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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젊은시인조명 작품해설/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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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줄기, 그러나 슬프지 않은
―김규린의 시
강 동 우
(문학평론가)
시가 언어를 매개로 하는 이상, 시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세 층위, 즉 의미의 층과 소리의 층과 형상의 층이 결합되어 있는 양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시 속에는 감정과 감정의 부딪힘, 인간 행동이나 내면의 갈등, 미감을 자아내는 상황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우선 그 시작품 속에 설정되어 있는 내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름대로 구성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김규린의 시는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김규린의 시를 읽어 나가는 독자들은 어떤 인과관계나 연관성이 결여되어 있는 시적 정황이나 그 시들 사이의 거리에 우선 당혹하게 된다. 김규린의 시가 어려운 것은 그의 일상적 관심, 그러니까 일상의식의 요체를 시 속에서 추출해 내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그것은 그녀의 시가 일정한 정도의 비유와 일정한 정도의 감춤, 그리고 일정 정도의 드러냄이 묘하게, 때로는 과격하게 교차되어 있는 데에서 쉽게 확인된다. 물론 이런 점은 시인이 자신의 사고와 감정을 효과적으로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고의로 독자들을 혼미하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강렬한 인상이나 감정적 충동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기교나 이미지의 배합이 결과적으로 시를 어렵게 만들 수도 있지만, 김규린의 경우 그 어려움은 시인의 체험 내용이 일상적 차원의 범속성을 초월한 데서 혹은 초월하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김규린은 일정한 감정에 자맥질하는 것보다는 비범한 유추와 연상으로 일상성을 탈피하고, 일정한 관념을 풀었다 모았다 하는 것에 능한 시인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김규린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의 축자적 이해나 산문적 해설보다는 언어의 미묘한 뜻과 느낌, 그리고 그 상징성에 주목하여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상징성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그녀가 상재한 시집 ꡔ나는 식물성이다ꡕ(문학과지성사, 1999)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김규린이 이번에 발표하는 신작시는 시집 ꡔ나는 식물성이다ꡕ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김규린의 시는 이 시집의 연속 선상에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녀만의 독특한 이미지나 상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나는 식물성이다’라고 지칭한 자신의 모습이 하나의 수사적 방법의 차원을 넘어서 시인의 삶과 사유를 제어하고 통찰하는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관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식물성이다’라는 전제는 김규린의 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 개념이자 상징성을 푸는 열쇠가 된다. 그녀의 ‘식물성’은 향일성의 외향적이고 밝은 이미지보다는 향지성의 내면적이고 어두운 이미지에 근접해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그녀의 시집 도처에서 발견되는 핵심적 이미지이다. 가령 다음의 시들을 보면,
불현듯 내 몸을 밀어낸 것은
부슬부슬 내려앉기 시작한 어둠이었을까
어둠이 내리고 창문을 두드리는 웅성거림이 들리지만
손 잡을 수 없다. 나는 닫혀 있다
―「거듭나기」 부분
단단히 육신 땅에 박고
겨우 요만한 굴레를 지상에 펼치는
알록달록한 삶들
햇살 무성할수록 창백해지는 파라솔 안에는
……(중략)……
그늘이 뿌리와
뿌리에 얽히는 고운 덩굴 하나
뭉클히 비추고 있다
―「피서지에서」 부분
누군가 버리고 간 대지와 누군가 버리고 간 우리들의 하느님은
뿌리에 묻은 채 썩고 있다
썩은 뿌리에서 핀 꽃은 위태롭다
날아간 새들은 돌아와 부리를 묻고, 다시는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버려진 우리의 표정」 부분
죽음이 없는 묘지는
권태롭다
묘지에서 뛰어내린 삶들은
도처에 깔린 벼랑의 탯줄을 안고 조용히
바다로 향한다
―「파도」 부분
그녀의 식물성은 밀폐된 자의식 속(“나는 닫혀 있다”, “단단히 육신 땅에 박고”, “뿌리에 묻은 채 썩고 있다”)에서의 치열한 싸움과 관련된다. 이런 자의식이 어떻게 생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노래하는 것은 현실적 삶이나 섣부른 초월이 아니라 안으로 파고드는 내면에의 집착이다. 특히 ‘뿌리’에서 비롯된 자의식, 시인의 고통과 비애, 그리고 죽음과 관련된 세계무상이라는 경험들은 그 진위를 불문하고 시를 자극시키는 힘이 되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때 뿌리는 자신의 폐쇄적인 내면의식이라고 보아도 좋고, 무자비한 현실이라 해도 좋고 또는 단순히 죽음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뿌리’는 시인의 의식이나 내면 속에서 단단히 묶여있는 내적 상황의 표현이다. 그런 면에서 김규린의 시적 형상화는 근원적 자아, 존재의 어두운 심연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존재의 다양한 삶의 방식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뿌리’로 상정되는 존재의 본질적 형태, 그것도 개인의 내면적 형태에 대한 물음과 관련된다.
