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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특집>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고영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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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존재 이유
―독자(讀者)인가, 독자(獨者)인가
고 영 직
(문학평론가)
1. 시장의 검열, 혹은 문화산업에 문제 있다
2. 상업주의는 저널리즘을 좋아한다
3. 권위가 무너진 낡은 문학상 제도
4. 문학은 자기 부정의 정신을 회복해야
5. 당국의 문학교육 개선과 문화에 대한 시각 전환 필요
한때 “문자는 사라져도 붓글씨는 남는다.”라는 말이 나돈 적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본격화된 ‘영상매체 시대’라는 낯설지만 강력한 도전 앞에서, 문자매체의 운명을 서예의 그것에 빗대 자조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 그후 약 10년이 흐른 지금 문자매체는 불과 10~20년의 상황에 비추어 보더라도 낙백(落魄)한 처지가 됐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시인 김지하의 ꡔ오적ꡕ을 필사하고, 언필칭 지하서적을 제작․반포하는 등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ꡔ장미의 이름ꡕ에 등장하는 중세의 ‘필경사’들을 연상시키는 문화적 ‘이상(異常) 증상’은 거의 눈씻고 찾아보기가 어렵게 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문자매체는, 18세기 유럽에서 인쇄 자본주의(print-capitalism)의 중심적 중요성에 의해 급성장했지만, 20세기 말 인터넷의 출현과 함께 또 한 차례 그 존재 방식과 유통에도 새로운 변화의 전기를 맞았다. 문학 개념 또한 ‘기술적 리얼리즘’이란 새로운 기술 발달에 따라 문자와 동영상과 음향이 겹쳐지는 하이퍼텍스트적 형태들을 적극 도입하는 등 전통적 개념도 달라지고 있다. 가령, 1980년대의 <얼굴 없는 시인> 박노해와 2000년대의 <얼굴 없는 소설가> 듀나라는 존재 방식의 차이는 문자매체의 환경 변화를 대표단수로 보여주는 기표들은 아닐까. 이들은 <얼굴이 없다>라는 익명적 존재로서의 공통점을 제하고는, 그 익명성이란 작가 조건의 자발성 여부 및 장르 차이에서 결정적으로 차이점이 드러난다. 박노해가 딛고 있었던 지하(地下) 공간과, 듀나의 활동무대인 사이버(Cyber) 공간의 차이는 본격문학의 존재 방식의 차이가 어떤 심연의 단층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시와 소설이라는 장르적 차이는 문학 장르에서의 적자(嫡子) 교체를 드러내는 ‘기표’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표지들은 (본격)문학이 변화되는 환경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한 기획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일부 작가를 제외하고는 냉담하기 짝이 없다. 시인 황지우의 말처럼 <이제 문학은 은둔하자>라는 독백을 읊조려야만 하는가. 그러나 ‘은둔’할 때 은둔하더라도 특히 ‘젊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현실에 대한 어떤 타개책은 문학 내부와 문학 외부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요구된다. 따라서 ≪리토피아≫의 질문은 매우 곤혹스럽지만, 나의 답변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문학제도와 작가정신이라는 측면에서 문학 특유의 비판성과 자율성 그리고 진리 충족성을 가로막는 요소들을 찾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다.
1)우선, ‘시장의 검열’ 혹은 문화산업을 문제삼지 않을 수 없다. 양의 동서와 동서의 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의 검열은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다. 역사상 최악의 검열 사례는 아마도 기원전 213년 이사(李斯)의 간언에 의해 중국 진시황이 자행했던 분서갱유(焚書坑儒)였을 터이다. 그 참극의 상황에서 분서(焚書)의 참화를 피했던 서적류는 의약(醫藥), 복서(卜筮), 종수(種樹: 농업)에 관한 책들과 진나라의 역사서들이었다. 이른바 실용서를 비롯해 ‘자신들의 승리’를 기록한 역사서 외에는 모두 탄핵과 숙청의 대상이 된 셈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권력의 이러한 검열 행태는 조선조의 사문난적(斯文亂賊), 일제 말의 조선어 말살정책, 군사정권의 금서목록 작성 등의 사례에서 보듯 유구한 역사를 갖는다. 이런 검열 행위가 문명 파괴 행위와 진배 없다는 말은 국가가 법률로써 문화인들의 상상력의 한계를 제한하기 때문이다. 1965년 「분지(糞地)」 필화 사건을 겪은 남정현은 그때의 체험을 “죽음의 공포를 실감했다”고 회고했다. 문제는 다음의 언급에서 보듯 비판적 창조력을 거세(去勢)시킨다는 점이다. “달리기 선수가 막 달리고 있는데, 뭔가에 탁 걸려 넘어졌다.”