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토피아 - (사)문화예술소통연구소
사이트 내 전체검색

수록작품(전체)

11호 <특집> 문학이 읽히지 않는 이유/최세웅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편집부
댓글 0건 조회 2,592회 작성일 05-01-19 12:50

본문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

최 세 웅
(학생)



1. 시는 능동적인 독서를 요구한다
2. 많은 시인, 많은 시들, 그러나 많은 반복
3. 영상문화에 더욱 익숙해진 현실
4. 취약한 접근성
5.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훈련받는 문제풀이를 위한 시 읽기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모르겠어/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중략)

그다지 좋았던 기억은 아니지만 네루다와 달리 나는 시가 나에게 언제 어떻게 왔는지 알고 있다. 그때는 내가 막 중학교에 올라갔을 때였다. 사춘기를 열심히 앓고 있던 나는 달력으로 곱게 싼 국정 국어 교과서에서 반강제적으로 시를 만났다. 그리고 시는 곧 강제적으로 돌변하였다. 시는 자신을 밑줄 그으며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냈고 한 학기에 두 번씩 질문을 해댔다. 정답은 오직 하나였다. 시의 제재와 시의 주제, 시에서 사용된 비유법, 중요 시어가 의미하는 것. 이러한 것들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밑줄 긋고 외워야 할 필수 사항들이었다. 운이 좋으면 시를 이해하지 않아도 질문에 답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 요령이 생기자 요령만으로도 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후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간간이 수능 모의고사를 보았고 시는 종전과 다른 방식의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만점은 없었다. 내가 느낀 것은 일종의 배신감이었을 뿐, 시와 친해지는 방법은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도 네루다에게 찾아온 ‘시’는 시적 영감으로서의 시일 것이다. 그는 시인이니까 그렇다 치고, 나에게 시가 진심으로 친근하게 찾아온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였다. 시험에 대한 부담감 없이 ‘시집’이라는 것을 한장 한장 넘겼을 때의 기분은 수년간 자습서에서 주석이 달린 시를 본 때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자유롭고 여유로운 시 읽기. 그것은 즐거움이었고, 그러한 즐거움으로 시집을 읽었다. 시에 대한 관심은 이때 생겼다. 그러나 나의 서투른 애정 때문인지 또는 설익은 지식 때문인지 몰라도, 주변에서 시에 대해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면 항상 어려움을 느낀다. 가장 어려울 때라면 운 좋게 과외자리가 생겨서 학생들에게 맘에 없는 ‘시’를 훈련시킬 때이다. 하지만 이번 주제와 같은 경우처럼 평소 수업시간이나 술자리에서 열심히 갑론을박하던 것도 막상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캄캄한 것이다.

1. 시는 능동적인 독서를 요구한다
시는 분명 쉽게 읽히지 않는다. 대다수의 시들은 많은 집중과 능동적인 독서를 요구한다. 어느 정도는 모든 장르의 텍스트가 그렇겠지만 시는 특히 그러하다. 시적 형상화는 일상적인 산문과 많이 다르다. 비유와 상징들, 언어의 자의성에 대한 인식과 의식․무의식에 대한 탐구는 시를 다른 문학과 확연히 구분시킨다. 꼼꼼히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많다. 그러한 애매성이 시만의 매력이라 생각하는 경우는 여기서 논외로 치겠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시를 누군가에게 보여주었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무슨 소리야’였다. 이해되지 않음은 많은 사람들이 시를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요소이다. 그리고 난해하지 않더라도 시의 함축성은 읽는 이를 피곤하게 만들 수 있다. 문자는 감성적이기보다는 이성적인 표현 수단이며, 동시에 추상적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독서는 능동적인 독서를 통해서만 즉, 열심히 곰곰이 보고 또 볼수록 어떤 표현이 가지는 의미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분명 문자는 다른 이미지와 다른 장점이 분명히 있지만, 독자가 부지런해져야 함을 담보로 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에 부지런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문학을 읽으려 할까? 특히 시라면 더욱 의심스럽다.  

