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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특집>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한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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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살기의 괴로움
한 창 훈
(소설가)
1. 프로작가, 생계 유지가 안 된다
2. 지식인에 대한 편견으로 함량 미달의 책이 적지 않다
3. 작가들의 도덕주의가 독자들과 엇박자 이뤄
4. 독자도 물질 시대의 피해자
5. 국가의 창작 마인드가 없다
하긴 뭐, 담배 끊는 약과 가래 천식 고치는 약 팔면서 담배까지 파는 약국도 적잖기는 하지만, 글 써서 벌어먹고 사는(아니, 정확히는 글 써서 벌어먹고 살아보려고 하는) 작가가 책 안 팔리는 이유를 따져 몇 마디 고시랑댄다는 게 얼핏 보면 투정일 수도 있는 데다, 옥수수 장수가 내 옥수수 왜 잘 팔리는지를 말해보는 것도 아니어서 흥나는 짓거리만은 아니다.
담배로 잃은 건강 홍삼으로 되찾자가 전매청의 숨어있는 구호라고 하기는 한다면, 우리 시대 소설이 안 팔리는 그 담배 같은 것은 무엇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홍삼은 또 무얼까.
한 소설가가 있다. 스스로를 프로작가라고 이름지어 놓고 프로답게, 가열차게 소설을 쓴다. 사람의 삶을 정면에서 들여다보는, 인생사 아프고 괴로운 현실을 제대로 그려내고자 애쓰는 소설가이다. 첫 번째 책은 그럭저럭 팔렸다. 평론가와 문화부 기자들도 꼭 필요한 작가가 나왔다고 칭찬이 대단했다. 작가로서 평생을 살아보고자 하는 희망이 생겼다. 자신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와 만나 연애를 했고 결혼을 했다. 아이도 낳았다.
이 정도면 별 탈 없는 듯하다. 소설가로서 자리도 잡았고 좋은 아내가 있고 귀여운 아들이 있다. 그러니 걱정할 게 무어 있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결혼이 돈 되는 것은 부조 받은 날 하루이고, 애가 돈 되는 것도 백일이나 돌 때 반지 받은 것뿐이니, 이것 까먹는 것은 한 이틀이면 충분하다.
그는 요즈음 쓰기 귀찮거나 괴롭거나 그런 거 따지지 않고 닥치는 대로 쓴다. 그래야 밥을 먹고 아이 우유를 사고 카드빚을 갚기 때문이다. 그를 보고 있자면 ‘황금머리를 가진 사나이’라는 러시아 콩트가 생각난다. 돈이 필요할 때마다 황금머리를 조금씩 때어내 쓰는 이야기 말이다. 그 사나이는 한 아가씨를 사랑해서 원하는 대로 사주었는데 더 이상 황금을 떼어내지 못 할 정도에 이르자 그 아가씨는 떠나고 만다. 사나이는 사랑을 되돌리기 위해 황금을 더 떼어내서 비싼 구두를 샀는데, 머리의 절반이 없어진 다음이라 자신이 왜 구두를 샀는지, 누구에게 주려고 했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길거리에 쓰러져 죽는다.
물론 생활비 걱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이 태반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도 프로 작가는 글을 쓰는 것으로 생계가 유지되어야 하는데 (작가란 무엇인가. 한 국가와 한 시대의 정신을 일으켜 세우고 지키는 존재 아닌가. 예로부터 작가가 나지 않은 국가는 역사의 어두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렇지를 못 하는 데에 문제가 있다. 나도 똑같다.
사실 내 책이 안 팔렸다고 하면 사람들은 잘 믿지를 않는다. 술 사기 싫어서 그런 줄 안다. 책 좀 나갔지? 자꾸 물어온다. 정말로 안 팔렸다고 다시 대답한다. 설마, 이런다. 급기야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호가 일쇄야.”
왜 이런가. 우선 창작자와 출판 세계를 보면 이렇다.
나는 지금 출판인협의회에서 이 달의 좋은 도서선정 위원을 맡고 있다. 두 달에 한 번씩 하는데 매번 출품되는 책이 칠십 권 이쪽 저쪽이다. 선정위원 세 명이(우리는 문학 창작물 파트이다. 아동물이나 청소년, 자연과학 사회과학 등 여러 파트가 있다) 이걸 읽고 모여 회의를 하여 아홉 권 또는 여섯 권씩 선정하고 그 이유를 쓴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많은 책을 읽어내야 하는 것도 고역이지만 이 짓을 하다 보면 어떤 실체가 하나 보인다. 작가 아닌 사람들이 쓰는 책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일단 쓰고 나면 작가 아니냐,고 한다면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 함량 미달의 책이 적잖다는 소리이다.
