰랐어.”
열 개가 넘는 화분에서 활짝 핀 난꽃들은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죠. 진경이는 그 꽃들에 눈길을 던지면서 말했어요.
“나도 새로 온 아줌마가 넌 줄 몰랐어.”  
나는 세월의 물결이 고스란히 새겨진 진경이의 얼굴을 보며 대답했죠. 그러면서 세상만사가 결정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삼십대면 이미 한 사람은 시장 부인이고 한 사람은 그 집에 일을 하러 오는 파출부일 수 있다는 게 결정이 나는 거랍니다.  
“그렇지만 네가 나중에 이렇게 될 줄은 알았어.”
진경이도 그런 이치쯤은 애저녁에 깨달았다는 듯이 덧붙여 말했죠. 그때 살짝 진경이의 목소리가 떨렸던 듯도 합니다. 그러나 왜 떨렸을까요? 나는 담배를 꺼내 피워 물며 그 애에게도 하나 권했어요.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했던 것이죠. 그것은 정말이지 나의 전략적 실수였습니다. 나와 마주 앉아서 담배를 피우게 되자 그 애는 나와 자신의 관계를 잊어버린 채 한동네에서 함께 손잡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공연되는 연극을 구경하러 성당에 가던 사이로 돌아간 듯한 생각에 배지근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는 조금 짜증이 났답니다. 시간은 흘렀고 그 애는 진경이, 나는 나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그 사태를 잘 수습할 수가 없었어요. 고작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죠.
“친구 집이니까 편히 생각하고, 갈 때 싸갈 만한 찬거리라도 있으면 갖다가 애들 줘. 참 애는 몇이야?”
애는 나처럼 딸 하나, 아들 하나, 둘이라더군요. 나는 애써 내가 대범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진경이 그 애를 배려해주는 처지니까요. 아마 그런 태도가 전해져서인지 진경이는 정말로 우리 집을 편하게 생각하고 일을 하는 것 같았어요. 뿐만 아니라 내가 술을 자주 마신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오히려 자기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죠! 나는 속으로 벼르기 시작했어요. 네가 저 난 화분 중에서 하나만 깨트려봐. 아니, 난꽃 한 송이라도 시들게 하거나 이파리 하나에도 먼지가 끼게 해봐. 당장 잘라버릴 테니! 그런데 술독에 빠진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진경이는 점입가경으로 신춘문예 얘기를 꺼내는 거였어요. 자기가 시를 공부하고 있다나요? 언젠가는 신춘문예에 한번 내볼 거라나요? 자기처럼 시난고난한 인생을 산 사람도 시를 써서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걸 봤다나요? 당치도 않은 얘기를 수줍은 목소리로 하는 그 애에게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시는 그렇게 물렁물렁한 게 아니야.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날카롭지 않고 사유가 깊지 않으면 달착지근한 낙서밖에는 안 나오는 거야. 그래, 너도 시를 쓸 수 있겠지. 그러나 그건 시가 아냐.
하지만 그런 걸 대놓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어요.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죠. 그런데 나는 정말 모욕을 받고 말았어요. 진경이 그 애가 정말로 시집들을 들고 다니며 틈틈이 공책에다 베껴 쓰기 시작하더군요. 그 다음은 한국문학전집을 도서관에서 하나씩 빌려다 베껴쓰겠다면서요. 그날 도지사 부인이 주관하는 봉사회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정말 기가 막혔죠.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애는 헛된 꿈에 매달려 시간과 돈을 낭비할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잔인하지만, 네 형편을 직시하라고 충고해줄 셈이었죠. 하지만 그날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요.
그 다음날은 남편과 함께 남편의 은사를 만나러 가기로 한 날이었어요. 그 사람은 남편이 시장에 당선된 뒤 열다섯 개의 난 화분들 중 하나를 축하선물로 보내준 사람이죠. 웬일인지 나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날 밤 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나는 말했죠.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 그냥 자기만 갔다 와.”
남편의 표정은 금세 또 일그러졌죠.
“제발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 해.”
“난 정말 가고 싶지 않아서 그래.”
나는 공손하고 또 겸손하게 말했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나? 더구나 당신은 시장 부인이야.”
나는 입을 다물었어요. 그랬더니 남편은 나를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죠.
