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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특집>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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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3,273회 작성일 05-01-19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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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
―어두운 질문과 조금 더 어두운 대답들

김 상 철
(숭실대 강사)



1. 문자가 소외당했다
2. 누가 나를 이끌어줄 것인가
3. 문학은 누구를 위해 쓰여지는가
4. 문학은 왜 재미가 없을까
5. 동어반복(同語反覆)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는 나와 같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문학을 읽지 않는 이유’로 들린다. 문학을 둘러싼 문제들의 이유가 문학 안쪽에 있다고 보는 듯한 이 질문에는 따라서 많으면서도 복잡한 뜻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읽힌다는 말이 팔린다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다면 조금 더 문제가 복잡해지겠지만 순수하게 읽힌다는 말만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피동형으로 제시된 질문은 문학 자체의 문제점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이유를 밝혀내고, 문학을 좀더 생산적인 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 쪽으로 힘을 모으자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질문은 넓혀 생각해 보면 ‘문학의 위기’라는 다소 진부한 질문의 한 가지처럼 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언제든 ‘문학의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느냐 하는 다소 체념적 어조의 질문에 비추어보면, 새삼 문제될 것도 없는 ‘읽히지 않는 문학’에 대한 논의 또한 원래 질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이 분명 머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인 위기의식, 살아야겠다는, 쭈뼛거리는 몸의 감각에서 오는 것임은 분명한 것이리라.

문자가 소외당했다
조금 거창한 말로 표현하자면 문학 작품은 분명 문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예술의 하나이다. 그리고 그것은 버릴 수 없는 정체성의 뿌리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색의 힘도 아니고 음의 힘도 아닌 말 그대로 문자의 힘이다. 그런데 이 문자가 소외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자가 소외당한다는 것은 이제 세계 표현의 중심이 문자에서 다른 것으로 옮아갔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중심이 어디로 옮아갔는지는 너무도 자명하다. 기왕의 많은 논자들이 영상시대의 도래에 따른 문학의 위기를 말하였을 것이다. 이때 문학의 위기란 문자의 소외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쉽게 보면 시같은 영화나 드라마는 보지만 시는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괴리는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추상적인 답 같지만, 과거 문자에 대한 갈증이 이미 다른 감각적인 매체에 의해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문학을 둘러싼 많은 이야기들-이제는 오히려 진부하다고 생각되기까지 한-가령, 재미없다, 너무 진지하다, 지루하다 등의 불명예스러운 장식들은 영상의 감각적인 힘과의 비교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문학은 읽히지 않는다. 읽다라는 행위는 이제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냥 본다라는 원초적인 감각에 이끌릴 뿐이다. 인터넷소설이라든지 전자우편이라든지, 혹은 휴대폰의 문자메시지 등도 분명 문자의 자식들이긴 하지만 그 모두 단말기라는 영상기계의 깜빡거림에 불과한 것이다. 어찌되었든 문학이 영상에 비해 덜 감각적이다라는 인식은 문학 쪽에서는 분명 핸디캡이다. 이런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아마도 책의 장정이나 광고 등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외형적 대응으로 과연 문학이 읽힐 수 있을까.

누가 나를 이끌어줄 것인가
개인적으로 문학작품을 손에 쥔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이다. 조그만 서양사 책을 구해 읽고 나서 글의 힘에 매료되었고 바로 문학작품으로 방향전환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어떤 문학작품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선택은 전적으로 내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문제였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문학교사가 없었던 셈이다. 지금은 이 문학교사의 역할을 텔레비전이나 신문이 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결국 문학의 외부에 종사하는 이들이 문학교사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이다. 그렇다고 문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문학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문학만을 다루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문학도 여러 활자 매체의 하나일 뿐 어떤 지고한 가치물은 아니다. 그러니까 문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문학과 독자를 맺어줄 교량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알아서 거친 물살을 헤집고 나가야하는 것이 독자의 입장이며, 문학은 그에게 다가갈 수 없는 그저 강 저쪽의 일이 될 뿐이다.
사실 알아서 문학작품을 찾아 읽는 이들에겐 문제가 없다. 어느 정도 선택의 내공이 쌓이고 정보도 축적되면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은 눈에 띈다. 문제는 문학작품을 알아서 찾아 읽지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대충 이들의 입장을 고려해 보면 소설도 읽어보고 시도 읽어보고 싶은데-물론 책 읽을 시간이 부족하지는 않다. 우리나라에서 한 권의 두툼한 책은 아니더라도 단편소설 하나, 시 한편 읽지 못 할 만큼 시간이 부족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간이 부족하다는 투정은 대개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유치한 변명인 것이다.-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신문의 책 섹션코너나 광고 등을 믿고 읽자니 이게 읽어야할 책이 도무지 한두 권이 아니다. 또 광고 같은 것도 문학작품 광고라고 해서 정말 책의 가치만을 온전히 옮겨놓은 것도 아닐 것이다. 책도 상품이다 보니 좀 폼도 잡고 거품도 물었을 게다.
생각이 이쯤에서 풀리면 독자는 그냥 손을 놓는다. ‘내 신세에 무슨 문학이냐, 비디오나 한판 때리자.’ 대충 이런 시나리오로 전개된다. 그러니까 이 시나리오의 어디쯤에서 한번 제대로 된 제동이 걸려야 하고 세칭 ‘믿을맨’이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믿을맨’들이 도대체 다들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에겐 좀 투박한 듯이 보이는 모델도 있다. 프랑스에선가는 고등학교 때 볼테르 정도의 책들을 읽힌다고 한다. 물론 강제다. 안 읽으면 졸업도 안 시킨다고 한다. 여기서는 국가나 제도가 그런 문학교사의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우리의 현실에서 제도적으로 문학교사를 양성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독자의 거리를 좁혀줄 그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문학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질 수 있는.