그러나 김규린의 시에서 ‘뿌리’가 원초적 고통을 상징하고, 이 원초적 고통이 자의식을 분열시키고 어두운 심연으로 끌고 가는 원인이 되지만 시인은 억압적인 이 상황에 더욱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자기 내면의 폐쇄성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것은 ‘꽃’ 또는 ‘잎’과의 역동적 관계에서 잘 드러나는바, 가령 「거듭나기」의 후반부에서 “저만치서 조각상이 꽃씨를 던”질 때, “오래 뿌리의 전신에 귀기울이면 차츰/잘록해지는 허리께에서 실핏줄만한 햇살이/환하게 새어나오고 있다”는 언술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인이 믿고 지향하는 것은 ‘꽃씨’를 낳는 뿌리의 강인한 생명력이다. 이렇듯 뿌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닫고 있으면서 또 그렇게 간직한 어떤 것을 더 넓은 세계로 치켜올린다. 때문에 그는 “썩은 뿌리에서 핀 꽃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렇듯 김규린의 시에서 뿌리는 단순히 폐쇄성을 상징하지 않고 ‘꽃’과 ‘잎’의 개방성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가 “나는 식물성이다”라고 전제를 했을 때, 식물성의 본질 자체는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지의 깊이와 잎을 흔들고 있는 공중의 높이 사이에 구축되는 유통, 즉 수직적 이동이다. 그러나 뿌리가 생성하는 결실로서의 꽃과 잎의 이미지는, 낮은 가치를 가진 것의 희생에 의해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이 태어남을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의 하나이므로, 그것만으로 독창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규린의 식물성 이미지의 독창성은 뿌리와 꽃의 역동성 사이에서 ‘줄기’의 모습을 발견한다는 데 있다. 뿌리는 빛을 싫어하는 반면에 잎은 빛을 좋아한다. 식물의 줄기는 이런 상반된 두 경향의 중간에 속한다. 김규린의 내면의식은 이 뿌리와 잎 또는 꽃의 중간에 놓인 줄기에 해당한다. 김규린에게 ‘줄기’는 개방과 폐쇄, 빛과 어둠, 꿈과 현실, 의식과 무의식, 하늘과 대지 등의 갈등과 대립, 투쟁과 화합의 소산이다.
