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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2003년 여름호)<북리뷰> ‘밥통’과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기/윤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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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3,312회 작성일 04-01-2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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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통’과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기


윤 관 영
(시인)



리토피아문학회 사화집
<밥통의 계보를 묻다>(리토피아刊)

권정순 시집
<불가마 속으로 들어가다>(리토피아刊)



‘‘밥통의 계보를 묻다’를 가슴속에 묻다
한 개인의 시집은 일관된 특성을 지닌다. 이 일관성이 그 시인의 개성이 된다. 문집은 그 소속된 회원들이 모인 의도에 따라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 면에서 보면 리토피아문학회 사화집 ꡔ밥통의 계보를 묻다ꡕ(이하 ꡔ밥통ꡕ)는 한 개인의 시집처럼 단일하지 않고 다양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떤 의도에 종속되지 않은 개개 시인들의 개성이 확보되었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고무줄 바지를 입고, 입에 침을 바르면서 다가오는 이미지떼, 그 다채로운 개성의 숲으로 들어가본다.
먼저 식물적 이미지. 이 이미지의 시로는 박익홍의 「겨울 산사의 상수리알」, 이상아의 「나무로 된 집」, 박경순의 「무화과」, 배경숙의 「산수유꽃」등이 있다. 제제가 식물이어서 ‘식물적 이미지’인 게 아니라 거기에 스며든 식물적 서정이 이 시들을 단일한 이미지로 묶게 만든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시.

오글오글 모여 산야를 들끓이다/문득 종적을 감추는/어렴풋한 기운//봄의 경계를 흔들어/빈 무게로 자신을 지켜갈 뿐/옷깃 스치는 소리조차 없다//아름다운 반란/꿈꾸는 물빛/차마 고일 곳이 없어 눈물로 서리는가
―「산수유꽃」 전문

다음으로 불교적 이미지. 여기 속하는 시로는 백우선의 「비천」, 「미륵 연화」, 권천학의 「안개」, 황희순의 「늙으신 부처님」 등이 있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또 용서하기에 자기 색깔이 없을 듯하지만, 해탈의 경계에 섰다한들 시인들 저마다의 개성이 어디 가겠는가. 그 점에서 다음의 시는 절묘하게 역설적이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으니/웃지 않을 곳이 없으리’(백우선 「미륵연화」) 이런 역설이 있기에 ‘머리끝도 고요히 웃고/발가락도 그윽히 웃’는 선적인 고요가 이윽고 가능했을 터.
다음은 동물적, 혹은 관능적 이미지다. 읽는 맛을 줄 수는 있으나 좋은 시가 되기 어려운 것이 바로 관능적 이미지다. 왜? 진짜배기 관능적 이미지는 관능 자체를 드러내지 않는, 그야말로 이미지니까. 이 이미지의 시로는 이상아의 「9월, 초음파」, 나금숙의 「뒷모습」, 「흐린 하늘」, 그리고 이경림의 「욕조에서」가 있다. 이 중에서도 「흐린 하늘」은 ‘해설적 관능’이라 따로 이름 붙여볼 만한데, 하나의 정황이자 상태인 ‘흐린 하늘’에서 사물의 생리적 인과관계를 잡아채서는 그것에 미세한 관능을 입혀가는 솜씨가 사뭇 순발력 있게 다가온다.

흐린 하늘은/많은 씨방을 가졌다/물 알갱이로 된 씨방들은/가끔 제 부피를 견디지 못한다/기류가 일렁일 때/얇아질 대로 얇아진 껍질이/터지곤 한다/산화하는 물방울들/물의 씨앗들/텀벙/물상 안으로 튀며 뛰어든다/사물들은 가슴께가 간지럽다/윤곽들 흐려지며/경계가 무너진다/흐린 하늘이 스며/사물들 모두 물의 씨앗을 갖는다
―「흐린 하늘」 전문

