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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호<신작시> 사과를 깎으며 외 1편/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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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편집장
댓글 0건 조회 2,393회 작성일 04-01-2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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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영

사과를 깎으며



크고 붉은 사과, 반을 가른다.
농익은 단맛이 부패를 불러들였던 걸까
겉보기와 다르게 내부에는 부패가 한참 진행중이다.
씨방과 씨가 아직 꼭지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지만
단단한 육질이 꼭 감싸고 있는 건 단맛이 아니다, 부패의 방이다.

내가 믿는 겉모양이란 이렇게 속을 열고 보면 딴 얼굴일 때가 많다.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는 이 시대의 불문율 앞에서
나는 여전히 내 눈에 의지하고 사물을 가늠하고 있지만
늙은 호박을 두드려보면
200년 된 고목의 내부에 손을 넣고 더듬거려보면
겉모양이란 중심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자리잡고 있음을,
세상 어머니들의 속 얘기에 가만히 귀 기울여보면
그들 내부에서도 깊은 울림이 파도처럼 밀려나온다.

중심을 비워낸 그 자리,
투명한 공명통과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검은 곰팡이들.
세월의 무늬란 저런 것일까
고개 숙이고 깎는 사과 한 접시,
그 옆, 도려낸 부위와 껍질이 더 많이 쌓인다.





오후 3시와 4시 사이에 멈춰있는 어떤 겨울 풍경



저 바퀴는 굴러가는 시간보다 멈춰있는 시간이 더 길다. 해와 함께 출근해서 해와 함께 퇴근하는 남자의 하루가 바퀴 위에 멈춰있다. 뻥튀기 아저씨,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나 불러주는 그의 오래된 이름이다. 저 트럭은 이 동네 길목을 지키는 고소하고 정겨운 겨울 풍경이다. 아니다, 그의 가업(家業)이다. 한 봉지의 군것질이 겨울 내내 남자의 생계를 붙들고 있다. 오후 3시 30분, 남자의 나이도 이 시간쯤에 멈춰있는 듯하다. 마침표처럼 앉아있는 남자의 머리칼이 검고 푸르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모자챙을 내리누른다. 부풀어오른 옥수수, 쌀, 보리, 콩 등을 담은 봉지가 장식처럼 매달려있다. 저 뻥튀기들을 몽땅 다 팔면 남자의 주머니보다 마음이 더 빨리 부풀어오를 것만 같다. 남자가 뻥튀기 기계를 돌린다. 하루에도 수백 번도 넘게 기계를 돌리는 남자가 가끔은 쌀알 대신 그의 한나절을 집어넣고, 사카린 대신 지루한 시간을 슬쩍 집어넣고 돌린다. 환하게 쏟아져 나오는 튀밥들 중 서너 개가 도로로 뛰어든다. 그 튀밥보다 더 멀리 더 빨리 튀고 싶었을 남자. 자기 생도 고소한 냄새를 팡 터트리고 싶었을, 세상의 단맛이 되어 어디로든 스며들고 싶었을 남자의 하루가 그 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다. 뻥 뻥 소리가 날 때마다 고개를 돌리는 건 어린 눈망울들 뿐,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그의 생(生)이 푹 눌러쓴 모자 밑으로 삐죽 드러나 있다. 아직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칼이다.


김나영
․1961년 생
․1998년 ≪예술세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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