2. 많은 시인, 많은 시들, 그러나 많은 반복
위의 문제는 시의 일반적 특성에 따른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시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시를 꼼꼼히 읽는다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사실 학교에 있는 시 관련 동아리나 학회에 가보아도 능동적인 읽기에 지쳐서 시를 싫어하는 이들은 없다. 시 읽기를 즐기고 있는 독자들은 분명히 존재해 왔다. 오늘날 대중적 인기도가 가장 신속하게 반영되는 인터넷을 뒤져봐도 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포털사이트 ‘다음’에는 7,800여 개의 카페가 있으며 수천에서 수만의 회원을 거느린 카페들이 많다. 유명 시인을 위한 카페는 규모가 큰 경우 1,000명 이상의 회원을 갖고 있다. 단지 물론 이러한 수치가 다 실수라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시가 읽히지 않는 이유가 단지 외부의 원인, 일반적 원인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학교에서 학우들과 시를 공부하다 보면 간간이 들려오는 불만이 있다. 많은 시들이 반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많은 시인들이 많은 문예지에서 시를 발표하고 있으며, 한 달에도 몇 권의 시집이 나오고 있지만 그만큼의 많은 시들이 왠지 모르게 반복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비슷한 내용과 형식이 독자들을 지루하게 하는 것이다. 안정적으로 보이는 시들은 참 많다. 그러나 매력적인 시들은 찾기가 힘들다. 흔히 시적 완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독자를 사로잡지 못 하고 있다. 여전히 독자들은 시집을 선물로 주고받으며, 시인과 시를 술자리의 안주로 삼는다. 그 수가 적더라도 그러한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주고받는 시집은 근래의 시집이 아니다. 대걔 일정한 스테디셀러만이 계속 팔리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단지 그들이 오늘날의 시를 몰라서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3. 영상문화에 더욱 익숙해진 현실
현실 곳곳에서 시는 찬밥신세다. 아예 일상적인 현실은 시에 대해 관심이 없는 듯하다. 내가 인문대 학부생으로서, 내가 경험한 일에 한에서만 이야기한다면 대학 학부의 문학 전공자들 또한 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하다. 현실은 문학 전공자들간의 대화에서 시에 대한 이야기보다 영화이야기(또는 드라마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살인의 추억’ 대해 논쟁하고 ‘야인시대’에 대해 비난하지만, 이성복의 신작시집에 대해서는 말 한마디 꺼내지 않는다. 아니, 꺼낼 수가 없다.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은 바로 시의 독자들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이제 문화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고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의 주말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그리고 그 문화의 주인은 영상이미지들이다. TV와 인터넷에서는 어떤 영화의 개봉일을 우리에게 주입시킨다. 뜬금없이 할인권이 날아오기도 한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시집이 아닌 영화를 보기 위해 지출을 한다. 금전적 지출뿐만 아니라 시간적 지출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는 영상물이 주인인 듯하다. 만약 여유 있는 주말을 보내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보고싶은 영화가 따로 있다면 예매를 하는 게 편하다. 여차하면 길고 긴 줄에 합류해야 하고 바로 앞에서 매진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말에 어설프게 서너시쯤에 갔다가는 맨 앞자리에서 마지막 회를 보고 심야버스를 기다릴 가능성이 높다. 극장은 이제 거대해졌다. 집에서 서둘러 나와 지하철에 오르면 시집을 읽는 사람은 쉽게 보이지 않는다. 70년대가 선데이서울이었다면 지금은 주간 영화 잡지가 주인공이다. 읽으면 실제로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기도 하다. 같이 보면 더 재밌다. 저녁에 영화계에 뛰어든 용감한 선배가 술을 사기도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용감하다며 부러워하고 진심으로 걱정도 한다. 예전에는 소설가가 주류였을까? 그러나 이제 새내기의 꿈은 시나리오 작가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학생들이 영화감독, 광고회사, 기획사를 꿈꾼다. 분명 문학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공유할 정도는 아니다. 강의실에서 이론을 공부할 때 선생님들께서 예시로 드는 것은 대부분 영화나 음악이다. 아니면 예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시는 우리의 문화로 느껴지지 않지만, 영화, 인터넷, TV 는 엄연히 문화로서 존재한다. 우리의 일상적 삶이 된 것이다. 푸코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읽어도 도무지 모르겠지만, 맥루한이 말한 영상시대의 도래는 안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안다. 그의 주장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한 영상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영상은 문자에 비해 훨씬 직접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능동적 사고를 강요하지 않는다. 하고 싶은 사람만 하는 것이다. 영상 이미지를 접하다가 문자를 접했을 때 평소 책을 많이 접한 나도 한동안 글이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것은 그만큼 내가 수동적 읽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원작이 있는 영화를 볼 때, 영화를 먼저 볼 때와 소설을 먼저 보았을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며, 비슷하게 잘된 작품이라면 영화를 먼저 본 후 소설을 읽기가 어렵다. 아무리 영상시대라 하여도 문자의 중요성은 인터넷만 뒤져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상의 위세는 TV와 인터넷이 우리 삶에서 중요해진 만큼 강력해졌다.