김규린의 시에서 뿌리와 꽃의 대립은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를 열어가는 것’과 ‘스스로를 닫고 있는 것’의 단절로 나타난다. 뿌리와 꽃(잎)의 단절은 시인의 내적 갈등을 낳는 계기가 된다. 이 단절은 인간관계의 단절이나 개인과 사회와의 단절이라기보다는 개인적 차원의 단절, 즉 자신의 내면의 단절이다. 이 내면의식은 ‘슬픔’과 관련되고, 넓게는 우울의 미학을 보이고, 이 우울의 미학은 이미지의 파편적인 연결, 당혹하리만치 폭력적인 결합과 관계된다. 신작시 「그들의 열애」를 보자
외로운 돌이
산비탈 굴러 굴러
어느 날
작은 호수에 던져졌다
심연의 깊은 밑둥이 자잘히 부서져
파문이 일었다
아무도 모른다
흔들리는 뿌리가 움켜 안은
수만 마디의 말과
수만 마디의 말이 뿌릴 벗어나
수면 위로 오를 때
은밀히 피가 번지는 것을
―「그들의 열애」 전문
돌이 산비탈을 굴러 호수에 던져지면서 파문을 일으키는 시적 정황과 ‘뿌리가 움켜 안은 말’과 ‘뿌리에서 벗어난 말’이 수면 위로 오르는 시적 정황은 어떠한 인과성도 없다. ‘그들의 열애’라는 제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뜬금없이 ‘뿌리’와 ‘말’, ‘피’가 나타나는 것도 사뭇 돌발적이다. 김규린의 시적 언어들은 이 돌발성, 당돌함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신화적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는 어휘들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이해가 쉽지 않다. 다만 ‘나는 식물성이다’라는 기본 관념을 전제로 이 시를 읽을 때 ‘돌’은 파문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이 돌이 일으키는 파문은 다름아닌 ‘뿌리가 움켜 안은 말’(폐쇄성)과 ‘뿌리를 벗어난 말’(개방성)의 대립과 단절에서 오는 고통(“은밀히 피가 번지는 것”)이다. 이 고통이 바로 ‘외부의 세력’(돌)에 의해 존재론적으로 둘로 찢어져 있는 자아의 내면 모습이다. 소통되지 않는 “그들의 열애”는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은밀히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실 이 시에서 ‘피’는 ‘정열’이나 ‘열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목 「그들의 열애」에 맞추어 본다면, ‘피’는 ‘정열’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시는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내면’이 아니라 ‘조화와 화해를 꿈꾸는 내면’ 의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1연의 “심연의 깊은 밑둥이 자잘히 부서져 파문이 일었다”에 초점을 맞추어 ‘고통’으로 이해하였다.
이렇듯 김규린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단일한 자아로 환원될 수 없는 낯선 자아의 불균형이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 속에서 서로 맞서 있는 두 분력(폐쇄성과 개방성)이 서로 길항하면서 다투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따라서 이 불균형의 해소와 관련하여 나타나는 시인의 다양한 내면의식을 이해하는 것이 김규린의 시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음의 시는 「칼라꽃 부케를 든 신부」에서 전반부를 제외한 부분이다.
첩첩벽지로 나를 몰아넣는 제주 바람
내가 키운 바람이건만 그것들 언제나
낯설게 몰아치고―
나를 뚫어 오르는 꽃아
모든 길은 불공평한 그리움에 속해 있고
검은 가로수들은 길게 팔벌려 서서
행방을 채근하고 있다
어디에 닿으려 하나 나는……
보이지 않는 내가 물으면
잠잠히 하늘로 오르던 두터운 줄기
깃발이 보태어준 바람결 거세질 때
꽃아
네가 거둔 나의 수액과 함께
흰뿌리 다치지 않게 살살
살살 날아 이 세상
건너고 싶다
―「칼라꽃 부케를 든 신부」 부분
「그들의 열애」에서 화자에게 고통을 심어주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돌’이었다면 이 시에서는 ‘제주 바람’으로 나타난다. 제주 바람은 “잠잠히 하늘로 오르던 두터운 줄기”를 위협하고, 꽃과 흰뿌리를 다치게 하는 위협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돌’이 시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외부적 현실로 비춰진다면 ‘제주 바람’은 시인의 의식 속에 굽이치는 내부적 요인으로 보인다. 그것은 “내가 키운 바람이건만 그것들 언제나/ 낯설게 몰아치고”라는 언술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바, 폐쇄성(“내가 키운 바람”)과 개방성(“낯선 바람”)의 이중적 모습을 지닌 시인의 내면적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내가 키운 바람”은 “보이지 않는 나” 또는 “뿌리”와 대응되고, “낯선 바람”은 “어디에 닿으려는 나” 또는 “꽃”과 대응된다.