“우리가 왜 이렇게 됐지? 당신이 이렇게 변한 이유가 뭘까? 분명 우리는 서로 좋아해서 결혼했고 그 후에도 괜찮았었는데”
나는 고개를 돌렸어요.
“나도 모르겠어. 난 그저 문득문득 아버지가 생각나. 자기도 알다시피 우리 아버진 한복 입고 난 치는 게 취미셨지.”
이렇게 대답하는데 조금 목이 메어왔죠.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거야? 우리는 이렇게 젊은데 왜 당신은 인생을 망치려고 하는 거야?”
“우리 아버진 말야, 교육감이었는데 교사가 노동자라는 말을 참을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이셨어.”
“제발 그만 하자.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거야.”
“미안해. 다신 술 안 마실게.”
“제발 그래야지.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그 말에 나는 콧등이 시큰해졌어요.
“맞아. 애들이 있었지. 걔들이 내가 이러는 걸 알면 얼마나 창피스러워할까.”
“지금도 늦지 않았어. 지금부터라도 술을 딱 끊으면 되는 거야.”
“알았어. 정말 노력할게. 하지만…… 하지만 말야, 난 문득문득 저 난 화분들이 견딜 수가 없어.”
“더 이상은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군! 한두 번도 아니고, 도대체가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말야!”
급기야 남편은 화가 난 것 같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남편은 몹시 피곤한 상태였죠. 사실 그는 너무나 열심히 일을 하니까요. 나는 문득 그의 얼굴을 어루만져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손을 뻗었죠. 하지만 남편은 고개를 홱 돌렸어요. 할 수 없이 나는 손을 내려야했죠.
“송은정, 정말 경고하는데, 내 신세까지 망치지 마.”
남편은 씩씩거리며 내게 말했어요. 나는 남편에게 조금 미안해졌어요.
“그래, 알았어. 안 마실게. 정말이야. 다신 안 마실 거야.”
나는 결심을 하듯 단호한 어투로 말했죠. 하지만 남편은 화가 안 풀린 것 같았어요. 그때 또다시 내 눈에 그의 와이셔츠가 눈에 들어왔죠. 방금 간 작두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있는 흰색 와이셔츠.
“그거, 자기가 입고 있는 셔츠 말야. 그거 내 친구가 다린 거야.”
남편은 돌아버리겠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었어요.
“그래서?”
“예전에 너는 다린 옷이 싫다고 했었는데. 억압받는 거 같다면서.”
남편은 짜증스럽게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겼어요.
“그때 너는 참 괜찮았는데.”
그 말에 남편은 폭발하고 말더군요.
“내가 오늘 얼마나 피곤한지 알아? 시 예산 가지고 하루종일 보고받고 검토하고 입씨름하고. 게다가 시정 홍보지 기획안이란 건 정말 개떡같지.”
나는 그를 좀 위로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나 같으면.”
그런데 그 순간 딸꾹질이 나오고 말았어요.
“예산은, 많으면 옆에 있는 시에 좀 나눠주고 모자라면 남아도는 시에 가서 좀 받아오겠어. 그러면 문제가 수월하게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딸꾹질을 참으면서 진지하게 얘기했죠. 그랬더니 남편이 “미이친년.” 한마디 하더군요. “넌 지금 정상이 아냐.” 이 말까지 덧붙이면서 그는 방안을 왔다갔다했어요. 그러다 갑자기 나한테로 다가와서 물었죠.  
“너 이러는 거 여기 드나드는 네 친구도 알아?”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했죠. 그러나 남편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어요. 그는 다시 물었죠.
“너 이러는 거 파출부로 오는 네 친구도 아냐고?”
나는 대답 대신 낄낄거렸어요.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답니다. 딸꾹질이 그때는 웃음으로 변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흘러나왔으니까요. 남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죠.
“이봐, 내가 묻는 말에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대답 대신 내 어깨에 올려져 있는 그의 손을 뿌리쳤어요. 그가 하도 세게 쥐고 흔드는 바람에 어깨가 아팠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금세 손을 내 목으로 가져갔죠.
“그러니까, 니가 이러는 거 니 친구가 안단 말이지!”