4. 취약한 접근성
영상 이미지는 분명히 쉽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 수준도 높다. TV광고에서 우리는 어떤 미적인 경험을 받는다. 이제 우리의 오감은 영상이미지에 매우 민감해진 것이다. 문화를 향유하기에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데 영상문화는 여기저기서 번쩍인다. 이에 비해 시는 어디에 있는가? 동네 도서관에는 없다. 동네의 서점에는 정말 없다. 절판된 게 혹시라도 있을까 하는 마음에 가보기는 한다. 하지만 절판될 거 아예 갖다놓지 않는단다. 제대로 시집을 보고 싶으면 대형서점을 가야 한다. 가기야 한다면 여유 있게 시집을 골라서 볼 수 있지만 불행히도 그런 대형서점은 서울에도 몇 군데 없으니 다른 곳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 상품이 되지 못 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온전한 변명이 되지 못 한다. 도서관에서마저 원하는 시집을 찾지 못 했을 때의 난감함은 상실감의 다른 말이다. 뭔가 부당한 일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다. 문학의 해니 문학의 위기니 말은 많지만 막상 현실은 시집을 한 권도 쉽게 구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나마 대학 도서관에서의 상황이 좀 나은 것은 대학생들의 문화적 특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5.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훈련받는 문제풀이를 위한 시 읽기
마지막으로 이 글의 서두에서 밝힌 나의 경험과 연결시켜 보겠다. 현대시의 한 특성이 애매성이라는 건 이제 특별한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운 것은 ‘문제풀이를 위한 훈련’이었다. 물론 그러한 훈련이 기본적으로 시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년간 하나의 정답만을 외우며 시를 접한 이들에게 자습서가 없는 현대시는 적응하기 힘든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가장 감수성이 강했던 시절에 받은 훈련은 그 효과가 오래간다. 나는 종종 이해되지 않은 시를 보고 불안함을 느낀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다. 영원히 겨울은 고난이어야 하고, 봄은 해방이어야 한다. 강박관념도 이런 강박관념이 없다. 입시를 위한 훈련은 스스로 시를 읽는데 방해가 된다. 다이제스트가 없으면 시는 영원히 (풀어야 하지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일 뿐이며, 밑줄 ‘마저’ 그어져 있지 않은 불친절한 숙제가 된다. 현대시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는 것에는 그 어떤 명예가 있다.” 는 보들레르의 말은 이제 지나가 버린 구시대적 발상일까?  그렇지 않다면, 이제 우리의 시 교육도 현대성을 획득하여야 할 것이다.
짧게나마 시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시에 대한 애정이 많기에 더욱 말을 쉽게 하지 못 했다. 짧은 글 실력도 나의 어려움에 한몫 한 것 같아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독자로서의 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 이 글의 가장 큰 목적이었다.

최세웅
한양대 국문과 4학년


추천1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사)대한노래지도자협회
정종권의마이한반도
시낭송영상
리토피아창작시노래영상
기타영상
영코코
학술연구정보서비스
정기구독
리토피아후원회안내
신인상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