굳이 원인을 따져본다면 지식인에 대한 편견 또는 착각 때문인 듯하다. 유교주의와 일본제국주의, 전쟁과 급하게 들어온 3류 자본주의의 과정을 겪는 동안 올라서는 안 될 사람이 위에 오르고, 뭘 맡지 말아야 할 사람이 뭘 맡는 경우가 아주 흔했다. 그들은 이권을 챙겼고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고물 가루를 얻어먹기 위해 줄 끝에 선다.
자질 부족을 숨기는 데에는 문예교양이 필수라 사람들은 가식과 품위의 옷 입기를 즐기게 되었는데, 그래서 지식인=저자의 등식이 만들어진 듯하다. 저서가 있어야 명함에 모양이 난다는 생각이다.
하다보니 말이 한쪽으로 좀 쏠리긴 했지만 어쨌든 도서의 과잉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외모만 보고 사람을 알 수 없듯이 책도 표지만 보고 내용을 알 수 없지 않는가. (물론 외모를 중시하는 습관대로 표지 편집과 제목이 멋있으면 사람들이 많이 사기는 한다.) 그러니 사람들은 베스트셀러라고 소문난 것에 손이 간다. (검증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사재기해서 베스트 반열에 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건 상당히 복잡한 문제라 한 두 마디로 정리가 되지 않을 듯하다. 전문가들이 좀 분석을 해주었으면 한다.)
또 하나는 작가들의 도덕주의가 고민하기 싫어하는 독자들과 엇박자로 맞아떨어진 탓이다. 솔직히 일반 독자들은 내 책을 어려워한다. 읽기가 부담스럽고 뭔가 생각을 요구하는 듯해서 괴롭단다. 까짓것 이해한다. 죽을 둥 살 둥 머리카락 쥐어뜯어가며 썼으니 그걸 한순간에 홀랑 삼키기 힘들 수밖에.
일반 독자들은 그런 책을 싫어한다. 재판대 위로 올라와야 하는 것은 당연히 독자의 수준이다. 그런데 독자들의 게으름과 호흡을 맞춰 작가들도 약삭빨라진다. 독자들이 게을러지니까 그 게으름에 맞춰서 책을 낸다.
땅과 씨앗을 주고 자 이제 경작해서 수확하세요,라거나 하다 못 해 쌀 배추 고기 양파 마늘 젓갈 따위를 차려주고 이제 알아서 해 잡수세요,까지만 작가들이 해야하는데 더 나가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말이다. 숫제 밥 안쳐 뜸 뜨고 참기름 쳐발라 비벼 먹여주고는 손바닥 발바닥 주물러 체하지 않게 하고, 아랫배 주물러 똥 잘 싸게 해준다. 그래서 팔리기도 한다. 문제는 팔리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는 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동화나 기행이나 산문이나, 조금 팔린다 싶으면 그곳으로 가기 때문에 또 과잉이다. 어떤 게 제대로 써진 것인지 판단하기에 시간과 노력이 든다. 그래서 한 번 잘 팔린 작가 것은 또 잘 팔리는 데 비해 뒤차를 탄 작가들은 헛물켜기 일쑤이다.
난 사실 책을 많이 내는 작가들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출판사 이름 모호한 시집을 받다보면 시보다도 약력이 긴 이들을 간혹 보는데(긴 시가 좋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그리고 시인 약력에 관변 단체 이름이 왜 필요한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책 권수로 승부를 거는 이들을 흘겨보곤 했다. 그런데 세상 살다보니 욕하다가 닮는다고 했던가,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스물 일곱에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스스로 다짐을 한 게 두어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마흔에 첫 소설집을 내겠다는 거였다. 마흔에 괜찮은 책 하나 내겠다고 다짐을 했으니 급할 게 없어서 좋기는 했지만, 그래서 그랬는지 어땠는지 지금 와서 보면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나는 지금 마흔 하나, 만으로 딱 마흔이다. 첫 번째 책을 내겠다고 다짐했던 그 나이에 이미 책 여섯 권을 낸 것이다. 이제 베개 높이는 됐다고 농담을 하곤 하는데 올해 한두 권 더 나올 예전이니 최초 마음먹은 것과 너무 동떨어져 버렸다.
그동안 냈던 책 여섯 권 중 팔렸던 것은 세 번째로 냈던 장편 ꡔ홍합ꡕ이다. ꡔ홍합ꡕ은 3만 권 가량 팔렸다. (상금 3천만 원은 선인세로 받은 것이라서 추가 인세를 받으려면 한 만 권은 더 팔렸어야 했다.) 그리고 나머지 다섯 권은 말했듯이, 모두 일쇄에서 끝났다.