그러더니 무엇인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게 느껴지더군요. 나는 켁켁거렸어요. 나는 내가 지금 밀폐된 욕실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중일 거라고 생각했죠. 진경이 대신에 말이에요. 그날 낮에 진경이가 장을 봐왔는데 그 안에서 얼핏 락스와 산소계 표백제가 있는 게 보였어요. 언젠가 신문에서 그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죠. 어느 부지런한 주부가 더 깨끗하게 청소해야겠다는 생각에 그 둘을 섞어서 문을 닫은 채로 욕실을 청소했다는 기사를요. 그 주부는 유해가스에 질식해서 숨을 거두었다고 했죠. 나는 너무도 슬펐어요. 누구도 욕실 청소를 하는 주부에게 그 두 표백제를 섞어쓰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해주지 않았으니까요. 가장 아름다운 집, 가장 안전한 장소, 가장 내밀한 공간이 사실은 가장 위험하고 배반을 일삼는 곳이라는 걸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그걸 보며 진경이한테는 그 말을 꼭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대체 그렇게까지 하면서 깨끗하게 닦아얄 게 뭐가 있겠니?
그렇지만 나는 거실 한쪽 열다섯 개의 난 화분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에 정신이 팔리고 말았어요. 생장에 필요한 최대한의 조건을 갖추어주고 그 존재를 최대한 존중을 해주지 않으면 결연히 자결을 하고 마는 꽃들. 나는 술이 아니라 마치 그 꽃향기에 취하는 것 같았죠. 나는 지금까지 술이 아니라 그걸 마셔온 거였어요. 나는 그것에 서서히 질식이 되어 여기까지 온 거였어요. 진경이한테도, 그 애가 욕실 청소를 하기 전에 그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그날 밤, 내가 진경이 대신에 문을 닫은 채 욕실 청소를 하고 있었던 거예요. 나는 남편에게 나를 차라리 요양원으로 보내는 게 좋겠다고 말할 참이었죠. 그것이 당신을 휴머니스트로 만들어주면서 당신 생에 찍힐 오점 자국을 최소화시켜주는 방법이 될 거라고 말할 참이었어요. 그런데 난 화분들이 흔들리면서 나는 욕실로 들어갔죠. 문을 닫고 청소를 시작했어요. 숨이 점점 막혀오더군요. 바로 그때, 나는 보았던 거예요.

나지막한 언덕배기 같은 곳에 미친년의 집이 있었다. 그곳에서 미친년은 한쪽 다리를 저는 어미와 함께 살았다. 그들은 바께스를 들고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음식찌꺼기를 얻어다 도새기것(돼지먹이)으로 파는 일을 했지만, 미친년은 발칸반도 여자들 같은 머플러를 뒤집어쓰고 바람에 부풀어오르는 검정색 치마를 입은 채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바람 속을 헤매다닐 때가 더 많았다. 너무 똑똑한 나머지 미쳐버렸다는 미친년. 누구한테 겁탈을 당해 그 충격으로 미쳐버렸다는 미친년. 그런 미친년의 집에 어느 날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그의 어미가 서방으로 들인 사람이라고 했는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팔 양쪽에 그들 모녀를 두고 잠을 잔다고 했다. 미친년의 배가 바람에 부풀어오르는 검정색 치마 위로 더욱 크게 부풀어오른 것은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누가 미친년의 배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남자 고등학생들과 군부대 군인들이 우선 그 주범으로 거론되었고 여름이면 커다란 젖통을 출렁이는 백인 여자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해수욕을 가던 미군들이 더불어 범인으로 쑥덕거려졌다. 미친년의 새아버지가 그랬다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다. 과연 누구인가. 누가 미친년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들은 그후 어디로 갔는가. 한쪽 다리를 절던 그의 어미와 늘상 술에 취해 있어서 역시 미친 거나 다름없었던 그 새아버지라는 사람과 그가 중얼거리는 말은 외계인밖에 해독하지 못한다는 미친년, 그들 모두는 언제,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나.
그리고 어느 날. 바닷가 해녀 탈의실 안에서 혼자 애를 쓰는 어미의 다리 사이로 힘겹게 고개를 내미는, 아아, 미친년의 아이.




김연화
․2002년 제2회 ≪문학과경계≫ 문학상 수상으로 등단
․소설집 <피아노 소리>

추천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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