바다, 또는 물 이미지. 이 이미지의 시로는 정경해의 「안개 속으로 흐르는 강」, 김영섭의 「섬」, 서동인의 「밥통의 계보를 묻다」․「그 노인이 사는 법」, 하두자의 「돌멩이가 운다」, 정경해의 「잠행」을 들 수 있다. 편의상 한 이미지로 묶기는 했으나 정경해와 김영섭, 그리고 하두자는 그 자체로 자가운동을 하는 반면, 서동인의 이미지는 현재적인 무엇과의 결합을 통해 과거를 복원한다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난다는 느낌이다.
역시 빠질 수 없는 것이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을 다룬 도시 이미지의 시들이 있다. 도시 문화 자체에 대한 현재적 저항이 한 줄기를 이루는가 하면, 그것을 내면화하면서 자아성찰로 가는 길이 또 하나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현재적 저항의 시로는 권천학의 「사람이 그립다」․「탈출하고 싶다」, 김왕노의 「속도를 잃다」가 있고, 자아성찰의 줄기로는 박경순의 「비겁함에 대하여」, 이성률의 「분재」, 김영섭의 「귀뚜라미가 우는데」, 그리고 유정임의 「가스렌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대상적 이미지가 있는데, 이 이미지도 대략 다음의 세 갈래로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대상과 현재적으로 교감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그 대상의 현재적 상태를 부정하면서 풍자 혹은 비꼬는 방식이 다른 하나이고, 그 대상이 촉발시킨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이 또 다른 하나이다. 굳이 세 갈래로 분류하긴 했으나 사실 현재적인 교감으로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식은 대부분의 시에서 고르게 나타난다 할 수 있다. 풍자 혹은 비꼬는 방식을 역설로 밀고 나가는 것은 남태식이고, 비꼬는 식으로 나가는 것은 정승렬이다. 과거로 돌아가는 방식은 황희순에게서 나타나는데, 그 아픔의 원형은 현재와 결합되어 있다.
동화적 이미지의 유경희를 빼놓을 수 없겠다. 단순한 착상 같으면서 웅숭 깊은 시선을 지닌 다음의 시를 마지막으로 인용한다.

시계를 되돌리면/이 외투는 초원을 뛰어다니겠지/눈밭에 한바탕 굴러/이 색깔들을 지우고/심장을 하나씩 주워 달고/숲속 오솔길로 사라져 가겠지/벽지 속 국화가 지고/장미가 자라는 소리
―「모피」 전문

짧은 지면 탓이긴 하나 좋은 시들을 너무 소략하게 훑었다는 느낌에 마음이 편치 못하다. 아쉬움을 접으며 사화집 전체에 대해 간략한 촌평을 덧붙인다. ꡔ밥통ꡕ은 일단 플롯에서 성공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엄선된 두 편의 시와 대표시, 혹은 등단시를 두고 시작노트 형태로 시인이 산문을 쓰면서 입체화시킨 것이 읽는 맛을 더하고 있고, 독자가 빨려드는 친밀도를 더하고 있다. 물론 그 입체화에는 김영식의 산문과 백선경의 엽편소설이 사화집 구성에서 다른 한몫을 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불교적 상상력, 그 통과제의의 시
권정순의 시는 김성동의 소설을 영화화한 「만다라」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하산하는 길에 “내 법명이 知山인데, 산을 알긴 뭘 아는가?” 하던 자조 섞인 말과 “내 고민의 일부를 신에게 의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하던 지산의 간절함이 어떤 절규로 느껴졌었다. 자장면을 먹으면서 고기를 골라내는 법운을 보는 지산이가 음식이니 먹으라면서 소주를 시켜먹었던가 어쨌던가는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깨달음으로 어떤 계율에서 자유로워져도 자기 가는 길의 극점에 대한 고민으로 허허롭지만 결코 허허롭지 못한 그를 보았었다. 물론, 무언가 새롭다는 듯 자장면 문 입으로 선배를 보는 생뚱한 법운의 눈길도 기억나는데, 나는 권정순의 시에서 법운 같은, 아직은 순정한 불교적 상상력을 본다.
그의 시 세계, 불교적 상상력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는 시는, 이 시집 제1부의 첫 시 「석굴암」이다. 그의 모든 시가 모이고 풀리는 양태가 여기 있으므로 시 전문을 소상하게 풀어볼 필요가 있다.