예전에 이문구 선생께서 문학상 타지 말라고, 문학상 타면 돈은 안 남고 몸만 상한다고 하신 적이 있다. 선생께선 상 탔다고 흥청망청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우스개로 말씀하셨지만 딱 들어맞고 말았다. 상금으로 (이것도 세금 땐다, 백만 원을) 한 계절 흐뭇하고 말았다.
대폿집에서 짠지에 막걸리 먹으면서도 이 정도 팔자면 그래도 괜찮은겨, 하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술안주가 회만 있는 줄 안다. 그래, 그러면 좀 어떠냐, 내가 언제 회 한 점 사준 적 있나. 뭐 그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고 또 다르게도 썼다. 개갈 안 나게 상금 소리를 한 이유는 우리 같은 작가들은 상이나 타봐야 목돈을 만진다는 데에 있다. 그런데 상금은 돈으로 남지 않는다.
작가들은 책이 팔려 인세 받는 것을 원한다. 한 권 내겠다고 마음먹은 나이에 부끄럽게도 여섯 권을 낸 이유는 뭐겠는가. 계약금이나 선인세의 악순환이다. 돈이 필요하니 어쩔 수 없이 계약을 하고 계약금을 받는다, 빚을 갚기 위해 원고를 쓴다, 책은 또 안 나간다, 또 계약을 한다, 뭐 이렇다. 그렇다고 작가들만의 죄인가. 팔리는 장르 쪽으로 쏠리는 것도 따져보면 가슴 아픈 모습이다. (물론 나도 그런 유혹을 느꼈고 지금도 그렇다고 이 즈음에서 고백을 해야겠다.) 전세금 올라가지, 애는 커가지, 돈 쓸 데는 많아지지, 그렇게 쪼들리다 보면 당연히 그런 생각 하게 된다.
가제는 게 편이라 동료 작가들 두고 궁시렁대는 것보다는 독자의 수준을 가지고 물고늘어지고 싶다. 독자들이 원래 이런 수준이었나. 아닐 것이다. 정신의 시대가 가버리고 물질의 시대가 온 뒤로는 독자들도 피해자가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확대 재생산 싸이클에 정신의 개념이 끼일 틈이 없다. 저 정신 없이 돌아가는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 속에서, 오늘 나온 새 상품이 내일이면 이미 구닥다리가 되어버리는 이 구조 속에서 어느 누가 정신을 붙들고 있을 것인가. (정신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정신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것은 그 양만큼 물질의 결핍을 보듬어안아야 하는 것이니.)
쇼와 드라마와 수준 낮은 아이들 수다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텔레비전 끄고 창문 열어 홀로 별이나 바람을 바라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방법은 티비를 없애는 것인데, 그게 될까.
문학은 예술, 철학의 근본이다. 시작점이다. 문자 언어 창작물이 있어야 그 다음 장르가 가능하다. 연극 영화도 소설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국가부터 이른바 창작 마인드가 없다. 오페라처럼 거대 무대극이 문화예술의 첩경이라고 생각한다.
체육 강국을 만들려면 가장 기초인 달리기를 지원해야 하는데 골프를 지원하고 있는 것과 같다. 골프 점수 계산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나라에서 골프가 주종목이 되어버렸다. 국가부터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작가들은 국가에 지원금을 바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정신과 언어가 담긴 책이 사람들의 손으로 날아가 주기를 희망한다. 해결은 의외로 쉽다. 작가들의 책을 국가에서 사서 전국 도서관에 보내주면 된다. (잘못 쓰이고 있는 세금이 얼마나 많은가에 대해서까지 말할 필요 있을까.) 그러면 작가들 기본적인 생활비는 인세로 해결이 된다. 그리고 도서관은 학생들 중간고사 준비하는 곳이 아닌 도서관다운 도서관이 된다.
역시 떠들고 나니 투정처럼 되어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전 어떤 토론이 생각난다. 인터넷 시대에는 책의 운명이 어떻게 될까,가 테마였다. 책의 종말이라고 보는 이도 있었지만, 책이 갖는 인류사적 의미에 대한 어떤 이의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궁리와 정신이 집약된 게 책이고(책의 크기와 편집까지 포함하여) 그것을 손으로 쥘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책은 인터넷 다음 시대까지 살아남을 것으로 본 것이다.
크게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런 이유들로 절망스럽지 않다. 그러니 나부터 남보고 뭐라고 찡찡대지 말고 좋은, 말 그대로 좋은 원고를 써야할 일 아닌가.
한창훈
소설집 <바다가 아름다운 이유> 등
장편소설 <홍합> 등
산문소설 <바다도 가끔은 섬의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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