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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특집>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김종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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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16회 작성일 05-01-19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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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씨와의 인터뷰소설 씨와의 인터뷰

김 종 광
(소설가)


1. 먹고살기에 급급해져서
2. 인터넷이 발달해서
3. 시간 때울 방법이 너무 많아서
4. 원래 소수 정예만 읽는 것이라
5. 소설의 사망설은 일반화의 오류


아무래도 당신에 대한 소개가 필요할 것 같군요. 스스로 간단한 소개를 해주시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나는 막연한 존재지요. 유사 이래 해수욕장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생각했고 나를 썼습니다. 또한 나를 읽었으며 연구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 대해서 확실히 규명된 것은 아주 적습니다. 내가 몇 살인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나인지, 조선 후기시대의 나와 20세기의 내가 같은지, 해외의 나와 국내의 내가 동등한 것인지, 나는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곧 죽을 것인지, 거의 모든 점에 있어서 나는 모호한 존재입니다. 그 누구도 속 시원히 나를 규명해 주지 못 했습니다. 하기는 그 누가 나를 일목요연하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우주처럼 드넓은 존재이거늘.
자부심이 대단하시군요. 그런데 당신께서는 요즘 너무 안 읽히십니다. 당신을 이 자리에 불러낸 것도 사실은 그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왜 안 읽힌다고 생각하십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내가 안 읽힌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10여 년째 당신이 사망했다는 말이 저잣거리에 횡행하고 있습니다. 설마 못 들어봤을 리는 없을 테고, 시치미를 뗄 작정입니까?
내가 사망했다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나의 시체를 보았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나는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습니다.
그러니까 비유지요 비유, 당신이 읽히고 있지 않다는.
아무리 비유더라도 그렇지요. 문학이 사망했다는 말이라면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겠습니다. 요새 누가 시를 읽고 희곡을 읽고 평론과 수필을 읽습니까? 하지만 나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문학 전체를 말하는 게 아니고 오로지 나만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내 생각에는 읽히고 있습니다. 안 읽히고 있다는 것은 유사 이래로 늘 있어왔던 유언비어겠지요. 인터넷서점도 좋고 서울의 대형서점도 좋고, 아무 데나 들어가 보세요, 베스트셀러 집계에서 내가 얼마나 돋보이는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것만으로 따져도 5할 이상이 나입니다. 팔리는 것만 팔리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내가 여전히 절찬리에 읽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손색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같은 베스트셀러라도 옛날과는 비교가 안 된답니다. 판매량 차이가 엄청나답니다.
도대체 그 옛날이 언제를 말하는 건가요?
글쎄요, 그러고 보니 당신이 엄청나게 팔렸을 때에 대해서 정확히 말한 자는 또 없군요. 하지만 판매량에 대해 묻는 게 아니라, 읽히고 안 읽히고를 따지자는 겁니다. 팔렸다고 해서 꼭 읽혔다고 볼 수는 없잖습니까? 사놓고 안 읽는 사람도 많단 말입니다. 반면에 사지 않고 읽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몇몇만 봐도 그렇습니다. 녀석들이 읽은 대부분의 당신은 도서관 거였습니다. 요새는 책대여점도 많이 이용하더군요. 헌책방에서 헐값에 사들이기도 하고요. 당신을 살 돈이 없는 거지요. 당신을 좋아하는 자들이 대개 가난하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입니다. 그리고 돈이 있는 친구들 중에도 당신은 돈 주고 사기가 아깝다고, 유독 당신만은 꼭 대출로 보는 자도 있어요. 어쩌면 당신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들은 당신을 가장 안 사는 사람들일 겁니다. 이러니 판매량을 기준으로 해서 읽히고 안 읽히고를 따진다는 것은 어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나는 요새 고등학생들이 귀여니라는 작가의 책을 안 읽으면 왕따당한다거나, 황석영 선생의 삼국지와 이문열의 삼국지가 첩혈쌍웅하고 있다거나, 해리포터의 마법사가 전 세계 어린이뿐만 아니라 우리 한반도 남쪽의 어린이들도 집어삼켰다거나, 느낌표가 붙는 것마다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간다거나 뭐, 이런 소문들을 들어서, 팔리든 안 팔리든 간에 나의 최전성기인 줄 알았지요.
어쨌거나 문제는 당신을 안 사더라도, 열심히 읽어대던 자들이 팍 줄어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당신이 독자들에게 왜 읽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드리고 있는 거고요. 자, 많이도 필요없고 다섯 개만 대주시지요. 안 읽히는 이유 다섯 개.
