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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특집>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이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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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을 읽지 않는 몇 가지 이유
이 명 원
(문학평론가)
1. ‘인식의 새로움’에 기여하는 비평을 발견하기 힘들다
2. ‘육성’이 담겨 있는 비평을 찾기 힘들다
3. ‘지식 잡화상’과 같은 비평가의 태도도 문제다
4. 비평적 평가에 대한 불신도 문제다
5. 비평에 있어서의 ‘현장성’ 또는 ‘논쟁성’의 상실도 문제다
아주 난감한 질문이 던져졌다. 도대체 독자들이 비평을 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이 그것이다. 비평을 필생의 업으로 결심하고 실천하고 있는 비평가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이 던져졌다는 점에서, 그 질문은 내게 가혹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가혹한 운명 앞에서 때때로 우리들의 실존은 마술적으로 단련된다. 갑작스럽게 던져진 물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혼신의 열정으로 이 상황과 싸우는 일일 것이다. 얼마간 내가 생각해 본 다음의 대답은 그 싸움의 내적 기록인 셈이다.
1. ‘인식의 새로움’에 기여하는 비평을 발견하기 힘들다
좋은 비평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에게 각성된 인식이 촉발하는 지적 쾌락을 선사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사유로부터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비평가들의 수사학적 관용구 가운데 ‘전복적 책읽기’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발견하게 되는데, 사실상 오늘날의 현장비평에서 그러한 관용구에 대응되는 비평 태도를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나른하게 쓰여진 많은 비평들이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관습적 사유에의 함몰’ 태도이다. 좋은 비평은 ‘입장의 낯설기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읽기에 있어서의 전복성이란 인식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데서 가능해질 수 있다. 그런데 현장에서 발표되고 있는 많은 비평들이 갑남을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해 보았음직한 관습화된 시각에 멈춰있는 경우가 많다. 사정이 이러하니, 독자들이 구태여 아까운 시간을 투자하여 비평을 읽을 이유가 어디 있으랴.
2. ‘육성’이 담겨 있는 비평을 찾기 힘들다
내가 철저하게 비평의 독자였을 무렵, 그러니까 비평가로 공식적으로 등단하기 직전에 읽었던 비평들 가운데 가장 깊은 감동을 느꼈던 것은 싸늘한 분석적 논리에 기반한 것들이 아니었다. 나는 비평에서 비평가 자신의 고통스런 ‘육성’을 발견하는 것에서 희열 비슷한 느낌에 빠져들곤 했다. 그런 비평들은 많은 경우, 작품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는 과감성보다는 작품 앞에서의 절망을 뻔뻔스럽게 때로는 다소 숙연하게 밝히는 것에서 감동의 빛을 발했다. 독자들이 비평에서 읽고 싶어하는 것은, 비평가들이 자주 오해하는 것처럼 작품의 흔적이 아니라, 비평을 쓰고 있는 비평가 자신의 체취이자 육성이다. 그런데 그것은 많은 경우 다수결의 동의가 아닌, ‘고독한 편견’이 발하는 뜻밖의 진실에 속한다. 비평에서 육성이 사라질 때, 한 편의 평론은 수학능력 시험 대비용의 문학자습서와 비슷한 운명으로 전락한다.
3. ‘지식 잡화상’과 같은 비평가의 태도도 문제다
문학비평은 필연적으로 잡식성의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문학비평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전체를 자신의 탐사지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조명하는 비평 역시 제도적으로 주어진 지식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비평가의 예리한 자각 없이 자동화될 때, 비평가들은 어처구니없는 ‘지식잡화상’으로 전락한다. 한마디로 비평이 지식 땜질의 기술적 언어로 전락한다는 말이다. 지식잡화상으로 전락한 비평은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아도 능히 해독 가능한 일차원적 문제를, 체감할 수 없는 추상적 개념어로 덧칠하는 것이 마치 비평의 의무인 양 ‘현학성’을 극대화한다. 작품 자체가 도저히 호평을 가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일지라도, 지식 잡화상인 비평가는 기이한 열정으로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잡다한 지식을 동원하여 언어의 지랄탄을 쏘아댄다. 독자들은 이러한 비평에서 자신의 무식이 추궁 당하는 느낌에 빠졌다가, 시간이 지나 그것이 한갓 언어의 사기술에 불과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비평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거두어들인다. 무관심이 복수인 것이다.
