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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 젊은시인조명/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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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웅 신작시
초저녁별 외 8편
들판을 헤매던 양치기가 
하룻밤을 세우려고 
산중턱에서 피우는 모닥불처럼 
퇴근길 주머니에 국밥 한 그릇 값밖에 없는 
지게꾼이 찾아갈 주막처럼 
일찍이 인생이 쓸쓸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창문을 열어놓고 
뻐끔뻐끔 
혼자 담배를 피우는 
저 별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서
언젠가 한번 와 본 적이 있다
깊고도 환한 몸 속 
달빛이 스미는 순간 
아아 가쁜 호흡과 함께 터지는 사랑에 
내 영혼 뜨거웠던 적 있었다
언젠가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꿀벌이 꽃잎 속으로 들어가듯이 
아득하고도 먼
향기 속에 얼굴을 묻는 순간 
오오 그 속에서 연애하는 
젊었을 적 아버지와 어머니
창문 밖에 연등을 걸어놓고 
환한 꽃그늘
깊어가던 사랑과 뜨거움에 
화들짝 열리던 
그 분홍 치마 속.
햇빛이 지나갈 때 
햇빛이 각도를 바꿀 때마다 늑골이 아팠다
온몸 구석구석 감추어져 있던 
추억 같은 것들이 슬픔 같은 것들이 
눈이 부셨나보다 부끄러웠나보다 
접혀져 있던 세월의 갈피갈피들이 
어느 날 불쑥 펼쳐져 
마치 버려두고 왔던 아이가 커서 찾아온 것처럼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문득 돌쩌귀를 들추었을 때 
거기 살아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지나간 모든 것들은 멈춘 것이 아니라
남겨진 그 자리에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물지 않고 살아있는 생채기로 
시린 바람이 지나가듯이 자꾸 옆구리가 결렸다
기억의 갈피갈피 햇빛이 지나갈 때 
남겨진 삶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봄 무사 
햇빛을 조심하렴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눈부시니까 아프니까 
내리쬐는 햇빛에 그만 
견뎠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니까 
쨍 하고 
깨져버리니까
적막강산 
다 살지 못하고 간 모든 것들은 
세상에 적막으로 남는다
매미들이 뚝 
숨을 끊은 자리 
돌진하던 넝쿨들이 그만 
멈춘 자리 
사랑해라고 말했던 자리 
못을 뽑아놓은 것처럼 
흔적만 남아있는 자리
너무나 커서 
너무도 적막한, 
살다 만 그 자리 
허공 속 풍경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었다 
허리둘레가 넓은 아버지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대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가 우뚝 서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지나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굴비 몇 두릅을 더 얹으셨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으시던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 버린 집 
신기루처럼 보였다 사라지는 집
어른거리는 골목길 너머 장독대 너머 
할머니는 아버지는 모두 허공을 살다간 것이었을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물고 오던 
씨줄의 공간과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있는 
저 허공 속 
하현달 
하늘에도 툇마루가 있었구나 
월급봉투 여기저기 쪼개주고 
이번 달 어떻게 살까 근심에 
방문 열고 나와 걸터앉은 어머니처럼 
이마에 손등을 얹고 
저 달의 인생도 
쪽마루에 앉아 살아가야 할 날들 
걱정하고 있구나 
목련꽃 지는 자리 
밤새 큰누나가 뒤척이던 흔적 
흐트러진 이불처럼 
어지러워라
한 번도 서로 만나보지 못한 
늦은 외사랑이 지는 자리 
미색의 그리움들이 그만 
후드득 
하혈처럼 쏟아지는 자리 
통 화
―故 손혜경 화백께
달빛이 나뭇잎을 흔들며 마당에 내려올 때마다 바람이며 나뭇잎이며 그 빛의 입자들이 분명 무슨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요한 그 소리에 귀기울이다가 문득 우리가 사는 이곳은 공간의 버전만 다를 뿐, 서로 스치며 지나가는 둥근 회전문처럼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오버랩 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햇빛이 꽃잎의 비밀을 열 때마다 하늘 저편에 무지개가 걸릴 때마다 질량불변의 법칙처럼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들이 사라지지 않고 이곳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영혼이 더 성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아지랑이가 아닐까? 봄바람이 아닐까 이제 막 솟구쳐 오르는 새순이나 꽃봉오리가 아닐까? 햇빛으로 혹은 달빛으로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고 있을 당신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면서……
권대웅
․1962년 서울 출생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시집 ꡔ당나귀의 꿈ꡕ ꡔ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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