그렇군요.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 시대의 내가 독자들에게 왜 안 읽히느냐, 할 때의 ‘나’는 도대체 어떤 나를 말하는 겁니까?
당신은 그냥 당신이지요.
그렇지가 않지요. 같은 나라도 다를 수가 있지요. 베스트셀러인 내가 있는가 하면, 초판도 못 나가는 내가 있습니다. 팔려도 문학적인 대우를 못 받는 내가 있는가 하면, 거의 팔리지 않아도 한국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내가 있습니다. 느낌표에 선정되는 내가 있는가 하면, 라면 끓인 냄비 받침대로 쓰이는 나도 있습니다. 순수한 내가 있는가 하면 민중스러운 내가 있고, 리얼리즘한 내가 있는가 하면 판타지한 나도 있습니다. 페미니즘한 내가 있는가 하면 남근주의한 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한없이 다른 나를 ‘그냥 나’로 뭉뚱그리자는 겁니까?
딴은 그렇습니다만, 자꾸 말 돌리면서 회피하지 마시고 그냥 말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니,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갑니까? 요새 당신이 독자에게 안 읽히는 이유 다섯 가지만 대달라는데 그렇게 생각이 안 납니까?
누가 생각이 안 난다고 했습니까. 나는 다만 분명히 할 것은 분명히 한 뒤에…….
당신은 원래 모호한 존재라면서요. 모호한 대로 넘어갑시다.
좋시다, 좋아. 뻔한 거 아닙니까? 내가 안 읽히는 이유는. 누구나 말하는 이유. 아주 상투적이고 보편적인 이유, 설마 나에게 기상천외한 시각을 원했던 건 아니겠지요?
그렇게 엄청난 걸 요구했겠습니까. 다만 진솔하게, 정리가 좀 되게, 이 정도만 지켜주면 되는 거지요.
첫번째 시대의 정신 없는 질주 아니겠습니까. 혹자는 후기산업시대라고도 하고, 혹자는 신자유주의시대라고 하고, 혹자는 뭐라뭐라 하고, 하여튼 이 시대에 대한 많은 규명들이 있습니다. 나도 뭐가 가장 올바른 규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분명한 건 이 시대는 책이나 붙잡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겁니다. 가난하던 때에는 가난하므로 가진 게 시간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있으니까 나를 읽을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요새는 가난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부유하든 부유하지 않든, 가난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먹고살기에 급급하다는 거지요. 이럴진대 나를 읽을 시간이 있겠습니까? 우리 시대의 가장들이 평생 책과 담쌓고 지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먹고살기에 급급하기 때문이라는 거군요, 첫 번째는.
두 번째는 인터넷입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의 사람들 중에는 정보와 교양과 감동을 얻기 위해서 나를 읽었던 자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정보, 교양, 감동, 이거 인터넷에 널려 있습니다. 인터넷 붙잡고 한두 시간이면 무한한 정보와 광대한 교양과, 한없는 감동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누가 구태여 나를 붙잡고 몇 시간씩 골치 아프려고 하겠습니까?
독자들이 당신에게서 구하던 것을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당신이 읽히지 않는다, 이렇게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정반대 되는 말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즉 인터넷은 나를 더욱 읽히게 만든 요인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삼천포로 새는 말 같습니다만 해보시지요.
나는 원래부터가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주동적인 대상입니다. 독자는 시시때때로 읽음을 멈추고 사유할 수 있습니다. 사유할 짬을 거의 주지 않기 때문에, 보여주는 대로 볼 수밖에 없는 영화 예술과 비교한다면 내가 얼마나 독자 주동적 예술인지 알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독자에게 다소곳할 것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독자 입장에서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혹은 동감할 수 없는 나는, 독자에게 무의미한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럴 경우엔 내가 독자 주동적이라고 자부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독자의 수준과 비위에 맞추려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인터넷이 나의 그 자존심을 뭉개버렸지요. 인터넷은 나에게 강요했습니다. 좀더 쉬워져라, 좀더 유치해져라, 좀더 어린 사람들 비위에 맞추어라. 인터넷의 강요는 곧 시대의 강요이기도 했습니다. 출판시장은 강요를 받아들이거나 강요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곧 인터넷류라고 부를 수 있는, 나를 대거 출현시키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나도 인터넷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요. 즉 인터넷은 나의 외연을 증폭시켰고, 나의 내연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장일단이 있다는 말이군요. 인터넷은 당신의 독자를 줄인 측면도 있고, 늘게 한 측면도 있다는.