결국 이 시 또한 둘로 찢어져 괴로워하고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시인은 그 두 분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중적이고 역동적인 존재, 즉 ‘줄기’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다만 여기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줄기는 이전의 작품(ꡔ나는 식물성이다ꡕ의 작품들)에 비해 훨씬 개방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ꡔ나는 식물성이다ꡕ에서는 폐쇄성과 개방성의 두 분력 사이의 부조화와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상승보다는 하강, 즉 뿌리의 어둠을 더 강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빛’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이 시에 오면서 ‘줄기’는 “잠잠히 하늘을 오르”는 모습으로, 즉 꽃에 가까운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그것은 “꽃아/네가 거둔 나의 수액과 함께/흰뿌리 다치지 않게 살살/살살 날아 이 세상/건너고 싶다”는 언술에서 알 수 있듯이, 줄기는 꽃에게 수액을 전달해 주고 뿌리를 보호하면서 둘의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한다. 이렇게 시인은 이제 ‘뿌리’와 ‘꽃’을 소통할 수 없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고 의지하는 한 몸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조심스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의 변화는 「폭풍주의보」에서 둘 사이의 조화를 깨는 요소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의 앞부분은 폭풍주의보가 내리자 화자가 전의를 가다듬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시인은 섀시를 굳게 잠그고 커튼을 치고 조용히 땅 밑으로 숨어든다. 그러나 화자는 비 소리에 자신의 내면을 ‘도로 위’로 옮긴다. 도로 위로 옮겨진 뿌리는 폭풍으로 인해 연노랗게 벗겨진다. 그리고 자동차가 세차게 뿌리를 치고 간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황폐해진 자신을 불안해하거나 비탄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나른한 꽃병을 집어던지며
인정해야만 한다
이것 아니면 죽음
부서진 꽃잎들이 이끌어온 삶, 차마
날 버리지 못 하는 영혼아
자동차들이 나를 치고 갔다
이제 난
상처를
느껴야 한다
―「폭풍주의보」 부분
자신의 고통을 깊고 어두운 심연 속에서 오로지 정신적 상승을 통해 극복하려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인은 “부서진 꽃잎들이 이끌어온 삶”을 과감하게 집어 던지고 “상처를 느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동안 시인이 얼마나 관념의 세계에 함몰되어 있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외부세계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내면(“차마 날 버리지 못 하는 영혼”)에만 침잠되어 왔던 생활에서 이제는 외부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다만 외부 세계의 억압이나 현실의 부정적 모습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묘사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상처를 느껴야 한다”라는 언술에서 시인의 의식이 ‘뿌리’를 통한 정신적 순수화의 실현이 아니라, 즉 개인적 차원의 승화가 아니라, 우리들의 지상적인 삶의 조건,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통각을 문제삼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이런 사정은 가령 「산에 오르는 간헐천 변의 꽃」에서, 죽음의 의미를 ‘꽃의 부드러움’에서 발견하고, 앞으로 남은 모진 세월을 “간헐적인 향수와 폭풍 데리고” ‘산책’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표현한다. 현실(또는 죽음)이 모질고 고통스럽더라도 피하지 않고 그 자체로 수용하는 산책하는 마음에서 진정한 초월과 상승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듯 시인은 현실을 외면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좌절과 아픔과 상념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산책이 무료해지면/……/샛별처럼 밝아 오는 산 위에서/한시름 쏟고 싶다”). 물론 그러한 수용은 현실에 수동적으로 끌려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 속에서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의식적인 모든 관념을 능동적으로 비워버린다는 의미이다. 다음의 시는 「길 위에서」이다.
네가 가을이라면
가을을 무찌르는 裸松이고 싶다
모든 걸 다 벗고 싶다
가을아 고즈넉이 선 상념아
슬픔이 어쩌다 꽃이 된 뒤에
꽃이 천만 번의 윤회 끝에 슬픔을
다시 만나
말하라 生은―
우는 사람을 닮은 나무 같더라고
내게서 떨어져나간 죄악들이
어느 날 돌아왔을 때
팔 벌려 크게 감사할 줄 아는 마음
너를 향해 치켜올릴
꽃 하나 없이
조금씩 울먹인다 나는
무찌를 것 다 놓아버린 줄기만 혈혈단신
나부끼며 턱을 괴는
길 위에서
―「길 위에서」 전문
무엇보다도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3연과 4연이다. “슬픔이 어쩌다 꽃이 된 뒤에/꽃이 천만 번의 윤회 끝에 슬픔을 다시 만”난다는 발상은 이 가을이 상념이고 슬픔이지만, 결코 그 자체로의 애상적인 의미만을 전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만번의 윤회 속에서 슬픔과 꽃이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이런 동일시는 인간의 생(生)을 “우는 사람을 닮은 나무”, 즉 한없이 꽃과 잎을 벗어 던지고 혈혈단신 줄기만 나부끼더라도 언젠가 다시 돌아올 꽃과 잎을 환대해 주는 나무에 비유하게 된다. “무찌를 것 다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린 ‘줄기’의 모습은 단순히 일체의 대립과 갈등을 벗어버린 시인의 내면의식을 보여줄 뿐 아니라, ‘비움’이 바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생득적 조건인 죽음을 해방하는 진정한 생의 의미임을 보여준다.