‘내 무딘 손으로는’―화자의 현재적인 상태
‘아무리 쪼아내도’―상태에 이은 화자의 행위, 즉 각고의 어떤 정진
‘줄어들지 않는/단단한 어둠’―(화자가 속한) 세상의 상태, 그 속성

‘솔바람 불어와’―어떤 깨달음을 상징
‘조금씩 망각의 가지를 흔들며’―깨달음이 발현되는 한 방식
‘일어나 앉아라/좀더 멀리 귀기울이라 한다’―깨달음으로 가는 자세, 혹은 길

‘천 년에/다시 천 년을 더하는 결가부좌’―통과의례의 방법
‘눈꽃으로 환해질 동굴의 바깥/그 겨울을 위해’―완성된 깨달음(어떤)의 형태

과거적인 불교적 상상력이 「석굴암」이라면 「불가마 속에서의 어느 날」(이하 「불가마」)은 현재적인 진행 속에서의 제시이자 제의이다. 이 두 시를 비교해 보면 그의 시 세계가 더욱 명징하게 드러난다.
그가 인식하고 있는 세상은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더디게 옮겨온 무거운 발걸음을 잡아당기던 어둠’이다. 「석굴암」에서는 ‘단단한 어둠’으로 「불가마’」에서는 ‘뼛속까지 스며들던 어둠의 갈퀴들’로 나타나 있다. 그렇기에 완성된 깨달음의 형태나 이상적인 무엇이 제시될 때에는 어둠과 대비되는 ‘환함’이나 ‘하얀 이미지’가 등장한다. 「불가마」에서는 ‘껍질만 남은 이름의 낯선 그림자로부터 탈출한다’로 나타나 있다. 물론 그림자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진정한 나를 찾는 것도 되지만 본체의 어둠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어둠을 벗은 어떤 상태도 된다. 이는「박제된 갈매기」에서는 ‘아주 조금씩 깨어나는/내 영혼의 하얀 깃털’로 변용되기도 한다.
완성된 깨달음이나 이상적인 무엇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은 통과의례다. 그의 시는 통과의례의 시라고 불러야 될 만치 대부분의 시에서 그 점을 전제한다. 「석굴암」에서는 ‘천년에/다시 천년을 더하는 결가부좌’로 나타나고 있고, 「불가마」에서는 ‘머나먼 아름다운 시절을 가린 창호지를 찢어내’는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결국 그 선을 넘어서야 어떤 무엇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겠다. 특히 그에게 ‘창호지’는 통과의례를 넘어서는 중요한 수단으로 여러 시에 나타나 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통과의례에 도달하기 위한 화자의 실천적 행위이다.  그 실천적 행위는 ‘장승처럼 바라보는’(「장승」), ‘해묵은 침묵에/귀기울이는’(「섬진강 매화등걸」), ‘수없는 담금질로’(「말장난」), ‘이제 비워내라고’(「빛의 신전을 지나며」), ‘걸어잠근 마음을/풀어낸다’(「소쇄원」) 등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건 「석굴암」, 「불가마」, 「박제된 갈매기」에서 ‘쪼아대’는 행위이다.
「석굴암」에 ‘솔바람 불어와’는 ‘촉각적 이미지’이기도 하지만, 소리를 동반하기에 ‘청각적 이미지’이기도 하다. 이 시에서는 ‘귀기울이라 한다’고 하여 또 청각적 이미지가 반복되고 있는데, 그의 시에서 깨달음의 정점으로 가는 길엔 바로 이 <청각적 이미지>가 꼭 나타나곤 한다. ‘눈물 흐르는 소리’, ‘물소리’, ‘해금소리’, ‘새소리’, ‘침묵’, ‘소리 깊은/그믐달 하나’ 등이 그렇다.
그의 시를 <불교적 상상력, 통과제의의 시>라고 불렀지만, 지산(知山)처럼 현재적인 끌탕이 넘치는 어떤 다른 면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이쪽을 주문해본다.



윤관영
․1961년 충북 보은 출생
․1994년 <윤상원 문학상>으로 등단
․1996년 ≪문학과사회≫ 참여

추천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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