문학은 누구를 위해 쓰여지는가
어찌되었든 거친 물살을 헤치고 강 저 쪽의 문학에 다가갔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이쪽에서 생각했던 그런 것이 아닐 때 독자가 무엇을 느끼고 문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기 시작할지는 뻔한 일이다. 문학계의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몇몇 작가나 작품은 스타 만들기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쳇말로 거품이 많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문학교사의 부재를 메우고 있는 매체들이 독자에게 가장 밀접히 다가가 있음으로 해서 문학은 매체의 인정 없이는 성장할 수 없게 된 듯하다. 그런 점에서 매체는 다분히 권력적 성향을 가질 수밖에 없는 듯이 보인다. 매체 스스로가 권력화 되었느냐 아니냐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권력화된 매체의 입맛에 들 수밖에 없는 문학 또한 발생할 틈이 생긴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문학은 당연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 못 된다. 그러다 보면 함량 미달의 문학 또한 생기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문학은 그럴듯한 것을 다루지 않는다고 알고 있고 또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겉은 그럴 듯하지만 속은 그렇지 못 한 문학작품이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누가 증거를 대보라면 대볼 수 없는 일이다. 아무튼 읽어보면 답이 나오는 이야기니까.

문학은 왜 재미가 없을까
실제로 대학 1학년 학생들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졌다. 왜 문학이 읽히지 않느냐고. 대답은 결국 비싸다와 재미없다는 것으로,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책을 몇 권이냐 읽었느냐고 그랬더니 대부분이 읽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앞의 대답과 맞추어보면 비싸다는 이유로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읽지도 않고 재미가 없다는 답은 나올 수 없는 이야기다. 결국 학생들이 재미없다는 결론은 독서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학은 과연 재미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 읽어본 바로는 재미없다가 결론이다. 학생들이 문학작품에 대해 재미없다라는 것과 내가 재미없다라는 것은 차이가 있다. 학생들의 그러한 평가는 읽어보지 않고 나오는 선입견이고 나의 것은 읽어본 경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출간되는 모든 작품집과 문예지에 실리는 모든 작품들을 섭렵(사실상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하지는 못 하였지만 지금까지 읽어본 결과는 분명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재미없다는 것은 문학이 언제나 재미없다는 비난투의 어조가 아니다. 내가 쓰는 재미없다는 말은 전에 비해 그러하다는 말이다. 혹자는 문학이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문학은 재미가 있어야 한다. 이 재미는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이 재미란 그저 이야기의 진지함이며 긴장감이다. 소설에 견주어 말하자면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 하는 기대감이며 긴장된 몰입이 아닐까. 우리들은 흔히 이런 생각을 해본다. 같은 소설인데 환타지 소설이나 대중 소설이라고 하는 작품들은 몇만 권이 나갔는데 다른 작품들은 왜 그렇지 못 할까. 그것은 재미의 차이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몰입의 기울기가 다른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작품들이 많이 나가는 것에 불만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것들은 많이 팔릴 수밖에 없는 자꾸 몰입할 수밖에 없는 기술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작품이 그런 것을 다 따라갈 수는 없고 따라가기도 힘들다.
문학이 그런 쪽과는 다른 길을 걷고 싶고 좀더 많이 읽히기 위해선 그런 것들과는 다른 기울기의 각도를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많은 이야기들은 분명 이 긴장된 몰입의 기울기가 밋밋하다는 것이고 그것이 오히려 읽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동어반복(同語反覆)
몇 달 전의 일이다. 세미나를 위해 작년과 올해 문예지에 발표된 소설작품 수십 편을 정독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글들이 모두 비슷비슷한 사이클 속에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소설의 배경이나 인물들이 모두 외국경험이나 외국체류와 관련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좋은 것인지, 세계화시대에 걸맞는 국제적 감각인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여기의 우리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 우리가 없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결국 공허한 말씀만이 맴돌 뿐이다. 물론 그 세미나에 참석한 다른 멤버들은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의 연령대가 대충 20대쯤으로 잡아보면 그들이 문학에서 선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들이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엇인지 대강은 알 수 있을 듯했다. 세미나에서 약간의 토론이 형성되었는데 이쪽에서의 질문은 “이게 어떻게 좋은 소설이라 할 수 있느냐.”였고 저쪽에서 대답은 “잘 읽히잖아요.”라는 것이었다. 잘 읽힌다는 속뜻은 좀더 진행된 토론 중에 문체 혹은 글발이 좋다는 뜻임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나도 동의한다. 참 좋은 문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좋은 문체만이 훌륭한 글쓰기가 아닌 것은 독자들보다 작가 스스로가 더욱 마음에 새기고 있는 것일 게다.
좀 진부한 생각이지만 변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작품이 기술의 결과물이 아니라 정신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내가 읽고 싶은 문체가 아니라 색다른 배경이 아니라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습이라면 진한 우리들의 이야기였으면 한다. 흔히 작가 정신을 이야기할 때 작가정신이 무엇인지 한 번쯤 고민해볼 문제인 듯싶다.
문학이 읽히지 않는 결정적 이유는 아마도 문학을 읽히게끔 하기 위한 정말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수없이 문제제기를 하고 이유를 따져보고 하여도 그것이 구체적인 방안으로 맺어져 나오지 않는다면 언제나 이런 논의들은 ‘그들만의 잔치’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만다. 이제는 분명 너희들의 잔치가 되게끔 해주어야 할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 모두의 잔치가 되게끔 해야 할 것이다. 그게 언제인지 어디서부터인지는 잘은 모르지만.


김상철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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