김규린의 시가 전반적으로 무거운 어둠으로 깔려있고, 또 그것이 고통이든, 슬픔이든, 상념이든 죽음이든간에 그의 삶의 지향을 세계로 열려 있게 하기보다는 차단과 고립의 형태로 치달음으로써 내면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의 작품들에서 그가 폐쇄적인 내면의 세계에서 벗어나 보다 높은 경지의 열린 세계를 지향하는 의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줄기’가 머금고 있는 일체의 이중성을 거부하고 “뿌리”의 극단적인 순수성과 폐쇄성을 고집하던 김규린에게는 놀라운 변화이다. 이렇듯 김규린 시가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죽음’이나 ‘상실’의 문제이지만, 이 죽음과 상실의 이미지가 ‘줄기’의 ‘무욕’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극복되고 있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그것이 여전히 관념과 추상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 일상성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상적 울림과 감동을 수반하지 않는 메시지는 구체적 설득력을 획득할 수 없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실 필자는 그녀의 신작시 10편을 읽으면서 납득하기 힘든 정황묘사나 선명히 설명되지 않는 비유와 이미지의 배열에 상당 부분 당황하였으며, 작품자체의 축자적 이해나 산문적 해설이 어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을 읽는 필자의 능력부족 때문이지만, 김규린의 시가 적어도 사고들 또는 이미지들의 흐름을 집중적으로 집약할 수 있는 어떤 구심점을 제시해 주지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가령 「그들의 열애」에서 ‘돌’에서 ‘말’과 ‘피’로 이어지는 과격한 이미지의 흐름이라든가, 「칼라꽃 부케를 든 신부」에서 선명히 설명되지 않은 유년의 기억과 아픔이라든가, 「풍경화가 마흔에 찾아낸 풍경」에서의 “슬글슬금 날개 터는 백조의 무리/그 흰빛에도 분홍 뿌리 뻗어 있었네”와 같이 납득하기 힘든 정황 묘사라든가, 「물결치는 섬」에서의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유리구두의 가련한 지느러미들”이나 “먼 뿌리 바다” 등이 그러하다.
김규린보다 훨씬 수다스럽고도 숨이 긴 여타의 시인들, 예컨대 미국의 시인 올슨이나 긴즈버그의 경우만 하더라도 아무리 소용돌이 같은 감정의 분출, 폭포 같은 관념과 이미지들의 흐름이 있다 해도 반드시 그들에게는 어떤 구심점이 있다. 시가 단순히 삶의 넋두리가 되어서도 안 되지만 시가 말을 건네는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김규린에게는 이런 힘이 부족한 듯하다. 그러다보니 추상적 관념을 추상적으로 보여주는 추상적인 시가 되고 있다. 시는 모호성의 논리를 통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의 영지를 보다 더 많이 확보한다는 명분에 서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인 나름의 개인적인 방언이 객관화 보편화에의 호소를 외면하는 식으로만 토해져도 좋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주관회귀, 내면조응의 성향을 짙게 보이는 대부분의 시인이 그러한 것처럼 자기 폐쇄적인 내면의 서성임을 어떻게 구체화시키고 나아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김규린이 앞으로 넘어서야 할 과제일 것이다.
강동우
경남 마산 출생
2001년 ≪현대시≫ 평론으로 등단
현재 한양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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