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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북-리뷰> 생의 조화로운 한순간, 그 이전의 가난하고 황폐한 시작/문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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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360회 작성일 04-01-25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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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조화로운 한순간, 그 이전의 가난하고 황폐한 시작


문 혜 원
(문학평론가)




조하혜 시집
<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천년의시작刊)

김상미 시집
<잡히지 않는 나비>(천년의시작刊)



김상미의 ꡔ잡히지 않는 나비ꡕ는 폭력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내면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면에서, 그녀의 이전 시집들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 부조리한 세계는 전쟁과 기아(「밥 먹는 사람들」, 「This is War!」), 폭력적인 도시의 삶(「나, 불온한」), 기만적이고 왜곡된 인간 관계(「다트게임」)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도시는 그 모든 폭력을 내장한 채, 불합리하고 일방적인 시스템을 강요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생활의 공간이면서 자신과 불화하는 도시를 ‘병원’이라고 규정한다. (「병원 만세」)
그러나 이 도시의 폭력성은 그녀를 훼손시키지는 못한다. 외부적 상황은 그녀 안에 들어와서 시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본래의 공격성을 탈취당하고 그녀의 시 안에 얌전하게 자리잡는다. 그녀의 내면은 도시의 삶보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와 있어서, 외부적인 상황들에 직접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어떤 외부적인 변화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고 일정한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그녀가 적대적인 세계에 대응하는 방식이다. 특이한 것은 이 항상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에 기대어 평정심을 유지한다거나 자기 안에 감추어진 모성을 이끌어내는 등의 시적인 기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그녀는 몸 안에서 폭력에 대항하는 항체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면에서 그녀의 ‘내면’은 거의 ‘내공’에 가깝다.
김상미는 언어의 조작을 통해 이러한 항상성을 유지한다. 빈틈을 보이지 않는, 새침하리만큼 적절하게 다듬어진 그녀의 언어들은 그녀의 몸 안에 있는 항체들을 지키고 보호하는 방패막이 구실을 한다. 그녀의 시들은 대부분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전부 쏟아놓지 않고 약간 남겨놓은 듯한 상태에서 그친다. 외부의 상황에 반응하되 자신의 속내를 전부 다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약간의 미진함은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무차별한 관심에서 그녀 자신을 보호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은폐와 드러냄의 전략인 것이다.
이번 시집은 그런 면에서 조금 달라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언어를 조절하면서도 보다 적극적이고 강렬한 이미지들이 전면에 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붉음, 꽃, 핏물 등의 이미지들은 시집 전체를 생생하게 살아나게 하고 있다. 예컨대 그녀는 “나는 젖혀진다/남쪽으로 남쪽으로 젖혀진 내 목에서/붉은 꽃들이 피어난다/붉은 꽃들은 피어나면서 사방으로 퍼진다/그의 힘이다”(「사랑」)라고 말한다. 그 사랑이 결실을 맺을 때 사랑은 “나는 벌거숭이/너는 꽉 죄는 거들처럼 내 몸에 착 달라붙어 있다/흐느끼면서 온몸 파고드는 환희의 빛가루들은/우리들 내부에서 펴지는 날개들처럼/안으로 안으로 훨훨 날아오르고 있다”(「연인들」)는 강렬하고 관능적인 구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여기서 그려지는 사랑은 현재진행중인, 내면으로 불타고 있는 꽃과 같은 사랑이다. 이는 “꽃피는 걸 보려고/꽃밭에 앉아”(「기차는 떠나고」)있는 적요하고 고여있는 사랑과는 분명 다른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들은 사랑의 힘에서 온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성간의 사랑이든 육친간의 사랑이든, 동일한 점은 그것이 그녀의 시에 생생한 기운을 불어넣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은 인간관계에 지칠 대로 지쳐 책 안으로 스며든 그녀를 밖으로 끌어낸다. (「맨발의 나라」) 사랑을 통해 그녀는 잃어버린 삶의 건강성을 회복하고, 햇볕 아래 서서 ‘세상이 내게 약속하고 내가 세상에게 약속한 희망의 작은 숨소리’(「햇볕 아래 서 있으면」)를 듣는다. 세상과 늘 불화하던 자아가 모처럼 세상과 투명하게 소통하는 시간이다. 그녀는 이 변화를 본래 물고기였던 자아가 바다 속으로 돌아간 것에 비유하고 있다.(「생방송, 에필로그」) 물고기에 대한 친연성이나 바다로의 회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그녀의 시적인 변화가 좀더 진행된다면, 자연스럽게 밝혀질 대목이다. 현 시점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그녀의 시적인 변화가 계속 유지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조화로운 한 순간은 계속 지속될 수 있을까. 어차피 시인은 세상과의 불화에서 시작하는 존재가 아닌가.