세 번째는 시간을 때울 수 있는 방법이 무한히 늘어났다는 겁니다. 과거에는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서, 재미있고 싶어서, 연애하고 싶어서 등등 신변적인 이유로 나를 읽는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 남아도는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때웠을까요? 나밖에 더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새 세상은 선택의 여지가 무궁무진합니다. 텔레비전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과거에는 서너 개 채널을 아무리 돌려봐도 구미에 맞는 게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채널이 수십 개입니다. 구미에 맞는 게 하나는 걸리지 않겠습니까? 텔레비전 한 번 켰다가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르는 사람이 속출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요. 텔레비전말고도 볼 게 얼마나 많습니까? 보는 게 지루하면 인터넷 게임으로 들어가 조금 눌러대다 보면 한나절 홀라당 가버립니다. 그리고 요새는 갈 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다들 차가 있으니까 멀리 떨어진 곳도 이제 손바닥 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논다는 자체도 힘드는 일이라 그렇지, 놀 작정이라면 아주 가까운 곳에 놀 건수가 지천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세상이 놀기를 강요한단 말입니다. 열심히 일했으니까 여가 시간에는 열심히 놀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일하고 노는 기계나 마찬가지지요. 한 마디로 나를 붙잡고 있을 시간이, 사람들에게 없어요.
그러니까 당연히 당신을 안 읽겠군요. 여가선용 기회가 넉넉해서,라고 정리하겠습니다.
네 번째는 나 자체가 원래 읽은 사람만 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안 읽히는 이유가요?
어느 시대에나 백 명이 있었다고 칩시다. 그 중에 나를 읽는 사람은 언제나 10%센트였다는 겁니다. 조선시대에도 일제시대에도 보릿고개시대에도 70, 80년대 나의 황금기에도 포스트모더니즘시대에도 당대에도. 그런데 나를 읽지 않는 90퍼센트가 생각하기에는 언제나 ‘우리 시대의 그는 독자에게 읽히지 않았다’는 거죠. 제 생각에는 2003년 현재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나를 읽는 10퍼센트의 사람들이 있고, 여전히 나를 읽지 않는 90퍼센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90퍼센트의 사람들은 당대의 나를 안 읽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당신은 원래 소주정예에게만 읽힌다는 말이 되겠네요. 그런데 다른 항목과는 달리 이번 항목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의견이 아닐까요?
진솔하라고 말하라기에 내 솔직한 심정을 말했습니다.
아무튼 좋습니다. 다섯 번째는?
다섯 번째가 아무리 해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혹자는 마지막으로 반성적 발언이 나오지 않았을까 예측하겠습니다만, 나는 반성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재미없어서 독자가 안 읽는다, 이러면 참으로 근사한 발언이 되겠지요. 겸양에, 앞으로는 잘 읽히도록 노력하겠다는 각오도 될 테니까요. 독자도 흡족하고, 나도 반성했으니 마음 편하고, 이런 자리를 마련한 주최측도 모양 좋게 끝낼 수 있고. 그러나 제 생각에는 나는 할 만큼 했습니다. 한반도 남쪽만 따져도 굉장히 많은 내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내가 있는가 하면, 소리 소문 없이 몇몇에게서 추앙받는 내가 있고, 위대하나 철저히 버림받아 묻힌 내가 있습니다. 참으로 허다한 내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이 중에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몇몇 나만을 읽은(특히 평소 나를 즐겨 읽지 않다가 어쩌다가 읽은) 분들 중에는, 나라는 거대한 숲을 속속들이 다 본 양, 거침없고도 단칼과도 같은 일반화를 토로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겁니다. 아마 내가 사망했다는 소문도 그런 섣부른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 그만하십시오. 어떻게 감히 독자님들에게 주둥아리를 놀리십니까? 그러니까 먹고살기에 급급해져서, 인터넷이 발달해서, 시간 때울 방법이 너무 많아서, 원래 소수정예만 읽는 거여서, 우리 시대에 당신이 안 읽힌다는 얘기지요? ……예, 그럼 이것으로 소설 씨와의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김종광
1971년 충남 보령 출생
1998년 ≪문학동네≫ 단편소설 등단,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소설집 <경찰서여, 안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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