(minjak.or.kr/웹진 육성낭송 참조)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이념 차원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전례 없이 누리고 있다. ‘북한’과 관련된 금기가 남아 있지만, 이념 차원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필화 사건이라면 풍속(風俗) 사범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말이 결코 농담만은 아니다. 그런 대신에, 우리는 상업주의라는 새로운 차원의 ‘자기 검열’ 기제를 내면에서 작동시키지 않고서는 문학장 안에서 생존하기 힘든 조건에 처해 있다. 그렇지 않으려면 절대 고독의 비애를 감수해야만 하는데, 오늘 우리 시가 처한 조건이 바로 그러하다. 차라리 1970~1980년대의 이념 검열의 시대가 행복했다는, 특히 시인들의 자조 섞인 푸념이 시대착오적 발언만은 아닌 것이다. 상업주의 자체가 항상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상업주의라는 유령은 오직 “승자가 최고이고,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The Winner is the best and the most brilliant)”라는 다윈이즘적 질서를 강화함으로써 문학 행위의 가치를 서바이벌 전투 현장으로 옮겨가게 했다는 점이다. 우리 문학은 상업주의라는 무시무시한 허깨비와의 전투가 채 시작도 되기 전에, 백기의 투항을 내면화하지는 않았는지 자문자답해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2)위의 답변과 관련된 사항이겠지만, 상업주의는 자기 증식의 확장 욕망을 무한히 팽창시킨다는 점이다. 즉 상업주의는 저널리즘을 유독 좋아한다. 현재의 ‘문학-저널리즘’은 특히 언론사 탈세 공방을 거치면서 자사 이기주의 및 상업주의와의 결탁 양상이 심화되고 있다. 가령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 작가’인 이문열의 <책 장례식 사건>에 대한 유력 언론들의 보도 행태는 문학-저널리즘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당연한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나는 ‘장례식’의 의장을 빌린 ‘문화적 리콜’ 행위는, 그 도(度)가 심했으며 자칫 동일성의 폭력을 답습할 수 있는 우를 범하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도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책 장례식 사건>에 대한 보도 행태는 문학-저널리즘의 상식을 깬 명백한 사실(fact)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부분으로써 전체를 개괄하는, 즉 일반화의 오류라는 인식론적 독단론을 드러내고 있는 탓이다. “이날 따라 깊고 무심한 하늘엔 한국 문화의 장래를 절망케 하는 검은 만장 같은 징후가 떠돌고 있었다. 피켓 든 자만 남고 펜과 붓을 쥔 자는 이 땅을 떠날 것 같은.”(<조선일보>)
문학-저널리즘은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를 먼저 물었어야 한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 문학-저널리즘의 존재는 그 자체가 ‘괴물’이 될 수밖에 없다. 혹자는 <꽃을 든 괴물> 운운한 바 있으나, 괴물이 꽃을 들었든 책을 들었든 <괴물은 괴물이다>라는 속성 자체는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저널리즘의 플래시를 받지 않고서는 초판 1천명의 독자와도 만나기 힘든 상황에서, 문학-저널리즘이 문학과 독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까. 소수의 힘 있는 문학권력의 일거수 일투족을 ‘중계방송’하는 일이 문학-저널리즘의 역할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문학평론가 한만수(순천대, 국문학)가 지난해 문인, 문학담당 기자, 문학 출판사 편집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문학 저널리즘에 관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안티조선운동에 호응해서 <조선일보>의 원고 청탁이나 인터뷰를 거절하겠느냐”는 문항에 전체 문인의 58.7%가 긍정적인 응답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문학-저널리즘의 왜곡된 보도 행태는 결국 우리 문학과 문화를 위해서도 큰 손실이다. 요즘 신문의 문학 지면에서 안 팔리지만 작품성이 빼어난 ‘중견 작가’가 자주 등장하는가. 자신의 이름 없음[無名]을 탓하면서도 창작 의지를 불태우는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는 지면을 본 적이 많은가. 눈 씻고 찾아볼래야 잘 보이지 않는다. 소수의 ‘마케팅 전문가’를 비롯해 몇몇 인기 작가들이 온 지면을 독점하고 있다. 이런 행태는 수년 전 유네스코에서 선언한 바 있는 <문화 종(種) 다양성 선언>에도 명백히 어긋난다. 예를 들어 젊은 관객들의 ‘조폭 영화’ 편식 때문에 「고양이를 부탁해」 같은 영화가 일주일 만에 간판을 내리는 문화 현상은 저널리즘의 보도 행태에도 원인이 없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을까. 문학-저널리즘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부탁해!”라는 식의 보도 관점에서의 방향 전환을 요구받는다.
