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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시> 솔개에 대하여 외 1편/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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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섭
솔개에 대하여
이제 솔개에 대해 말할 때가 되었다
고백은 또는 폭로는 갑자기 터져버린 목화 같은 눈물은
늘 창공을 맴돌 뿐이었다 홀로 바라보던 이정표 너머로
바람에 날리는 낙엽보다 더 빛 바래고
해질녘 창가보다 더 고요해서
어느 사원 툇마루에 앉아
텅 빈 마당을 수없이 깁고 수놓는 햇살을 바라볼 적에도
내 몸뚱이도 한 오라기씩 풀리어
낡은 누각 비바람에 지워진 희미한 초상화처럼 사라져갈 적에도
지평선에서 지평선으로 솔개는 후광을 그리었다
그러니 솔개는 오래 전에 죽었던 것이다
비 내리는 신작로에서 그녀를 안는 순간
―그건 일찍 끊기는 막차에 그녀를 태우기 직전이었다
순식간에 하늘이 개고 붉은 노을이 흘러 내렸다
나는 문득 구름 끄트머리로 빠져나가는 솔개의 꼬리깃을 보았다
그러니 솔개는 오래 전에 죽었던 것이다
노을에 불타는 소지(燒紙)처럼
길 떠난 지 수수억 년 된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사막의 모텔
별점이라는 게 있다
태어난 달에 움튼 별자리의 기운이 이르러
생사고락의 운명을 정한다는
나의 행성은 물고기다 한 번 지느러미를 흐느끼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모래의 성에 갇히고 마는
별점이라는 게 내게 저 별의 닻이 드리워 있다는 게
서력 이천삼년이월 달빛 아래를 걷고 있다 흐릿하다
안개에 싸인 모텔은 앞산 선승이 쌓아놓은 경전이다
층층마다 무량한 중생의 업보가 새겨져 있다
오십육억칠천만 호에 투숙한 노부부는 오늘밤 마지막 공양을 할 것이다
또는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아래층은 모래 속에 파묻히고
꼭대기층은 다시 돋아나 감쪽같이 그대로인 천일야화였을 거다
모래 속 지층에선 점차 추억이 늘어나겠지만
누구도 지난날을 말하지 않는다
바깥의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저건 너의 체온이다
함석 찢는 소리를 내며 바람은 길고 긴 행군을 계속한다
쓰라린 여정으로 지친 너의 몸뚱이
이 생애를 묵고 가려면 모래 폭풍의 꿈을 꾸어야 한다
하염없이 성을 쌓아야 한다
너의 모래시계는 현생을 지우며 폐허를 낳는다
모래알 수억의 행성마다
목마른 물고기가 하룻밤 머물곤 새겨놓은 이 별자리
윤의섭
․1994년 ≪문학과 사회≫ 등단
․시집 ꡔ말괄량이 삐삐의 죽음ꡕ ꡔ천국의 난민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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