4. 비평적 평가에 대한 불신도 문제다
개별 작품들에 가해진 비평적 평가에 대한 독자들의 불신도 심각한 문제로 판단된다. 사실상 90년대 이후의 우리 비평은 비유컨대 ‘뻥튀기 담론’으로 일관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로부터 자유롭지 못 하다. 대형출판사에서 출간되는 거의 모든 작품들이 문제작으로 언급되었으며, 주요 문학매체에 발표되어 문학상의 수상작이 되었던 거의 모든 작품들이 한국문학의 ‘축복’이니 ‘기적’이니 하는 헌사에 기꺼이 노출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헌사에 일말의 신뢰를 표시하면서 해당 작품을 읽었던 독자들이 느껴야만 했던 배신감의 누적이다. 많은 경우 앞에서 언급한 과잉된 헌사들은 한국비평을 구조화하는 ‘주례사비평’의 토양으로부터 배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문인들간의 언어적 카르텔이, 독자 편에서는 비평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으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비평의 주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가 ‘가치평가’의 문제라고 할 때, 이에 대한 불신의 심화라는 현상은 비평의 존재근거를 그 근저에서부터 위협하는 상황이라는 점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5. 비평에 있어서의 ‘현장성’ 또는 ‘논쟁성’의 상실도 문제다
비평의 주요한 매력 가운데 하나는 치열한 상호논쟁의 전개에 있다. 독자들은 한 가지 사안에 대한 개별 비평가들의 상이한 관점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견지하고 있었던 관점을 수정하고 보충하는 것을 기꺼이 즐긴다. 비평에 있어서의 논쟁은, 논쟁의 대상이 된 특정한 작품이나 사안이 일도양단식의 투명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그 난제를 해결해 가는 개별비평가들의 개성적인 시각을 날카롭게 드러낸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우리 비평에서는 이 매력적인 논쟁적 대화가 실종되어 버렸다. 비평이 치열한 논쟁의 태도를 회피할 때, 결과하는 현상은 ‘현장성’의 상실이라는 문제이다. 논쟁은 과거를 향해서도 미래를 향해서도 나아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시대를 어떻게 읽고 판단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동된다. 말하자면, 비평가는 논쟁을 통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동시대에 개입하게 된다는 말일텐데, 비평에 있어 이러한 태도의 상실은 독자 편에서는 문학장(文學場)에 대한 참여의 열기를 차갑게 식혀버리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사항이 독자 편에서 본 비평에 대한 관심 회피의 원인이라면, 이제 비평가 자신의 고뇌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현재의 문학독자들은 비평 읽기가 재미없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그 쓰기의 주체인 비평가들은 비평을 쓰는 일이 요즘처럼 힘든 때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수년 전 국내에서 있었던 문학을 주제로 한 국제심포지엄에서 일본의 저명한 문학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자신의 비평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진술을 한 바 있다. “나는 더 이상 현장비평을 하지 않는다. 일본의 순문학은 더 이상 비평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논의할 작품이 없는 데 비평이 존재할 수 있으랴.” 대략 이런 논조의 진술을 펼쳤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러한 진술을 들으면서, 나는 머지 않아 한국문단에서도 동일한 고뇌에 빠지는 비평가들이 다수 출현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것은 현단계의 한국문학의 지형을 참고해 볼 때, 우리가 순문학 또는 본격문학이라고 지칭하는 작품군들이 보여주는 역량의 미달현상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내 판단에 최근의 한국문학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작품활동을 벌이면서, 또 질적으로도 가장 높은 수준의 작품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은 저널리즘에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군의 젊은 작가들이 아니라, 언필칭 4.19 세대로 명명되는 이제는 60대에 다다른 중견작가들이다. 한승원, 이청준, 황석영, 김주영과 함께 한 세대 위라고 할 수 있을 박완서 등의 수준 높은 작가적 성취는 그것이 화려하면 할수록, 오히려 젊은 세대 작가들의 문학적 공백은 더욱 커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동세대 혹은 바로 윗세대의 작가들이 창작진영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작품의 ‘대량생산’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제 갓 30대 또는 40대 중반에 이른 작가의 출간작품 수가 10여 종을 상회하는 것도 이제는 흔한 풍경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대량생산된 작품들이 많은 경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동어반복’의 발성법을, 문학사의 차원에서는 ‘기성품’의 경향을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작품의 ‘양적 축적’이 ‘질적 비약’으로 이어지지 못 하는 이러한 현실 앞에서, 모든 진지한 비평은 그 의욕을 상실한다.