3) 문학-제도의 측면에서 간과할 수 없는 문학상 문제 역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문학상의 오도된 이벤트 마인드에 대해 몇 차례 지적한 바 있는데, 몇몇 유력 매체 및 출판사 중심으로 재편된 문단의 상업주의와 에콜주의가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행해지는 문학상 제도가 ‘축제의 향연장’이 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크다고 본다. 문학상이란 특정 매체 및 에콜의 “세계관의 한 표현”일 터인데, 현행 문학상 제도는 과연 세계관의 한 표현으로서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고 있는가. 문학상은 기법의 단순한 ‘확장’이 아니라 ‘경험’의 심화에 기여하는 문학, 즉 다양한 문학적 입장이 공존(共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문학 부양책이다. 작금의 문학상 제도의 문제는 권위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아니다. 문학상의 권위를 따지기 이전에, 특정 ‘에콜의 권위주의’의 강화 및 확산을 위해 존립하는 낡은 관행이 되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 이 상 저 상과 별다른 차별성이 없는 문학상의 존재는 독자들로 하여금 문학적 차이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4)오늘의 한국문학은 문학 내적으로는 독자들과의 새로운 소통과 대화를 위해서 ‘자기부정의 정신’을 회복해야 한다. 문학에서 자기부정이란 하나의 상식이 아니던가. 가령 시인 신경림의 언급처럼 그것은 “어제의 시(詩)는 어제 버려라.”라는 상식적 호소와도 일맥상통한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화하는 통합적(unified) 상상력을 연마하는 시인들과 소설가들을 접하게 힘들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따라서 무릇 작가들은 자신의 문학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가슴에 품고, 21세기적 문명의 주요 사항들과 길항하면서 <문학은 죽었다>라는 언표가 한낱 수사학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자기 증명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손석춘․조은 등 소위 비전업작가들의 등장이다. 이들은 작가들이 자기 발화의 위치를 절대적으로 특권화할 뿐만 아니라 일종의 반(反)서술적 스타일로 점차 획일화되는 작단의 풍토에서, ‘자아 찾기’라는 매우 고전적인 주제이지만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서술 전략을 구사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최근 <행갈이는 시의 총알이다>라는 테제를 제출한 시인 김지하의 주장이 ‘문화적 행갈이론’으로 읽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김지하에 따르면 최근 시의 행갈이 붕괴는 “시의 방향에 대한 감각이 약해지거나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좀더 확장해 본다면 ‘행갈이 붕괴’라는 현상은 뭔가 새로운 기운을 찾지 못 한 문화적 양식(樣式)의 붕괴와 같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행갈이는 시의 총알이다」, <시사저널>, 제717호, 2003. 7. 24).
5)독자의 귀환을 위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또 무엇이 있을까. 문학교육의 제도적 개선과 함께 문화를 공공재(公共財)로 인식하는 정부 당국의 시각 전환과 정책 지원이다. 특히 청소년 및 대학교 문학교육의 혁신은 매우 절실하다. 우리 문학교육은 나르시즘의 자아 도취에 취한 채, 더 이상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입시과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전국의 수십만 청소년이 소월의 「진달래꽃」의 주제를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라고 달달 외우고 시험 문제를 푸는 문학교육으로는 미래의 ‘주체적 독자’가 자라날 수는 없을 터이다. 스스로 발견하고 그 발견하는 속에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상상력 교육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로서 문학교육이 수행되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른바 생명을 잉태하는 ‘정신의 임신’(김상봉)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불임(不姙)의 교육을 강요하는 현행 문학교육에 대해 각급 문학교사, 학생, 작가, 관련 부처 등이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고쳐가려는 노력을 보일 때, 문학교육은 문화의 ‘불온한 전위’로서 문학이 독자들과 더불어 호흡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는 장이 될 것이다. 공공도서관의 증설 및 관련 예산의 획기적인 증가와 같은 인프라 구축은 두말하면 잔소리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소박한 소망이 가능할 수 있을까. 문화와 환경과 같은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획기적으로 진전된 사태 인식과 국정 비전을 담아내지 못 한 <국민소득 2만 달러>라는 정부의 청사진은 결국 국가 차원의 이벤트 마인드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의문스럽다. 나는 ‘2만 달러’라는 국정 지표와 저 박정희 시절의 <100만 달러 수출 돌파>와 무엇이 얼마나 다른 차별성을 띄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피와 살이 도는 인간의 육체와 영혼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이 모든 것을 산술적으로 계산화하는 시대에, 우리 문학이 서야 할 지점은 어디이고, 독자의 귀환을 위해서는 어떠한 안팎의 어떤 노력이 요구되는 것일까.
문학의 자리는 <국민소득 2만 달러>의 장밋빛 청사진을 문자로 ‘디자인’하는 차원에서 만족하는 장르는 아닐 터이다. 설령 그럴 바에야 ‘소수집단’이라는 주어진 운명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미만한 시장 만능주의에 온 존재로써 맞서는 항체의 진앙지가 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아니, 독자(獨者), 그것이 옳다. 문학이 처한 이 외롭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
고영직
1968년 전북 군산 출생
1992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주요 평론 <한국 반미문학사 서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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