언어의 운용 방식으로 본다면, 조하혜의 ꡔ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ꡕ는 김상미의 시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언어를 적절하게 다듬고 배치하는 김상미와는 달리, 조하혜는 자신의 언어들을 굳이 취사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녀의 시는 머릿속에 수런거리는 언어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테크닉이 거의 없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의 시는 이따금씩 행을 바꾸지 않는다면 줄글과 다르지 않을 만큼 산문적이고(“아침방송 드라마를 보다가/가난한 집안의 여주인공이 악녀가 되어/재벌 집안으로 시집가는 줄거리는/너무 뻔하다고/ 채널을 돌리려다 잠깐,”-「최신판 공포영화」), 극단적일 경우 “갯벌 위로 구르는 작은 돌 틈 사이로/사람이 발 딛고 서 있는 땅의 왜소함이/인간의 키를 바지락 조개쯤이나/진흙 알갱이처럼 감싸안던 섬을/ 다시 찾다”(「안면도 현장에서 전해드리는 시」)와 같은 불분명한 구절을 낳기도 한다.
이처럼 거친 수사의 이면에는 그녀의 트라우마가 놓여있다. 스스로 정의한 것처럼, “어떤 이에겐/트라우마가 곧/존재의 코기토가 될 수”(「도넛을 볼 때마다」)도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겉은 뜨거우면서도 속까지는 따뜻해지지 않는, 속이 휑하니 뚫려있어 텅 비어있는 ‘도넛’과 같다고 말한다. ‘비어 있음으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는 나의 존재성을 선포하는 공격적인 발언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을 고백하는 말이다. 결핍은 항상 충만을 전제로 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녀가 스스로 결핍되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대답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녀는 여러 시에서 역사, 민족, 국가, 시대, 타자와 같은 거대 서사의 흐름에 동참하지 못한(못하는) 자책감을 고백한다. (「변두리 여인숙․2」, 「역사에 대한 반역과 우울한 몽상 1」, 「역사에 대한 반역과 우울한 몽상․2」, 「어둠 속에서 어둠에게 말걸기」, 「코리언 드림」 등) 역사와 사회에 빚지고 있다는 부채의식의 준거는 다분히 80년대적이다. 90년대 학번으로서의 그녀는 ‘아프지 않고도 살아남은 것들’(「변두리 여인숙․2」)이라는 자책감에 괴로워하며 ‘슬픔도 견고하달 수 있을까’(「도넛을 볼 때마다」)고 반문한다. 이러한 자의식이 그녀의 시를 서정성이나 심미성과는 무관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조하혜는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시를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장 안에 위치시키려 한다. 그녀 말대로라면, 이것은 90년대 학번이 결하고 있는 사회적인 상상력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상상력은 “황무지를 발굴해낸 자만이/황폐한 기억을 지울 수 있다”(「4월」)는 방법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그녀의 시를 단순하고 평범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내가 가장 부끄러워하는 것과/동시에 부러운 것은/내가 90년대 학번이라는 것과/시대의 아픔 속에서 자신을 내던졌던 80년대 産과는/체질이 다른 아픔을 가졌다는 데 있다”(「당신들과의 대화 창구」)는 발언은 적절한 것일까? ‘90년대 학번’이라는 규정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주어진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운명이다.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주어진 것이라면,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고 체화함으로써 운명에 대한 대응력을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녀의 시에서 돋보이는 대목은 ‘나는 나라는 망상이다’(「망상과 싸우다」)는 관념적인 명제이다. 일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당신 A」나 「망상과 싸우다」와 같은 시에서 그녀는 ‘나’라는 존재의 존재성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 A」로 유추한다면, ‘당신’이라는 망상에 시달리는 ‘나’는 당신의 거울 앞에서 사물이 된 연후에야 비로소 시달리지 않게 된다. 의자는 의자끼리, 탁자는 탁자끼리, 찻잔은 찻잔끼리, 사물이 만나는 방식을 배우고 나서, 그러므로 ‘나는 망상이다’라는 결론에 이른 후 구역질이 멈추는 것이다.
이는 조하혜가 짐지고 있는 또 하나의 부담인 ‘관념’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자주 사유와 관념, 지식을 버거워하면서, 결국 그것에 붙들린다. 수식하고, 설명하고, 덧붙이고, 어렵게 쓰는 언어 습관은 (아마 그녀 스스로도 알고 있는) 사유 속된 말로 ‘먹물’의 병이다. 설명을 자세히 해주어야만 자신의 이야기가 전달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인 것이다. 그녀의 시가 산문적인 줄글 형태를 취하는 것도 사실은 이 강박관념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관념적인 자신의 존재론적인 특성 때문에 다시 고민에 빠진다. 그러는 와중에 ‘비어있음’은 ‘텅 빈 충만’(*이것은 虛나 空의 의미가 아니라, 그녀의 실존과 연결되어 있는 표현이다.)의 가능성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다만 결여태로 남게 되는 것이다.
다른 90년대 학번들처럼 세련된 미시 서사와 자기방어적인 독백으로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조하혜의 시는 거칠고 우울하다. 시를 쓰는 시인은 시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 고통은 사유의 깊이, 건조하지만 힘이 실리는 언어, 실존에 관한 질문 등 적지 않은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다. 장점보다는 모자란 점을 더 많이 지적하면서도 끝맺는 마음이 상쾌한 것은, 그녀의 시가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 헤쳐나가야 할 장벽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혜원
․1965년 제주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9년 ≪문학사상≫ 신인상 수상.
․저서 <한국 현대시와 모더니즘>
평론집 <흔들리는 말, 떠오르는 몸> 등

추천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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