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작품(전체)
10호<신작시> 들꽃여관에 가고 싶다 외 1편/박완호
페이지 정보

본문
박완호
들꽃여관에 가고 싶다
들꽃여관에 가 묵고 싶다.
언젠가 너와 함께 들른 적 있는, 바람의 입술을 가진 사내와 붉은 꽃의 혀를 지닌 여자가 말 한 마디 없이도 서로의 속을 읽어 내던 그 방이 아직 있을지 몰라. 달빛이 문을 두드리는 창가에 앉아 너는 시집의 책장을 넘기리. 삼월(三月)의 은행잎 같은 손으로 내 중심(中心)을 만지리. 그 곁에서 나는 너의 숨결 위에 달콤하게 바람의 음표를 얹으리. 거기서 두 영혼의 안팎을 넘나드는 언어의 향연을 펼치리. 네가 넘기는 책갈피 사이에서 작고 하얀 나비들이 날아오르면 그들의 날개에 시를 새겨 하늘로 날려보내리. 아침에 눈뜨면 그대 보이지 않아도 결코 서럽지 않으리.
소멸의 하루를 위하여, 천천히 신발의 끈을 매고 처음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던 나의 전부를 남겨 두고 떠나온 그 방. 나 오늘 들꽃 여관에 가 다시 그 방에 들고 싶다.
파리
종이박스 가득 실린 손수레를 끌고
질주하는 차들 사이로 한쪽 다리를 저는 나귀처럼
도로를 무단 횡단한 노파의 휑한 머리에
파리 한 마리 앉아있다
길가 화단에 걸터앉은
늙은 나귀의 코에서는 연신 더운 바람이 새어나온다
머리를 간지르는 파리의 장난질에도 나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몸에서 뻗어나간 가지마다 물 주고 다독거리느라
젖꼭지 말라붙은 지 오래,
아직 빨아먹을 단물이 남았거든
마지막 물기 마저 다 가져가라고
나무 그늘 속으로 밀어넣는 머리 위에서는
파리 한 마리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두손 싹싹 빌고 있다
박완호
․충북 진천 출생
․1991년 ꡔ동서문학ꡕ으로 등단
․시집 ꡔ내 안의 흔들림ꡕ ꡔ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ꡕ
- 이전글10호<신작시> 봄, 공화국 외 1편/조하혜 04.01.25
- 다음글10호<신작시> 碎쇄 ―찌개를 위하여 외 1편/이상아 04.01.2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