비평이 의욕을 상실하면서 번성하는 것은 스트레이트성의 문학기사와 ‘상품시’로 명명할 수 있을 출판사의 보도자료의 자극적인 문구들이다. 비평과 기사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발견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보도자료의 홍보성 문안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시점에서, 독자들에게 우리들이 써 내려간 비평을 읽어주시라는 주문을 던지는 것은 후안무치한 일이다. 비평가인 나 자신의 입장에서 이 거대한 동어반복과 기성품의 대열에 수사학적인 위장을 통해 편승하는 것 또한 비평가로서의 양심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비평을 쓰는 일을 중지하거나,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문학상황에 전면적으로 개입하는 일 이 두 가지가 남는다. 비평이 회생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회생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독자들의 창조적인 개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와 함께, 아카데미에 포섭된 비평의 궁색한 현실도 환기될 필요가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나는 비평의 생명은 ‘동시대적 개입’의 태도, 즉 ‘현장성’에 있다고 믿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비평이 동시대에 탄력적으로 개입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태도는 이론화의 유혹과 현장에서의 거친 언어의 견인력 사이에서 끈질긴 균형을 취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슬아슬한 균형이다. 이러한 태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강단비평과 저널리즘 비평의 상호보족적인 관계의 형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90년대를 관통하면서, 우리의 비평은 강단비평에 포섭되었고, 비평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저널리즘 비평은 거의 실종되는 형국에 이르렀다. 특히 비평의 강단으로의 실종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켰다. 강단비평의 노골화된 생리라는 것이 미끈한 이론화와 가치중립적인 객관화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형성 중에 있는 비평가의 개성을 말살시킨다. 비평이 보수적인 아카데미 제도 속에 학문적으로 편입됨으로써, 이론의 외양을 취하고 있는 담론은 번성하지만, 그 번성하고 있는 담론의 현실대응력은 심각하게 약화된다. 이러한 문제점을 타계하기 위해서는 저널리즘 비평이 활성화됨으로써, 강단 비평의 제도화와 맞서는 긴장관계가 조성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문학출판을 포함한 저널리즘 지형에서의 비평적 실천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나는 비평가의 ‘생존조건’이라는 문제가 이 부분에서 심각하게 음미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한 사람의 비평가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 자신의 문학적 신념과 삶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은 ‘아카데미’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문학출판을 포함한 저널리즘 현장에서 비평가들의 안정적인 생존은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비평의 언어가 자본주의적 교환시스템에서 상품성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비평의 생존을 위해 많은 비평가들은 아카데미 시스템에 포섭되거나 수혈되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포섭과 수혈의 과정은 모든 제도화의 메커니즘이 그렇듯 관료제적 순응 장치에 적응할 것을 요구한다. 만일 아카데미라는 공간의 외부에서, 비평가가 최소한의 글쓰기 조건을 확보하면서, 자신의 발언을 계속할 수 있다면, 오늘날 비평을 둘러싼 집단적인 무기력과 타매의 분위기도 얼마간 지양될 수 있을 것이다.
이명원
1993년 <문화일보>로 등단
비평집 <타는 혀> <해독>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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